~~~~신라 역사를 찾아서~~~
언 제 ; 2013년 4월 28일
어 디 ; 경주 보문동<옛날 영양남씨마을>
**** 개인사찰 보문선원과 진평왕능에 가다****
계사년 삼월열아흐레(양력2013.4월28일)날이 광의종숙님의 제사날이다.
매원형님 내외와 나는 고경 초일묘사를 마치고, 경주 보문동에 있는 제종형 선산형님댁으로
가면서 시간이 있어 보문선원과 진평왕능을 상세히 살펴보았었다.
***개인 사찰 보문선원***
산신각이 돌로 지어졌다
돌에 새겨진 산신각 현판이 이채롭다
산신각 입구 문도~~?
이 탑이 대허당이란다(대허는 선원장의 호이다)
****진평왕능****
우리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골품제하의 왕족들의 표현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성골은 왕과 그 직계 손을 뜻하며 진골은 왕의 형제 친척들을 말한다.
이래나 저래나 신라의 요직은 최소 진골 아니면 임용이 될 수 없으니...
집안끼리 혼인하고 정치 경제를 독점하여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6두품
이상의 관직은 오를 수 없는 세습왕조의 장단점이 들어나곤 하였다.
여기서 조명하는 진평왕은 참으로 그릇이 크며 혁신 개방적 군주였다.
진평왕의 가계도를 들어다 보면 재밌고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다.
그에겐 아들이 없었다.딸만 셋을 두었는데 선덕, 선화, 천명공주였다.
우리민족 최초의 여왕이며 첨성대를 만들은 선덕여왕은 조금의 역사지식만 있어도
들어보았을 것이고, 선화공주는 마를 팔던 백제의 무왕 서동왕자와 결혼하여 의자왕의
어머니가 그 분이시며, 천명부인은 김춘추(태종 무열왕)의 모친으로 진평왕의 셋째딸이다.
선덕여왕에서 진평왕 어머니의 동생(이모)의 딸 즉 이종사촌인 진덕여왕(승만)에게
왕위를 넘긴 후 무열왕 춘추가 계승함으로 자연스럽게 진골로 왕위가 이어지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백제의 의자와 신라의 태종 김춘추는 이종 사촌간이라는
것이다.그렇게 본다면 진평왕 사후 아들이 없어 왕위 계승의 1순위 권자는
미혼이며 승려였던 선덕보다는 둘째 선화공주의 사위인, 의자왕의 아버지
백제의 무왕에게 돌아가야 맞는 것이다.
진평왕의 그릇과 혁신은 여기서 출발된다.
백제와 신라가 하나의 다스림으로 인하여 위정자들의 권력다툼 이전에 평화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민초들의 안정과 풍요 화합의 미래 제국건설을 꿈꾸며 그 첫걸음을 내딛었으나...
그의 큰 뜻을 따르기엔 백제의 무왕과 신라의 귀족 세력들의 사상과 이상이 그들의 관계
안에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백제와 신라는 전제 군주정치였으나 세력권 안의 귀족들의 정치 참여는 왕에게 조차
무소불위의 힘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왕까지 몰아내고 꼭두각시 왕을 만들어 정치를 좌지우지 하였다.
우리는 황산벌에서 계백장군과 싸우다 전사한 화랑관창의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화랑관창의 아버지는 김품일이다.품일의 형은 품석인데 대야성의 성주였다.
대야성은 지금의 합천을 중심으로 대야주의 주성으로서 관할 성이 42개나 되는
대주(大州)인데,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 재임시 백제의 무장 윤충장군에 의하여
함락당하여 성주 품석과 그의 부인은 함께 죽었는데, 품석의 부인이 김춘추의 딸이다.
김춘추...
태종 무열왕.신라 진지왕의 손자이지만 성골이 아니었다.
대야성 함락으로 춘추공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성골로 왕위를 계승하려면 아버지가 왕이어야 했는데, 어머니를 여왕으로 만들어
왕위를 계승받아 그 아들 법민 문무왕에게 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한다.
(문무왕 법민은 김유신의 조카이다.)
춘추공과 김유신의 정치적 결탁, 그로인한 세력의 결집과 응집력은 삼국 중에서
가장 약했던 신라가 통일을 이룩하는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밀접한 정치적 관계, 김유신과 김춘추
김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언니인 보희가 꿈을 꾸었는데 서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서라벌(경주)이 모두 잠기었다.
이 꿈 얘기를 들은 동생 문희는 언니인 보희에게 치마 한 벌을 주며 그 꿈을 산다.
춘추공이 유신의 집에 놀러와 축국을 하던 중 옷이 찟어져 유신이 보희에게 옷을 꿰매 주라
일렀으나 부끄럽다고 거절하여 동생 문희가 옷을 수선하던 중 눈이 맞아 결혼하여
문무왕 법민을 나아 후일 문명왕후가 된다.
이렇듯 혈연으로 이어진 그들의 관계는 우리민족사의 최초의 여왕을 탄생시키고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그 아들 춘추공이 자연스레 왕이 되어
신라 중기무열왕계 왕조의 시초를 이어간다.
진평왕 시기에 몽고 침략으로 불타버린 황룡사 구층목탑이 조성되어진다.
구층 목탑의 층층은 주변 국가의 문화를 가지고와 그들의 형식으로 조성되어졌다하니,
민족과 우리라는 테두리를 만들어 무조건 우리가 시초이며
우리문화의 우수성만 설파하는 작금의 우리들에게 시사되는 바가 크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사해동포주의를 말하시며
세상의 모든 문물은 함께 나누어 발전적 진화를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우수하고 내 문화만 정의인양 나타내 보이려는 작음(小)보다는
너를 인정하고 소중히 하여 나의 문화와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이어 가려던 진평왕의 높은 이상에 다시 한번 나와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이 고목은 얼마나 되었을까?
저녁 노을과 나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