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글: 아!, 자랑스럽다
/ 조성내
벌써 12월이 되었다. 일년 열두 달 중에서 나는 12월을 제일 싫어한다. 12월은 이 해의 마지막 달이다. 이 해를 또 보내야 하는 서글픔과 덧없음을 느낀다. 그 만큼 내가 늙었다. 허지만, 금년의 12월은 나로서는 아주 보람찬 달이다.
내가 <미주현대불교> 월간지에 글을 쓰기 시작한지, 이 달로서, 꼭 10년이 되었다. 10년 전에 글을 일년간 쓰고 난 후, 그러니까 9년 전 어느 연말 파티에서, 어느 여인이 나더러 앞으로 글을 얼마간 더 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10년을 더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10년을 요?” 하고 10년이란 말을 반복한다. 반복하는 말투가, 의심스럽다는 쪼다. 그녀는 내가 허풍을 떠는 걸로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예, 10년을 더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다시 말해주었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10년 동안 무엇에 대해 글을 써야 할까 하고 걱정을 많이 했었지만.
그녀에게 10년을 더 글을 쓰겠다고 말을 한 후, 적어도 10년은 더 쓰기로 혼자서 다짐했다. 허지만, 10년 동안 글을 써야할 자료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책을 많이 읽기로 작정했다. 일주일에 책 한 권 정도 혹은 한 달에 적어도 두 권 정도의 책을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불교잡지에 글을 쓰기 때문에, 불교실력을 늘이기 위해서, 불교책을 많이 구입해서 읽었다. 동시에 사색(思索)도 많이 했다.
편지도 쓸 줄 몰랐었다:
지난 10년간 글을 썼다는 대해 나는 상당히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다. 왜 대견하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67년도, 그러니까 나의 나이 30에 미국에 왔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나는 글을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글을 쓰고는 싶어했었지만, 글을 어떻게 쓸 줄을 몰랐었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었고, 그리고 개인 교습이나 지도를 받아본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고등학교 3년 생이 였었을 때, 선배 두 세분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학교를 다녔었다. 어머니가 선배들한테 편지를 쓰라고 했다. 편지에 쓸 말이 없었기에 편지를 쓰지 않았다. 헌데, 어머니가 편지를 하라고 재촉하셨다. 할 수 없이 몇 자 적어 보낸 적이 있었다. 이게 내가 처음으로 편지를 쓴 것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여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쓴 것 같다.
형님들, 안녕하십니까.
어머니한테 형님한테 편지 안 쓴다고 지천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편지 씁니다. 저는 잘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서 지천이란 말은 꾸지람을 들었다는 말이다. 선배들이 여름 방학 때 내려왔다. 나한테 하는 말이, “야 임마, 너는 그렇게도 편지 쓸 줄도 모르니, 네 편지 받아보고, 많이도 웃었다.” 선배들의 말을 듣고서 어찌나 창피한지, 지금도 얼굴이 후끈할 정도로 기억이 난다.
일기 쓰기 시작:
대학교 때, <글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책자를 두 세 권을 사서 읽어보았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책자를 읽는다고 해서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니었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책에, 다독(多讀), 다습(多習), 다색(多索)이라고 했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이 글을 써보고, 그리고 많이 생각하라고 했다. 글쓰는 연습으로서 제일 좋은 방법은 일기쓰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교를 다닐 적에, 일기를 이 삼 년간 쓴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일기를 어떻게 쓸 줄을 몰랐다. 일기란 그날 한 일을, 그날 생긴 일을, 그날 일어난 일들을 적는 것으로 오해를 했었다. 그래서 하루 하루 생긴 일을 일기장에 적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그리고 낮에 학교에 다녀와서 친구들하고 놀다가 밤에 잠을 잤다 하고 쓰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똑 같은 말만 되풀이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기쓰는 것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일기 쓰는 것을 그만 두었다.
헌데, 어느 날 갑자기, 일기 쓰는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 일기란, 그날 일어난 일만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을, 나의 감정을, 글로 적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그후, 일기장에다가, 나의 감정을 쓰기 시작했고, 그리고 나의 생각을 적기 시작했다. 옆집에 처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고은 목소리로, 크게, 매일 노래를 불렀다. 매일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나니, 그녀에게 은근히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나의 정을 일기장에 적었다. 한 동네에서 몇 년간 같이 살면서도 그녀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한 채 나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또는 어머니한테 용돈 달래서 돈을 안 주면 화가 났다. 어머니가 미웠다. 어머니가 나쁘다고, 어머니에 대해 욕을 많이도 썼다. 어머니가 돈을 안 주니까 나는 어머니한테 매일 돈을 달랬다. 하루는 누나가, 나더러, 너는 왜 어머니한테 매일 돈을 달라고 졸라대느냐고 핀잔을 준다. 매일 돈을 달래도 안 주니까 매일 달랄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내가 매일 용돈을 타다 쓰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돈복이 없다고:
어느 날은 어머니가 말하는데, 나한테 돈을 주기 위해서 돈을 모아놓으면, 누나가 와서 그 돈을 가져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나더러, “너는 복이 없어야” 하고 말한다. 복이 없으니까 용돈을 안 줘도,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고 나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어느 친구는 나의 아내를 보더니만, 아내가 복이 있게 생겼다면서, 내가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지 않고 사는 이유는, 아마 아내의 복 때문일 것이라고 말해준다. 아내가 복이 있어서 내가 잘 사는 것인지, 혹은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아내한테 잘 갖다 주니까 아내가 복이 있게 보이는 것인지 잘은 모르지만,
여름방학이면, 내 친구들은 해수욕장이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산에 가서 며칠간 등산을 하고 왔었다. 헌데 나는 돈이 없기에, 어디론가 놀러 가지를 못했다. 할 수 없이, 점심을 싸들고, 대학 도서관에 가서 온 종일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은 것이 지금에 와서 글을 쓰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새옹지마의 감이 든다.
새옹지마:
새옹지마 (塞翁之馬)의 새는 변두리, 옹은 늙은이, 그래서, 새옹지마는 변두리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다. 어느 날 말(馬)이 어디론가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안 되었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며칠 후에, 사라져버린 말이 다른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이 말 한 마리가 더 생겼으니 좋겠다고 축하해주었다. 어느 날,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부러트렸다. 동네 사람들이 또 찾아와서, “안 됐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얼마 못 가서 옆 나라하고 전쟁이 터졌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와서, 아들이 다리가 부려졌기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아서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이처럼 동네 사람들이 와서 위로나 축하를 해 줄 때마다 노인은 항상, “인간사(人間事)란 어찌될지 모르니까 두고봅시다” 라고만 대답을 했었다.
쉽게 말하면, 새옹지마란, 행(幸)이 불행(不幸)이 되고, 그런가 하면, 불행이 행이 되고, 행과 불행이 서로 돌고 돌면서 오고 간다는 말이다. 학교 시절 때, 내가 돈이 없어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지 못한 것이 한(恨이)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한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됐다.
미국에 와서, 영어 때문에 고생을 많이도 했다. 이 지면을 통해서 수 십 번 나는 영어타령을 했었다. 아마 어떤 독자들은 나의 영어타령을 더 이상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 미국에 왔었을 때, 환자하고 상담(相談)을 한 후, 영어로 상담 내용을 적어야만 했다. 헌데 영어 실력이 없었기에, 상담을 적을 때마다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고통을 당할 때는, 나는 가끔 하늘을 쳐다보고 원망을 하던가 혹은 땅을 내려다보고 운다. 그러면서, 만약 한글로 상담을 적는다면 얼마나 쉬울까 하는 아쉬움에, 어느 날은 한글로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써보았다. 그랬더니 글이 써졌다. 아내가 내 글을 읽어보더니만, 잘 써진 글이라고 칭찬을 해주면서 신문 독자란에 투고해보라고 했다. 나의 첫 번째 글이 1974년, 그러니까 나의 나이 37세 때, 신문독자란에 처음으로 실렸다. 그 후부터 살곰살곰 글을 써서 신문에 발표를 했었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강의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문장법에 대해 개인지도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쉽게 말하면, 나는 글쓰는 법에 대해 무식이었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마치 독자가 나의 말 상대자인 것처럼, 대화식으로 글을 썼다. 신통하게도 친구들이 나의 글을 읽어보고는 나의 글은 읽기가 쉽고 그리고 나의 글을 읽어보면, 뭔가 머리에 남는 것이 있어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지금도 친구들이 칭찬해 주는 힘으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영어가 서투른 정신과 의사다. 미국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가 서투른 만큼 반비례로,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했었고, 그리고 더 많은 일을 열심히 해야만 했었다. 1998년에는 Lifeline Center for Child Development의 의료과장으로 취직했다. 임상회의를 매주 주관하고 있다. 임상회의 때마다, 처음 15분 정도 정신과질환에 대해 강의를 해준다. 매주 강의를 준비를 하는 데 많은 신경이 쓰인다.
강의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잡지며 정신과신문을 많이 읽어야만 한다. 강의 준비가 끝나고 난 후, <미주현대불교>지에 글을 쓰기 위해서, 정신과 이외의 책을 또한 많이 읽어야만 했다. 다음에는 무슨 글을 <미주현대불교>지에 실릴까 하고 항상 고민을 해야만 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아이디어를 컴퓨터에 적는다. 적어놓은 글을 다시 읽어보고, 수정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보탤 것은 더 보탠다. 글이 완성되면 아내한테 읽어보라고 부탁한다. 아내가 읽어보고 좋다고 하면 발표한다. 아내도 간호사로서 일한다. 어떤 때는 짜증이 나는가 보다. 읽기 싫다고 불평을 토한다. 아내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내 글을 읽어봐 달라고 아내한테 다시 부탁한다.
다음 달에 무슨 글을 써야 하나 걱정:
다음 달에는 무슨 글을 쓰지 하고 걱정을 하면, 아내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여보, 당신이 걱정을 하면 내 마음이 괴로워요. 제발 걱정을 하려면 혼자서 해요” 한다. 걱정을 해야만 다음 달에 쓸 글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아이디어가 나와야만 글을 쓸 수가 있지, 아이디어가 없으면 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찾아야만 한다. 어떤 때는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아이디어가 나올 때도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지난 10년간 <미주현대불교>지에 글을 써온 것이다. 10년간 글을 써온 것에 대해서 나는 아주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봐도 정말 대견스럽다. 나는 전문적인 문필가는 결코 아니다. 나는 정신과의사로서 활동하면서, 시간을 내서 글을 써온 것이다. 그것도 10년 동안 달달(月月)이,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글을 써온 것이다.
지난 10년간 글을 썼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어떤 친구는 “그랬어!?” 하고 아주 짤막하게 대꾸해준다. 반응이 아주 싱겁다. 어떤 다른 친구들은, 내가 10년간 글을 썼다고 하면,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나의 얼굴만 쳐다본다. 마치,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하는 식이다. “별거 아닌 것 가지고 괜히 까불어대네” 하는 식이다. “더 이상 까불어대지 말라”는 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요사이는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게 더 이상 말을 끄집어 내지 않는다. 그저 혼자만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4개월간 중단:
아까 “지난 10년간 꼬박꼬박 달달이,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글을 써왔다”고 했는데, 2002년 9월 호부터 12월 호까지 4개월간 내 글이 실리지가 않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2001년 11월 호부터 2002년 5월 호까지, 9개월 동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영혼은 없다”와 그리고, “자력신앙”에 대해서 썼었다.
내가 부처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숭배하고, 예배하는 이유는 “부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지 결코 신이나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가 신 혹은 하느님이라면, 차라리 기독교의 하느님을 믿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허지만,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설”을 믿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나 하느님이 이 우주를 만들었고 그리고 만들었기에 어느 땐가는 종말이 있다고 부르짖고 있다. 허지만, 불교에서는, 이 우주는 무시무종 (無始無終)이라고, 시작도 없는 먼 옛날부터 이 우주는 존재해 왔었고, 그리고 이 우주는 종말이 없이, 인연따라, 무한하게 계속해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무시무종의 우주관을 믿는다.
부처는 자력신앙을 부르짖었다. 자력신앙이란, 내가 직접 5계를 지키고 그리고 10선을 행해야만 죽어서 천상의 하늘 나라에 갈 수가 있는 것이지, 내가 못된 짓을 다 저질러놓고, 그리고 죽기 전에, 부처님이나 혹은 하느님께 빈다고 해서 극락이나 천당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내가 못된 짓을 다 저질러놓고, 그리고 내 자식들한테, 내가 죽거든, 하느님에게 기도해서 혹은 천도재를 베풀어서 나를 천당이나 극락으로 가게끔 해달라고 부탁해서, 자식들이 나를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천도재를 베푼다고 해서, 내가 극락에 가게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당이나 극락에 가고 싶으면 내가 직접 10선을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자력신앙인 것이다.
영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죽으면 ‘나’라고 하는 주체의식을 가진 영혼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데, 우리가 죽으면 ‘나’라고 하는 주체의식을 가진 영혼은 없다는 글을 썼었다. ‘나’라고 하는 주체의식을 가진 영혼이 없다는 말은, 가령 박정희씨가 죽었는데, 박정희씨라는 주체의식을 가진, 그리고 박정희씨가 살아있었을 때의 생김새를 가진 박정희 영혼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약 누가 박정희씨의 영혼을 보았거나 혹은 박정희씨의 영혼하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이거나 혹은 정신질환의 일종인 환상 환청에 불과한 것이다. 결코 박정희씨의 주체의식과 박정희씨의 생김새를 가진 그런 영혼은 없는 것이다. 그런 영혼이 없기에,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혹은 천도재를 베푼다고 해서 있지도 않는 박정희씨의 영혼이 천도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죽은 후 저승에서 박정희씨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허지만, 죽어서 천당에 가보면 박정희씨는 없다. 왜 없나구요? 당신이 태아였었을 때의 당신하고 지금의 당신이 다르듯이, 지구상의 박정희씨하고 그리고 죽은 후 저승에서의 박정희씨는, 서로 연속되어있다고 하지만, 서로 다른 박정희씨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모든 것은 다 무상(無常)이고, 무상이기에 무아(無我)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의 글을 일부의 스님들이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미주현대불교>의 편집실에서 앞으로는 이런 종류의 글을 써주지 말아달라고 부탁이 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영혼이 없다”라는 것하고 그리고 “타력신앙을 비난하고 자력신앙을 강조하는 글”을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됐다.
그 대신, 2001년 여름에 태국을 방문했었기에, 태국방문기를 2002년 8월호에 실렸다. 9월 호에, “태국수녀와 한국의 비구니”라는 글을 <미주현대불교>사에 보냈다. 이 글이 말썽이 됐다. 이 글에서, 한국의 여승들은 남승들로부터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요사이는 남녀가 동등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여승도 남승하고 동등해야 한다. 여승도 도를 많이 닦았으면 남승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하고, 여승도 스님생활을 오래했으면, 갓 들어온 남승한테 합장예배를 받아야하고, 능력이 있으면 총무원장에도 출마해서 불교계를 이끌어가야 하고, 그리고 도를 터득했으면 종정에도 추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 글이 말썽이 됐다. 이 글이 9월 호에 실려 나오지가 않았다. 묵묵히 그냥 기다렸다. 4개월 동안 내 글이 실리지 않았다.
다음 해인 2003년 1월 호와 2월 호에 <태국수녀와 한국의 비구니>가 상(上)과 하(下)로 실려 나왔다. 그 후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 전에, 나의 글이 한 호에서 두 개의 글이 실린 적이 세 내 번 있었다. 그러니까 4개월 동안 내 글이 실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전에 두 개의 글을 실린 적이 있었기에, 이 달로서 지난 10년 동안, 다해서 120개의 글을 썼던 것이다. 120개의 글!, 내가 생각해봐도, 자랑스럽다!
책을 쓰면 돈을 버는 줄 알았었는데!:
고등학교 때, 가히 유명하지 않는, 어느 수필가가 수필집을 발간해서 들어온 돈으로 전셋집을 샀다는 글을 내가 읽었다. 책을 발간해 내면 돈을 벌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도 어느 땐가는 이 수필가처럼 책을 발간하고 싶었다. 발간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헌데, 현실은 정 반대다.
지금까지 내가 세 권의 책을 발간해 냈다. 1998년도에 <오늘은 당신이 이기시오. 내일은 내가 이기겠소> 라는 첫 번째 책을, 그 당시는 한국에서 IMF 경제곤란이 생겨서, 환률이 대략 1500대 1이 였었다. 돈 4000달러를 주고 발간했다. 첫 번째 책인지라, 신이 났다. 자랑도 할 겸, 그리고 염치불고하고, 아는 사람들한테 책 한 권에 10달러 식 팔았다. 본전을 찾아냈다.
2001년도에, 돈 5천 달러를 주고 두 번째 책 <인생은 가지고 와서 갖고 간다>를 출판했다. 허지만, 똑같은 친구들한테 책을 다시 사달라고 부탁하기에 너무 미안했다. 내 책을 다시 사달라고 부탁할 염치가 없어서, 팔지를 않았다.
이번 지난 달 11월에, 세 번째 책 <저승에 갈 때 가지고 갈 것을 지금부터 준비해놔야 하지 않겠어요>를 발간했다. 달라 값이 떨어져서, 환률이 대략 1100대 1이다. 6천 달러를 주고 출판했다. 이번에도 친구들한테 책을 팔지 않기로 했다. 한국에 있는 서점에서 책이 팔리면 팔리는 것이고,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손해를 보면 손해를 볼 참이다.
사람들은 가끔 가다가 터무니없는 것을 바랄 때가 있다. “혹시 이번만은 잘 되겠지 !” 하는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일이 잘 안 되면 섭섭해 한다. 이게 인생이다.
허지만, 인생은 희망은 갖고 살아야 한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야만 한다. 비록 “나는 복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내는 복이 있으니까, 아내의 복을 믿고서, 아내한테, 이번 세 번째 책만은 그래도 손해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허지만, 아내는 내 말을 믿지 않고 있다. 아내는 이미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 포기한다는 말은 6천 달러를 잃게 된다는 말이다. 6천 달러!, 나로서는 큰돈이다.
만약 6천 달러를 푸게 된다면, 운땜한다는 셈치고 그래도 마음 편하게 살겠다.
운때이란 말이 참 좋다:
말이 살짝 바뀌지만, 운땜한다는 말이 참 좋은 말이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상처나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기면, 나는 이런 상처로 혹은 이번 손해로, 운땜을 했으니까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 만약 이번 상처 혹은 손해가 없었더라면 더 나쁜 일이 생겼을텐데, 이번 일로 운땜을 했으니까 앞으로는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운땜의 운(運)은 운명을 말하고, 그리고 땜은 땜질한다는 말이다. 운명 중에 나쁜 곳이 있으면, 가령 상처가 난 운명이나 고장난 운명, 혹은 뭔가 잘 못된 운명이 있으면 땜질해서 운명을 다시 좋게 고쳐놓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운땜을 했다”는 말을 많이도 사용한다. 정말 운땜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영어로 운땜한다는 말이 없는 것 같다. 나의 주위에 있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운땜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영어로 운땜이라는 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멍해버린다. 영어로는 운땜이라는 적절한 표현이 없는 것 같다. 혹은 있는데, 내가 잘 못 설명해주었기에, 나한테 운땜이라는 말을 영어로 말해주지 않는지도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것은 경제적인 손실:
250페이지 내지 300페이지 짜리 책을 1천 권을 발간하는 데, 대략 5천불 내지 6천 달러가 든다. 가령 책 한 권에 10달러라면, 서점에서 절반인 5달러를 먹는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책을 각 서점으로 배부해주는 대가로 또 4분의 1인 2.5달러를 챙겨간다. 나의 손에 들어오는 것은 나머지 2.5달러뿐이다. 책이 많이 팔리지 않는 한, 돈을 벌기는커녕 본전도 찾아내기 어렵다.
지난 10년 동안 글을 쓰는 데 소비한 시간을, 다시 말하면, 책을 읽고, 사색하고, 친구들하고 써야 할 글의 내용에 대해 토론을 하고, 글을 쓰고, 쓴 글을 수정하고, 다시 쓰고, 등등, 글을 쓰는데 소요된 시간이 적어도 일주일에 20시간 내지 40시간은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시간을 정신과의사로서 근무를 했었더라면, 적어도 50만 달러를 벌어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쳐서 지난 10년간 글을 썼었다. 헌데, 결과는, 책을 발간해 낼 때마다 나는 돈을 푸고 있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나더러 그런 병신같은 짓을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충고해준다.
다음은 중앙일보 (02/2/13일)에서 읽은 “이경철이 본 글과 세상”이란 글이다.
박재삼 시인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40년간 죽자사자 쓴 내 시 전부의 값이 화가의 그림 한 점 값만도 못하다니!” 펴낸 시집만 20여권, 산문집 10여권인데 이 많은 책에 실린 시와 산문의 원고료와 인세를 다 합쳐보았자 살아있는 유명화가의 그림 한 폭 값에도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박재삼 시인은 “그림 한 점 값”만도 못하지만, 그래도 원고료를 받았는가 보다. 나는 지금까지 원고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
박재삼 시인은 산문집 10여권을 펴냈고, 그리고 시집 20여권을 발간해 냈다고 했는 데, 나 같으면, 산문집 한 권을 발간해 내는 데 5천 달러로 계산한다면, 산문집 10여권이니까 적어도 5만 달러가 쉽게 없어졌을 것이다. 시집 한 권 발간하는데, 적어도 3천 불이 소요될 것이니까, 시집 20여권이면, 6만 달러, 합계, 11만 달러가 고스란히 없어지고 말았었을 것이다. 헌데, 박재삼 시인은 다행히도 출판사의 부담으로 책이 출간되어 나온 것 같다. 만약 나의 책이 출판사의 부담으로 출판되어 나왔다면!, 아유, 상상만 해도, 기쁘다.
타이거 우즈는 골프 한번 칠 때마다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 헌데, 나는 골프를 칠 때마다 적어도 돈 30불 내지 50불을 써야만 한다. 타이거 우즈처럼 골프를 치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골프를 칠 때마다 30불 내지 50불을 내야하는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돈을 버는 문필가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돈을 푸는 문필가도 있다.
인생이란 푸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있기 마련이다. 푸는 사람이 있어야만 또한 버는 사람이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당분간은 푸는 사람으로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푸면서 살다보면, 새옹지마처럼, 어느 땐가는 버는 날도 있게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글을 쓴데 대해 아내한테 내가 장하다고 칭찬해 달라고 했다. 아내만이라도 나를 칭찬해준다면, 나는 앞으로도 행복하게 글을 써낼 수가 있는 것이다.
[2004년 12월 1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