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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는 하늘까지 닿겠네' 라는 동요가 있다. 어린시절 새신을 새로 사서 신는 날의 기분은 정말 하늘에 닿을 것같이 가볍고 신나는 일이었다. 낡은고무신이나 검은 운동화가 발바닥이 보일 정도로 다 떨어져야 그제사 아버지는 다음 장날에 새신을 사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5일마다 열리는 시장에 가야만 신을 살 수가 있었다. 그러면 손꼽아 다음 장날을 기다린다. 어린이는 장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신을 직접 신어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장에 가실 때 손뼘이나 지푸라기로 발을 재어서 눈대중으로 사신다. 새신을 기다리는 장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을앞산 언저리까지 장에 가신 아버지를 마중하러 들락날락한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김삼기 소장님 제보
고무신 하면 어른들은 많은 상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차표고무신, 말표고무신, 진양고무신…. 아마 이러한 상표들이 고무신 세대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고무신의 종류도 다양했다. 흰고무신, 검정고무신, 남자고무신, 여자고무신, 할아버지고무신 등 성과 나이 색깔에 따라 달리해서 고무신을 신었다.
고무신은 우리 어린 시절에는 훌륭한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요즘처럼 밀기만 하면 저절로 굴러가며 스스로 소리까지 내는 장난감 자동차는 아니었지만 고무신 한 컬레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장난감 자동차였다. 한짝 위에 다른 한짝을 약간 구부려 끼우면 자동차가 되었고, 한짝을 둥글게 말아 끼워서 다른 한짝 앞코에 끼우면 아주 훌륭한 짐차가 되었다. 개울가나 모래톱에서 고무신 한 컬레로 여러 가지 자동차의 모형을 두루 만들어 거기에 따른 자동차 소리도 음성으로 묘사해가며 하루종일 신나게 놀았다.
고무신 하면 하교길 뜀박질이 떠오른다. 시오리 학교길에서 돌아올 때면 으레껏 뛴다. 도시락이 든 덜거럭 거리는 책 보자기를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두 손에 고무신 잡고는 학교문에서 집까지 줄곧 뛰어서 온다. 고무신을 신고 뜀박질을 하면 양말을 신지 않던 그 시절에는 땀이 많이 나서 미끄러지기에 고무신을 아예 벗어 들었다.
고무신은 또한 선물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환갑 때가 되면 고무신이 중요한 부조감이었다. 빛바랜 할아버지의 회갑사진에 보면 수연상 앞에 차곡차곡 쌓인 고무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장사를 지낼 때 상여꾼들에게 주어지는 물품에도 보면 흰수건 흰양말과 함께 흰고무신이 있다. 상여꾼들은 새로운 흰양말과 흰고무신을 신고 머리에 흰수건을 쓰고 상여를 멘다. 지난 시절 선거 때만 되면 고무신은 살 필요가 없었다. 장에만 가면 한번에 선거입후보자들로부터 몇 컬레를 선물로 받기 때문에 그 해에는 고무신을 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옛날 선거를 '고무신 선거'라고 까지 했다.
고무신을 처음 사면 해야하는 일이있다. 고무신은 모양이 같고 단지 크기에만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잔치나 모임에 가면 신발이 바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고무신을 처음 사는 날은 소죽솥 앞에 앉아서 철사줄을 달구어 고무신 안쪽에 *나 +표 등으로 자기 신발에 새긴다. 잔칫집에 가면 우리 할머니들은 봉지에 자기 신발을 꼭 싸서 직접 관리를 하는 이유도 아마 신발의 외형이 똑같은 고무신에서 나온 풍속일 것이다.
해방 이후부터 애용되기 시작한 고무신은 검은 운동화세대를 걸쳐 오늘날의 유명 메이커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 우리 어린이들은 고급 운동화를 반도 덜 떨어졌는데도 새로 사달라고 조른다. 새신 하나 신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과 기대 속에서 마음에서부터 새신을 신었던 그 어린시절의 고무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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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
첫댓글 새 고무신이라도 명절 때 받고 좋아 했던 시절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가협제각 보수가 다 끝났습니다.
성수아제와 주옥동생 수고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