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첨(姜民瞻)은 진주(晉州)의 진강(晉康) 사람으로서,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현종(顯宗) 때 동여진(東女眞)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니, 강민첨은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曹子奇)와 함께 도부서(都部署) 〈관원이〉 되어, 〈그 곳에〉 가서 주군(州郡)의 군사를 독려하여, 여진을 격퇴하였다.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임명되었고, 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강감찬(姜邯贊)을 보좌하여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을 흥화진(興化鎭)에서 크게 격퇴하였다. 소손녕이 군사를 거느리고 곧바로 개경으로 향하자, 강민첨이 추격하여 자주(慈州)의 내구산(來口山)에 이르러 다시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응양상장군 주국(鷹揚上將軍 柱國)으로 발탁되었다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옮겼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지중추사 병부상서(知中樞事 兵部尙書)가 되었다. 현종 12년(1021)에 죽으니,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고,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추증하였다.
강민첨은 서생(書生) 출신으로 기용되었으므로, 활쏘기와 말 타기는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의지와 기개가 굳고 과단성이 있어서 여러 차례 전투에서의 공을 세워 드디어 현달하게 되었다. 후에 교서를 내려 공을 기록하고, 그의 아들 강단(姜旦)에게는 녹봉과 관직을 올려주었다.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중상부(大中祥符, 북송 眞宗의 연호) 11년(1018)에 거란이 난입하였을 때, 병부상서 지중추원사(兵部尙書 知中樞院事) 강민첨이 용감하게 싸워[奮擊] 반령(盤嶺)의 들에서 크게 승리하니, 거란이 북쪽으로 달아나면서 버리고 간 무기와 갑옷들로 다니는 길이 막히고 끊겼으며, 포로가 되거나 죽은 자가 10,000급이나 되었다. 그 〈전투의〉 공을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표창을 함이 마땅하니,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을 걸어서 후세에 권장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