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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원(元). 명(明), 고려(高麗). 조선(朝鮮) 왕조의 교체(2)-홍무제의 독재체제, 정난의 변
임광자 추천 0 조회 163 08.05.15 23: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원(元)·명(明), 고려(高麗)·조선(朝鮮) 왕조의 교체 이길상

원(元)·명(明), 고려(高麗)·조선(朝鮮) 왕조의 교체           이 길상

나. 원(元)·명(明) 왕조(王朝)의 교체(交替)

(1) 명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 1368 ~ 1398)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낸 천단. 중국 베이징주원장(朱元璋/ 1328 ~ 1398)이 25세 때 곽자흥에게 의탁하여 홍건적이 되었다가(1352), 응천부(應天府)를수도(南京/난징)로, 연호(年號)를 홍무(洪武)로 정하고 명나라를 세운 것이 1368년(원지정 28년) 정월 초하루. 천지(天地)에 제사(祭祀) 지내고 황제의 즉위했는데 이때그의 나이 41세.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도적의 무리에 뛰어든지햇수로 17년만의 일 이였습니다. 원조(元朝) 타도의 깃발을 올렸던 같은 무리의 진우량을파양호( 陽/포양)에서 화공지계(火攻之計)로 격파하고(1365), 이듬해 오왕 장사성을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소주(蘇州/쑤조우)를 중심으로 완강하게 저항하여큰 곤욕(困辱)을 치르다가 결국 장사성은 잡혀서 죽음을 당하였고(1367), 주원장은이곳의 주민 20 여만 명을 남경(南京/난징)으로 이주케 하여 저항의 뿌리를 뽑아없애고 황제가 된 후에는 가혹하리만큼 무거운 세금을 매겨서 보복했습니다.

황제가 된 주원장은 오랜 동지였던 서달(徐達)을 대장군으로삼아 20 여만 명의 군대로 원나라 타도의 토벌(討伐) 군을 보냈는데, 서달은 산동(山東/산뚱)을거쳐 하남(河南/허난)을 석권하고 대도(大都/현재의 北京)에 육박하자, 원의 순제는황후, 비빈, 황태자를 이끌고 대도를 버리고 겨융관을 거쳐서 내몽고의 상도(上都)인개평(開平/카이핑)으로 망명하여 그 후 20 여 년 간 북원(北元)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이었으나, 이로써 사실상 몽고족이 세웠던 원나라는 멸망하였고, 대도를 무혈 입성한명나라는 개봉(開封/카이펑)에 항구적인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대운하를 보수하여정치중심인 화북지방을 연결하고, 다스리게 되었습니다(1368)

정복왕조인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운 주원장은 대의명분(大義名分)에따라 중화사상의 회복(回復)을 내세워 몽고 식의 변발과 복장 등 의관(衣冠)을 비롯하여몽고의 언어, 몽고 식의 이름 등을 폐지하고, 정치, 군사, 법률, 교육, 행정 등 모든면에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였고, 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채택하고 이를 간추린 칙어(勅語)를 발표하였으며, 과거제도를 부활하여 문운(文運)을진흥(振興)하였습니다.

(2) 홍무제의 독재군주권 확립

육유(六喩)라는 교육 칙어(勅語)는 여섯 개의 덕목을각각 네 글자씩, 전부 스물 네 글자를 만들어 초하루와 보름 등 한 달에 여섯 번씩 외우게 했는데, 그 내용은 ①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며(孝順父母), ② 윗사람을존경하고(恭敬長上), ③ 이웃간에 화목하며(和睦鄕里), ④ 자손을 잘 가르치고(敎訓子孫),⑤ 각자가 현재에 만족하며(各安生理), ⑥ 비위를 행하지 말라(無作非爲)는 것인데,이것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상식적인 유교적인 윤리 도덕으로, 누구도 반대할 이유도명분도 없는 것을 채택하여 시행하므로 써 황제 권을 높이고 백련교도 등의 발흥과반역을 차단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이런 바탕에서 전래(傳來)의 법률인 당률(唐律)을자신이 겪은 시련과 경험을 토대로 법가적인 통제와 엄벌주의(嚴罰主義)를 곁들여명의 성립과 함께 공포(1368)하고 그 후 세 차례(1374, 1389, 1397) 수정(修訂) 끝에홍무 30년(1397)정비하여, 최종 확정된 것이 일반 형법인 대명률(大明律)과 행정법전인대명령(大明令)이라는 것인데 누구보다도 밑바닥 인생을 경험했던 천자가 직,간접으로참여하여 만들었다는 이 율령(律令)은 관리와 백성을 빈틈없이 얽어 메고, 상하의관계를 엄격히 하여 하극상(下剋上)을 막아 황제의 절대권을 오래도록 유지하고자한 했던 것으로,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두둔하고 보호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철저히 배격하고 일소하는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대명률은 당률의 형벌체계가 태(笞 : 작은 회초리로허벅지나 볼기짝을 치는 것)·장(杖 : 큰 회초리로 허벅지나 볼기짝을 치는 것)·도(徒: 징역, 중노동)·유(流 : 귀양)·사(死)의 5형에서 자자(刺字: 이마 등에 죄인임을표시하는 먹물 문신을 넣는 것)가 추가되고, 사형(死刑)의 경우 교(絞 : 목을 졸라죽이는 것)와 참(斬 : 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의 두 가지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 사지를 찢어 죽이는 것)를 추가하는 등 엄격한 성격을 보이고 있으며, 법률의 적용에서도당률은 범죄 당시의 법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데 비해(법률 불소급의 원칙)대명률은 재판 당시의 법을 그 이전의 행위에 대해서까지 적용하는 소급처벌(소급입법)을 하였고, 또한 중국에서는 당률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실형주의를 전제로 하였으나대명률에서는 원(元)대의 배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살인상해죄의 경우 매장은(埋葬銀)을받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대명률이 조선에서도 대명률직해라는 이름으로 이두(吏讀)로해석되어 재판 등 다방면에 통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대명령은 국가 행정조직인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6부의 권한과 책임을 규정한 것으로 이를 6령(令)이라고도 합니다. 전부 145조로이루어진 이 6령에, 처음에는 형벌의 규정도 들어 있었으나, 1374년 명률(明律)을개정할 때 형벌 규정은 대명률에 넣어 일원화 시켰고, 행정 영(令)만 적용하여, 이후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런 일련의 홍무제의 조치는 그의 강력한중앙집권을 위한 절대군주권의 확립과 연관되는 것으로, 후대에 오면서 모순되는조항은 새 법전을 만들고 이를 우선시켰기 때문에 본래의 대명령의 효력은 많이 줄었다고합니다.

(3) 독재군주 실상과 호람(胡藍)의 옥(獄)

중국에서 주의 봉건제도가 가져온 폐단이 춘추전국시대를거치면서 나타났고, 이를 거울 삼아 진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제도를채택하여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였으나, 그후 한(漢)·당(唐)시대를 거쳐 오면서 다시황제 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이 각처에서 지방세력을 이루어 지방분권의 형태가 나타났는데,송(宋) 대에 이르러 과거가 제도화되면서 다시 황제 권이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황제독재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과거로 선발된 관료들이 황제의 손발이 되어 주었기때문에 가능했는데, 사대부(士大夫)라고 부르는 이들이 이후 중국에서 정신적 사상적지주(支柱)가 되어 어떤 세력도 이들과 타협 없이는 정권유지가 불가능했습니다.

명의 홍무제도 송의 황제독재 권을 본받아 이를 제도적으로확립하였는데, 위선 황제의 독재 권을 이루기 위해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고,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첫 단계로 측근들을 숙청하는 비인간적인 모습을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개 홍건적의 괴수로서 천하를 얻기까지 수족(手足)처럼부리고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옛 동료들이 나라를 세우면서 공신(功臣)들이 되었고,이들의 노고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황제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가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요. 무식하고 예절 모르는 이들이 싸움을 해서 세력을잡을 때 까지는 절대 필요한 존재가치가 있지만, 황제가 되어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이런 무뢰한 집단보다는 지식계급이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천하에 적이 없어진 지금,그의 새로운 적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이들 공신들이었고 이들에게는 강력한 사병들이버티고 있어서 황제로서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원장이 오국왕이 되어 독립정권을 세운 1364년부터홍건적(백련교도)의 사교(邪敎)적인 미신(迷信)이나 신조(信條)를 버리고, 오랑캐인원의 지배를 거부하고 절강(浙江:져쟝) 산골에 숨어 살던 명 대 제 1의 문장가 송염을비롯한 이들 사대부들을 끌어들여 유교적인 대의명분을 세움으로서 지식인, 관리,향신(鄕紳) 부로(父老) 층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것이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비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중국을 하나로 묶는 것은 그들의 문자, 즉한문이라고 하는데, 조칙(詔勅)이 발표되면 그 내용보다는 문장의 구성이 명문이면지지를 받고, 문장이 조잡하고 볼품이 없으면 외면을 당하는 것이 중국적인 특징이라고합니다.

주원장에게는 마 황후의 사이에서 난 세 아들을 비롯해서여러 비빈 들로부터 2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마 황후 소생의 맏아들 표(標)를 황태자로세우고 궁중에서의 경찰권을 주었고, 둘째를 진왕(秦王)으로 삼아 서안(西安/시안)을셋째를 진왕(晉王)으로 태원(太原/타이위안)을, 공비 소생의 체( )를 연왕(燕王/베이핑)으로삼는 등 아들들을  왕으로 삼아 변경과 지방 요소의 영지를 주고, 호위할 군사를양성할 수 있도록 하여, 황실의 울타리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홍무 11년(1378) 이들이 20대의 청년이 되어 임지에부임한 둘째와 셋째가 독자적인 군사를 이끌고 이듬해 수도(南京/난징)로 입성하였고,양자(養子)로 삼았던 목영(沐英)이 청해(靑海/칭하이)를 정벌하고 귀환하자 수도에는홍무제의 직계부대로 가득 채워졌고, 이런 군사력을 배경으로 홍건적 출신의 공신들을몰아 내는 1차적인 친위 쿠데타가 성공 리에 막을 내렸습니다(1380)

이때 좌승상 호유용을 위시해서 숙청 당한 사람이1만 5천 여명, 이를 "호유용의 대역사건"이라고 하는데, 호유용은 홍무제와동향출신으로 좌승상에 오래 있으면서 마음껏 세도를 부렸고, 북원과 왜구와 통하면서나쁜 도당을 만들어 역모(逆謀)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일망타진되었다고 명사(明史)에서는적고 있으나, 이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조작된사건임이 틀림없을 것 같으나 그 진실은 역사의 장막에 가려 그렇게 짐작 만할 뿐알 길이 없으나, 1393년에 일어난 "남옥의 옥"과 합쳐 후세에 와서 "호람의옥(胡藍의 獄)"이라 하여 그 일부남아 진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숙청하기 위해서 없는 죄를 되집어 씌웠다는 것이지요.

일차로 피의 숙청을 마친 홍무제는 정부개혁을 전격적으로단행하여, 원조(元朝)이래 최고의 행정관청이던 중서성(中書省/승상)을 폐지하고,그 밑에 두었던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부를 각각 독립시켜이를 황제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감찰은 도찰원(都察院)을거쳐 황제에 직결되도록 하는 등 3권을 분립시키고, 지방에서도 행정은 포정사사(布政使司),군사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감찰은 안찰사사(按察使司)에서 관장하게 하여 3권이동등한 권한으로 중앙에 직속되게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궁중제도도 간소하게 정비하여환관세력의 팽창을 억제하였으며, 이로써 송(宋)나라 이래의 황제 독재권은 더욱강화되고 율령(律令)·병제(兵制)도 모두 이러한 방향으로 개정하게 되었습니다.

명대의 청화백자홍무제의 개혁은 서민생활에까지미쳐, 전국의 토지를 엄격히 측량하여 새로운 토지대장(土地臺帳)을 만들었는데,대장에 그려진 토지의 구획 선이 물고기의 비늘 같다고 하여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는이름이 붙었고, 전국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호적부(戶籍簿)를 만들어 조세와요역을 부과하였는데 표지가 누런 색으로 되어 있어서 이를 부역황책(賦役黃冊)이라고불렀습니다. 1370에 작성하기 시작한 이런 조세와 부역의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1381년에는향촌 단위로 110호로 1리(里)를 편성하고, 그 중 부유한 10호를 이장호(里長戶),나머지 100호를 갑수호(甲首戶)로 해서 이를 10호씩 10갑(甲)으로 나누어, 영세해서부역이 면제되는 호는 여기에 부속시키는 이갑제(里甲制)라는 반관 반민의 촌락 행정조직을만들어 향촌까지 황제 권이 침투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때까지의 중서성(총리), 대도독부(군사령관),어사대(감사원, 경찰, 검찰)의 장관을 황제가 갖게 되므로써, 황제는 3권을 장악,홍무제의 대명제국은 황제와 그 일가의 사유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다시 폐단을 가져와 행정의 횡적 연결이 안되고, 종적(縱的)계통이되어 부서간의 협조가 잘 안되며, 그 많은 업무처리를 황제 혼자서 담당하는 것 자체가무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제의 처결을 바라고 올라오는 상주문(上奏文)이하루에 평균 400 여건, 혼자서 상의하고 결정하여 한 건을 처리하는데 소요시간을3분으로 계산해도 20 시간 정도가 되는데, 황제라고 해서 하루의 시간이 배로 늘어나는것도 아니고 보면, 밥먹고 잠자고 노는 시간을 어디에서 할애(割愛) 받아야 하고병이라도 나서 몸 저 자리에 눕게 되면 국사(國事)가 마비되는 현상이 올 수도 있겠지요.그래서 보완 책으로 황제의 사사로운 비서(秘書)를 두어 이를 대학사(大學士)라 부르고,이들이 표의(票擬)라는 결재원안을 쓴 쪽지를 문서에 붙여 황제의 재가(裁可)를 받았다고합니다. 이런 것이 홍무제 때 처음 생긴 일은 아니고 그보다 1600 여 년 앞서 진시황도황제가 모든 것을 처결했는데, 그때는 종이가 없었던 시대라서 목간(木簡)에 써서올린 많은 문서들을 읽고 결정하는데는 더욱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홍무제라는 정력적인 인간에게는 가능했다할지라도, 후대의 황제가 모두 홍무제가 될 수는 없었겠지요. 후대에 와서는 비서들이자금성내의 문연각을 중심으로 뭉쳐서 내각(內閣)을 조직하고, 공공연히 정치에 참여하면서옛 중서성의 기능을 맡게 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임시로 파견되었던 순무(巡撫/감찰관)나총독(總督/군사령관)이 상설화되면서 사실상의 지방장관 노릇을 하게 됩니다.

독재자들에게는 인간적으로 외롭고 의심이 많은 공통점이있다고 합니다. 특히 고아(孤兒)에다 추남의 용모로 홍건적에 투신하여 황제가 된홍무제에게는 늘 그를 괴롭히는 어두운 용모와 과거가 따라다니면서 자격지심을 일으켜성격이 더욱 비뚤어지게 되었고, 이런 광기(狂氣)가 문자에도 미쳐서 광(光)은 까까머리중대가리를, 생(生)은 승(僧)을, 칙(則)은 적(賊)자를 바꿔 놓은 글자라고 생각해서질색을 하였는데, 이를 모르고 글을 올린 학사나 관료들은 모조리 목이 달아났다고해서 이를 "문자(文字)의 화(禍)"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도(制度)라는 것이 한 번 만들어 시행되면, 처음만들 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방향에서 엉뚱하게 추진되기도 하는데, 아들들을왕으로 삼아 친위 군을 만들어 호유용의 일파를 제거한 1차적인 대 숙청을 감행하여독재 권을 확보하였으나, 아직도 홍건적 출신의 세력이 남아 있는 한 이들 친위 군은그들에게 언제 역습을 당할지 모르는 공포가 남게 되고,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겠지요.그래서 이들 친위군은 새로이 과거(科擧)를 통해서 들어온 관료들과 힘을 모아 이들을제거하는 일대 숙청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목표가 홍건적 출신의 공신들이었고, 이 때는홍무제의 뜻과는 관계없이 많은 공신들이 처형되거나 쫓겨났습니다. 심지어 황제가이들에게 고개 숙여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로  법에 어긋난다, 기강이 바로 안선다는등의 구실을 달아서 황제를 압박하는 대는 홍무제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이를 제 2차 숙청이라고 합니다.

황태자가 살아 있을 때는 그래도 공신(功臣)들을 보호하고,친위군의 지나친 행동을 막을 수 있었으나 홍무 25년(1392) 39세의 젊은 나이로 황태자가죽자 황태자의 어린 아들을 황태손(皇太孫)으로 세우고, 황제와 제왕(諸王), 관료들이부동(附同)하여, 큰 공을 세웠던 남옥(藍玉) 등 2만 여명을 처형하였는데, 이를 제3차 숙청이라고 이름을 달았습니다.

이래서 중화 회복의 명분을 걸고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세웠던 원훈(元勳) 장로(長老)와 홍건적 출신의 공신, 대관(大官), 소리(小利), 병졸(兵卒)에이르기까지 씨를 말려버렸습니다(1393). 이를 "남옥의 옥(獄)"이라 부르고,홍건적의 세력을 서리를 맞고, 백련교는 사회의 표면에서 자취를 감추고 다시 지하로잠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고, 그 끈질긴 생명력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혁명의 전주곡을 수 없이 연주하게되지요.

(4) 정난(靖難)의 변

입술이 없으면 잇몸이 시리듯이 호람의 옥으로 황태손을지지한 새로운 관료 파가 권력을 잡게 되자 황제는 이름뿐이고, 실상은 이들의 허수아비(괴뢰:傀儡)에불과 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둘째 아들(秦王)과 셋째 아들(晉王)이 홍무제에앞서 사망하자, 외롭고 쓸쓸한 독재자의 말로도 주검을 재촉하여 홍무 31년(1398)그야말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때 나이 71세, 역대 군왕으로서는장수(長壽)하였으나, 수 많은 사람들의 피를 보았던 그가 골육상잔의 비극을 보지않고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 이였는지도 모릅니다.

홍무제가 죽고 16세의 황태손 윤문(允?)이 2대 황제로즉위하고 연호를 건문(建文)이라 하여, 이를 건문제(建文帝/惠帝/1483 ~ 1402)라고부릅니다. 홍무제에게는 모두 2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변방이나 요지에영지를 주어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배치를 보면 동쪽은만주에서 서쪽은 감숙성(甘肅/깐슈)에 이르는 만리장성 안팎의 군사상 요지에는 12명의아들에게 분봉(分封)하여 조선, 여진, 몽고, 서역에 대비시켰고, 이들을 국경의 요새를지킨다 하여 새왕(塞王)이라 불렀으며, 호북(湖北/후베이), 호남(湖南/후난), 사천(四川/쓰촨),운남(雲南/윈난) 등 서남 지역을 여섯 아들에게 분봉(分封)하여 묘족과 티베트족을진무(鎭撫)케 하였으며, 도적의 소굴인 하남(河南/허난), 산동(山東/산뚱) 지방에다섯 아들을 배치시킴으로서 수도 응천부(난징)를 축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주씨 일가의명나라를 보호하는 방패 막으로 포석을 깔았습니다.

이것을 언뜻 보기에는 한 고조가 취했던 군국제도의재판(再版)같으나 내용 면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이들 제왕(諸王)들에게는 약간의호위군사만 거느릴 뿐, 중앙에서 파견한 군대의 지휘는 고사하고 주민을 동원하거나조세를 징수할 권리도 없었으며 살림을 살아가는 비용도 중앙에서 보내는 세록(歲祿/연봉)으로충당하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월급쟁이 왕이 였습니다. 유사시에 주둔한 군대를지휘할 수 있으나 이것도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했는데, 예외적으로 서안(西安/시안)의진왕(秦王)과 북평(北平/베이핑)의 연왕(燕王)은 방비상의 중요성 때문에 독자적인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연왕이 된 것은 홍무제와 공비사이에 태어난 제 4황자체로서 그의 동복(同腹) 동생은 주왕(周王)으로 봉해졌는데 이들을 낳은 공비가 조선에서건너간 공녀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요. 연왕 체는 21세에 북평(北平/베이핑)에부임하여 31세때는 장성을 넘어 몽고를 원정하여 공을 세우고 홍무제로부터 칭찬을받았고, 황태자가 죽고는 태자가 될 번도 하였으나, 연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건문제가 즉위하자 이들 억센 삼촌 제왕들이 그에게 많은 부담이 되었겠지요. 그래서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연왕 체의 동복 동생인 주왕이 작위를 박탈당하여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운남으로 귀양 갔으며, 상왕은 자살하고, 민왕, 제왕, 대왕등도 연이어 폐위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 진짜 제거의 대상은 연왕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연왕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대비한 준비도 철저히 해 두어야 하겠지요. 이래서 연왕은 철저한 준비를 해 두었다고합니다.

1399년 건문제는 북평(北平/베이펑) 포정사 장병에게연왕부의 책임자를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이에 이르러 연왕 체는 다음 목표가자기라는 것을 눈치 체고 선수를 쳐서 군대를 동원, 정난(靖難)의 사(師)를 일으켰는데,정난(靖難)이란 근심을 없앤다는 것이고, 사(師)란 군대라는 뜻입니다. 황제를 어지럽게하는 간신들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출동했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당시 건문제를도와서 정사를 맡고 있었던 것은 태자 때부터 스승이었던 황사징과 병부상서 제태등으로 당대의 문장가인 방효유가 등장했을 때는 이미 사태가 진정될 수 없는 지경에이르고 있었습니다.

건문제는 50만 군대를 보내어 이를 토벌케 했으나패하고, 승세를 탄 연왕 군이 산동과 하북지방을 휩쓸자 이에 당황한 건문제가 황사징과체태를 파면하고 철병을 요구, 그러나 연왕은 오히려 정부군의 철병을 요구하는 등, 이렇게서로 철병을 요구하면서 대치하기를 3년, 다시 대세가 정부군으로 기울자, 연왕은황실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환관과 내통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고, 속전속결로 나가기로결심하고, 건문 3년(1401) 12월, 불시에 전선을 돌파하여 황하를 건너 곧 바로 응천부(난징)에육박하자, 건문제는 방효유의 건의를 받아 국토의 할양을 조건으로 강화를 제시했으나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성난 연왕 군은 건문 4년 (1402) 6월 단숨에 양자강을건너 궁성을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불을 질러서 궁전 누각이 모두 불길에 휩싸였고,이래서 연왕의 승리로 최후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제인 건문제가 보이질 않자 궁궐의 잿더미속에서 불탄 시체 하나를 찾아 장사(葬事)지내고 죽었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러나이것이 후일 많은 야담, 설화 등을 만들어 궁궐이 불탈 때 지하비밀 통로를 따라탈출한 건문제는 중이되었다는 등의 소문이 꼬리를 잇게 되었습니다. 응천부를 함락한연왕 체는 황제로 즉위하고 그 이듬해(1403)에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고치고, 수도를자기의 본거지 북평으로 옮기고 이를 북경(北京/베이징)이라 했고(1419), 응천부를남경(南京/난징)으로 고쳐(1419) 태자를 머물게 하면서 남방 경락의 요충지로 삼았습니다.이를 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靖難의 變(혹은 役)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우리들을 숙연하게 하는 것은 당대제1의 학자 방효유의 기개 높은 선비정신인데, 영락 제가 난징에서 즉위하고 그에게즉위의 조서(詔書) 작성을 의뢰했으나 그는 오히려 "연적 찬위(燕賊簒位:연나라의 도적이 황제자리를 빼앗았다)"라고 네 자를 써서 영락제를 꾸짖자 영락제는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그를 달랬으나 결국 실패하였는데, 그를 달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그의 처자식을 죽이고, 그리고 동생, 아버지의 일족, 어머니의 일족 등을 차례로죽이면서 협박하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그 역시 사지가 찟기는 죽음을 당하였다고하는데 그가 살다간 세상은 고작 47년, 고집(?)하나만 꺾고 몇 글자만 써주었으면반대로 자손 누대로 영화를 보장받을 수도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여 그 화가 친가와처가, 외가 등 10족에까지 미쳐, 일가 친척과 제자 등 873명이 처형되고, 이에 연좌(連坐)되어먼 지방에 유배당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런 가혹한 형벌은그때까지 한번도 없었다고 하며, 이것이 빌미가 되어 건문제에게 절개를 지킨 3천여명도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이것을 어떻게평가해야 될지, 그 정답을 찾기가 무척 어렵지요.

(5) 새로운 수도 북경(北京/베이징)

자금성. 중국 베이징태조 홍무제가 주씨 일가의안전을 위해 수많은 피의 숙청을 단행하여 황실을 반석 위에 올린 듯 하였으나, 그가죽고 삼년 거상도 치르기 전에 조카와 삼촌간의 일대 혈전이 전개되었고, 드디어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祭物)로 황제가 된 영락제는 비록 찬탈이라는 도덕적인비난은 받았으나, 수성(守成)의 군주로서 왕업의 기초를 다지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그가 1 차적으로 착수한 것이 수도를 북경(北京 :베이징)으로 옮기는 것이었는데,이곳이 과거 금(金)과 원(元)의 수도였고, 그의 세력 기반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침입을막을 수 있는 요충지로서, 남경(南京/난징)에는 아직도 인심이 그를 따르지 않는등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즉위 후 영락제는 이곳에 행재소(行在所 : 임시로머무는 곳)를 설치하고, 대운하를 개수(改修)하여 남쪽과의 수송로를 트고, 자금성(紫禁城)을짓기 시작하였습니다(1407) 영락 7년(1409)부터는 행재소에 머물면서, 여기에서 정사를처결하다가 정식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영락 19년(1421), 이때부터 북경(北京)과남경(南京)이라는 명칭을 붙여 사용하였다는 것도 앞서 이야기했지요. 홍무제가 국수적,중국적인 폐쇄주의를 고집하여 이른바 해금(海禁)정책을 썼으나, 일찍 외국인들과자주 접촉했던 영락제는 대외정책과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중화사상의폭을 훨씬 넓히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락제(永樂帝 : 1402∼24)의 치정에서 가장 현저한것은 주변지역에의 대규모 정벌과, 그것에 의한 명나라 국경의 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즉, 동북지방에서는 흑룡강(헤이룽강/黑龍江) 하류에 누르간도사(노아간도사 : 奴兒干道司)를,장백산(창바이산 : 長白山, 백두산) 북쪽에 건주위(建州衛)를 두어 여진부족을 통할하고,타타르 해협에서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땅을 지배하였습니다. 하얼빈 일대에서 반목,반수렵으로 생활하던 건주위 여진족이 남으로 내려와 고려후기에는 백두산 동북 쪽,간도지방에 자리잡았는데, 이곳을 지린(吉林:길림/국경)이라 부른 것은 고려와의국경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몽골은 원(元)나라가 멸망한 뒤 분열상태에 있었으나영락 초년 동부에 타타르, 서북부에 오이라트가 일어나 북변에서 명나라에 압력을가하자, 영락제는 1410년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 원정하였고 이후 1424년 진중에서병사할 때까지 5차례의 친정(親征)으로 그 위협을 막았는데, 이를 중국에서는 3리5출 이라 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3 리(犁)란 몽고 고원에서 적의본거지를 세 번 부셔버렸다는 것이고, 5 출(出)이란 다섯 번이나 고비사막을 넘어몽고에 쳐들어갔다는 것으로, 언제나 이들에게 당하기만 하던 중국이 이들을 쳐 부셨다는것은 분명히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지요.

서남지역에서도 티베트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소수민족을눌러 귀주 포정사사(貴州布政使司)를 두었으며, 1406년에는 안남(安南:베트남)에원정하여 교지 포정사사(교(交趾布政使司)를 두고 직할지배하에 넣고, 환관 정화를단장으로 또 남해지역에 6회에 걸친 대원정군을 보내어 멀리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세력을 확장하여 명나라의 위세를 떨쳤으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를 일본국왕에봉하여 왜구를 누르고, 감합무역(勘合貿易 : 조공형태의 허가무역)의 길을 연 것도이 시기 였습니다.

내정 면에서 영락제의 관심은 지식인들은 회유하는것으로서, 과거를 통해서 선발된 새로운 관료 군을, 조칙(詔勅)의 입안과 시강(侍講),사서의 편찬을 맡아보는 한림원을 세우고 여기에 배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정책에힘을 기울여 2만여 권에 이르는 백과사전 격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을 편찬하였고,이외에도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주자학 해석을 통일한 일종의 국정교과서를 편찬하여, 유교적인 사상 통일을 이룩하였고, 과거 응시자들에게 학습의 지침을 제공하였습니다.

영락대전은 영락 3년(1405)에 시작하여 8년에 걸쳐완성한 중국 초유의 방대한 저서로서, 처음 한 질(帙)만 만들었으나, 그후 가정 41년(1562)부본(副本) 한 질을 다시 작성, 보관하다가 정본은 명나라 말기 병란에 휩싸여 불탔으나부본은 청나라에 인계되어 보관되어 오다가 1860년 영, 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면서비로 진창이 된 길에 이 두꺼운 책을 깔고 대포를 운반해서 산질 되여 현재는 그일부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기에 환관이 다시 정치에 대두하기 시작하여,이후 명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선례를 남겼습니다.

(6) 북원(北元)의 그 후

주원장이 황제에 즉위하고 명나라를 세운 후 서달(徐達)을대장군으로 삼아 원의 본거지인 대도(大都/베이펑)를 공격하자 원의 순제는 대도를버리고 내몽고의 상도로 도주, 다시 명나라 군대가 이곳까지 뒤쫓아오자 다시 응창성으로피했다가 이듬해(1369) 그곳에서 병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원조(元朝)가 아주 망한것은 아니고 그의 태자가 뒤를 이었고, 그가 죽고 나서는 다시 그의 동생이 뒤를이어 이후 20 여년간 명맥을 더 유지하는데 이 북쪽 땅 몽고에 세워진 원을 편의상북원(北元)이라고 부릅니다.

응창성에서 순제가 죽은 후 고려 출신 기 황후의 아들이즉위하여 연호를 선광(宣光)이라 하였는데 이가 소종(昭宗/1370 ~ 1378)으로서, 그는 오고타이칸의수도였던 카라코럼(Karakorum)에 본거지를 두고, 몽고를 확보하는 한편 고려와 기맥(奇脈)을통하고, 서쪽으로는 티베트를 넘어 운남(雲南/윈난)까지 세력을 뻗치면서 중원 탈환의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명의 홍무제로서도 이 삭막한 사막 땅에서 전투를 치르는데많은 곤욕을 치러야 했고, 번 번히 패하는 창피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소종이 죽고, 그 아우가 황제가 되자 홍무20년(1387) 만주를 침입한 명나라 군대는 이곳을 지키던 나하추로부터 항복을 받고,그 여세를 몰아 만주의 서북부 외몽고와의 국경지대인 하르하 강변의 노믄한(Nomonhan)근처에서 북원의 주력 부대와 대면, 8만 여명을 사로잡아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는데,이 때 황제는 용하게 몸을 피했으나 눈보라 치는 톨라강변에서 다른 몽고족에게 습격당하여 피살되므로 서 원(元)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1388)이후 몽고족은 타타르(Tatar/달단/??)라 부르고 그 황제라는 칭호도 전래의 습관대로칸이라 하였습니다.

원의 잔존(殘存)세력이 세운 이 북원(北元)이 고려에미친 영향은 의외로 커, 고려 조정에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북원과 명나라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로 왔다 갔다 하다가, 명이 만주를 점령하고 이 지역의 중요성을인식, 동녕부의 반환과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통고하자(1388) 고려조정에서는 다시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요동정벌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물거품이됨과 동시에 고려의 운명도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원·명,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3)-편에서 중국에서 홍무제가 군주독재권을 확립할 시기 고려에서 있었던, 이른바 친원파와친명파의 대립, 왜구의 침입과 이성계 세력의 성장, 신돈의 개혁과 그 실패. 사대부와과전법 실시, 조선왕조 창업, 왕자의 난, 종계변무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가겠습니다.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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