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박 3일 남해[南海]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남해→통영→거제도, 이름만 들어도 한려수도의 푸른 바다,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미리 상세한 코스를 확인하고,
네비의 도움을 받아 가며 운행했는데도 두 번이나 되돌아나온 끝에 드디어 남해대교 앞에 도착했습니다.
너비 12m, 길이 660 m, 높이 80 m. 1973년 6월에 개통,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현수교이자 육지와 섬을 잇는 붉은 연륙교.
다리를 건너가기 전 아내는 김밥부터 샀는데,
다리를 건너가며 몇 점 먹어보더니 맛 있다고 차를 다시 돌려 김밥 몇 줄을 더 샀습니다.
타지에서 음식탓을 몹시 하는 아내의 '밥 걱정'이 해결됐으니 웬지 이번 여행이 순조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남해읍으로 가는 길목의 작은 언덕에 이충무공의 시신을 잠시 모셔 두었던 충렬사가 있고,
다리 아래 바다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거북선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이자 대첩의 역사, 순국[殉國]의 바다입니다.
" 나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 " , 충무공의 목소리와 북소리 둥둥, 관음포 푸른 바다에서 들려 옵니다.

남해에서는 마늘만 심는가, 파란 마늘밭이 잇달아 나타나는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
왼쪽으로 푸른 바다를 내려다 보며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남해읍에 도착,
시장에서 도다리와 멍게를 샀습니다.
칼로 꼭지를 자르면 바닷물 찍 솟구치는 싱싱한 멍게 한주머니에 만 원 싼 값에 사고,
세꼬시 먹을 때처럼 도다리 잘게 썰어 한 무더기에 만원, 그러나 양이 너무 많아 반만 샀습니다.
다랭이마을 가는 길 중간, 바다 경치가 수채화 같은 곳에 자리 잡고 도다리와 멍게회와 '바다'를 먹었습니다.
입맛 돋우는 멍게의 감칠맛이 새콤달짝한 초고추장과 섞여 입 안에 가득 넘치고,
바다의 모든 것에 '환장하는' 나를 보며 아내는 '미쳤다'고 웃습니다.
다랭이마을은 미리 사진도 보고 글도 읽고 경험을 쌓고 간 탓인지 크게 흥[興]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가파른 언덕을 계단처럼 깎아 논을 만들어 농사 짓는 사람들의 삶의 억척스러움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인 줄 아는 까닭에 참 친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노란 유채꽃과 푸른 바다가 밀려와 솟구치는 흰 파도, 어디서건 삶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해 질 무렵, 독일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언덕을 올라가며 지은 전통 독일식 주택으로 붉은 지붕 흰 벽의 이국적 풍치가 한껏 멋을 자아내지만,
60년대의 우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가슴 뭉클한 심정으로 이 집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가난이 죄'라서, 60년대 우리나라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서독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급여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서독에 온
그들은 아내와 자식을 위해, 배고픈 동생들의 '빵'을 먹이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바쳐 일했습니다.
그리고 64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의 탄광촌을 방문하자 ,
광부와 간호사들은 눈물 젖은 애국가를 부르며 가난한 조국의 대통령을 환영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느라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고, 육영수 여사도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들은 육 여사의 옷을 잡고 흐느꼈고 육 여사는 “조금만 참으세요”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눈물진 역사.
세월이 흘러 현장에서 은퇴한 그들은 노인이 되어 귀국,
이곳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3만여평의 부지에 남해군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짓고 여생을보내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 촬영지로 유명해졌지만,
밀려드는 관광객 탓으로 마을은 시끄러워졌고, 이제 엑스트라가 된 그들은 편안한 삶을 보내기 힘들어졌습니다.
아내도 관광객, '남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그 집 주인처럼 사진 한 장 멋지게 찍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



어제 1박을 한 <토굴찜질방>은 손님이 적어 조용했지만,
창문 가까운 곳에서 밤 깊도록 술판을 벌인 술꾼들의 떠드는 소리에 신경 예민한 아내가 잠을 설친 눈치입니다.
커피 한 잔 아침으로 삼고, 서둘러 금산 보리암으로 향했습니다.
길 오른쪽은 또 바닷가, 아무리 봐도 물리지 않는 바다를 보며 가다가 유채꽃 유명한 두모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언덕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는 온통 노란 유채꽃,
사람도 하나 없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유채밭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제는 유채꽃이 코스모스 정도로 어디 가나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이곳은 다랭이마을처럼 계단식 밭에 유채꽃을 심어 운치가 남 달리 뛰어납니다.


남해 관광의 중심지, 금산(해발 681m) 보리암을 찾았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차를 절 입구까지 댈 수 있었지만 그래도 보리암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
울창한 숲과 남해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보리암은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서해의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히고 있 기도처 중 한 곳이라서 벌써 탑돌이를 하고, 108배를 올리는 신자들로 법석였습니다.
관음보살상 위로 솟은 대장봉, 그 오른편에 화엄봉과 일월봉, 왼편에 삼불암이 늘어서 있고,
건너편에 거대한 상사바위가 보입니다. 아래에는 3층 석탑 , 발치에는 금산 제1의 명소 쌍홍문이 있습니다.
아들인가, 노모가 탄 휠체어를 밀고 이 높은 곳까지 온 효자도 보이고,
딸들이겠지, 양 옆에서 친정엄마를 부축하다시피 살피며 계단을 내려오는 효녀들도 보는 이의 미소를 자아냅니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옆에 있던 사진사가 친절하게 석탑과 관음보살과 삼불암이 다 나오는 지점을 가리켜줍니다.
절밥을 먹는 사람답게 불심[佛心]이 자못 깊어 보입니다. ^^^
보리암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의 삼촌이 되는 장유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람하며 다니다 금산이 빛나는 것을 보고 보광사를 지었다는 두 가지 설로 갈립니다.
저 아래 마을이 있는 큰 섬 옆으로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서 한 폭의 수채화로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인도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장유선사의 편이 되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