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혁명의 원인과 국민의회(6)
6. 재정과 교회
혁명 사업이 당장 직면한 어려운 문제는 재정이었다. 재정 문제가 본격적으로 토론되기 시작한 것은 10월 초부터이다. 오튕의 주교로서 삼부회의 제1신분 대표자로 국민의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었던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의 제안에 따라 교회의 재산을 국유 재산으로 몰수하기로 하였다. 탈레랑의 평가에 의하면 교회 재산은 양 30억 리브르이고 연수입은 2억 리브르였다. 교회가 소유한 토지와 건물은 국가 전체의 약 5분의 1에 해당했다. 탈레랑의 제안에는 반대가 적지 않았으나 시에예스와 미라보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11월 2일 교회 재산의 국유화가 508대 346으로 결의되었다. 국가가 교회의 토지와 건물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에 대한 봉급과 예배 비용 및 교회의 사회사업비는 국가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담보로 아시냐(Assignat)라는 일종의 정부 보증 지폐를 발행하였다. 1789년 12월 19일에 처음 발행한 액수는 4억 리브르였다. 아시냐는 통화의 기능은 하지만, 원칙적으로 국유화한 교회 재산의 구입에 쓰는 정부 발행 어음이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아시냐를 국유재산 매입 대금과 납세금으로 회수하면 전부 태워버려야 했다. 그러나 일부만 소각하고 대부분 그대로 둔 채 계속 발행함으로써 가치의 하락을 초래하였다. 1790년 4월과 9월에 각각 4억 리브르를 발행하였다. 그중 7억 리브르는 소각했으나 나머지 17억 리브르는 그대로 두었다. 이리하여 아시냐가 가치는 날로 하락하여, 1792년 봄, 아직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데도, 화폐의 가치가 프랑스 국내에서는 평균 25%에서 35퍼센트 떨어지고 해외에서는 50퍼센트에서 60퍼센트가량이 떨어졌다.
아시냐가 처음 발행되었을 대 아무도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교회 재산은 실제로 성직자가 관리하고 있었고, 교회가 진 빚이나 저당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않아 아무도 교회 소유의 토지를 선뜻 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런 토지를 샀을 때 과연 소유권이 보장될 것이냐 하는 의문이 컸던 것이다. 거기서 정부는 1790년 3월 17일 법령과 4월 17일령에 의하여 성직자의 부채와 교회의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기로 하고 국유화 재산에 대한 저당권을 무효화하여 아시냐의 신용을 얻는 동시에, 국유재산의 매각은 반드시 코뮌을 경유하도록 규정하여 재산 취득자의 소유권을 정부가 확인해 주었다. 여기서 비로소 아시냐는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혁명정부의 재정을 충족시켰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시냐의 가치가 하락하자, 상인도 노동자도 아시냐를 받지 않고 경화를 요구하는 경향이 높아갔다. 여기서 대상인들이 발행한 ‘신용 화폐’나 은행들이 자기 신용으로 발행한 ‘신용 지폐’가 나돌았다. 신용 지폐는 파리에서 만도 63종이나 유통되고 있었다. 곁들여서 위조 아시냐가 대량으로 범람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경제 질서의 혼란은 경제적 원인에 의한 것이기도 했으나 혁명정부의 신용을 실추시키려는 반혁명 세력의 정치적 책동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국유재산의 매각은 토지 소유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아시냐의 가치 하락은 국유재산 매입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국유재산을 가장 많이 취득한 계층은 도시의 부르주아였고 귀족도 성직자도 꽤 많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에 비해 농민은 돈이 없어 많이 소유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일부는 살 수 있었다. 국유재산을 취득한 사람들은 혁명의 수혜자로서 새 질서와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 재산의 몰수는 결과적으로 프랑스 교회의 재편성을 불러왔다. 재정 문제와 종교 문제는 깊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국민의회 의원들은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추호의 적의도 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분명히 표명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종래 왕권이 교회 문제에 관여했던 것처럼 자기들도 국민의 대표자로서 교회 문제를 규율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아직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입각한 제도를 생각한 사람은 없었지만 교회 재산의 국유화에 따라 교회 조직의 개혁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에서는 일찍부터 절대왕권이 발달하여, 프랑스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왕권이 성직의 임면과 교회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교황권 지상주의인 울트라몬타니즘 (Ultramontanism)에 대하여 프랑스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는 갈리카니슴(Gallicanisme)이 매우 강하였다. 그리하여 세속적인 국가권력이 교회 문제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은 근대 시민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국민의회 의원들의 머리에서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국민의회는 상당히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1790년 7월 12일 성직자 민사 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e)을 가결하였다. 이 종교 현장은 약 150구의 교구를 새로 제정된 행정구역에 따라 83개의 데파르트망(departement)에 일치시켜서 83구로 줄이고, 주교와 사제를 일반 공무원처럼 선거 위원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였다. 주교와 사제의 신분도 일반 공무원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종교헌장은 모든 성직자에게 헌장 준수 서약의 의무를 규정하였다.
그런데 많은 성직자가 서약을 거부하였다. 의회는 1790년 11월 27일령으로 선서 거부자에게 공공 의식을 금지시켰다.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 성체 수여식, 고해와 설교 등을 집례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금지령으로 선서 거부 성직자가 많은 지방에서는 주민의 세례, 결혼, 장례가 일체 거행될 수 없었다. 이것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혼란을 의미하였다. 1790년 12월 25일령은 선서 강제령을 내렸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 종교 혼란은 반혁명 진영에게 다시없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1791년 3월 10일 교황 피우스 6세는 회칙을 내려 종교 헌장을 비난하였다. 교황은 인권선언을 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비난한 바 있고, 인민주권 사상을 일체의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프랑스 혁명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종교 문제를 가지고 혁명을 뒤엎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교황의 회칙은 교회의 분열을 크게 부채질하여 모든 성직자를 선서 성직자와 거부 성직자의 두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주교는 일곱 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제도 거의 절반이 선서를 거부하였다. 선서 성직자와 거부 성직자는 대체로 혁명 지지와 혁명 반대와 일치하고 있었으나 교회 개혁에 찬성하는 성직자도 서약을 주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종교 문제가 야기한 의외의 혼란에 놀란 국민의회는 1791년 4월 21일령과 5월 7일령으로 파리 지방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걸쳐서 거부 성직자에 대한 관용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책은 선서 성직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거부 성직자는 이제 종교적 박해에서 승리한 격이 되고 선서 성직자는 마치 종교적 불순이라도 범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곳에 따라서는 선서 성직자의 예배 집전이 거부되기도 하고 심한 곳에서는 박해와 모욕과 구타 심지어는 살해당하는 일마저 일어났다. 여기서 선서 성직자들은 당시의 국민의회를 지배한 라파예트와 그 일파에서 일탈하여 더 과격한 자코뱅파(Jacobins)로 몰려갔다.
자코뱅은 선서 성직자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톨릭교회 자체를 공격하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여, 종교 헌장이 제정한 국가에 의한 교회 예산의 폐지를 강조하였다. 자코뱅의 이 주장은 앞으로 반교권론이라는 형태로 19세기를 통하여 내내 중요한 정치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반교권론은 국가를 종교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끊어버리자는 주장이다.
어쨌든 교회 조직의 개편은 뜻밖의 진통을 겪었다. 교회 재산의 매각을 방해하고 아시냐의 신용 추락을 획책하는 반혁명의 선동은 종교 헌장 반대에 그 중요한 논거를 발견하여 광범한 지역에서 반혁명 폭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동 음모는 실제로 별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791년 봄부터는 선서 성직자의 힘이 착실히 그 뿌리를 내려갔다. 그리하여 반혁명의 기세는 혁명의 불꽃 앞에 사라져갔다. 혁명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은 바스티유 사건 1주년을 기념한 1790년 7월 14일에 열린 전국민 연합체였다. 파리의 샹드 마르스에 운집한 30만 시민 앞에서 탈레랑이 조국의 제단에 미사를 올리고, 라파예트가 83개 도의 이름으로 “프랑스인 동포를 하나로 묶고 자유와 헌법과 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모든 프랑스인을 국왕에게 연결시킨다”고 선언하고, 국왕도 국민과 법에 충성할 것을 서약하였다. 민중은 열광 속에 다시 찾은 연합과 단결에 한없는 갈채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