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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순서> : 3호분 → 4호분 → 2호분 → 회화나무 → 3호 토광묘 → 5호 즙석봉토분 → 1호 쌍분 → 내원외방형 → 2호 토광묘 |
1. 석촌동 제3호 돌무지무덤
< 장군총 >
< 장군총 복원도 >
3호분은 방형(또는 장방형)의 단축적석총(段築積石塚)이고, 3단까지 남아있는 각 단의 높이는 0.7∼0.8m, 폭 4∼4.2m이다. 남북 길이 43.7m, 동서 길이 55.5m, 그리고 높이가 약 4.5m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의 축조 과정은 상부 시설물을 만들기에 앞서 지반 위에 자갈을 고르게 깔아 수평을 이루게 하고 그 위에 할석(割石)을 폈다. 다시 할석 위에 한 벌 자갈을 깔고 또 할석을 펴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기단에는 넓은 장방형의 판석을 두 겹 쌓았고 그 바깥 주위에는 묘역 시설로 주구(周溝)를 팠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으로 만든 얇고 둥근 판을 가는 금줄로 꿰매어 단 금제영락형(金製瓔珞形) 장식품 1점과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 자기 항아리 목 부분(지름 14.4㎝, 두께 0.6∼0.8㎝), 곡옥(曲玉)을 만드는 도구인 옥연석, 그리고 흑도편(黑陶片)과 백제 초기의 회청색 연질토기편 등이 있다.
1986년 서울대학교 발굴 조사에 의하면 중국 동진시대의 사이호가 발굴되었다.
이 고분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기단식 적석총의 외형과 축조 방법이 흡사한 사실 등을 토대로, 고구려의 유이민이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한번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A.D. 3세기 중엽의 초대형급 적석총으로서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4)의 능(陵)일 가능성이 크다.
2. 석촌동 제4호 돌무지무덤
4호분은 3호분의 남쪽 약 80m 거리에 있으며, 정방형으로 잔 자갈을 깔아 묘역을 먼저 구성하고 있다.
제일 바깥선은 한 변 30m이고, 그 안으로 좁혀 들어가면서 3단의 피라미드 형태를 보여준다.고분의 정상부 중앙에는 4.7m의 정방형에 가까운 묘곽과, 남벽 중앙에 달린 연도(羨道)가 나 있었다.
곽내는 일단 위까지 채워진 점토층을 다시 파서 남쪽과 북쪽에 두 평행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는데 북쪽의 광(壙)은 부부합장용으로 마련해 두었다가 어떤 이유로 하여 매장을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
4호분에서 많은 연질토기편과 유사흑도편(類似黑陶片), 그리고 제3단에서 쓸려 내려온 청회색 연질의 백제 기와편이 다량으로 나왔으며, 무덤 주위에서 금으로 만든 가는 고리 형태의 귀고리 한 점도 발견되었다.
기단식 돌무지무덤의 전형적인 고구려식 적석총에 내부를 점토로 채워 넣는 봉토분(封土墳)의 요소가 가미되는
새로운 백제식 적석총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석촌동 제2호분
제2호분은 복원 정비하기 이전에는 길이 약 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봉우리 모양을 이루고 남아있었다. 봉우리 모양의 분구 바닥 주위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돌담장이 돌려있었으며 파괴된 분구 위에는 약 10∼30㎝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
복원 정비된 제2호분의 기단은 사방 16m 높이 90㎝, 단의 너비 2m이고, 전체 높이는 3.5m이다.
다져쌓기 한 부분의 아래에서 1기의 널[木棺]이 발견되었으며, 관 속에 단지[壺]· 쇠손칼[鐵製刀子]· 철검(鐵劍)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2호분 역시 4호분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식 적석총이 백제식 적석총으로 바뀐 묘제로 파악된다.
4. 회화나무
* 안내판 : 보호수 지정일자 1989.10.24. 수령 235년 키 12m 둘레 2.3m
수령 260년 가까운 회화나무가 이 곳을 지키는 신목인 듯 구부러진 가지를 하늘로 뻗으며 서 있다.
중국 주(周)나라 때는 궁궐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조정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삼공(三公)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겼다. 주나라 궁궐 예법을 따른 우리나라에서도 궁궐 입구에 회화나무를 심고,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현재 창덕궁 돈화문 앞 회화나무가 바로 그런 궁궐 예법에 따라 심은 나무다.
왕릉이 있는 이 곳에 3정승을 상징하는 회화나무를 심어 놓은 이치도 예법에 어울려 보인다.
5. 석촌동 제3호 토광묘(石村洞 第三號 土壙墓)
제3호 토광묘는 표토 밑 70㎝에서 드러났고 평면은 네 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장방형이며, 묘광의 크기는 길이 208㎝, 너비 58㎝, 깊이 26㎝이다. 장축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벽면은 수직이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목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형식의 토광묘는 이 지역에서 3기가 드러났다.
원래의 토광묘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원형 토광묘에 방수시설을 하고 그 바로 위 50㎝ 되는 곳에 원형 그대로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6.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
목관 3기와 옹관 1기가 한 봉토 안에 매장된 가락동(可樂洞) 2호분과 같은 구조로 보아 발굴하지 않았으며,
분구 위에 강돌을 지붕처럼 덮은 요소를 중시하여 묘제명을 즙석봉토분이라 붙였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들이 고구려식 돌무덤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움무덤 위에 강돌(川石)로 지붕을 덮는 복합묘제를 발생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무덤들은 그 크기로 보아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으며, 가족 관계로 추정되는 피장자들이 한 봉토에 묻히는 것은 정치권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서울지역에만 유독 집중되어 있어 이 지역의 정치․사회적 중심역할을 한 피장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가락동 2호분에서 출토된 흑색마연토기로 보아 축조 시기가 3세기 중엽으로 풍납동 토성 등의 거대 성곽축조 및 백제토기의 형성시점과 일치하고 있으므로, 백제가 국가로 성립된 것을 가리키는 표지적(標識的) 묘제로 보고 있다.
1927년에 조사된 서울 석촌동 6․7호분과 파괴분, 5호분, 3호분 동쪽지역의 즙석봉토분, 가락동 1호분 등이 있다.
7. 석촌동 제1호분
일찍이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의 담장 속에서 북쪽 부분이 파괴되어 상부 구조는 알 수 없지만,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의 형태로 확인되었다.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과,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남분 한가운데는 3.7m의 땅이 점토로 메워져 제단(祭壇)으로 추정된다. 먼저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북분은 점토를 채워 다지는 백제식 적석총으로 이 지역에 살던 선주민 부인의 묘로 추정되고, 남분은 고구려식 적석총으로 바닥은 깬돌과 자갈을 채웠고, 네 벽은 길이 20∼30㎝ 크기의 깬돌을 사용하여 계단식으로 축조한 왕릉급 고분이다.
남분 안에 놓여 있던 큰 석곽 1개는 동서 방향, 작은 석곽 3개는 북쪽 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 한 줄로 놓여 있어 가족묘로 추정된다. 작은 석곽바닥에서 은 귀이개와, 제단터에서는 풍납동식 경질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적석총과 평면모양이 같은 고분에는 고구려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려묘자촌 제15호분·평안북도 소암리 제45호분 등이 있다.
8.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 일본 나라현에 있는 상원하방형 고분 석무대 >
기단부는 파괴되어 흙이 덮였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서 원형을 파악할 수 없었다.
고분 기단부의 서남 모서리와 서·북쪽의 석축 기단 일부를 찾아내어 복원 정비한 결과 안쪽은 지름 11.4m의 원형을 이루고 바깥쪽은 길이 16m의 방형이 되어서 기단부의 모양을 내원외방형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다.
안쪽 원형 석축 바닥에서 적석 토광묘 2기와 석곽묘 3기가 들어 났는데 이러한 적석 토광묘와 석곽묘 위에 이 적석총이 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고분에는 상부가 평면ㆍ원형이고 하부가 평면ㆍ방형인 상원하방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본 평면의 모양이 이 적석총의 기단 평면 모양과 흡사하다.
원(圓은 하늘을 상징하고, 방(方)은 땅을 상징하는 천원사상(天圓思想)에서 유래된 고분일 가능성이 크다.
9. 석촌동 제2호 토광묘
이러한 구조 형식의 토광묘는 제3호분과 근접한 동쪽 지점에서 10여기가 드러났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토광묘는 적석총보다 앞선 시기의 묘제였음을 짐작케 한다. 원래 있던 곳에서 남쪽으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제2호 토광묘 모형을 만들어 두었다.
10. 출토 유물 정리
3호분 : 금으로 만든 얇고 둥근 판을 가는 금줄로 꿰매어 단 금달개 1점,
중국 육조시대 자기 항아리 목 부분(지름 14.4㎝), 곡옥(曲玉)을 만드는 도구인 옥연석,
흑도편(黑陶片), 백제 초기의 회청색 연질토기편 . 동진시대의 사이호
4호분 : 많은 연질토기편과 유사흑도편, 청회색 연질의 백제 기와편, 무덤 주위에서 금귀고리 1 점
2호분 : 목관 속에 단지, 쇠손칼, 철검 .
3호 토광묘 : 회청색 목짧은 단지 1개
즙석봉토분 : 나무로 만든 노, 금귀걸이
*가락동 2호분(즙석봉토분)에서 출토된 흑색마연토기는 3세기 중엽 백제 국가성립의 지표.
1호분(쌍분) : 은 귀이개, 풍납동식 경질토기 조각.
내원외방형 : 없음.
동쪽지구 : 대형 목관토광묘와 여자 인골(* 순장의 가능성), 화장 유구(부여의 장제). 붉은색 칠기.다수의 토기.
11. 껴묻거리에서 본 위세품
백제가 서울에 도읍한 한성백제(기원전 18~475년)시기, 중앙과 지방의 관계 및 영역의 범위를 논할 때 참고가 되는 자료중의 하나로 위세품(威勢品)이 있다. 매우 희귀한 물건을 특정인 혹은 특정집단이 독점해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높이려 할 때 사용하는 물품을 지칭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위세품으로는 4~5세기 대 중국물품인 ‘진식대금구(晋式帶金具)’로 불리는 허리띠 장식품과 초두(?斗) 등 청동제 용기, 동경, 도자기 등이 있으며, 대체로 5세기를 전후한 시기 백제 중앙에서 제작돼 지방에 하사한 물품으로 관모와 귀걸이, 금동신발, 용봉조각의 환두대도, 살포 등이 있다.
공주 수촌리고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제이식(귀걸이), 환두대도(둥근고리갖춤 큰칼), 중국제 흑유도기(검은색 유약을 바른 도기), 흑유계수호( 닭머리모양 주둥이가 있는 검은색 유약 주전자 도기)가 출토됐다.
위세품은 백제왕실에서 들여왔으며 백제중앙의 필요에 따라 위세품을 적절히 하사함으로써 지지세력의 이탈을 막고 그들을 매개로 거점지역을 지배하고자 했다.
공주지역의 수촌리 백제고분군은 백제고분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일 뿐 아니라 출토된 유물이 백제가 서기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여기서는 금동관(金銅冠)과 금동신발(金銅飾履), 금제이식(金製耳飾.귀걸이), 환두대도(環頭大刀. 둥근고리갖춤 큰칼), 중국제 흑유도기(黑釉陶器. 검은색 유약을 바른 도기), 흑유계수호(黑釉鷄首壺. 닭머리모양 주둥이를 갖추고 검은색 유약을 쓴 주전자 모양 도기)가 출토됐다.
* 이형구교수 : 1. 80년대초 3,4호분 밑 지하도 공사 주도( 519억원 ) 2. 올림픽대교 우회 도로로 풍납토성 보존. 3. 1997년 위례성 집터와 유물 발견 |
2. 웅진백제의 고분(475~538년)
웅진 시대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 세력이 위축되면서 64년간 천도했던 시기로 초기에는 지방 호족과의 다툼으로 혼란하였으나 곧 국내를 정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불교 중흥의 바탕을 이룩하는 한편 중국 양(梁)나라와 문물을 교류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웅진 시기의 송산리고분은 금강 남쪽지대에 자리한 해발 130m의 송산에서 해발 75m 정도 구릉의 남쪽에 위치한다. 서쪽으로 금강이 감싸고, 동쪽에는 공산성이 보인다.
고분의 연도와 현실의 방향이 멀리 바라보이는 남쪽 산과 직선을 이루게 축조한 점이 입지 선정의 특징이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쪽 능선에 1~4호분, 서쪽 능선에 5호분,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1~5호분은 굴식돌방무덤,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이라는 것이 차이지만 만드는 방식은 모두 동일하다.
웅진백제는 고구려 계통의 돌무덤이 급격히 소멸하면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한성시대에 이어 만들어졌고, 6세기초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벽돌무덤[塼築墳]이 새로운 묘제로 나타나는데 구릉에 위치한 입지조건으로 해서 현실에 배수구 시설을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입지조건이 다른 곳에 수혈식 석실분과 토광묘가 많이 나타났다.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일제시대부터 기루베 지온[輕部慈恩] 같은 일본인에 의해 조사 발굴되었으며, 대부분 유구를 확인할 당시 중요 유물이 이미 도굴되거나 반출되었기 때문에 보고된 유물의 출토 현황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금속 제품· 장신구류가 주를 이룬다.
송산리 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1997년 모형 전시관이 건립되어 전시되고 있다.
1호분 ~ 5호분
< 굴식 돌방무덤 >
1~5호분은 모두 자연 할석으로 축조한 횡혈식 석실분으로 연도는 현실의 동쪽 벽에 축조되어 있으며, 벽면은 백회를 발라 미장(美粧)하였다. 천장은 돔 형식의 궁륭상이며, 바닥은 냇자갈을 깔아서 관대로 이용하고 있는데, 5호분만은 벽돌로 관대를 만들었다.5호분은 남향으로 묘광을 만들고 그 안에 자연 할석으로 현실과 연도를 축조한 횡혈식 구조이다.
바닥에서 약 130㎝ 정도는 수직으로 쌓았고, 그 위부터는 약 25° 가량 안쪽으로 기울여 할석을 엇물림하며 맞조여 네 벽을 쌓아 궁륭상 천장을 이룬 후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덮었다. 현실 내에는 벽돌로 만든 관대가 남아 있다. 연도는 현실의 정면 동쪽에 편재되어 있으며, 현실의 입구에서부터 90㎝ 간격을 두고 벽돌을 종횡으로 하여 이중으로 쌓아 폐쇄하였다.
2. 6호분
무령왕릉과 함께 유일한 전축분인 6호분의 현실은 남북이 긴 직사각형 평면이며, 바닥에는 동벽쪽으로 치우친 곳에 벽돌로 쌓은 관대 하나가 설치되었다. 연도는 남벽의 가운데에 시설되어 있으며, 현실 입구에서 남쪽으로 길이 약 20m의 배수로가 시설되어 있다. 현실과 연도를 축조한 벽돌들은 각기 그 쓰인 위치에 알맞게 크기나 모양이 다양하게 만들어졌으며, 안쪽으로 드러나는 면에는 오수전오수전(五銖錢) 모양, 마름모꼴 등 여러 가지 선 무늬를 넣었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면에는 그림을 그릴 부분만 진흙을 바른 후, 그 위에 호분(胡粉)으로 벽화를 그렸으나 지금은 많이 박락되고 퇴색되었다. 벽화는 동벽에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에 주작과 좌우에 해와 달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연도부는 현실과는 달리 채색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
3.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일 송산리고분군 가운데 5·6호분에 대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하게 발견됐는데,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굴됐다. 무령왕릉은 연꽃무늬 벽돌로 쌓은 전축분으로 중국 양나라의 묘제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렇지만 횡혈식에 단실묘라는 점은 기본적으로 백제 석실분의 구조를 따르고 있어 문화의 융합을 볼 수 있다.
중국 양나라의 분묘양식인 벽돌무덤을 수용하여 백제적인 건축기법으로 조영한 사실에서 볼 때 백제는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재창조함으로써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였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고대사 연구의 기본자료인 '삼국사기'의 사실성을 증명해 주며, 고고미술자료의 편년에 기준을 제시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더욱이 백제의 장례문화를 비롯해 도가사상 등 동아시아 사회풍습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부각된다.
유물로는 지석을 비롯해 108종 4600여 점이 출토됐으며, 17점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금제관장식, 금동신발, 은제탁잔, 은제팔찌, 금제목걸이를 비롯하여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 무덤을 지키는 동물 진묘수(鎭墓獸) 등 다양한 유물은 백제의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미의식과 창의성, 수준 높은 공예기술을 보여준다.
중국산 도자기와 한나라 때의 동전인 오수전(五銖錢),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등은 당시 백제의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무령왕릉은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분구(墳丘)는 지름 약 20m의 원형이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무덤 꼭대기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여진 하나의 방으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모양이며 바닥면으로부터의 높이는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꽃모양 창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아치형 석실 내 등감(燈龕·등자리)에 등불을 켜놓고 밀봉함으로써 무덤 안을 무산소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장품들이 부식되는 것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4600여점의 유물이 부장된 왕릉을 단 이틀 만에 수습한 졸속 발굴은 발굴사의 수치스러운 기록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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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비백제의 고분 (538~660년)
사비 시대는 백제의 웅비(雄飛)의 시기이며, 부여는 123년 동안 수도였다.
성왕(523∼554)은 백제의 중흥의 왕으로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 양나라와의 교류을 통해 남조(南朝)의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다. 미륵사(彌勒寺), 왕흥사(王興寺)와 같은 대찰을 창건하여 "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흥하였다.
사적 14호로 지정된 부여 능산리고분군(陵山里 古墳群)은 고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7기의 고분은 맨 위 1기 중간 3기 아래쪽 3기가 남향 쪽으로 있다.
조선시대 공주의 옛 읍지에 따르면 부여현의 관아에서 동쪽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백제시대 왕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능뫼, 능산리라는 지명으로 왕릉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비백제 6명의 왕이 대개 이곳에 묻혔다고 추측되지만 일찌감치 도굴되었고 무령왕릉처럼 무덤의 주체를 알 수 있는 유물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1966년 추가로 고분 1기를 더 발견하였다. 1993년 고분군 서쪽에서 능사터가 발굴되었는데, 이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었다. 1995년에는 창왕 즉 위덕왕의 명복을 비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도 나와서 능산리 고분들이 왕실 무덤 지역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1~3호 무덤은 합장묘 방식이고, 5호분은 홑무덤인 단장묘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봉토분으로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이며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전축묘의 영향으로 중앙연도가 주를 이루고, 잘 다듬은 판석으로 벽을 축조하는 한편, 평면과 높이 등의 크기에서 규격화된 소위 능산리형석실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동하총인 1호분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앞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1호분에는 각 벽면에 현무, 주작, 백호, 청룡의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구름무늬와 연꽃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봉터의 지름은 27m 정도이며, 봉토 아래에는 할석을 2.3단 쌓은 호석이 봉토 연변을 따라 돌려져 있었다.
2호분(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분(서하총)· 4호분(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사비백제가 존속할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 금동투조식금구· 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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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사진 보고 갑니다. 본격적인 장마가 오려나봐요 건강 유의 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