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 지명의 전설
백화 문상희
구리시 (九里市)의 조선시대 명칭은
양주군 퇴계원면 교문리였다
망우리 지명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온다
하나는 태조 이성계의 동문수학하던 지기가
망우리에 살았다는 근거에 관한 것이 있고
또 하나는 동구릉에 관한 유래로 전해진다.
그 유명한 위하도 회군으로 망조에 든 고려를
폐하고 1392년 집권후 나라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이라 국호를 정하고 몇 년 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천도를(태조 3년)했다
태조는 본인이 정치적으로 구상한 국정을
이로써 모두 이루졌다고 생각했다.
태조 이성계의 남은 걱정이라면 조선 개국 이후
천년태평을 이루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사후에 본인이 묻힐 자미원을
찾으라 지관에게 하명 하였다
전국 팔도를 헤매고 명당을 찾은 지관은
궁으로 들어가 자미원을 찾았노라 보고를 하였다.
하여, 태조께서는 지기인 무학대사를 불렀다
일행은 양주 땅 퇴계원 교문리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드시고 동구릉으로
향하는 망우리 고개까지 올라가셨다
산 꼭대기에서 잠시 휴식을 위해 말에서 내린
태조는 여기가 어디쯤인가 물었다.
지관이 동구릉 자미원에 대해 말하기를
용마산에서 이어진 망우산을 뻗어내려 와
퇴계원 쪽 능선을 따라 좌우로 큰 기운을 받은
구릉이 좌청룡 우백호라 말씀을 드렸다
또한 굽이진 한강의 물줄기가 자미원을 지켜주는
길함이라고 보고를 했다.
이 말을 들은 태조 이성계는 큰 포효를 하시며
그래, 이제 큰 근심거리를 하나 잊었노라 하셨다
이후 이 말이 마을사람들에게 전해졌고
동네사람들은 잊을忘, 근심憂, 마을里, 로
망우리라 불려졌다고 전해진다.
태조께서는 그러면 우리가 점심 먹은 마을과
동구릉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물었다
지관이 보고하기를 십리가 조금 못 되는
구리쯤 된다 하였다 이후 교문리에서
교문읍으로, 그다음 시로 승격될 때 태조께서
말씀하신 九里市로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가 동구릉 산 꼭대기에서 양평 쪽을
바라보니 한강으로 내려가는 개천의 물줄기와
주변의 경치가 너무 좋아 말을 타고 내려와
개천가에서 하룻밤 묵었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 王, 잘 宿, 내 川, 으로 왕숙천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태조께서는 봉분의 풀이 고사하면
국운이 기울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엄동설한에도 죽지 않고 뿌리를
잘 내리는 고향 함흥땅 갈대로 무덤을 덮어달라
유언하여 함흥에서 가져온 갈대로 봉분을 덮었고
육백 년이 지난 지금도 동구릉엔 갈대가 무성하다.
용마산에서 망우산으로 그리고 동구릉으로
이어진 산세는 완만하면서
풍수지리학 상으로도 좌청룡 우백호를 낀
명당자리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뒤로 망우리와 동구릉 근처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었고 유명인들도 많이 묻혀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유익한 정보 챙겨갑니다.
교문리
망우리를 지나
계곡으로
여름 청년 단합대회를 떠났었던.........그.......추억들!
감사합니다. ㅎㅎ
정보를 공유하는 의미에서
써본 지명유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