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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9 편
데카폴리스 여행
(Paper 159 : The Decapolis Tour)
. 중도자 위원회
. 29년 8월 18일 ~ 9월 16일
. 장소 : 데카폴리스
159:0.1 예수와 열두 사람이 마가단 공원에 도착했을 때, 여인단까지 포함하여 거의 1백 명의 전도사와 제자들의 무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했고, 그들은 즉시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가르치고 전도하는 여행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9:0.1 When Jesus and the twelve arrived at Magadan Park, they found awaiting them a group of almost one hundred evangelists and disciples, including the women's corps, and they were ready immediately to begin the teaching and preaching tour of the cities of the Decapolis.
159:0.2 8월 18일 목요일 아침, 주는 추종자들을 불러 모으고, 사도들은 각자 열두 전도사 가운데 하나와 함께 연합하여, 다른 전도사들과 함께 열두 그룹으로 나누어,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수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여인단과 다른 제자들은 그와 함께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예수는 이 여행에 4주를 할당하였고, 추종자들에게 9월 16일 금요일까지는 마가단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그들을 자주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달 동안에 이 열두 그룹은 게라사ㆍ가말라ㆍ히포, 자폰ㆍ가다라ㆍ아빌라, 에드레이ㆍ필라델피아ㆍ헤스본, 디움ㆍ스키토폴리스, 그리고 많은 다른 도시에서 일했다. 이 여행 기간 동안에 치유 기적이나 다른 특별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159:0.2 On this Thursday morning, August 18, the Master called his followers together and directed that each of the apostles should associate himself with one of the twelve evangelists, and that with others of the evangelists they should go out in twelve groups to labor in the cities and villages of the Decapolis. The women's corps and others of the disciples he directed to remain with him. Jesus allotted four weeks to this tour, instructing his followers to return to Magadan not later than Friday, September 16. He promised to visit them often during this time. In the course of this month these twelve groups labored in Gerasa, Gamala, Hippos, Zaphon, Gadara, Abila, Edrei, Philadelphia, Heshbon, Dium, Scythopolis, and many other cities. Throughout this tour no miracles of healing or other extraordinary events occurred.
1. 용서에 관한 설교 (The Sermon on Forgiveness)
159:1.1 어느 날 저녁 히포에서 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용서에 대한 교훈을 가르쳤다. 주가 말했다:
159:1.1 One evening at Hippos, in answer to a disciple's question, Jesus taught the lesson on forgiveness. Said the Master:
159:1.2 “마음이 착한 어느 사람이 양 1백 마리를 키우다가, 그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바로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서 나서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약 그가 좋은 목자라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 찾지 않겠느냐? 그리고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면,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면서 집으로 가서 친구와 이웃들에게 소리칠 것이다, ‘함께 즐거워하자,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아냈다.’ 내가 선언하니, 회개할 필요 없는 올바른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명을 하늘에서 더욱 크게 기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작은 아이들 중 하나가 길을 잃거나, 하물며 그들이 멸망하는 것은 더더욱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너희의 종교에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들을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의 복음에서는 그들이 회개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그들을 찾으려고 나가신다.
159:1.2 "If a kindhearted man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goes astray, does he not immediately leave the ninety and nine and go out in search of the one that has gone astray? And if he is a good shepherd, will he not keep up his quest for the lost sheep until he finds it? And then, when the shepherd has found his lost sheep, he lays it over his shoulder and, going home rejoicing, calls to his friends and neighbors, `Rejoice with me, for I have found my sheep that was lost.' I declare that there is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 and nine righteous persons who need no repentance. Even so, it is not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that one of these little ones should go astray, much less that they should perish. In your religion God may receive repentant sinners;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Father goes forth to find them even before they have seriously thought of repentance.
159:1.3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희의 죄를 용서하신다; 따라서 너희는 서로 용서하기를 배워야 한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지었으면, 그에게 가서, 재치와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잘못한 것을 보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너와 그 사람 둘이서만 하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를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형제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가 자기의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든, 서로에게 친구인 사람 한두 명을 데리고 그에게 다시 가라. 이처럼 둘 아니 세 증인이라도 너의 증언을 확인하고, 죄를 저지르는 형제를 네가 공정하고 자비롭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라. 이제 그가 형제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너는 회중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도 좋고, 다음에 그가 단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들이 현명하다고 여기는대로 행동하게 하여라; 그렇게 제멋대로인 구성원은 하늘나라에서 쫓겨나게 하라. 너희는 동료들의 혼을 심판하는 듯 할 수 없고, 너희가 죄를 용서해 주거나 다른 방법으로 하늘 무리의 감독자들의 특권을 빼앗을 수도 없지만, 동시에 세상의 나라에서 현세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일이 너희 손에 맡겨져 있다. 너희가 영생에 관한 신성한 율례를 간섭할 수는 없겠지만, 땅에서 너희는 형제들이 현세에 누리는 복지에 관계되는 행동 문제들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형제의 규율과 관련된 이 모든 일은, 땅에서 너희가 무엇을 선포하든지 하늘에서 인정받을 것이다. 비록 너희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으나, 너희는 단체 행동에 대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이는 이 일 중에 어떤 것에 관해서도 너희 가운데 두셋이 찬성하고 내게 요청하면, 그 간청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언제라도 사실이니, 두세 명의 신자가 모여 있는 곳에는, 그 가운데 내가 있다.”
159:1.3 "The Father in heaven loves his children, and therefore should you learn to love one another; the Father in heaven forgives you your sins; therefore should you learn to forgive one another. If your brother sins against you, go to him and with tact and patience show him his fault. And do all this between you and him alone. If he will listen to you, then have you won your brother. But if your brother will not hear you, if he persists in the error of his way, go again to him, taking with you one or two mutual friends that you may thus have two or even three witnesses to confirm your testimony and establish the fact that you have dealt justly and mercifully with your offending brother. Now if he refuses to hear your brethren, you may tell the whole story to the congregation, and then, if he refuses to hear the brotherhood, let them take such action as they deem wise; let such an unruly member become an outcast from the kingdom. While you cannot pretend to sit in judgment on the souls of your fellows, and while you may not forgive sins or otherwise presume to usurp the prerogatives of the supervisors of the heavenly hosts, at the same time, it has been committed to your hands that you should maintain temporal order in the kingdom on earth. While you may not meddle with the divine decrees concerning eternal life, you shall determine the issues of conduct as they concern the temporal welfare of the brotherhood on earth. And so, in all these matters connected with the discipline of the brotherhood, whatsoever you shall decree on earth, shall be recognized in heaven. Although you cannot determine the eternal fate of the individual, you may legislate regarding the conduct of the group, for, where two or three of you agree concerning any of these things and ask of me, it shall be done for you if your petition is not inconsistent with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And all this is ever true, for, where two or three believers are gathered together,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159:1.4 시몬 베드로는 히포에 있는 일꾼들을 책임진 사도였다.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듣자 그는 말했다: “주님,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얼마나 자주 그를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는 베드로에게 대답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집사에게 재정적인 계산을 명령하는 어떤 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들이 장부 검사를 시작했을 때, 우두머리 신하들 중에서 하나가 앞에 끌려 와서 그가 왕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고백하였다. 왕의 궁정에 있는 이 관리는 어려운 시절이 그에게 닥쳤고 이 빚을 갚을 물건이 없다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자녀들을 팔아 빚을 갚도록 명령하였다. 이 엄명을 듣자 이 우두머리 집사는 왕의 앞에 쓰러져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베풀고 그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왕에게 탄원하며 말했다, ‘주여, 나를 조금 더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모두 갚겠습니다.’ 이 나태한 신하와 그 가족을 바라보았을 때 왕은 동정심에 마음이 움직였다. 왕은 그를 풀어주고, 빚을 전부 탕감해주라고 명령하였다.
159:1.4 Simon Peter was the apostle in charge of the workers at Hippos, and when he heard Jesus thus speak, he asked: "Lord, how often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Until seven times?" And Jesus answered Peter: "Not only seven times but even to seventy times and seven. Therefore may the kingdom of heaven be likened to a certain king who ordered a financial reckoning with his stewards. And when they had begun to conduct this examination of accounts, one of his chief retainers was brought before him confessing that he owed his king ten thousand talents. Now this officer of the king's court pleaded that hard times had come upon him, and that he did not have wherewith to pay this obligation. And so the king commanded that his property be confiscated, and that his children be sold to pay his debt. When this chief steward heard this stern decree, he fell down on his face before the king and implored him to have mercy and grant him more time, saying, `Lord, have a little mor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you all.' And when the king looked upon this negligent servant and his family,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He ordered that he should be released, and that the loan should be wholly forgiven.
159:1.5 “이 우두머리 집사가 왕의 손에서 이렇게 자비와 용서를 받고 나서 열심히 일하였는데, 그에게 겨우 1백 데나리온 빚진 그의 하급 집사 하나를 발견하고서 그를 붙잡아 멱살을 잡고 말했다, ‘네가 내게 빚진 것을 모두 갚아라.’ 그리고 나서 이 동료 집사는 우두머리 집사 앞에 쓰러져서 탄원하며 말했다, ‘나를 참아 주십시오. 그렇게만 하시면 내가 곧 당신께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두머리 집사는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빚을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의 동료 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의 주, 상전인 왕에게 가서 말하였다. 우두머리 집사가 한 일을 들었을 때, 그 왕은 고마움을 모르고 용서하지 않는 이 사람을 앞에 부르고 말했다: ‘너는 악하고 자격이 없는 집사다. 네가 동정을 구했을 때 나는 너의 빚을 모두 아낌없이 용서하였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보인 것 같이, 어째서 너도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았느냐?’ 그 왕은 아주 몹시 성이 나서, 고마움을 모르는 우두머리 집사가 빚진 것을 모두 갚을 때까지 붙들어 두도록 간수에게 그를 넘겨주었다. 그와 같이 동료에게 아낌없이 자비를 보이는 자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더욱 풍부하게 자비를 보일 것이다. 똑같은 이 인간의 약점을 가진 죄 때문에 너희가 형제를 꾸짖는 버릇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의 부족함을 배려해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 모두에게 말하니, 하늘나라의 좋은 것들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땅에 있는 동료들에게 거저 주라.”
159:1.5 "And this chief steward, having thus received mercy and forgiveness at the hands of the king, went about his business, and finding one of his subordinate stewards who owed him a mere hundred denarii, he laid hold upon him and, taking him by the throat, said, `Pay me all you owe.' And then did this fellow steward fall down before the chief steward and, beseeching him, said: `Only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resently be able to pay you.' But the chief steward would not show mercy to his fellow steward but rather had him cast in prison until he should pay his debt. When his fellow servants saw what had happened, they were so distressed that they went and told their lord and master, the king. When the king heard of the doings of his chief steward, he called this ungrateful and unforgiving man before him and said: `You are a wicked and unworthy steward. When you sought for compassion, I freely forgave you your entire debt. Why did you not also show mercy to your fellow steward, even as I showed mercy to you?' And the king was so very angry that he delivered his ungrateful chief steward to the jailers that they might hold him until he had paid all that was due. And even so shall my heavenly Father show the more abundant mercy to those who freely show mercy to their fellows. How can you come to God asking consideration for your shortcomings when you are wont to chastise your brethren for being guilty of these same human frailties? I say to all of you: Freely you have received the good things of the kingdom; therefore freely give to your fellows on earth."
159:1.6 이렇게 예수는 사람이 동료를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함을 가르치고 그 불공평함을 보여주었다. 규율은 유지되어야 하고 공정은 집행되어야 하지만, 이 모든 문제에서 형제 사랑의 지혜가 앞서야 한다. 예수는 입법과 사법 권한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게 맡겼다. 이렇게 권한을 집단에 맡기는 것조차 개인의 권한으로서 행사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판결이 편견 때문에 치우치거나 열정 때문에 왜곡될 위험이 언제나 있다. 집단의 판결은 개인적 편견에 따르는 위험을 없애고 불공평을 제거할 가능성이 더 많다. 예수는 언제나 불공평ㆍ앙갚음ㆍ복수의 요소를 최소로 줄이려고 애썼다.
159:1.6 Thus did Jesus teach the dangers and illustrate the unfairness of sitting in personal judgment upon one's fellows. Discipline must be maintained, justice must be administered, but in all these matters the wisdom of the brotherhood should prevail. Jesus invested legislative and judicial authority in the group, not in the individual. Even this investment of authority in the group must not be exercised as personal authority. There is always danger that the verdict of an individual may be warped by prejudice or distorted by passion. Group judgment is more likely to remove the dangers and eliminate the unfairness of personal bias. Jesus sought always to minimize the elements of unfairness, retaliation, and vengeance.
159:1.7 [자비와 참을성의 예로 일흔일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라멕이 몹시 의기양양해 하는 것을 언급하는 성서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라멕은 그의 아들 두발 가인이 가진 금속 무기 때문에, 적들의 무기와 이 우수한 도구를 비교하면서 “카인이 그의 손에 무기도 없이 일곱 배의 복수를 했다면, 나는 이제 일흔일곱 배로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159:1.7 The use of the term seventy-seven as an illustration of mercy and forbearance was derived from the Scriptures referring to Lamech's exultation because of the metal weapons of his son Tubal-Cain, who, comparing these superior instruments with those of his enemies, exclaimed: "If Cain, with no weapon in his hand, was avenged seven times, I shall now be avenged seventy-seven."
2. 이상한 설교자 (The Strange Preacher)
159:2.1 예수는 가말라로 건너가 요한과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그날 저녁, 질문과 대답이 끝난 후에, 요한은 예수에게 말했다: “주님, 나는 어제 아스타롯에 가서, 당신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던 사람, 아니 악귀들을 내쫓을 수 있다고도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와 한 번도 함께 한 적이 없었고, 우리 뒤를 따라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그를 막지 말라. 이 하늘나라 복음이 곧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어떻게 복음을 믿을 모든 사람이 너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기대할 수 있느냐? 우리의 가르침이 이미 우리의 개인적 영향력의 한계를 넘어서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뻐하라. 요한, 내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한다고 공언하는 자들이 결국엔 우리 운동을 지지해야 하는 것을 모르겠느냐? 그들은 분명히 급하게 나를 나쁘게 평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그가 우리를 위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후대에 온전히 가치가 없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이상한 일을 많이 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금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마른 혼에게 찬물을 주더라도, 아버지의 전령들은 그런 사랑의 봉사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159:2.1 Jesus went over to Gamala to visit John and those who worked with him at that place. That evening, after the session of questions and answers, John said to Jesus: "Master, yesterday I went over to Ashtaroth to see a man who was teaching in your name and even claiming to be able to cast out devils. Now this fellow had never been with us, neither does he follow after us; therefore I forbade him to do such things." Then said Jesus: "Forbid him not. Do you not perceive that this gospel of the kingdom shall presently be proclaimed in all the world? How can you expect that all who will believe the gospel shall be subject to your direction? Rejoice that already our teaching has begun to manifest itself beyond the bounds of our personal influence. Do you not see, John, that those who profess to do great works in my name must eventually support our cause? They certainly will not be quick to speak evil of me. My son, in matters of this sort it would be better for you to reckon that he who is not against us is for us. In the generations to come many who are not wholly worthy will do many strange things in my name, but I will not forbid them. I tell you that, even when a cup of cold water is given to a thirsty soul, the Father's messengers shall ever make record of such a service of love."
159:2.2 이 설명은 요한을 크게 당황하게 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하는 주의 말씀을 그가 듣지 않았는가? 이 경우에는 하늘나라의 영적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반면, 다른 경우에는 한 집단의 신자들이, 앞으로 생길 세계적 형제 단체를 궁극에 구성할 기타 집단의 일을 행정적으로 통제하고 관할하는 권리에 관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광범위한 관계, 신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했음을 요한은 깨닫지 못했다.
159:2.2 This instruction greatly perplexed John. Had he not heard the Master say, "He who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he did not perceive that in this case Jesus was referring to man's personal relation to the spiritual teachings of the kingdom, while in the other case reference was made to the outward and far-flung social relations of believers regarding the questions of administrative control and the jurisdiction of one group of believers over the work of other groups which would eventually compose the forthcoming world-wide brotherhood.
159:2.3 그러나 요한은 종종 하늘나라를 위해 그의 이후의 수고와 관련하여 이 체험을 회상했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화를 냈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발 앞에 앉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감히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항상 부적절해 보였다.
159:2.3 But John oftentimes recounted this experience in connection with his subsequent labors in behalf of the kingdom. Nevertheless, many times did the apostles take offense at those who made bold to teach in the Master's name. To them it always seemed inappropriate that those who had never sat at Jesus' feet should dare to teach in his name.
159:2.4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일하지 말라고 요한이 막은 이 사람은 사도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메소포타미아로 계속 가기 전에 카나타에서 상당한 무리의 일행을 모았다. 이 사람 아덴은 케레사 가까이에서 예수가 고쳐 준 미친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주가 그에게서 내쫓았다고 생각한 그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들을 몰아 벼랑을 넘어 거꾸로 떨어져 죽게 만들었다고 아주 확신했던 사람이었다.
159:2.4 This man whom John forbade to teach and work in Jesus' name did not heed the apostle's injunction. He went right on with his efforts and raised up a considerable company of believers at Kanata before going on into Mesopotamia. This man, Aden, had been led to believe in Jesus through the testimony of the demented man whom Jesus healed near Kheresa, and who so confidently believed that the supposed evil spirits which the Master cast out of him entered the herd of swine and rushed them headlong over the cliff to their destruction.
3. 선생과 신자를 위한 가르침 (Instruction for Teachers and Believers)
159:3.1 토마스와 그 동료들이 일하던 에드레이에서 예수는 낮과 밤을 보냈다. 저녁 토론 과정에서, 그는 진리를 전도하는 자들을 인도하고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이 활동하도록 하는 원칙의 말씀을 주었다. 현대의 어구로 요약되고 재작성하면, 예수는 이렇게 가르쳤다:
159:3.1 At Edrei, where Thomas and his associates labored, Jesus spent a day and a night and, in the course of the evening's discussion, gave expression to the principles which should guide those who preach truth, and which should activate all who t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Summarized and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Jesus taught:
159:3.2 항상 사람의 성격(personality)을 존중하라. 의로운 주장은 결코 힘으로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 영적 승리는 오직 영적 힘으로 얻을 수 있다. 물질적 힘을 이용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정신의 힘도 언급한다. 압도하는 논리와 정신적 우월성으로 남녀들을 하늘나라로 들어가라고 강요하는데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인간 지성의 단순한 논리의 무게로 짓누르거나, 기발한 웅변으로 겁을 주어서도 안 된다. 인간 결정에서의 한 요소인 감정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하늘나라의 운동을 진전시키려 하는 자들을 가르칠 때, 감정에 직접 호소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단순한 감정에 호소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호소할 때는 공정해야 하고, 자제력을 발휘해야 하며, 생도들의 성격을 적절히 존중해야 한다.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갈 것이다.”
159:3.2 Always respect the personality of man. Never should a righteous cause be promoted by force; spiritual victories can be won only by spiritual power. This injunction against the employment of material influences refers to psychic force as well as to physical force. Overpowering arguments and mental superiority are not to be employed to coerce men and women into the kingdom. Man's mind is not to be crushed by the mere weight of logic or overawed by shrewd eloquence. While emotion as a factor in human decisions cannot be wholly eliminated, it should not be directly appealed to in the teachings of those who would advance the cause of the kingdom. Make your appeals directly to the divine spirit that dwells within the minds of men. Do not appeal to fear, pity, or mere sentiment. In appealing to men, be fair; exercise self-control and exhibit due restraint; show proper respect for the personalities of your pupils. Remember that I have said: "Behold,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and if any man will open, I will come in."
159:3.3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올 때, 그들의 자존심을 낮추거나 손상시키지 말라. 지나친 자존감은 적절한 겸손을 파괴하고, 자존심, 자만심, 오만함으로 끝날 수 있지만, 자존심을 잃는 것은 때때로 의지의 마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을 잃은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고, 가진 자는 자제하는 것이 이 복음의 목적이다. 너희 생도들의 생활에서 잘못을 비난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칭찬받을 만한 일에 대해 너그러운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또한 기억하라. 자존심을 잃고서 정말로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나는 무슨 일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잊지 말라.
159:3.3 In bringing men into the kingdom, do not lessen or destroy their self-respect. While overmuch self-respect may destroy proper humility and end in pride, conceit, and arrogance, the loss of self-respect often ends in paralysis of the will. It is the purpose of this gospel to restore self-respect to those who have lost it and to restrain it in those who have it. Make not the mistake of only condemning the wrongs in the lives of your pupils; remember also to accord generous recognition for the most praiseworthy things in their lives. Forget not that I will stop at nothing to restore self-respect to those who have lost it, and who really desire to regain it.
159:3.4 소심하고 두려운 혼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주의하라. 생각이 단순한 내 형제들을 희생하면서 빈정거리는 일에 빠지지 말라. 두려움에 시달리는 내 아이들에게 냉소적으로 굴지 말라. 게으름은 자존심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선택한 일을 바쁘게 하도록 충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159:3.4 Take care that you do not wound the self-respect of timid and fearful souls. Do not indulge in sarcasm at the expense of my simple-minded brethren. Be not cynical with my fear-ridden children. Idleness is destructive of self-respect; therefore, admonish your brethren ever to keep busy at their chosen tasks, and put forth every effort to secure work for those who find themselves without employment.
159:3.5 “겁을 주어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들어오게 하는 것과 같은 가치 없는 책략을 쓰는 일에 결코 죄를 짓지 말라. 사랑하는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신의 정당한 요구에 복종하도록 겁주지 않는다.
159:3.5 Never be guilty of such unworthy tactics as endeavoring to frighten men and women into the kingdom. A loving father does not frighten his children into yielding obedience to his just requirements.
159:3.6 언젠가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강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신성한 영의 인도하심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곳으로 가도록 강하고 이상하게 감명을 받는 것이 반드시 그러한 충동이 내면에 깃드는 영이 이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59:3.6 Sometime the children of the kingdom will realize that strong feelings of emotion are not equivalent to the leadings of the divine spirit. To be strongly and strangely impressed to do something or to go to a certain place,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such impulses are the leadings of the indwelling spirit.
159:3.7 육신을 입고 사는 삶으로부터 영적으로 사는 높은 삶으로 넘어가는 모든 이들이 영적으로 살아가면서 넘어야 할 갈등의 경계에 대해 모든 신자들에게 미리 경고하라. 어느 한 영역 안에서든 꽤 온전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나 혼란이 거의 없지만, 두 단계의 삶 사이의 과도기 동안에는 모두 다소간의 불확실성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하늘나라에 입성할 때, 너희는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의무를 회피할 수 없다. 하지만 기억하라: 복음의 멍에는 쉽고 진리의 짐은 가볍다.
159:3.7 Forewarn all believers regarding the fringe of conflict which must be traversed by all who pass from the life as it is lived in the flesh to the higher life as it is lived in the spirit. To those who live quite wholly within either realm, there is little conflict or confusion, but all are doomed to experience more or less uncertainty during the times of transition between the two levels of living. In entering the kingdom, you cannot escape its responsibilities or avoid its obligations, but remember: The gospel yoke is easy and the burden of truth is light.
159:3.8 세상은 생명의 빵을 바로 눈앞에 두고 허덕이는 갈급한 혼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찾다가 죽는다. 살아있는 믿음으로 바로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하늘나라의 보물이 모두 있는데, 사람들은 동경하는 마음과 지친 발로 이 보물을 찾는다. 믿음과 종교의 관계는 돛과 배의 관계와 같다. 믿음은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요, 생명의 짐은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자에게 오직 하나의 투쟁이 있으니, 즉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투쟁이 있으니, 즉 의심―불신―을 이기는 것이다.
159:3.8 The world is filled with hungry souls who famish in the very presence of the bread of life; men die searching for the very God who lives within them. Men seek for the treasures of the kingdom with yearning hearts and weary feet when they are all within the immediate grasp of living faith. Faith is to religion what sails are to a ship; it is an addition of power, not an added burden of life. There is but one struggle for those who enter the kingdom, and that is to fight the good fight of faith. The believer has only one battle, and that is against doubt-unbelief.
159:3.9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과 친구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친교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똑같이 호소할 것이요, 그들의 특징인 열망과 이상을 아주 참되게 채워주는 무엇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녀들에게 말해라. 나는 그들의 느낌을 다치지 않으려 애쓰고 약점을 참을 뿐 아니라, 또한 죄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불의를 참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앞에서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일부러 저지르는 악행과 사악한 반란의 와중에서 나는 똑같이, 사정없이 용서하지 않는다.
159:3.9 In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you are simply teaching friendship with God. And this fellowship will appeal alike to men and women in that both will find that which most truly satisfies their characteristic longings and ideals. Tell my children that I am not only tender of their feelings and patient with their frailties, but that I am also ruthless with sin and intolerant of iniquity. I am indeed meek and humble in the presence of my Father, but I am equally and relentlessly inexorable where there is deliberate evildoing and sinful rebellion against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159:3.10 너희의 선생을 슬픈 사람으로 묘사하지 말라. 미래의 세대는 우리의 기쁨의 광채, 우리의 선한 의지의 솟는 힘, 우리의 좋은 유머가 주는 영감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좋은 소식이 담긴 말씀을 선포하고, 변화시키는 그 힘은 사람들에게 퍼진다. 우리의 종교는 새 생명과 새 의미로 고동친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가슴 속에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다. 늘어나는 행복은 하나님을 확신하는 모든 사람이 항상 겪는 체험이다.
159:3.10 You shall not portray your teacher as a man of sorrows. Future generations shall know also the radiance of our joy, the buoyance of our good will, and the inspiration of our good humor. We proclaim a message of good news which is infectious in its transforming power. Our religion is throbbing with new life and new meanings. Those who accept this teaching are filled with joy and in their hearts are constrained to rejoice evermore. Increasing happiness is always the experience of all who are certain about God.
159:3.11 모든 신자가 거짓 동정이라는 불안한 버팀목에 기대지 않도록 가르치라.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튼튼한 성품을 기를 수 없다; 불쌍한 처지를 단지 같이 슬퍼하는 거짓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직하게 애쓰라. 생활의 시련 앞에서 겨우 마지못해 버티는 비겁한 사람에게 지나친 동정을 삼가며, 담대하고 용감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라.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자기 문제 앞에 드러눕는 자를 위로하지 말라. 단지 동료들이 보답으로 너희를 동정할 수도 있다 해도 친구들을 동정하지 말라.
159:3.11 Teach all believers to avoid leaning upon the insecure props of false sympathy. You cannot develop strong characters out of the indulgence of self-pity; honestly endeavor to avoid the deceptive influence of mere fellowship in misery. Extend sympathy to the brave and courageous while you withhold overmuch pity from those cowardly souls who only halfheartedly stand up before the trials of living. Offer not consolation to those who lie down before their troubles without a struggle. Sympathize not with your fellows merely that they may sympathize with you in return.
159:3.12 내 자녀들이 일단 신성한 존재에 대한 확신을 스스로 의식하게 될 때, 그러한 믿음은 시야를 넓히고, 혼을 고귀하게 만들고, 성격을 강화시키고, 행복을 키우고, 영적 인식을 깊게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높여줄 것이다.
159:3.12 When my children once become self-conscious of the assurance of the divine presence, such a faith will expand the mind, ennoble the soul, reinforce the personality, augment the happiness, deepen the spirit perception, and enhance the power to love and be loved.
159:3.13 모든 신자에게 하늘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시간의 사고나 자연의 보통 재앙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라.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곤경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너희에게 고난이 덮칠 때 너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보장할 것이다. 너희가 감히 나를 믿고 마음을 다하여 나를 따라온다면, 그렇게 함으로 분명한 고난의 길로 아주 확실히 들어설 것이다. 나는 역경의 바다에서 너희를 구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지만, 나는 그 모든 역경을 함께 헤쳐나갈 것을 약속한다.
159:3.13 Teach all believers that those who enter the kingdom are not thereby rendered immune to the accidents of time or to the ordinary catastrophes of nature. Believing the gospel will not prevent getting into trouble, but it will insure that you shall be unafraid when trouble does overtake you. If you dare to believe in me and wholeheartedly proceed to follow after me, you shall most certainly by so doing enter upon the sure pathway to trouble. I do not promise to deliver you from the waters of adversity, but I do promise to go with you through all of them.
159:3.14 그리고 예수는 이 무리의 신자들이 밤에 잘 준비를 하기 전에 그들을 더 가르쳤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했고, 이 말씀을 주실 때 자리에 없던 사도와 제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이 말씀을 자주 되풀이했다.
159:3.14 And much more did Jesus teach this group of believers before they made ready for the night's sleep. And they who heard these sayings treasured them in their hearts and did often recite them for the edification of the apostles and disciples who were not present when they were spoken.
4. 나다니엘과 한 이야기 (The Talk with Nathaniel)
159:4.1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아빌라로 갔는데, 거기에는 나다니엘과 그 동료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나다니엘은 예수의 선언 중에 일부가 인정된 히브리 성서의 권한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따라서 이날 밤에, 여느 때처럼 질문 대답 시간이 끝난 후, 나다니엘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데로 예수를 모시고 가서 물었다: “주님, 당신은 제가 성서에 대한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제가 관찰하기에는, 당신은 우리에게 신성한 기록의 일부만―내가 보건대 최선을―가르치고,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대 이전에도 하늘에서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율법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취지로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당신은 배척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성서에 대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혼란스러워하는 사도의 질문을 듣고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159:4.1 And then went Jesus over to Abila, where Nathaniel and his associates labored. Nathaniel was much bothered by some of Jesus' pronouncements which seemed to detract from the authority of the recognized Hebrew scriptures. Accordingly, on this night, after the usual period of questions and answers, Nathaniel took Jesus away from the others and asked: " Master, could you trust me to know the truth about the Scriptures? I observe that you teach us only a portion of the sacred writings-the best as I view it-and I infer that you reject the teachings of the rabbis to the effect that the words of the law are the very words of God, having been with God in heaven even before the times of Abraham and Moses. What is the truth about the Scriptures? " When Jesus heard the question of his bewildered apostle, he answered:
159:4.2 “나다니엘, 네가 옳게 판단하였다, 나는 성서를 랍비들과 같이 여기지 않는다. 나는 이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온전히 되어 있지 않은 너의 형제들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너와 함께 이야기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담긴 말씀과 성서의 가르침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겨우 요즈음에 와서 성서가 우리가 가진 대로 수집되었다. 유대 민족의 최고 사상과 최선의 소망을 담고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본성과 가르침을 대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즉 나는 더 좋은 가르침 중에서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이삭을 줍듯 진리를 골라야 한다.
159:4.2 "Nathaniel, you have rightly judged; I do not regard the Scriptures as do the rabbis. I will talk with you about this matter on condition that you do not relate these things to your brethren, who are not all prepared to receive this teaching. The words of the law of Moses and the teachings of the Scriptures were not in existence before Abraham. Only in recent times have the Scriptures been gathered together as we now have them. While they contain the best of the higher thoughts and longings of the Jewish people, they also contain much that is far from being representative of the character and teachings of the Father in heaven; wherefore must I choose from among the better teachings those truths which are to be gleaned for the gospel of the kingdom.
159:4.3 “이 글들은 사람들이 지은 것인데, 어떤 사람은 거룩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거룩하지 않다. 이 책들의 가르침은 그 기원이 있던 시절에 깨우친 관점과 정도를 나타낸다. 진리의 계시로서, 마지막 것은 처음 것보다 더 믿을 만하다. 성서는 결함이 있고 그 기원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지만, 잘못 생각하지 말라, 성서는 이 시점에 온 세상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지혜와 영적 진리 가운데 최고의 모음집이다.
159:4.3 "These writings are the work of men, some of them holy men, others not so holy. The teachings of these books represent the views and extent of enlightenment of the times in which they had their origin. As a revelation of truth, the last are more dependable than the first. The Scriptures are faulty and altogether human in origin, but mistake not, they do constitute the best collection of religious wisdom and spiritual truth to be found in all the world at this time.
159:4.4 “이 책들 중 다수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고, 그것이 담고 있는 진리의 가치를 결코 훼손하지 않는다. 요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요나가 살아있지 않았더라도, 니느웨와 소위 이교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 이야기의 심오한 진리는 동료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눈에는 여전히 귀중할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 글에 담고 있으며, 의와 진리, 거룩함의 가장 높은 개념을 기록하기 때문에 신성하다. 성서에는 참된 내용이 아주 많이 담겨 있지만, 현재 너희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 글들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즉 내가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온 사랑하는 하나님을 잘못 표현한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159:4.4 "Many of these books were not written by the persons whose names they bear, but that in no way detracts from the value of the truths which they contain. If the story of Jonah should not be a fact, even if Jonah had never lived, still would the profound truth of this narrative, the love of God for Nineveh and the so-called heathen, be none the less precious in the eyes of all those who love their fellow men. The Scriptures are sacred because they present the thoughts and acts of men who were searching for God, and who in these writings left on record their highest concepts of righteousness, truth, and holiness. The Scriptures contain much that is true, very much, but in the light of your present teaching, you know that these writings also contain much that is misrepresentative of the Father in heaven, the loving God I have come to reveal to all the worlds.
159:4.5 “나다니엘, 사랑의 하나님이 너의 조상에게 싸움터에 나가서, 적을 모두―어른과 아이들을―도륙하라 지시했다는 성서의 기록을 단 한 순간이라도 믿지 말라. 그런 기록은 그리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한 말이며,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다. 성서는 성서를 쓴 사람들의 지적ㆍ도덕적ㆍ영적 상태를 언제나 반영해 왔고,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선지자들이 사무엘부터 이사야까지 기록하면서 야웨 개념이 더 아름답고 영화롭게 성장하는 것을 너는 주목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너는 성서가 종교적인 가르침과 영적인 지도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은 역사가나 철학자들의 작품이 아니다.
159:4.5 "Nathaniel, never permit yourself for one moment to believe the Scripture records which tell you that the God of love directed your forefathers to go forth in battle to slay all their enemies-men, women, and children. Such records are the words of men, not very holy men, and they are not the word of God. The Scriptures always have, and always will, reflect the intellectual, moral, and spiritual status of those who create them. Have you not noted that the concepts of Yahweh grow in beauty and glory as the prophets make their records from Samuel to Isaiah? And you should remember that the Scriptures are intended for religious instruction and spiritual guidance. They are not the works of either historians or philosophers.
159:4.6 “가장 개탄스러운 것은 단순히 성서의 완전성과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전통에 노예가 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신성한 글을 혼동하여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늘나라 복음의 새로운 가르침을 대적하기 위해 성서의 영감과 그 잘못된 교리 둘 다를 사용할 것이다. 나다니엘, 결코 잊지 말라. 아버지께서는 진리의 계시를 한 세대나 어느 한 민족에게만 주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이 성서의 완전성에 대한 이러한 교리에 혼란스러워하고 낙담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59:4.6 "The thing most deplorable is not merely this erroneous idea of the absolute perfection of the Scripture record and the infallibility of its teachings, but rather the confusing misinterpretation of these sacred writings by the tradition-enslaved scribes and Pharisees at Jerusalem. And now will they employ both the doctrine of the inspiration of the Scriptures and their misinterpretations thereof in their determined effort to withstand these newer teaching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Nathaniel, never forget, the Father does not limit the revelation of truth to any one generation or to any one people. Many earnest seekers after the truth have been, and will continue to be, confused and disheartened by these doctrines of the perfection of the Scriptures.
159:4.7 “진리의 권위는 살아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 정신이지, 다른 세대에 깨우침이 덜한 사람들,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죽은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이 오래된 거룩한 사람들이 영감을 받고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들의 말이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이 하늘나라의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내가 떠나면, 너희가 나의 가르침에 대한 너희의 해석의 다양성으로 인해 여러 집단이 급속히 진리 경쟁자로 분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대를 위해 우리는 기록 만드는 것을 피하면서 이러한 진리를 사는 것이 최선이다.
159:4.7 "The authority of truth is the very spirit that indwells its living manifestations, and not the dead words of the less illuminated and supposedly inspired men of another generation. And even if these holy men of old lived inspired and spirit-filled lives, that does not mean that their words were similarly spiritually inspired. Today we make no record of the teachings of this gospel of the kingdom lest, when I have gone, you speedily become divided up into sundry groups of truth contenders as a result of the diversity of your interpretation of my teachings. For this generation it is best that we live these truths while we shun the making of records.
159:4.8 “나다니엘, 내 말을 잘 새겨라. 인간의 본성이 닿는 것은 절대 확실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없다. 인간의 지성을 통해 신성한 진리는 실제로 빛을 발할 수 있지만, 항상 상대적인 순수함과 부분적인 신성을 가지고 있다. 그 생명 존재가 절대 확실성을 갈망할지 몰라도, 그러나 그것은 오직 창조주만이 소유한다.
159:4.8 "Mark you well my words, Nathaniel, nothing which human nature has touched can be regarded as infallible. Through the mind of man divine truth may indeed shine forth, but always of relative purity and partial divinity. The creature may crave infallibility, but only the Creators possess it.
159:4.9 “그러나 성서에 관한 가르침에 가장 큰 착오는 성서가 오로지 그 민족의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 감히 풀이하는 봉인된 책, 신비와 지혜의 책이라는 교리이다. 신성한 진리의 계시는 인간의 무지, 편견, 좁게 생각하는 불관용이 아니면 봉인되지 않는다. 성서의 빛은 오직 편견이 가리고 미신에 의해 어두워질 뿐이다. 신성시 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두려움은 종교가 일반적 느낌에 의해 보호되는 것을 방해해 왔다. 과거의 신성한 기록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은 오늘날 정직한 혼들이 복음의 새로운 빛, 즉 하나님을 아는 바로 이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해한다.
159:4.9 "But the greatest error of the teaching about the Scriptures is the doctrine of their being sealed books of mystery and wisdom which only the wise minds of the nation dare to interpret. The revelations of divine truth are not sealed except by human ignorance, bigotry, and narrow-minded intolerance. The light of the Scriptures is only dimmed by prejudice and darkened by superstition. A false fear of sacredness has prevented religion from being safeguarded by common sense. The fear of the authority of the sacred writings of the past effectively prevents the honest souls of today from accepting the new light of the gospel, the light which these very God-knowing men of another generation so intensely longed to see.
159:4.10 “그러나 가장 슬픈 점은 이 전통주의의 신성함을 아는 일부 선생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성서의 이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에, 도덕적으로는 겁쟁이며, 지적으로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성서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런 충격적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감추기를 고집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서를 달리 해석하고 왜곡하여, 성서를 다른 세대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지혜, 종교적 영감, 영적인 가르침의 보고로서 성서에 관심을 끄는 대신에, 비영적인 것 안에서 권위와 일상생활의 맹종하는 세부사항을 담은 안내서로서 만들고 있다.”
159:4.10 "But the saddest feature of all is the fact that some of the teachers of the sanctity of this traditionalism know this very truth. They more or less fully understand these limitations of Scripture, but they are moral cowards, intellectually dishonest. They know the truth regarding the sacred writings, but they prefer to withhold such disturbing facts from the people. And thus do they pervert and distort the Scriptures, making them the guide to slavish details of the daily life and an authority in things nonspiritual instead of appealing to the sacred writings as the repository of the moral wisdom, religious inspiration, and the spiritual teaching of the God-knowing men of other generations."
159:4.11 나다니엘은 주의 선언에 깨달음과 충격을 받았다. 마음속 깊이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예수의 승천 이후까지 이 회담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다음에도 주가 가르친 이야기를 전부 전하기를 두려워했다.
159:4.11 Nathaniel was enlightened, and shocked, by the Master's pronouncement. He long pondered this talk in the depths of his soul, but he told no man concerning this conference until after Jesus' ascension; and even then he feared to impart the full story of the Master's instruction.
5. 예수의 종교의 긍정적 본질 (The Positive Nature of Jesus’ Religion)
159:5.1 야고보가 일하고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긍정적 본질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논평을 하는 과정에서, 성서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진리를 더 담고 있음을 넌지시 비추었고, 듣는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자기 혼에게 먹이라고 훈계했을 때, 야고보는 주의 말씀을 가로막고 물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성서에서 더 좋은 구절을 선택할 수 있을지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는 대답했다: “좋다, 야고보, 너희가 성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이 영원히 참되고 신성하게 아름다운 가르침을 찾아보라:
159:5.1 At Philadelphia, where James was working, Jesus taught the disciples about the positive nature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When, in the course of his remarks, he intimated that some parts of the Scripture were more truth-containing than others and admonished his hearers to feed their souls upon the best of the spiritual food, James interrupted the Master, asking: "Would you be good enough, Master, to suggest to us how we may choose the better passages from the Scriptures for our personal edification?" And Jesus replied: "Yes, James, when you read the Scriptures look for those eternally true and divinely beautiful teachings, such as:
“오, 주님, 제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159:5.2 "Create in me a clean heart, O Lord.
“주는 나의 목자이시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159:5.3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159:5.4 "You shoul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의 오른 손을 붙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159:5.5 "For I, the Lord your God, will hold your right hand, saying, fear not; I will help you.
“나라들이 더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159:5.6 "Neither shall the nations learn war any more."
159:5.7 이것은 예수가 어떻게 히브리 성서의 노른자를 추종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하늘나라의 새로운 복음의 가르침에 넣으려고 날마다 사용하는 예를 든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하나님이 사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다정한 아버지가 의존하는 자녀들의 복지를 위하여 걱정하는 것으로 비유했고, 다음에 이 가르침을 그의 종교의 주춧돌로 만들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신조는 사람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은 그의 종교의 총체이자 실체가 되었다. 예수는 유대 종교를 최대한 활용하여 하늘나라 복음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가치 있게 설정해 놓았다.
159:5.7 And this is illustrative of the way Jesus, day by day, appropriated the cream of the Hebrew scriptures for the instruction of his followers and for inclusion in the teachings of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ther religions had suggested the thought of the nearness of God to man, but Jesus made the care of God for man like the solicitude of a loving father for the welfare of his dependent children and then made this teaching the cornerstone of his religion. And thus did the doctrine of the fatherhood of God make imperative the practice of the brotherhood of man. The worship of God and the service of man became the sum and substance of his religion. Jesus took the best of the Jewish religion and translated it to a worthy setting in the new teaching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159:5.8 예수는 유대 종교의 부정적 교리 속에 긍정적 행동 정신을 집어넣었다. 예식의 요구 조건에 부정적으로 순응하는 대신에, 예수는 새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새 종교가 요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행하라고 명령했다. 예수의 종교는 그 복음이 요구한 것을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데 있다. 그의 종교의 핵심이 사회봉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봉사는 참된 종교 정신을 가져서 생기는 한 가지 확실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159:5.8 Jesus put the spirit of positive action into the passive doctrines of the Jewish religion. In the place of negative compliance with ceremonial requirements, Jesus enjoined the positive doing of that which his new religion required of those who accepted it. Jesus' religion consisted not merely in believing, but in actually doing, those things which the gospel required. He did not teach that the essence of his religion consisted in social service, but rather that social service was one of the certain effects of the possession of the spirit of true religion.
159:5.9 예수는 서슴지 않고 성서에서 더 좋은 반쪽을 이용했고, 한편 못한 부분을 거부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의 큰 훈계는 성서에서 인용한 것으로, “너희는 네 민족의 아이들에게 복수하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부정적 부분을 거부하면서 이 성서의 긍정적 부분을 이용했다. 그는 심지어 부정적이거나 순전히 소극적 무저항도 반대하였다. 그는 말했다: “적이 네 한쪽 뺨을 치거든, 잠자코 소극적으로 서 있지 말고, 적극적 태도로 다른 뺨을 돌려대라. 다시 말해서, 잘못에 빠진 네 형제를 잘못된 길로부터 올바르게 사는 더 나은 길로 이끌도록 가능한 최선의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라.”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어떤 생활 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ㆍ적극적 반응을 요구했다.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이나 또는 그것이 무슨 행위를 상징하든지, 진취성을 요구하고 그 신자의 성격에 대한 활기차고 긍정적이며 용기 있는 표현을 요구했다.
159:5.9 Jesus did not hesitate to appropriate the better half of a Scripture while he repudiated the lesser portion. His great exhortation,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he took from the Scripture which reads: "You shall not take vengeance against the children of your people, bu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Jesus appropriated the positive portion of this Scripture while rejecting the negative part. He even opposed negative or purely passive nonresistance. Said he: "When an enemy smites you on one cheek, do not stand there dumb and passive but in positive attitude turn the other; that is, do the best thing possible actively to lead your brother in error away from the evil paths into the better ways of righteous living." Jesus required his followers to react positively and aggressively to every life situation. The turning of the other cheek, or whatever act that may typify, demands initiative, necessitates vigorous, active, and courageous expression of the believer's personality.
159:5.10 예수는 악의 저항을 하지 않는 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자가 모욕을 주는 데 소극적으로 굴복하는 행위를 옹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추종자들이 선으로 악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끝까지 선에 대하여 빠르고 긍정적인 반응으로 지혜롭고 민첩하게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잊지 말라. 참된 선은 가장 지독한 악보다 언제나 훨씬 더 강력하다. 주는 의에 대한 긍정적인 기준을 가르쳤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무시하고 날마다 모든 책임을 다하며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는 “선행을 하는 것”으로 그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복음의 이러한 측면은 그가 나중에 그의 추종자들에게 말씀한 여러 비유에 서 잘 설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결코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 의무를 짊어지라고 훈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의 인간적 책임과 신성한 특권을 충분히 충족시키기 위한 에너지와 열정을 가지라고 훈계하였다.
159:5.10 Jesus did not advocate the practice of negative submission to the indignities of those who might purposely seek to impose upon the practitioners of nonresistance to evil, but rather that his followers should be wise and alert in the quick and positive reaction of good to evil to the end that they might effectively overcome evil with good. Forget not, the truly good is invariably more powerful than the most malignant evil. The Master taught a positive standard of righteousness: "Whosoever wishes to be my disciple, let him disregard himself and take up the full measure of his responsibilities daily to follow me." And he so lived himself in that "he went about doing good." And this aspect of the gospel was well illustrated by many parables which he later spoke to his followers. He never exhorted his followers patiently to bear their obligations but rather with energy and enthusiasm to live up to the full measure of their human responsibilities and divine privileges in the kingdom of God.
159:5.11 예수는 사도들에게, 누가 부당하게 외투를 빼앗을 때, 다른 옷도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을 때, 문자 그대로 외투가 아니라, 관련된 오래된 충고―“눈에는 눈"을 보복하라는 대신에 잘못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긍정적인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예수는 복수하거나 그저 불공평을 소극적으로 참거나 그에 희생되는 자가 되는 개념을 몹시 싫어했다. 이 경우에 그는 악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음을 가르쳤다:
159:5.11 When Jesus instructed his apostles that they should, when one unjustly took away the coat, offer the other garment, he referred not so much to a literal second coat as to the idea of doing something positive to save the wrongdoer in the place of the olden advice to retaliate―"an eye for an eye" and so on. Jesus abhorred the idea either of retaliation or of becoming just a passive sufferer or victim of injustice. On this occasion he taught them the three ways of contending with, and resisting, evil:
1. 악을 악으로 갚는 것―적극적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법.
159:5.12.1. To return evil for evil-the positive but unrighteous method.
2. 불평 없이 저항하지 않고 악을 견디는 것―순전히 부정적인 방법.
159:5.13.2. To suffer evil without complaint and without resistance-the purely negative method.
3. 악을 선으로 갚는 것, 그 상황의 주인이 되도록 의지를 주장하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긍정적이고 올바른 방법.
159:5.14.3. To return good for evil, to assert the will so as to become master of the situation, to overcome evil with good-the positive and righteous method.
159:5.15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한때 물었다: “주님, 어느 낯선 자가 짐을 지고 십리를 가라 강제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는 대답하였다: “소리를 죽여 그 낯선 자를 헐뜯으면서, 앉아서 위안을 얻으려 한숨을 쉬지 말라. 의(義)는 그러한 수동적 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더 효과 있게 적극적인 일을 전혀 생각할 수 없거든, 적어도 그 짐을 십리나 더 나를 수 있다. 이것은 부당하고 사악한 낯선 사람에게 분명히 도전이 될 것이다.”
159:5.15 One of the apostles once asked: "Master, what should I do if a stranger forced me to carry his pack for a mile?" Jesus answered: "Do not sit down and sigh for relief while you berate the stranger under your breath. Righteousness comes not from such passive attitudes. If you can think of nothing more effectively positive to do, you can at least carry the pack a second mile. That will of a certainty challenge the unrighteous and ungodly stranger."
159:5.16 유대인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악행을 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먼저 죄인을 찾아 나서며, 그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기꺼이 돌아오려고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뻐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지 못했다. 종교에서 이 적극적 음성은 주의 기도까지 연장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인간의 공정성에 대한 긍정적인 훈계로 전환했다.
159:5.16 The Jews had heard of a God who would forgive repentant sinners and try to forget their misdeeds, but not until Jesus came, did men hear about a God who went in search of lost sheep, who took the initiative in looking for sinners, and who rejoiced when he found them willing to return to the Father's house. This positive note in religion Jesus extended even to his prayers. And he converted the negative golden rule into a positive admonition of human fairness.
159:5.17 어떤 가르침에도 예수는 어수선한 세부를 어김없이 피했다. 그는 미사여구를 피하고 말로만 표현하는 단순한 시적인 묘사를 피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작은 표현 속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는 예를 들어 설명할 목적으로 소금ㆍ누룩ㆍ고기잡이ㆍ어린아이와 같은 현재 통용되는 여러 낱말의 의미를 다르게 표현했다. 그는 분 단위와 무한 등을 비교하며 대조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묘사는 “소경을 이끄는 소경”처럼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증적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장점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예수는 종교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가져왔다. 그는 새로운 통찰력과 새로운 애정을 줌으로서 혼의 기본적 필요를 묘사했다.
159:5.17 In all his teaching Jesus unfailingly avoided distracting details. He shunned flowery language and avoided the mere poetic imagery of a play upon words. He habitually put large meanings into small expressions. For purposes of illustration Jesus reversed the current meanings of many terms, such as salt, leaven, fishing, and little children. He most effectively employed the antithesis, comparing the minute to the infinite and so on. His pictures were striking, such as, "The blind leading the blind." But the greatest strength to be found in his illustrative teaching was its naturalness. Jesus brought the philosophy of religion from heaven down to earth. He portrayed the elemental needs of the soul with a new insight and a new bestowal of affection.
6. 마가단으로 돌아오다 (The Return to Magadan)
159:6.1 데카폴리스에서 4주 동안의 임무는 적당히 성공적이었다. 수백 명의 혼들이 하늘나라로 받아들여졌고, 사도와 전도사들은 예수의 직접적인 성격적 존재에 대한 영감 없이도 그들의 일을 수행하는 값진 체험을 가졌다.
159:6.1 The mission of four weeks in the Decapolis was moderately successful. Hundreds of souls were received into the kingdom, and the apostles and evangelists had a valuable experience in carrying on their work without the inspiration of the immediate personal presence of Jesus.
159:6.2 9월 16일 금요일, 모든 수고자들은 사전에 마가단 공원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안식일에 1백 명이 넘는 신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거기서 하늘나라의 일을 확장하기 위하여 앞날의 계획이 충분히 고려되었다. 다윗의 전령들이 자리에 있었고, 유대ㆍ사마리아ㆍ갈릴리, 그리고 인접한 구역에 두루, 신자들의 복지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159:6.2 On Friday, September 16, the entire corps of workers assembled by prearrangement at Magadan Park. On the Sabbath day a council of more than one hundred believers was held at which the future plans for extending the work of the kingdom were fully considered. The messengers of David were present and made reports concerning the welfare of the believers throughout Judea, Samaria, Galilee, and adjoining districts.
159:6.3 이때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전령단이 얼마나 값진 수고를 했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전령들은 팔레스타인에 두루, 신자들이 서로, 그리고 예수와 사도들과 연락을 유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 어두운 시절에 또한 자금을 모으는 자로서 예수와 그 동료들을 부양까지 했으며, 또한 열두 사도와 열두 전도사의 가족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일했다.
159:6.3 Few of Jesus' followers at this time fully appreciated the great value of the services of the messenger corps. Not only did the messengers keep the believers throughout Palestine in touch with each other and with Jesus and the apostles, but during these dark days they also served as collectors of funds, not only for the sustenance of Jesus and his associates, but also for the support of the families of the twelve apostles and the twelve evangelists.
159:6.4 이 무렵에 아브너는 활동의 근거지를 헤브론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겼는데, 여기는 또한 유대 지방에서 다윗의 전령들의 본부였다. 다윗은 예루살렘과 벳세다 사이에서 교대로 밤 동안에 전령 봉사를 유지했다. 이 전령들은 저녁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시카와 스키토폴리스에서 교대하였고, 이튿날 아침 식사 때에 벳세다에 도착했다.
159:6.4 About this time Abner moved his base of operations from Hebron to Bethlehem, and this latter place was also the headquarters in Judea for David's messengers. David maintained an overnight relay messenger service between Jerusalem and Bethsaida. These runners left Jerusalem each evening, relaying at Sychar and Scythopolis, arriving in Bethsaida by breakfast time the next morning.
159:6.5 예수와 동료들은 이제 하늘나라를 위하여 수고하는 마지막 시기를 개시할 준비가 되기 전에, 한 주 동안 휴식을 취하려고 준비했다. 이것은 마지막 휴식이었는데, 페레아 사명이 전도하고 가르치는 운동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예루살렘에 그들이 도착하고 예수의 지상 삶을 마무리하는 사건들을 연출할 때까지 바로 이어졌다.
159:6.5 Jesus and his associates now prepared to take a week's rest before they made ready to start upon the last epoch of their labors in behalf of the kingdom. This was their last rest, for the Perean mission developed into a campaign of preaching and teaching which extended right on down to the time of their arrival at Jerusalem and of the enactment of the closing episodes of Jesus' earth car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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