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은 소상히 밝혔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20세기 패션 아이콘인 디자이너 샤넬과 혁명적인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샤넬이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밝혔던 둘의 만남은 사후에 출간된 전기를 통해 알려졌다. 이를 기반으로 소설 '코코와 이고르'(2002)가 출판됐고,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감독 얀 쿠넹)가 탄생했다.
배경을 보면, 영화는 전적으로 샤넬의 시각을 기반으로,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을 더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트라빈스키가 샤넬을 몇 년간 짝사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면, 당시 유부남이었기에 샤넬과의 사랑을 숨길 수밖에 없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영화는 1913년, 파리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봄의 제전'으로 시작된다. 태양신에게 바칠 처녀를 선발하는 이교도들의 의식을 발레로 만든 작품으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춰 니진스키가 안무를 짰다.
거칠고 강렬한 리듬과 긴장으로 가득 찬 불협화음, 안짱다리를 하고 무대 위에서 격렬하게 뛰어다니는 무용수들. 기존의 형식을 부숴버린 음악과 무용은 관객들을 성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비규환 같은 이날의 혼란은 잘 알려져 있다.
이때 무대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샤넬이다. (이것은 허구다. 하지만 샤넬은 실제로 스트라빈스키를 후원했고, 7년 후에 공연된 '봄의 제전'의 의상을 맡았다.)
스트라빈스키와 샤넬의 직접적인 만남은 7년 후, 한 파티에서 이뤄졌다. 당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샤넬은 후원을 자처하며, 자신의 저택에서 함께 살 것을 제안한다. 물론 스트라빈스키의 아내 캐서린과 4명의 아이와 함께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고르와 코코의 어긋난 사랑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다.
안무가 니진스키는 "스트라빈스키가 황제라면 아이들과 아내는 병사처럼 보였다. 스트라빈스키는 아내 캐서린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아이들 때문에 함께 사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을 남겼다.('스트라빈스키', 정준호 저)
그는 권위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그는 병약한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샤넬을 향한 뜨거운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지내는 집안 곳곳에서 샤넬과 대담한 정사를 벌인다.
차라리 니진스키의 언급대로,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적인 스트라빈스키로 그려졌다면 이 같은 행동은 좀더 설득력을 얻었을 것 같다.
영화는 이들의 관계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 스트라빈스키에게는 음악적 영감이 되었으며, 샤넬에게는 향수 No.5 탄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연결짓는다.
또한 한 살 차이였던 이고르와 코코가 1971년 같은 해에 눈을 감았다는 운명적 인연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 사족 같은 노년의 한 장면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차분한 호흡으로 진행되기에, 그다지 극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아라베스크 문양이 점차 확대되면서 스크린 전면을 채우는 첫 장면과 '봄의 제전'에 대한 심도있는 고증은 흥미롭다.
실제 샤넬의 모델이기도 한 안나 무글라리스가 표현한 코코 샤넬은 당시 뭇 남성들의 뮤즈가 되었던 샤넬의 환생인 듯 도도하면서도 무척이나 매혹적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외에 가브리엘 야리드의 음악 역시 귀를 사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