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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일본 헌병이 되기 위한 충성적 활약 |
분단의 비극 속에서 살길을 얻다 |
공산당 잡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 |
김도영과 김창룡의 악연 |
"과도기"가 필요로 한 "경험자" |
숙국 자료 제공으로 출세의 가교 확보 |
숙군 과정에서 떨친 악명 |
어느 날 아침의 피살 |
일본 군대에서 배운 "좋은 점(?)"을 조국의 군대를 위하여 |
참고문헌 |
▲김혜진(서울대 정치학과)
김창룡은 1916년 함남 영흥군 요덕면 임상리 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의 현실은 일본 식민 통치하의 암울한 시대였다. 당시 일본은 한민족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한편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바치도록 조선인을 동화시키려는 이중적인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 역사의 비극적 시기를 살아간 조선인들의 삶은 민족이 당한 처참함만큼 처절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은 일본인에 의한 식민지 강권 통치가 조선인에 의한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여 반일 투쟁이 강화될 것을 우려했고, 그래서 구상한 책략이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의 지배였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김창룡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자들이 원했던 바로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때 영흥으로 나와 영흥공립농잠(農蠶)실습학교에서 2년 과정을 마친 김창룡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편창(片倉)제사공장에서 직공 생활을 하면서, 일본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이 공장에서부터 일본인 경영자에게 신뢰를 받게 된 그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년만에 만주 장춘역(長春驛) 직원으로 추천 받았다. 김창룡은 만주에서도 또 한 번 그 특유의 충성심과 헌신성으로 일본인의 신임을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다시금 일본인의 소개로 마침내는 북지(北支)에 있는 일본 헌병 부대의 군속(軍屬)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군속이 아닌 진짜 헌병이 되기를 소원했다. 김창룡은 일본 장교의 눈에 들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고, 그 노력의 결과인지 1940년 초 장춘에 있는 관동군 헌병 교습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열성인 김창룡은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그렇게도 바라던 일본 헌병이 되었다. 보조 헌병이지만 그는 드디어 소원을 이룬 셈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그는 일본 헌병이 되자마자 마치 조선인이라는 신분적 장애물을 뛰어 넘기라도 할 듯이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조선과 중국의 항일 조직에 대한 색출 작업이었으며, 그의 이후 행적과 관련하여 전력상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그는 일본군에 편입하여 남경(南京), 무창(武昌), 한구(漢口), 영수(永修)를 거쳐 안의(安義)에 배속되었고, 그의 임무는 국경 지대의 간첩(?)을 잡는 것이었다. 이때의 그의 활약상 한 토막을 짚고 가는 것이 그의 대일 충성심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41년 4월 김창룡은 상해(上海)에서 특파된 흥안북성(興安北省)일대의 간첩책임자 왕근례(王近禮)에 접근하기 위해 중국인 거지로 가장해 그 집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왕근례는 공의성(公儀成)이란 잡화점을 경영하였는데 김창룡은 여기서 식료품을 배달하며 왕근례의 관련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는 왕근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일곱 차례나 유치장 신세를 졌고 드디어 왕근례와 인근 중국인들까지도 그를 중국인으로 인식할 정도가 되었다. 특수공작원은 특수공작부대 직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창룡이 당시 경찰에 드나들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고충을 술회하듯이 그의 임무는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열성적인 노력에 의해 소련에서 파견된 간첩 등 50여 명을 체포하고, 무전기 9대를 압수하는 대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충성적 활약은 스스로 "형언하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술회하듯, 영하 5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 속에서 밤을 새는 잠복 근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이러한 열성적인 활동은 일본 헌병이 되고 나서 2년간 만주에서 50여 건의 항일조직을 적발하여 검거한 공로로 헌병 오장(국군의 하사급)으로 특진하는 개가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전황을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유럽의 대독일 전선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소련이 마침내 1945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 전선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소련의 참전, 미국의 원폭투하 등으로 일본의 패망은 시간 문제였다.
만주 통화(通化)에서 소련군의 진주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김창룡 소속의 헌병 부대도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김창룡은 소련국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사복을 입고 귀국하였다. 이때 그는 기념으로 일본도를 가져왔는데 이로 인해 당시 자치대원과 실랑이가 벌어져, 7일간의 유치장 신세를 감수해야 했다. 일본도에 대한 필요 이상의 집착은 일제 시대의 활약상에 대한 향수 어린 물건이었기 때문일까? 여하튼 고향에 온 김창룡은 영흥에서 도상원(都相媛)과 결혼했다. 당시 나이 29세였다.
북한에서 그는 일제 시대 때의 행적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했고, 생활도 곤란해졌다. 마침내 김창룡은 1945년 늦가을 철원에 있던 김윤원(金允元)이란 사람을 찾아갔다. 김윤원은 김창룡이 관동군 시절 헌병정보원으로 데리고 있던 청년으로 김창룡으로서는 자신이 베풀어 준 것이 많다고 생각해서 믿고 찾아갔을 것이다. 김윤원은 김창룡이 소만 국경에서 일본군 특무대원으로서 소련 간첩을 잡는 일을 해왔다고 고발하였고, 김창룡은 친일 반동분자로 철원 보안서(保安署)에 수감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 해 11월 15일, 김창룡은 최고전범군인으로서 함흥의 전범재판소로 이송시키던 화물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하였다. 그는 3일간 산중을 헤매다 영흥 친척집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탈출 과정에서 입은 상처가 심하여 회복을 위해 몇 달간 그곳에서 머무르며 월남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보안대에 잡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행정 체계가 잘 조직되어 있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창룡이 탈주범이었던 사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김창룡은 자신이 체포된 경위를 영흥군 요덕면 보안서장이었던 외사촌 김영조(金榮助)의 고발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는데, 그가 소련놈을 없애야 하며 그 앞잡이들은 씨도 남겨서는 안 된다고 외사촌에게 호통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탈주범인 것이 밝혀지지는 않은 상태에서 김창룡은 이번에도 전범자로 규정되어 다음해 4월 영흥에서 정평으로 옮겨져 정평고등재판에서 4월 11일 다시 한 번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6년 4월 김창룡은 취조실에서 졸고 있던 소련군을 의자로 내려치고 또다시 탈출에 성공하여 처가인 평양으로 도주했다. 북한에서 두 번에 걸쳐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고발당한 김창룡은 더 이상 북한에 남아 있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전범으로서 소련군에게 취조 당한 고초는 북한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살아 남기 힘들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했다. 결국 남천(南川), 금곡(金谷)을 거쳐 송악산을 넘어 월남에 성공한 김창룡은 그 자신이 "꿈에도 잊을 수 없던 자유 대한"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김창룡은 남북이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민족의 비극적 상황으로 인해 친일행위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남한으로 필사의 탈출을 했던 것이다. 즉 미소의 분할 점령이 고착화되고, 남북의 대치 상태가 강화되어가면서 친일을 했던 사람들, 특히 경찰, 관료, 군인 등의 친일파들은 처벌을 피해 다수 월남했던 것이다. 그들은 남한에서 정치 권력에 다시 기생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하였다. 이처럼 식민지 시대에 이어 또다시 뒤틀리게 되는 우리 역사의 운명 앞에서 김창룡도 마침내 살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는 1946년 5월 초순에 도착했으나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김창룡은 거의 걸인과 같은 상태로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만군 시절의 친구인 박기병(朴基炳, 당시 경비대 사령부 부관) 소위를 만났다. 김창룡은 박기병과 장래 문제에 대해 의논하면서 "공산당 잡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나섰다. 북한에서 전범으로 사형당할 뻔했던 김창룡은 복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박 소위는 경찰이나 군대를 추천하였고 김창룡은 "북한에 쳐들어가 복수할 수 있는"군대를 선택했다. 박기병이 원용덕(元容德) 장군에게 말해서 김창룡은 당시 모집중인 부산의 제5연대(연대장-백선엽)에 입대했다. 1946년 말 경비사관학교 2기생 모집이 있을 때 그는 이에 응시하려 했다. 당시 경비사관학교 지원에는 연대의 추천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연대 부관(인사 담당)이었던 학병 출신의 백남권(白南權) 소위는 김창룡이 일본군 헌병 출신이기 때문에 장교가 되서는 안 된다 하여 추천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부대를 이탈, 서울로 올라와 박기영 소위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리 203연대로 전출된 상태였다. 김창룡은 다시 이리로 내려갔다. 당시 제3연대장은 김백일(金白一) 소령, 행정장교는 김종오(金鐘五) 대위였다. 제3연대에 다시 입대한 김창룡은 연대 정보과에 배치되었다. 당시 연대 정보과장은 오일균 대위였다. 그런데 당시 군 내부에는 좌파 세력이 상당히 강했고, 김창룡이 오일균 대위를 의심하기 시작해 김창룡과 오일균은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오일균 대위는 육사로 옮겼갔고, 김창룡은 자신의 활약상을 서서히 보여 주기 시작한다. 그가 정보과에서 일제하 헌병 시절에 체득했던 능력을 한껏 발휘할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그는 내무반, 식당, 훈련장 등 어디서나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인가를 가려내는데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제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경비사관학교 3기생 모집 추천을 받아 응시, 합격하였다. 3기생으로 입학한 김창룡은 1947년 1월 13일 입교하여 95일간의 과정을 받고 4월 19일 임관되었다. 그런데 경비사관학교 3기 출신들 중에는 좌우 대결을 역사 속에서 나중에 서로 총부리를 겨루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즉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에서 폭동을 주도한 김지회(金智會). 홍순석(洪淳錫), 두 중위가 3기생이었고, 이들을 토벌, 진압한 일선 중대장도 대부분 3기생이었던 것이다.
사실 좌익 세력에 대한 김창룡의 반감은 그가 생존해왔던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체득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좌익에 생리적인 반감을 지닌 그에게 있어 개인적인 사감과 좌익에 대한 반감을 별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김창룡의 성격을 파악해 볼 수 있는 한 사건을 먼저 살펴보자.
역시 일군(日軍) 하사관 출신이었던 김도영이 당시 이리 제3연대 소대장으로 있었다. 김도영은 김창룡이 야간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위반하자 김창룡을 꾸짖고 지휘봉으로 몇 차례 때리게 되었다. 그후 김창룡은 육사 3기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입대하여 만군 시절의 경험 덕에 정보계에서 차츰 두각을 나타냈다. 3년 후인 1949년, 4ㆍ3제주민중항쟁 사건 토벌 당시 206연대 1대대장으로 출전했던 김도영을 적과 내통하고 토벌 작전을 소홀히 했다는 혐의로 김창룡은 6개월간 특무대에 구금하고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김도영은 무혐의로 밝혀져 군에 복귀했다.
그 후 한국전쟁중 김도영은 부산 제2훈련소 부소장으로 있고, 김창룡은 부산지구 합수본부장을 지내게 되어 두 사람은 부산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이때 "당신 왜 저쪽(북)으로 안 가고 여기 있느냐"는 김창룡의 비꼬는 말에 화가 난 김도영이 권총을 빼들고 대드는 소동이 한바탕 벌어졌다. 종전 직후인 1954년에도 김창룡은 김도영을 논산 제1훈련소장으로 있을 때 야당 증진의원인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소 장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다시 얽어 넣었다. 4개원간이나 구속수사를 했으나 김도영은 결국 또다시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장성 진급 예정자였던 김도영은 이 사건으로 진급에서 좌절해야 했고, 무혐의로 풀려 나온 후에도 김창룡이 죽을 때까지 근 2년간 보직없이 군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김창룡은 정보계에서 활동하면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권력을 개인적 차원의 감정에서, 그것도 수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남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복수심을 불태우며 공산당에 대해 그처럼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도 해방 직후 북한에서 공산 세력에게 붙들려 일제하 행적으로 인해 호되게 고초를 당했던 앙갚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이념적 지향보다 자신의 복수심 때문에 군 내의 공산당 색출에 뛰어들었고,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군인으로서의 자기 업무에 대한 어떤 공적인 윤리 의식도 없이 공사를 구분하지 않고 권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공산당 색출에 대한 김창룡의 집착은 점차 병적으로 변해갔다. 북한에서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두 번이나 고발을 당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 한 글에서는 그의 이러한 집착에 대해 "공산당과 연관이 있다고만 하면 부모 형제, 백년지기 할 것 없이 즉각 체포ㆍ구속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은 붉은 고추만 보아도 즉각 처넣고 싶고, 여성들의 붉은 치마만 보아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산당과 연관시켜 볼 정도로 되게 하였다. 붉은빛에 대한 노이로제 기미라고 할까"라고 쓰고 있을 정도다.
1948년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시행된 숙군 작업에 앞서, 서울 태릉에 주둔했던 제1연대는 자체적으로 좌익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작업에 발탁된 사람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연대장이었던 이성가(李成佳) 소령은 김창룡을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정보소대를 편성케 하여 연대 내의 사상사찰을 전담시켰다. 생존과 권력 추구를 위해 항상 그가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김창룡은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일제하에서 경찰관이나 헌병을 지낸 경험자들을 특채하여 정보소대를 구성했고 이들을 통하여 연대 내 좌익 색출에 매진했다. 이 정보소대 요원들이 나중에 창설되는 육군 특무대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때 김창룡의 전력에 대한 시비가 있기도 했다. 김창룡이 한참 군내 사찰 활동을 하던 중 송호성(宋虎聲) 경비대 사령관이 법무처장 김완룡(金完龍) 대위를 불러 김창룡을 조사하여 파면시킬 것을 명령했다. 동시에 김창룡에 대한 항의서도 제출되었다. 내용은 김창룡은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헌병 앞잡이로서 만주의 우리 동포들에게 혹독한 박해를 자행한 민족 반역자이데 그런 자가 어떻게 신생 조국의 국군 창설에 등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완룡 대위는 제1연대로 가서 이성가 연대장과 이정석(李貞錫) 정보주임에게 문제의 항의서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군 내의 공산당을 잡아내는 데는 김창룡이 꼭 필요한 사람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서 일을 하게 하라고 간청했다. 마침 그때 김창룡은 당시 군 내에서 의심을 받던 이병위, 김종석(金鐘碩), 최남근(崔楠根), 김지회, 오일균 등의 좌익 장교들의 뒤를 밟고 있었다.
결국 김창룡은 조사 과정에서 조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풀려났다. "이런 과도기"에는 "그런 경험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과도기에서 살아 남았던 그는 그 과도기의 활동을 기반으로 영원한 권력을 추구하려 했다.
여수ㆍ순천 사건 이후 몰아닥친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은 맹활약하였다. 남북 분단이 김창룡의 생존을 보장해 준데 이어 여수ㆍ순천 사건의 동족잔상은 다시 한 번 김창룡의 출세를 보장해 준 것이다. 여수ㆍ순천 사건 직후, 이응준 육군 참모총장은 신상철 헌병사령관과 육군 총사령부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을 불러 경찰이 파악한 군내 좌익들에 관한 자료를 넘겨주었다. 이 자료는 당시 치안국장이던 김태선(金泰善)이 이승만을 통해 넘겨준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제부터 좌익혐의자로 지목 받았던 사람들 중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군복을 입은 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기록되어 있었다 한다. 이 문서는 정보국 산하 방첩대(CIC)에 넘겨졌고 그 동안 수집된 자체 정보와 함께 전군적인 숙군의 기초 자료로 사용되었다.
김창룡은 정부 수립 후 방첩부대(CIC)의 전신인 정보국 특별조사과(SIS) 김안일(金安一) 소령과 함께 숙군 작업을 담당했다. 순국 선풍이 불면서 당시 명동에 있었던 육군본부 별관(구 증권거래소)에 전군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2층에 헌병사령부, 3층에는 정보국이 있어 육군본부 별관이 "숙군 사령부"가 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혐의자 체포는 헌병 사령부가 맡고, 조사는 정보국 특별조사과에서 맡았다. 정보국 요원들은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전투 정보 및 방첩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마침 임관하던 육사 8기생들 중 성적이 우수한 30명이 선발되어 정보국에서 미군 교관들에 의해 정보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투정보과와 방첩대(CIC)의 창설 과정이었다.
당시 김창룡은 여수ㆍ순천 지구에 내려가 반란군, 토벌군 등 3천여명을 조사하여 150명을 남로당계로 가려 처벌했다. 그 공로로 김창룡은 대위로 진급했고 70일 만인 1948년 11월 5일 소령으로 특진했다.
그때까지 제1연대 숙군 책임자였던 김창룡은 그후부터는 전군에 대한 숙군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당시 숙군 과정에는 정인택(鄭麟澤), 이희영(李熙永), 장복성(張福成), 노엽(盧葉), 이진용(李珍瑢), 이한진(李漢晉), 이각봉(李珏鳳), 박평래(朴平來), 김안수등이 참여했는데, 이 중에는 경찰 정보 계통에서 일하다 군의 요청에 따라 정보국에 전속돼 숙군 후에 군인으로 복무한 이들도 많았다. 또한 숙군의 방대한 업무에 인력이 부족하게 되자 정보국은 앞서 지적했듯이 당시 막 임관한 육사 8기생들을 대거 영입시켰는데, 강신탁(姜信卓), 고제훈(高濟勳), 김영민(金永旼), 김종필(金鍾泌), 김진구(金振九), 김진성(金珍星), 김홍원(金洪元), 나공성(羅公成), 서정순(徐廷淳), 이병희(李秉禧), 이영근(李永根), 이희성(李熺性), 전재덕(全在德), 전창희(全昌熙), 정순갑(靜淳甲), 최명재(崔明載), 최영택(崔英澤), 표대현(表大鉉), 석정선(石正善), 최정국(崔正國)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뒤에도 "청정회(淸情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관계를 지속시켰다.
군에 대한 조사는 1949년 봄에 일단락 되었다. 영등포 특별중대 창고를 개조한 구치소에는 수백 명의 좌익혐의 장병들이 가득했다. 한편으로 전남 지역을 비롯한 지방 각지에서도 각 부대별로 좌익혐의자들이 검거되었다. 한편 숙군의 와중에서 1949년 5월 초 국군 2개 대대의 월북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응준(李應俊) 참모총장이 물러나고 채병덕(蔡秉德) 장군이 그 후임으로 인선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1949년 7월에 막을 내린 대숙군의 결과 총 4,749명의 장병이 처벌되었다. 이는 당시 군 병력의 5%에 해당하는 막대한 숫자였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 진행된 숙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용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군대좌익 조직의 비밀 명단이 입수된 뒤에 암호를 풀어 해당자를 잡아오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동명이인으로 엉뚱한 사람이 걸려 들어오는 예도 있었다. 또 한 명을 잡으면 "아는 놈 이름을 대라"고 때려가며 조사를 했는데 급한 김에 마구 불다보니 엉뚱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한편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김창룡은 당시 창립 준비중인 공군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거의 전원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석 주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金貞烈) 대령이 나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정렬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망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백선엽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 쓰여진 또 하나의 사건 또한 당시 김창룡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李雲起)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인지가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이 시절 무리한 조사로 인해 세간에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사건도 발생했었다. 1949년 9월 하순, 동대문 일대의 권력가인 고희두(高羲斗, 당시 47세)가 방첩대에서 고문 치사된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취조자 도진희(都晉熙)는 9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석방되었고, 방척대장인 김창룡은 전속 명령을 받았다. 당시 방첩대는 빨갱이를 조작하는 곳이라는 일반의 혹평을 받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 문제를 계기로 항의와 변명이 오가는 사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 강고(强固)해졌고,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의 이름으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시켰다. 전쟁의 발발과 이를 통한 이승만 독재의 강화는 김창룡의 활동 여지를 보다 넓혔고 이에 그는 다시 한 번 물을 만난 듯했다. 그러나 그의 남용된 권력 행사는 점차 곳곳에서 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56년 1월 30일 아침, 김창룡 육군 특무부대장은 출근길에 괴한들로부터 세 발의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건국이래 당시까지 최대의 군기 사건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동안 김창룡은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었다. 때로는 그의 권력이 육군 참모총장의 권력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육군 특무부대장으로서 고급 장교들이나 장성들의 비행을 조사했던 그는 군 내부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창룡에 대한 반대파들은 수차 그의 제거를 논의했으나 그는 이 대통령의 신임 때문에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건 한 달 만인 2월 23일 특무부대에 의해 범인들이 체포되었다. 권총을 쏜 행동대들과 배후지령자로 지목된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許泰榮) 대령 등 7명이 체포되었다. 놀랍게도 허 대령과 공범 모두가 특무부대 출신이었고 하수인 2인도 특무부대 문관이었다. 그런데 허 대령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부인이 구명탄원서를 제출하면서 이 사건의 배후로 제2군사령관 강문봉(姜文奉) 중장, 전 헌병사령관 공국진(孔國鎭) 준장 등이 지목되었다. 본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추가 구속이 되면서 세인들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이제 사건은 개인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최고위급 장성들까지 관련된 조직적인 범행으로 확산되는 듯했다.
이 일로 인해 삼성장군(三星將軍, 중장의 이칭)이 군법회의를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강문봉 중장은 공판에서 "김창룡은 군대 내에 있어서 육군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존재였으므로 제거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허 대령에게 범행을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군내에서 강문봉은 명석하고 강직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또한 허태영 대령은 김창룡을 제거한 동기와 목적에 대해 그가 상관과 동료를 모략하여 자기 영달을 꾀하였고, 수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육사 졸업식에서의 대통령 암살 음모 사건도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한 조작극이었으며, 고위 장성들의 비행을 조사하여 군을 이간시키고 단결을 저해했으며, 군 통수 계통을 문란케 하여 군 발전을 저해했으므로 군의 장래를 위해 그를 제거했다고 주장했다.
무려 54회 공판에 연 소요시간 2천 2백 56시간을 기록할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모았던 이 재판은 1957년 3월 19일 강문봉 피고인에 대해 사형을 구형하는 등 전원에게 유죄를 구형하였다. 4월 17일 확정 판결에서 허태영, 송용고, 신초식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강문봉 중장은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허태영을 비롯한 3인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강문봉은 4ㆍ19혁명 후 석방, 복권되었다.
김창룡이 월남한 이후 군인이 되려 했던 과정에서 그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김창룡은 조사 과정에서 경비대에 들어온 동기를 묻자 "일본 군대에서 배운 좋은 점을 가지고 조국의 군대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자 들어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일본 군대에서 배운 좋은 점을' '조국의 군대를 위하여'. 그가 일본 군대에서 배운 좋은 점은 민족이 어떠한 상황이건 개인으로서 살아 남는 것이었고, 그가 조국의 군대를 위해 한 것은 자신의 권력을 다지기 위해 무모한 희생자들을 양산한 것이다.
다시 조사관이 그런 희생 정신을 언제부터 가졌는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일제 때는 배운 것이 없어 어떻게 살아보려고 한 것이 헌병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해방이 되고서야 비로소 나라를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됐습니다. 따라서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죄를 씻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배운 것이 없어 들어갔던 일제 헌병 생활에서 그는 생존과 권력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해방 직후 그가 깨달은 것은 나라와 민족의 비극 위에서 자신의 생존과 권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김창룡, 그는 일제하에서는 제사 공장의 일개 직공에서 헌병까지, 해방 후에는 소위에서 중장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로 정보 계통에 종사하면서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초대한의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한 치의 반성도 없었던 그의 이러한 집념은 어느 날 아침 한 번의 총격으로 끝났다. 역사가 부여한 형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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