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 농암집 > 農巖集卷之二十一 > 序 >金昌協, 1651~1708
送宋道實 光涑 宰金化序
得百里之地而爲之宰。涖之以莊。行之以恕。政令必信。訟獄必平。節用以寬征斂。時使以勸農桑。養老興學。以善其風俗。使姦猾不得作。而鰥寡孤獨者皆有業。士君子之用於世。此亦足以行其志焉爾。然以余之試於淸。行且及期。而於是道也。無一之能行焉。則今於道實乎。欲以是說告之。得無爲人笑耶。然東家 之婦。語西家之婦曰。必敬事而夫子。毋得罪於尊章。必謹視而筦籥。灑掃而室堂。善而蠶績。絜而飮食酒漿。是其言也。皆己之所未能行也。然其心則固愛隣婦之心也。其事則固善爲婦之道也。是以在東家婦而言之。則不免於愚。在西家婦而行之。則足以爲賢。今吾且自爲東家之愚婦。而以己之所未能者告道實。道實能行吾言而爲西家之賢婦。不亦可乎。是以遂言之而不慚。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6
①금화 현감(金化縣監)으로 부임해 가는 송도실(宋道實) 光涑을 송별한 서
사방 백 리의 작은 고을에 수령이 되어 백성을 정중하게 대하고 정사를 너그럽게 행하여 정령(政令)은 반드시 미덥게 내리고 송사(訟事)는 반드시 공평하게 처리하며, 지출을 절약하여 세금을 줄이고 부역은 농번기를 피하여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며, 노인을 봉양하고 학교를 부흥시켜 풍속을 선도(善導)함으로써 간교한 무리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의지가지없는 이들이 모두 생업을 지니게 한다면, 사군자(士君子)가 세상에 쓰여져서 그 뜻을 행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재직하여 임기가 끝나려는 마당에 이러한 일들 중 제대로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제 도실에게 이 말을 일러 주려 한다면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동쪽 집 아낙이 서쪽 집 아낙에게 “반드시 남편을 공경히 섬겨 시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반드시 곳간 자물통을 주의 깊게 살피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며, 누에 치기와 베 짜기를 잘 하고 음식과 술과 장을 정결히 만들라.”고 한다면, 이러한 말들이 모두 자신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그 마음만은 실로 이웃 아낙을 아끼는 마음이고, 그 일만은 실로 훌륭한 부인이 되는 도리이다. 따라서 동쪽 집 아낙의 입장에서 이것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는 일이지만, 서쪽 집 아낙의 입장에서 이것을 실천한다면 충분히 현명한 부인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동쪽 집의 어리석은 아낙을 자처하여 내가 실천하지 못한 것을 도실에게 일러 주는 바이니, 도실이 나의 이 말을 실천하여 서쪽 집의 현명한 부인이 될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결국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이 말을 해 주는 것이다.
① 금화 현감(金化縣監)으로 …… 서 : 작자의 나이 38세 때인 1688년(숙종14) 가을 청풍 부사로 있을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송광속(宋光涑)은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좌승지 송시철(宋時喆)의 아들이며 작자의 중부(仲父) 김수흥(金壽興)의 둘째 사위이다. 작자보다 2년 연하이다.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로 있다가 이때 금화 현감이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4
송광속(宋光涑)
1653년(효종 4)∼1704년(숙종 30).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도실(道實)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송초(宋礎)이고, 조부는 예조판서(禮曹參議)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송극인(宋克訒)이다. 부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증의정부좌참찬(贈議政府左參贊) 송시철(宋時喆)과 모친 파주목사(坡州牧使) 증예조참판(贈禮曹參判) 정지경(鄭之經)의 딸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7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 송광엄(宋光淹)‧송광렴(宋光濂)‧송광순(宋光洵)‧송광준(宋光浚)‧송광연(宋光淵)‧송광택(宋光澤)이 있다.
타고난 자질이 영리하고 총명하여 대여섯 살에 이미 시를 외우고 글자를 익혔다. 막내로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며,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책을 읽어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다.
1669년(현종 10) 식년시 생원 3등 3위로 합격하였다. 1671년(현종 12) 모친상을 당하고, 1673년(현종 14) 부친상을 당하여 5년 동안 상복을 입고 근신하느라 몸이 많이 약해졌음에도 예를 다하였다. 1684년(숙종 10)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고, 1686년(숙종 12) 겨울에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688년(숙종 14) 여름에 사첨시주부(司贍寺主簿)가 된 지 몇 개월 만에 금화현감(金化縣監)으로 나가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려 한 지역이 편안해졌다. 1689년(숙종 15)에 겸 이천부사(兼 伊川府事)의 죄에 연좌되어 파직되었으며 이후 세도가의 재앙으로 아예 벼슬에 대한 뜻을 접었다.
1694년(숙종 20)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복직하여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호조정랑을 지냈다. 1696년(숙종 22) 가례도감낭청(嘉禮都監郞廳)에 차정되었으며, 가례가 끝난 후 임천군수(林川郡守)로 있을 때 교활한 무리들의 농간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1699년(숙종 25) 세자의 마마가 회복된 경사로 사면령이 내렸으나 인사담당인 이조판서와의 혐의로 복관되지 못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702년(숙종 28) 간성군수(杆城郡守)로 있다가 1704년(숙종 30) 가을 상경하는 도중에 피를 토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보안역(保安驛) 근처에서 잠시 머물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묘는 경기도 영평(永平) 금주산(金柱山) 선영에 있다.
[안항(鴈行)]
형(兄) : 송광엄(宋光淹)
형(兄) : 송광렴(宋光濂)[進]
형(兄) : 송광순(宋光洵)[生]
형(兄) : 송광준(宋光浚)
형(兄) : 송광연(宋光淵)[進]
형(兄) : 송광택(宋光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