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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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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마을 수호신, 장승을 찾아서
무기장터 추천 0 조회 52 14.12.24 09: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무나 돌을 조각해 마을 입구에 세우는 장승. 예로부터 마을 수호신으로 자리한 민간신앙의 한 형태다. 장승 재료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경기나 충청 등 북방지역엔 주로 목장승, 호남과 영남 등 남방지역엔 돌장승이 많다.
재밌는 건 대전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충청권에 해당하는데 의외로 돌장승이 많다. 비룡동 줄골 돌장승, 법동 석장승, 읍내동 뒷골 돌장승 등 돌장승이라고 이름 붙인 것만 10여기, 유사 선돌까지 합치면 20기가 훌쩍 넘는다. 심지어 전라북도 남원시와 함께 돌장승 대표 도시로 꼽히기도 한다.
대전에 돌장승이 많은 건 여러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대전 주변에 산이 많다는 것도한 이유다. 대전은 계족산, 식장산, 보문산 등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실제 돌장승이 있는 마을 어르신에게 물으면 절반은 “주변 산에서 가져온 돌로 장승을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돌장승도 산 주변, 특히 계족산 중심으로 집중 분포한다.
이에 반해 공주는 다른 충청권과 마찬가지로 목장승이 유명하다. 장승제가 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는 공주 탄천 장승은 말할 것도 없고, 장승제로 유명한 공주 백교리 장승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는 목장승이었다.
이처럼 장승은 저마다 특색이 다르다. 마을마다 추구하는 가치관, 종교나 문화, 주변 여건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 마을 장승을 살펴보면 마을의 문화를 파악해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여러 장승을 둘러보고, 장승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 장승 여행의 포인트다.


 

- 법동 석장승
아들과 딸이 함께 하는 가족 장승

 

법동 석장승(대전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동사거리에서 법2동으로 가는 초입에 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남장승(높이 약 160cm)과 여장승(높이 약 130cm)이 마주 보는 형상이다. 두 기 모두 자연석으로 눈, 코, 입과 가슴께 각각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을 새겨놨다.
남장승과 여장승, 형태는 비슷하나 이 두 기 사이엔 차이가 좀 있다. 남장승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특히 코가 크고 뭉툭하다. 이에 반해 여장승은 이목구비가 흐릿하다. 같은 시기에 만들었기 때문에 마모 정도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각각의 성(性)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 하나 외형적 특징은 남장승, 여장승 옆에 각각 있는 선돌이다. 대전 지역의 다른 장승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이것이 법동 석장승을 ‘가족 장승’이라 할 수 있는 이유다. 선돌은 그 높이에서 남장승, 여장승보다 각각 50cm 가량 작은데,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조수’ 또는 ‘아기 장승’이라 부른다. 이 아기 장승 덕분에 멀리서 보면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이 나란히 서서 마주보는 듯한, 가족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 법동 석장승은 약 300년 전에 만든 것으로 추측한다. 그때는 나무 장승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나무가 썩자 그 당시 법천골에 살던 송민노라는 부자가 자비로 지금의 돌장승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정확한 사실 여부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구체적인 이름까지 명시하며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영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300년의 세월. 법동 석장승이 그 긴 시간을 한 자리에 있었을까? 아니다. 두어 차례 옮겼다. 현 대전 동부경찰서와 한마음아파트 자리가 예전엔 ‘법천골’이라는 마을이었다. 법동 석장승은 바로 그 법천골 출신이다. 그러다 1989년, 법동지구에 택지개발을 시작하며 법천골 주민과 함께 장승도 고향을 떠나야 했다.
법동 석장승을 관리하고 장승제를 주관하는 ‘법동 동우회’ 김학제 회장은 그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법동 동우회는 당시 법천골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이 관계라도 유지하자며 만든 친목 단체다.)
“그 당시 법천골에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재개발한대서 다 떠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주민 대부분이 지금 법2동 시장통 있는 주택가에 자리잡았어. 돌장승도 그때 자리를 옮겨 대덕구청 뜰에 5년 가량 보관했다가 재개발 끝나면서 현재 자리로 온 거지. 남장승, 여장승이 마주 보던 모습이나 방향은 똑같고, 자리만 옮긴 겨.”
대전에서 유일한 가족장승.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 비룡동 줄골 돌장승
태양 따라 음양이 균형을 이루나니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대청호 방면으로 약 500m 가면 양 길가에 있는 장승. 바로 비룡돌 줄골 돌장승이다. 줄골 돌장승이 처음 만들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이다.
“나도 우리 아버지한테 전해들은 얘기긴 한데…. 약 250년 전 우리 6대조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선조들이 무덤 앞에 상석(床石) 만든다고 저 앞에 야산에서 돌을 가져왔댜. 그래서 상석 만들고 남은 돌을 어쩔까 하다가 선조들이 직접 돌장승을 만들었다는 거지. 일부에서는 줄골 장승이 200년 됐다고 하는디, 우리 집 족보를 확인해보니까 250년이 맞어.”
줄골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살고 있다는 박달순 할아버지는 줄골 돌장승이 얼마나 예쁜지 꼼꼼히 설명해줬다. “보고 왔어? 다시 가서 봐봐. 찬찬히 봐야 더 예뻐.”
줄골 돌장승은 일단 그 외형이 남다르다. 특히 천하대장군(높이 약 180cm)이 볼만하다. 눈썹, 눈, 코, 입에서 풍기는 섬세한 표정이라든가, 턱수염을 표현한 하관 모양새가 살아있다. 뿐만 아니라 천하대장군은 문관(文官)형 장승인데, 이를 상징하는 관모와 도포자락의 꼼꼼한 표현방식도 훌륭하다. 여기에 더해 앞, 뒤, 양옆, 네 면을 모두 입체적으로 조각해 보는 방향에 따라 색다른 멋도 느껴진다.
이에 비하자면 지하대장군(높이 약 160cm)은 다소 아쉽다. 일단 천하대장군과 달리 앞면만 조각한 평면적인 모양새다. 그나마 앞면도 얼굴과 가슴팍에 새긴 글자를 제외하면 별다른 게 없어 다소 밋밋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표정만큼은 천하대장군 못지않게 생생하다. 특히 얼굴 윤곽부터, 눈썹과 입 등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전형적인 동양 미인의 멋을 뽐낸다.
예술적 감성이 한껏 깃든 조각 형태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모가 적어 그 모습을 올곧이 간직한 보존 상태 등 외형적 특성이 대전 대표 장승으로 줄골 돌장승을 꼽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줄골 돌장승엔 동양적 정서도 담겨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 이 두 장승 사이엔 음양의 기운이 신비하게 흐른다. 일단 천하대장군은 치켜 올라간 눈썹만큼이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근엄하고 딱딱하다. 이에 반해 지하대장군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다. 음양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두 장승이 서 있는 방향에서도 음양의 교류가 느껴진다. 천하대장군은 서쪽을 향하고, 지하대장군은 동쪽을 향해 서 있다. 아침나절 천하대장군 뒤에서 떠오른 태양은 지하대장군 품에 안기며 저문다. 마치 천하대장군의 양기가 지하대장군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동양적 정서가 짙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주변 경관도 이런 분위기를 거든다. 천하대장군은 단단한 시멘트 담벼락 밑에 있다. 근엄한 분위기는 이로 인해 한층 고조된다. 지하대장군 주변엔 배롱나무를 비롯해 각양각색 꽃과 나무가 풍성하다. 부드럽고 온화한 지하대장군 이미지를 한껏 여성스럽게 거들어준다. 오래 볼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 있다. 줄골 돌장승이 딱 그렇다. 여유가 있다면 찬찬히 들여다보길 권한다.


 

- 읍내동 뒷골 장승
유교문화를 녹이다

 

그 옛날부터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 회덕동주민센터(조선 시대 회덕현 관아(官衙)가 있던 곳)와 계족산 사이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회덕현 관아 뒤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 해서 뒷골 혹은 후곡(後硲)이라 불렀다. 이 뒷골 마을에 읍내동 뒷골 장승이 들어선 건 대략 100년 전이다.
“지금은 이사갔는디 이 동네에 백조근이라는 사람이 살았었다고. 그 사람 할아버지가 엄청난 부자였어. 논밭 합쳐 2000평 이상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까…. 지금도 주민센터 뒤쪽으로 주차장이며 논밭이 다 백조근 그 양반 땅이여. 그 백조근의 할아버지가 장승을 세웠다고 하더라고.”
김수웅 뒷골 노인회장과 경로당 어르신들 증언으로 미뤄보아 백조근 씨의 할아버지는 뒷골 마을 유지였던 듯하다. 마을 내부에서 장승을 세우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마을 유지로서 앞장서 장승을 세우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렇게 자리한 읍내동 뒷골 장승은 할아버지 장승(약 160cm)과 할머니 장승(약 80cm)의 키 차이가 다른 데보다 유독 크다. 이유가 뭘까? 이 이유는 주변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뒷골 마을은 회덕 향교 대성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과 가까이 있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고 유교를 숭배하는 조선 시대 교육기관이다. 유교를 논하자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유교가 조선 시대 남성우월주의를 불러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향교뿐만이 아니다. 이 마을 초입엔 회덕현 관아(대덕구청 홍보문화과 확인 결과, 그 당시 회덕현 관아엔 현감 포함 관직자 200여 명이 상주했다고 한다)가 있었다. 이를 통해 그 당시 뒷골 마을이 이 일대를 대표하는 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뒷골 마을 초입에 있는 높다란 홍살문도 눈여겨볼 만하다. 홍살문은 주로 향교, 궁전, 관아 등의 건물 앞에 세우는 문으로 유교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놀라운 건 이 홍살문을 불과 1년 전 친환경 조성사업 목적으로 만들었고, 이에 관해 주민들도 반발 없이 응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할아버지 장승과 할머니 장승 키 차이가 심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주변 여러 상황으로 인한 유교 문화의 일상화, 이에 따른 남성중심 사고, 그러한 결과가 읍내동 뒷골 장승 모습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마을 문화를 통해 돌장승 모습을 해석해보는 것, 장승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 공주 백교리 장승
기자 신앙 반영한 선돌 형태

 

 

공주 백교리 장승은 충남 공주시 유구읍 백교리 마을 입구에 있다. 입구로 들어갈 때, 왼쪽에 보이는 게 여장승, 오른쪽이 남장승으로 서로 마주보는 형태다. 남장승엔 북방흑제대장군지위(北方黑帝大將軍之位), 여장승엔 남방적제대장군지위(南方赤帝大將軍之位)라고 적혀 있다. 남장승, 여장승은 모두 선돌형으로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다만, 남장승은 길고 뾰족한 형태인데 반해, 여장승은 둥글고 넙데데한 형태다. 기록에는 없으나, 기자신앙의 한 형태로 각각 남근, 여근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장승이 언제 생겼는지는 잘 모르지. 목장승부터 따지면 몇 백 년 됐겄지.”
고추밭에서 고추 따던 윤선중 할아버지는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른다고 한다. 공주향토문화백과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목장승을 깎아 제사를 모시다가 약 40여 년 전부터 매년 새로 깎는 수고를 덜고자 나무장승 대신 돌장승을 모셨다고 한다.
장승과 함께 있는 솟대는 여전히 매년 새로 깎는다고 한다. 솟대는 새끼줄로 장승에 고정되어 있다. 솟대 끝에는 오리를 상징하는 조각이 올려져 있다.
“정월대보름 전날 저녁에 장승제 준비해서 15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제 지내거든. 그때 동네목수가 소나무 가져다가 솟대 깎아서 세우고 그러지.”
백교리 장승제는 먼저 정월 초 제주와 축관을 선정한다고 했다. 이후 마을 풍물패가 마을을 돌며 주민에게 돈을 걷는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제물을 마련한 후 제를 지낸다. 제는 잔을 붓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치른다. 제사 후에는 제물을 음복한다.
광활한 논밭에 벼와 고추가 익어가던 어느 날. 장승과 함께 백교리 마을은 풍요로워 보였다.


 

- 공주 탄천 장승
신랑 마을 남장승, 신부 마을 여장승

 

 

충남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에 가면 ‘소라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은 가운데를 관통하는 길을 따라 동편 신랑 마을과 서편 신부 마을로 나뉜다.
이 소라실 마을 앞에는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는데, 풍수상 항상 화기를 내뿜고 있어 예로부터 화재가 빈번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재앙을 막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세운 장승이 바로 동편 신랑 마을의 남장승과 서편 신부 마을의 여장승이다. 각 장승은 동방천원축귀대장군(東方天元逐鬼大將軍), 서방지원축귀대장군(西方地元逐鬼大將軍)이라 부르는데, 모두 목장승으로 2년에 한 번 새로 깎는다.
소라실 마을은 사실 장승 자체보단 장승제로 유명하다. ‘공주 탄천 장승제(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8호)’라는 이름으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지내는데, 신랑 마을 남장승과 신부 마을 여장승을 합궁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오전에 일단 깃대제를 지내.”
마을에서 만난 점필복 할머니는 공주 탄천 장승제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오전에 지내는 깃대제는 서편 신부 마을에서 시작한단다. 신부 마을 주민이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신랑 마을로 가는데, 이때 신랑 마을 농기가 신부 마을 농기를 마중 나온다.
“그러는 사이 아침에 소나무를 베어오고, 동편 마을, 서편 마을 구분 없이 다 같이 마을회관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지.”
식사가 끝나면 마을 공터에서 준비한 소나무로 목장승을 만든다. 목장승은 동네 주민이 직접 깎는다. 날이 어두워지면 본격적인 혼례식을 거행한다. 혼례식은 표주박에 술을 따라놓고 신부 장승이 네 번 절하게 시키고, 신랑 장승은 두 번 절하게 시킨다.
혼례식이 끝난 뒤, 동편과 서편 마을 주민은 자신들의 장승을 모시고 돌아와 각각 장승제를 지낸다. 이후 각 마을 주민은 각자의 마을로 돌아오며 횃불놀이를 한다. 장수 횃불을 선두로 졸병 횃불이 따라오는 방식인데, 마을에 돌아와서는 제를 지내고 남은 술과 음식을 나눠 먹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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