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876년 유명한 법승 도선이 왕륭의 집에 와 명년에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한 1년 뒤, 왕건 출생한다.
신라에서는 진성여왕 즉위하고 진성여왕은 미소년과 음난한 생활을 하고 이들에게 요직을 주는 등의 행동으로 비난을 받는다. 그러던 중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난다.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상주지역을 장악하고 장군을 칭한다. 그리고 서남해 수군으로 있던 견훤은 예하의 병력을 이끌고 독립을 한다. 한편 궁예는 죽주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에게 투신했다 다시 북원의 양길에게 투신. 명주 관내의 여러 군현을 습격해 모두 항음한다. 이 때 견훤은 무진주(광주)를 습격하여 왕이 된다.
왕건이 왕이 될 것이라 예언했던 도선이 다시 와 왕건을 가르친다. 궁예는 北原(현 원주)에서 溟州(현 강릉)로 들어가 장군을 칭하고 그곳에서 병력을 3500명으로 불린다. 또한 저족, 성천, 부약, 금성, 철원 등 차례로 장악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평주(평산)의 대호족 박지윤 가문은 궁예에 귀부하고 왕륭, 왕건 부자 역시 궁예에 귀부하게 된다. 궁예는 왕륭을 金城태수로 삼고 왕건을 송악(개성) 성주로 삼는다. 궁예는 僧嶺, 臨江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을 칭하며 내외관직을 설치한다. 그리고 송악성을 수리하고, 천도를 결정한다.
왕건을 신뢰한 궁예는 왕건을 정기대감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치게 한다. 그 뒤, 궁예와 왕건은 경기 남부와 충북 지역 장악한다. 더욱더 왕건을 믿게 된 궁예 왕건을 아찬으로 삼는다. 한편, 견훤은 완산(전주)에 도읍하고 “백제(후백제)”라는 국가를 건설한다. 또한 금성군 남쪽의 10여개 주현 공략하는 등 여러 전투를 벌이지만, 대야성을 공격하는 데는 패배하고 만다.
궁예 역시 왕을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일컫는다. 궁예는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신라왕 화상을 칼로 치며 신라를 무너뜨릴 것을 다짐한다.
왕건은 錦城(나주) 등 10여성을 공격하고 귀환한다. 그리고 安邊拓境之策을 개진한다. 궁예는 그 공을 치하하며 왕건을 閼粲(알찬)으로 임명한다. 궁예는 백관을 설치하고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한다. 곧이어 패서도 10여 주현이 투항하고 공주장군 홍기가 궁예에게 귀부하는 등 후고구려는 날로 번성해간다. 몇 년 뒤, 궁예는 국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성책으로 고친다. 그리고 청주인 一千戶를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신라의 변경 읍락을 침탈한다.
한편, 왕건은 상주 사화진을 공격하여 견훤과 여러 번 싸워 이기는 등의 활약을 하지만 궁예는 신라로부터 항복해 오는 자들을 다 죽이는 잔인한 행위를 행한다.
왕건을 총애하는 궁예는 왕건에게 나주를 지키라 명하고 해군대장군에 임명한다. 그 뒤로도 왕건은 염해현(영광)에서 오월에 보내는 후백제 使船을 나포하고 알찬 종희, 김언 등을 부장으로 진도군을 함락시키고, 진격하여 皐夷島 (고이도) 점령했으며, 나주포구에서 화공으로 견훤을 무찌르는 등의 공적을 쌓는다.
또한 압해현에서 일어난 반란군의 두령 능창 사로잡아 궁예에게 보낸다. 그런데 궁예가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를 죽인다. 궁예는 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를 수덕만세라 고친다. 궁예의 행동이 점점 이상해지자, 승려 석총이 궁예를 비판한다. 그러자 궁예는 석총을 쇠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만다.
궁예는 왕건을 친아우처럼 대하며 왕건을 파진찬겸 시중으로 높여 소환한다. 그러나 얼마 후 아지태 사건이 일어나고 궁예는 왕건의 시중 벼슬을 떼고 다시 수군을 통솔하게 한다. 그러나 왕건은 다시 전선으로 불려나간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백선장군이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에 출진한다.
궁예는 왕건을 불러 역모죄 추궁하는 등 왕건에 대한 의심에 빠진다. 그 때 신동으로 불리던 한림랑 최응이 왕건을 위기에서 구해준다. 그리하여 왕건은 목숨을 건지고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나주로 간다.
궁예의 만행은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급기야 부인 강씨와 두 아들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그 틈을 타 후백제는 신라의 대아성 침공하는 데 성공한다.
궁예의 광증이 정도를 넘어서자 마군장군 신숭겸, 홍유, 복사귀, 배현경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다. 왕건은 궁예에 대한 믿음 때문에 왕위를 거절하나 대의를 위하여 결국 승락한다. 궁예는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 도망가지만, 그 동안 궁예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백성들에게 모습을 들켜 살해당한다.
왕건은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칭한다. 하지만 궁예를 따르던 무리들이 곳곳에서 크고 작은 반란을 일으킨다. 왕건은 반란의 씨앗을 없애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관제를 신라의 제도로 고치고 조세정법을 정했으며, 변방의 변란을 우려해 전권 사절들을 파견하라 지시한다. 또한 노비 1천명을 본가로 돌려보내고 백성들의 생활을 고려해 3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했으며 유이민들 돌려보내는 덕행을 베풀어 민심을 산다.
그 후 왕건은 송악으로 천도하여 삼성 등 관제를 정한다. 그리고 신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맺는다. 신라는 고려를 믿으며,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견훤은 화친 할 사람이 못된다’고 백제를 견제한다. 그 뒤, 백제와 고려의 사이는 점점 악화되고 만다. 그리고 고려와 백제는 크고 작은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
그 뒤, 왕건은 나라 안팎의 일에 한 것 더 신경을 쓰고, 내실을 기한다.
한편 견훤이 나이가 많아지자 후백제에서는 왕자들간의 왕위 다툼이 일어난다. 금강태자를 특히 총애한 견훤을 장남 신검이 아닌 금강을 후계자로 정하고, 그에 반발한 신검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다. 신검 형제는 아우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다.
신검은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하고 정식 왕위를 물려주기를 청하지만, 견훤을 거절하고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기를 청한다. 견훤이 들어오자 왕건은 상부로 칭하고 남궁을 사관으로 지정한다.
신검은 결국 후백제의 새 왕으로 즉위한다.
그 해 11월, 운이 다 한 신라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투항을 한다. 왕건은 천덕전에 나와 뜰에서 신라왕의 배례를 받는다.
그 후, 고려는 더욱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게 되고, 견훤의 요청에 따라 후백제 신검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한다. 우선 태자 무와 장군 희술을 시켜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게 한다.
왕건이 후백제를 치기 위한 전진기지로 천안을 선택한 것은 교통의 요로 임은 물론 당시 의탁했던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없지 않다. 또한 바로 전주로 직공하지 않고 천안을 거쳐 선산으로 내려간 것을 신검 군대를 기만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낙동강을 병참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후백제군 일선군(선산)의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에 참패당한다. 왕건의 나이 60세,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병력을 합세하여 일선군(경북 선산)으로 나아가니 신검이 무력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군은 진을 쳤다.
왕건, 견훤과 함께 군사들을 사열하여 군사가 총 8만 5천명이었는데 당시 견훤은 박술희 등과 함께 마군, 즉 기병 1만 명을 지휘하였다. 이외에 왕건의 북군은 능달이 지휘하는 보병 1만 명을 좌강에, 홍유 등이 지휘하는 기병 1만 명 삼순 등이 이끄는 보병 1만 명을 우강으로 삼았으며 김순식과 긍준, 왕렴, 왕예 등이 지휘하는 기병 2만 명, 유검필 등이 이끄는 흑수, 달고, 철륵 출신의 기병 9천 5백 명, 정순 등이 이끄는 보병 1천 명, 종희가 지휘하는 보병 1천 명, 김극종이 이끄는 보병 1천 명을 중군으로 삼았다. 또 공훤이 이끄는 기병 2백명 등 10만 대군이라 일컫을 만했다.
군사를 정비한 후 북을 치며 진군하니 갑자기 창검 형상으로 된 흰 구름이 고려 군사가 있는 상공에서 일어나 백제 쪽으로 떠갔다고 한다.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 4명이 창을 버리고 견훤이 타고 섰는 말 앞에 와서 항복함. 이에 적측의 사기가 저상되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왕건이 효봉 등을 위로하고 신검이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이 말하기를 신검이 중군에 있으니 좌우로 들여치면 격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왕건이 대장군 공훤에게 명령하여 고추 적측의 중군을 향하여 삼군과 함께 일제히 나가면서 맹렬하게 공격하니 적병이 크게 패함한다. 그리고 고려는 백제 장수 흔강, 견달, 은술, 금식, 우봉을 비롯하여 3천2백명을 사로잡고 5천7백명을 죽였다.
그러자 백제군사들은 창끝을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 고려 군사는 황산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다. 결국 신검이 아우들인 청주(경남진주) 성주 양검, 광주 성주 용검과 문무 관료들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결국 후백제 멸망하고 만다.
그 후 견훤은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 불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왕건이 송악으로 돌아와 문무백관과 백성들의 조하를 받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거란이 낙타 50필을 보내오며 친선을 요구하나 왕건은 거란과 국교를 단절한다.
왕건은 내전에 거동하여 대광 박술희를 불러 친히 훈요십조를 준다. 그러나 그 뒤,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왕건이 편치 못하여 정무처리를 정지하게 된다. 왕건은 재신 염상, 왕규, 박수문을 불러 내외의 기밀한 정무를 맡긴다.
시간이 흐를수록 왕건의 병이 위독해진다. 왕건은 학사 김악에게 명령하여 유조를 쓰게 한다.
결국 왕건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채 천수를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