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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30분 버스는 지리산의 성삼재에 대원들을 내려놓았다. 배낭을 짐칸에서 빼기 위해 내려간 순간 오싹하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추위가 일찍 찾아올 줄 몰랐다. 각자 챙겨 든 랜턴의 불빛이 어지럽다. 03시부터 출입이 가능하다는 문자전광판만 빛나고 있다. 45명의 대원들은 대장의 인솔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지리산, 백두대간의 시점이자 종점인 이곳은 산 중의 으뜸이다. 높이도 남한 육지의 최고봉이고 산꾼들의 마음에도 가장 높게 자리 잡고 있는 대상이다. 크고 웅장하며 품이 넓어 흔히 ‘어머니의 산’이라고 불린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밟아보는 기회지만 마음에는 수천 번 밟고 있는 산이다. 그러니 그 어떤 말로도 지리산을 담아내기엔 부족할 뿐, 한마디로 지리산을 말하기엔 범위가 넓고 깊으며 그 세월이 아득하고 무겁다. 옛글을 인용하여 지리산을 표현한다면 ‘다기다양(多岐多樣)하고 고준광대(高峻廣大)하면서도 중후인자(重厚仁慈)’한 산으로 유장(悠長)한 산악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이산(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 모순을 눈치 못챈다. 어느 경우에도 이(異)를 리로 발음하지는 않는다. 여기는 두음법칙이라는 문법 원리와 관계없다. 한자에 억지로 맞추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고 지리산의 명칭을 굳이 한자로 풀이하려는 것은 오류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즉 지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산이 ‘지루한 산’으로 생각했고 ‘지루하다’의 사투리 ‘지리하다’의 ‘지리’를 음차하여 한자 표기를 한 것이라고 하는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조선시대의 여러 산수유기에는 거의 두류산(頭流山)으로 표기했다. 두류산은 백두산[頭]의 맥이 흘러내려[流] 이루어진 산으로 신라 말 도선이 정착시킨 개념이다. 그렇다면 백두대간을 타는 우리는 지리산을 두류산으로 부를 줄 아는 식견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03;40, 주차장 위 탐방센터를 통과했다. 이곳 성삼재는 저 멀리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또는 마한의 한 부족이라는 설도 있다-달궁계곡에 궁을 짓고 성(姓)이 다른 세 장수로 하여금 지켰다 해서 姓三재다.
첫 번 째 목적지인 노고단을 향해 잘 다져진 넓은 돌길을 걸어 올라갔다. 세상은 적막에 쌓여있고 오직 들리는 것은 발자국 소리와 스틱을 찍는 소리다. 하늘에는 별이 무수히 달려있다. 그러면 날씨 하나는 믿어도 될 것이다. 지난 8.26 새벽의 엄청난 비는 결국 천왕봉 등정을 막는 절대적 방해자였다. 결국 대원들은 아쉬움을 술로 달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연의 섭리는 이렇듯 물러날 때를 알려주는 선지자의 역할도 한다. 다시 도전하는 반야봉 구간에 선지자는 도전해도 좋다는 메시지를 반짝이는 별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어둠의 시간은 길지만 곧 머지않았다는 것을 안다. 인생을 ‘무엇’이라고 확정한다면 뻔한 삶이 될 수 있으나 오리무중의 미래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진지하게 궁리하다보면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을 엮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둠의 새벽에 산을 오르는 행위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어둠 속에서 지형지물을 가늠하면서 발걸음을 내딛는 행위를 삶에 대비시켜 본다. 출발 한 지 900m 지점에 노고단이 2Km 남았다는 동판이 바닥에 박혀있다.
4시가 되자 노고단으로 바로 올라가는 지름길이 나타났다. 가던 길을 가면 3.2Km지만 지름길로 가면 1.1Km이니 산꾼들은 나무계단을 밟을 것이다. 표지목에는 “술에 취하지 말고 자연에 취해 보세요”라고 의미있는 글귀가 써있다. 국립공원은 산에서의 음주를 금지하고자 이미 계도를 하였고 급기야 9.14부터 단속을 하겠다고 한다. 산=술이라는 공식이 이번에 깨질지 두고 볼 일이다. 이곳은 벌써 해발 1,259m다.
20분 동안 돌계단을 걸어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했다. 그 까마득한 옛날 언젠가 라면을 끓여 먹었던 취사장은 그대로다. 동행했던 친구들은 누군지 희미하지만 장소를 보니 머릿속에 스크린이 나타났다. 아득하고 아련하다. 문득 젊음이 그립다. 얼른 표지목을 훑었다. 노고단 고개까지 400m 남았다고 알려주고 있다. 노고단까지 올라가는 좁은 길에는 둥근이질풀과 쑥부쟁이가 물기를 머금고 곧게 서있다.
04:30, 노고단 넓은 돌밭에 사진가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다. 특히 돌탑을 향해 렌즈는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고 사수는 두터운 옷을 걸치고 결전의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분명 별을 따기 위해, 아니면 별 보다 더 큰 무엇인가 얻기 위해 긴장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여명이 시작되면 여기저기서 사격이 시작될 것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나는 우선 이들의 장비에 주눅이 들었다. 총이 아니라 포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갈 길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포병이 아니라 특수부대원이기 때문이다.
노고단(老姑壇)의 이름이 범상치 않다. 노고의 이름은 할미의 다른 말이다. 할미의 어원은 ‘한+어미’에 있으니 그 대상은 마고할미다. 마고할미는 우리민족 창조주로서 역할이 가장 크다. 이 땅에 창조주는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에겐 경악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새에, 먹고 살기에 바빠서 몰랐을 것이라고 너그럽게 마고할미는 용서할 것이다.
멀리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의 훈련장이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는 화전이 행해지고 1928년 외국인 선교사 휴양시설과 종교시설이 제법 컸었다. 선교사들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아주 독선적인 그들이었다. 이후 건물은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고 한국전쟁 와중에 파괴되어 흔적만 남았다가 공단의 복원 계획에 따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곳이 노고단이다.
노고단의 통제소를 통과하여 본격적으로 지리산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04:40). 노고단 봉우리를 통과했으니 내리막이다. 주위에 시선을 뺏길 사물이 안보이니 속도가 빠르다. 랜턴 불빛에 전적으로 시각을 집중하고 신경세포는 하지 근육에만 전달하고 있다. 길 옆의 조릿대는 동물이 털갈이 하듯 이파리를 다 떨구고 가는 꽃을 피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왕시루봉 갈림길을 지나 돼지령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돼지평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다.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원추리 뿌리나 둥굴레가 많이 나는 곳이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돼지령 동쪽으로 여명이 시작되고 있다. 산하는 점점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빛이 온전하게 생성이 되어야 사물이 구별되고 카메라도 제대로 표현한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갈 길을 가야한다.
임걸령은 피아골 갈림길이 나있다(05:35). 가을이면 많은 사람들이 피아골로 들어가 피처럼 붉은 단풍을 즐기려고 할 것이다.그런데 그 피아골은 피(血)와 아무 관련이 없다. 진행방향이 동쪽이라 왼쪽으로 우뚝 선 반야봉이 실루엣으로 나타났다. 옛날에는 도둑을 녹림호걸(綠林豪傑)이라고 했는데 임씨 성을 가진 두목인 임걸(林傑)의 근거지라고 하여 임걸령이 되었다. 가까이 사시사철 물이 콸콸 나오는 샘이 있는데 과연 녹림호걸들의 산채로서 최적지인 셈이다.
저만치 앞서 간 이들의 랜턴 불빛이 작아지고 있다. 임걸령을 지나니 길은 북쪽으로 약간 휘어져 반야봉 방향으로 가는데 그럴수록 해가 올라오는 곳으로 가고 있어 자꾸만 그쪽으로 눈이 쏠리고 있다. 1,432봉에 이르자 구례군 토지면 방향 골짜기에 운해가 자욱한 것이 살짝 보인다.
이제 무박산행의 장점이 부각되는 때가 왔다. 그 장점은 신선한 아침의 모습을, 그 변해가는 아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명은 밤을 밀어 버리고 희망의 아침을 맞기 위한 전주곡이다. 이럴 때 쇼팽의 전주곡이 들려온다면 저 너머 층층이 중첩된 산줄기에 비로소 생명의 기운이 들어차는 것을 더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대신 들려오는 소리는 바로 새소리다. 빛은 새들도 반가운 손님이다. 그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산이 살아있다는 징표다.
햇빛이 벌써 구상나무 사이로 들어오고 있다. 구상나무는 지리산의 대표 수종이다. 이 나무는 한국특산종이자 희귀식물로서 전 세계에서 백두대간 지리산, 덕유산과 한라산 세 곳에만 서식한다. 우리는 이 귀한 보물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냥 지나치고 있다.
일출의 장엄한 광경은 놓쳤지만 아직 남은 빛으로 산야를 밝히고 있는 과정을 보고 싶다. 길 옆에 울타리를 넘어 나뭇가지를 제치고 전망 바위에 올라서니 “짠”하고 황금빛에 물든 산줄기와 저 너머 계곡 사이에 퍼져있는 운해가 나타났다. 바로 이 모습이다. 어둠을 뚫고 올라온 보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노루목에 이르러 갈림길이 나타나고 반야봉에 올랐다가 내려올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06:20). 상황에 따라,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데 반야봉은 주능선에서 약간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부분 배낭을 내려놓고 훌쩍 다녀오는 것으로 결정을 하는데 이왕이면 다녀오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 반야봉은 지리산의 여신이라고 본다. 즉 지리산 남신 격인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혼인한 도사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인 것이다. 서쪽의 반야와 동쪽의 천왕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반야봉에는 기필코 올라야 한다. 그리고 반야는 불교의 근본교리 중 하나로 ‘지혜’를 뜻한다.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반야봉은 ‘지혜를 얻는 봉우리’로 해석할 수 있다.
반야봉으로 올라가는데 주변이 온통 투구꽃 천지다. 그 옛날 마한의 병사들이 썼던 투구들이 속절없이 죽어간 병사들의 넋으로 환생한 것처럼 보였다. 손바닥처럼 생긴 잎과 투구처럼 생긴 꽃이라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가을의 대명사 쑥부쟁이 또한 지천이다. 아침이슬을 머금고 햇볕을 기다리고 있다. 작은 봉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반야봉(般若峰·1,733.5m) 정상이다(06:40). 동쪽을 바라보니 휘날리는 구름 사이로 천왕봉이 우뚝 솟아있다. 남쪽의 불무장등능선 너머 섬진강과 동쪽의 노고단 너머 구례와 남원 땅은 운무에 뒤덮여 지리운무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대원들은 모두 사진촬영에 몰두하느라 난리났다. 나의 모습을 저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들썩인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니 약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07:40). 다시 배낭을 들쳐 메니 갑자기 묵직하다. 삼도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리막길에 묘지 하나를 보고 15분 만에 삼도봉(三道峰·1,499m)이다. 삼각뿔의 표지가 박힌 삼도봉은 경상·전남·전북의 경계로서 정상부는 심하게 주름진 바위다. 전망이 좋아 잠시 휴식하기에 좋으나 사진 촬영만 하고 이내 돌아섰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가는데 도마뱀 두 녀석이 기어가고 있다. 그런데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을 물고 있는 것이다. 여성 대원이 싸우고 있다고 해서 자세히 보니 짝짓기를 하고 있는 거였다. 이런! 신성한 짝짓기를 방해하면 안 되지. 그 두 녀석을 옆으로 밀어 주었다.
곧 목재데크로 된 계단이 나타났다. 총 길이 240m로서 1999년도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30% 이상 급경사 구간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은 계단만 나타나면 투덜대는데 본인 무릎만 생각해서 하는 소리다. 목재데크는 노면이 파헤쳐지는 것을 방지하고 탐방객의 안전을 위하며 중간에 쉼터를 조성하여 휴식공간을 마련하고자 만들었으니 그저 감사해야 할 일이다.
화개재는 북쪽의 전북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과 남쪽의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연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화개장터가 여기서 열렸다는데 경남에서는 소금과 해산물이, 전북에서는 삼베와 산나물 등의 물건들이다. 그 물건들을 여기까지 짊어지고 오느라 무지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화개재는 넓은 공터지만 각종 식물들이 자유롭게 자라고 있다. 그 중 흰진범을 발견했다. 진범(진교)은 오리 모양의 자주색 꽃인데 그 색깔이 연한 황백색이다. 그 옆에 둥근이질풀이 많이 자라고 있다(08:20).
토끼봉으로 가는 길은 먼저 큰 바위 옆으로 나있다. 바위엔 많은 이끼가 싱싱하고 그 틈에 흰 꽃잎이 별처럼 생긴 바위떡풀이 많이 자라고 있다. 10Cm 정도의 키에 꽃잎이 두 장은 크고 세 장은 작아 마치 大자로 보이는 모습으로 바람에 살랑거리며 춤을 춘다. 이어서 조릿대 군락지가 나타나고 바닥은 야자수 줄기 섬유로 엮은 길이다. 화개재에서 30분 지나 우리는 또끼봉에 도착해 점심 도시락을 풀었다(08:50).
토끼봉(1,534m)은 반야봉에서 방위가 묘향이라 하여 묘봉으로 불리다가 토끼봉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순 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빨치산들이 봉우리에 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꽃대봉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낡은 헬기장 옆으로 쑥부쟁이가 만발했다. 대원들은 그 가을꽃을 즈려밟고 맛있는 점심 식사를 했다(09:20).
토끼봉을 떠나 연하천 산장으로 가는 여정은 좀 길다. 중간에 탈출로도 없고 마냥 가야한다. 무박산행의 단점이 여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피곤과 졸음이다. 이 구간은 전망대가 없어 조망이 좋지 않고 풍경이 반복적이다 보니 그런 증상이 나타났다. 이럴 때는 꽃에 관심을 가져도 좋다. 지금까지 온 지리산 구간의 대표 야생화는 투구꽃이다. 그 다음이 쑥부쟁이, 그리고 용담처럼 생긴 과남풀, 그리고 구절초, 둥근이질풀 등이다.
또 한번 죽은 조릿대가 나타났다. 올해 냉해 피해가 많은 과수처럼 산 속의 식물의 일부도 냉해의 영향을 아니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목재데크의 계단을 지나자 이번에는 많은 조릿대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같은 산악권에서도 이렇듯 생사를 달리하는 것을 보았다. 존재감이 없는 명선봉을 지나 목재 내리막길 끝에 ‘연하천산장’을 만났다(10:40).
연하천 산장은 정말 산장다운 멋을 느끼게 한다. 우선 돌을 이용하여 벽체를 만든 단층집으로서(경사를 따라 2층의 부속건물도 있다) 소박하고 아늑하다. 분지형이라 바람이 심하지 않아 겨울에도 안심이고 특히 물이 많아 더 좋다. 숲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 속에서 흐르고 있다고 해서 烟霞泉이다. 지리산 종주는 연하천처럼 물이 많아 굳이 배낭에 많은 물을 담지 않아도 된다. 이것을 아는 대원들은 샘터로 가서 물을 채우고 과일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산장 벽에는 다은과 같이 글귀가 달려있다. ‘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 행여 견딜 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의 한 구절을 따 온 듯한데 변덕스런 인간의 마음과 지리산까지 와서 제 구실 못하는 인간을 나무라는 글귀다. 잠시 생각하게 한다.
연하천 산장에서 대간 종주하는 팀을 만났는데 그들은 ‘좋은사람들’ 22기로서 우리와 같은 기수라 놀라웠다. 백두대간 종주의 붐이 일면서 우리나라는 많은 전문 산악회가 출범하고 있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면면을 보니 우리보다 젊은 그들로서 힘이 좋아 곧 우리를 앞서 나갔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산악회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인구비율로 볼 때 세계 1위인데 그 중 진짜 산악회와 가짜 산악회가 있는데 구별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그 조직이 누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가만 보면 된다. 진짜 산악회의 중심은 산악대장이다. 산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물론이요, 조직의 운영과 통솔 그리고 안전까지 책임지는 중대한 직책이므로 실무적이다. 그러나 가짜 산악회의 중심은 소위 ‘회장’이라는 사람이다. 산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도 미천하고 그저 조직의 맨 위에서 명예의 관을 쓰고 산이 우선이 아니라 친목에만 목적을 두고 야유회 성격으로 산행을 도모하는 인물로서 형식에 많이 치우친다. 소위 ‘동네산악회’가 그들이다. 그들의 생존방식은 오로지 관계유지다. 그것을 위하여 산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산이 주(主)가 아니라 인맥이 주가 되었으니 분열도 많이 생기고 생성도 많이 한다.
이제부터 벽소령 대피소까지 2.9Km를 움직여야 한다. 잠시 완만한 길을 가다가 ‘삼각고지’에 올라서면 앞으로 저 멀리 천왕봉과 그 앞으로 벽소령 대피소가 희미하게 보인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예술처럼 드리워있다.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는 지리고들빼기가 노란꽃을 무더기로 선 보이고 있다. 이 꽃 뿐만 아니라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됐거나 채집되어 우리말 이름에 ‘지리’ 또는 ‘지리산’이 붙은 것만 해도 수두룩하다. 지리괴불나무, 지리대사초, 지리강활, 지리산싸리, 지리산오갈피 등이다. 삼각고지에서 30분 진행하니 우뚝 솟은 바위가 나타나는데 형제봉이다. 저 멀리 천왕봉을 포함한 주능선의 봉우리들이 일제히 키높이 경쟁을 하는 듯 늘어서 있다.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깊은 형제의 비슷한 모습이라 해서 형제봉이다. 여기에는 지리산녀의 구애에도 등을 맞대고 꿈적하지 않았던 형제의 화석이라는 전설도 있다(12:00).
오늘의 목적지인 벽소령 대피소가 서서히 보인다. 형제봉 바위 밑과 그 아래 전망대에서 일행들에게 사진촬영을 했다. 파란 하늘과 구름의 조화가 아름답다. 태양은 강렬하나 열기는 높지 않고 시원한 바람이 정답다. 형제봉 아래의 종주길에는 유명한 바위문이 있다. 일부러 바위를 갈라 그 사잇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것이 꼭 영화 셋트장같다. 이 문을 지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마법의 장소다. 바위 단면에는 싱싱한 이끼와 귀여운 바위떡풀을 무더기로 감상할 수 있다. 대피소가 가까워서 그런지 길이 좋아졌다. 빨간열매가 달린 나무가 까치밥나무라고 ‘식물학 박사’ 박상복님이 알려준다. 나는 이번 종주에 가장 든든하고 믿음직한 동지이자 선생을 만났다. 산행 능력 뿐 아니라 야생초목에 해박한 지식을 겸비하여 나의 호기심을 매번 충족시키는 고마운 동지이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목재데크의 계단을 오르고 주변의 야생화를 두리번거리며 찾는 동안 어느새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12:50)
벽소령(1,350m)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종주코스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즉 지리산의 허리라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지리산의 화개골과 마천골, 즉 지리산의 남북을 연결하는 고개 중의 대표 격이다. 지금도 차량통행은 안되지만 도로가 나있다고 지도는 표기하고 있다. 벽소령에서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고 하여 ‘碧霄嶺’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리십경 중의 하나가 ‘벽소명월(碧霄明月)’이다.
오늘의 종주는 여기 벽소령 대피소가 끝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 음정마을(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까지 서비스 구간 6.7Km를 걸어 내려가야 한다. 이 날 도착한 대피소는 공사중이었다. 어디 마땅한 쉴 곳이 없어 물 한 모금 마시고 하산을 시작했다. 300m 아래 임도가 나타났다. 임도는 여기서 막혀 더 이상 지리 능선까지 오르지 못한다. 임도는 돌투성이 오프로드다. 산악자전거 정도는 가능한데 여기까지 올라온다는 자체가 미친 짓이다. 이제부터 하지의 무릎과 발목의 관절은 점점 힘을 잃고 통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원들은 선두와 후미가 길게 늘어나 본인의 체력과 여력에 따라 자유롭게 하산하고 있다. 간혹 저 아래 마을이 보이지만 너무 아득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도착하리라는 믿음을 배낭 위로 짊어지고 걸어야 한다.
15시10분, 드디어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수로의 차가운 물에 발가락을 냉찜질했다. 지형상 그리던 알탕을 못했지만 냉족탕으로 만족해야 했다. 백두대간을 간다는 것은 우리 땅의 척추를 온몸으로 확인하며 부대끼는 일이다. 수많은 고봉을 넘고 비산비야의 구릉지를 걸으며 우리나라의 이 땅을 확인하는 기회다. 특히 산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백두대간 종주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산줄기 타기다. 그 산줄기의 으뜸이랄 수 있는 지리산 산줄기, 오늘 온 몸으로 부딪치고 느끼고 생각했다. 진짜 산악회에서 동지들과 산에서의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이다. 이 하지통증이 지나가면 그 행복은 더 커질 것이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중략)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읊으며 유장한 지리 능선을 바라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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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진 사진과 글 잘보고 갑니다 ^*^
맛갈나는 산행기와 사진들 감사하며,수고 하셨습니다.
올 가을엔 꼭 피아골 단풍구경을 가야겠습니다 그려. 산에 얽힌 사연과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 코스가 달라
22기의 작가 선생님께 인사도 못드렸네요
가을처럼 풍성한 산행기, 건강하게 이어 가시길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