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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축일: 10월 6일 성 브루노 사제 ST.BRUNO San Bruno (Brunone) Sacerdote e monaco 1030 at Cologne, Germany - 1101 at Calabria Bruno = allude al colore della carnagione
1130년(1035년)경 쾰른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교육받은 후 1055 년에 사제품을 받고 신학을 가르쳤다. 부패한 성직자들과 맞서 싸우고 랭스 신학대학에서 교수 겸 교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이때 성직매매로 라임스의 주교가 됐던 마나세스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선 그는 사임을 요청하여 이를 이루어냈다. 대주교가 되어달라는 라임?교구민의 바람을 뒤로한 채 은수자가 되어,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몇몇 동료와 함께 노동과 관상기도의 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고독과 철저한 가난을 살았다. 기도소와 개인 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이 회가 곧 카르투시오Carthusio회의 시작이다. 이 회의 회원들은 극도의 가난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노동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쓰는 작업을 하였다. 1090 년 브루노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교황 우르바노 2 세에 의하여 성직자들의 개혁을 담당하는 교황의 보좌로서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협력했다.
하지만 얼마 후 교황을 설득하여 다시 은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때 칼라브리아의 라토레에 성 마리아 수도원을 세우고, 운명할 때까지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였다. 1101년 칼라브리아의 스킬라체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적인 명예를 취득하지 않는다는 카르투시오의 규칙에 따라 시성식은 치뤄지지 않았고, 1674년 교황 클레멘스에 의해 축일만 공포되었다.
성 브루노 사제의 「샤르트르 수도회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놉니다.
복된 우리 형제 랑두앵이 자주 보내는 반가운 연락을 통해서 여러분이 참으로 칭찬 받을 만한 합리적인 생활 기율을 열심히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거룩함과 완덕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열렬하고도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영혼이 주님안에서 기뻐 뛰놉니다. 참으로 기뻐하고 또 주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정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심히 탄식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맺은 덕행의 풍성한 열매를 보고 당연히 기뻐 용약합니다. 그러나 내 죄의 더러움 안에서 무기력하고 나태한 이 몸을 보고 부끄러워 마음이 괴롭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복된 상황과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의 부요에 대해 기뻐하십시오. 폭풍우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 겹의 위험들과 파선을 모면한 데 대해 기뻐하십시오. 또 많은 이들이 열렬한 갈망과 노력으로 시도해 보아도 결국 다다르지 못하는 그 안전하고 평온한 항구의 은밀한 안식처에 여러분이 다다르게 된 데 대해 기뻐하십시오. 사실 그 목표에 다다르려 하지만 위에서 오는 은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제외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이여, 만일 어느 누가 이 바람직한 목표를 체험하고 나서 어떤 까닭으로 든 거기서 떠난다면, 그가 자기 영혼의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에 대해 끝없이 후회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평신도 형제들이여, 여러분에 대해서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나는 역시, 여러분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고 여러분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고 계신 사랑하올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원장님의 보고를 통해서 여러분 위에 내린 크신 자비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비록 학식 면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으로 여러분의 마음에다 사랑과 당신의 법에 대한 거룩한 지식을 기록해 주심을 볼 때 우리 역시 기뻐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을 통해서 여러분이 무엇을 사랑하고 또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온갖 조심과 열성으로 순종을 연마할 때 감미롭고 생명을 주는 성서의 열매를 지혜롭게 읽고 깨닫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성인은 ’한 번도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개혁한 적이 없는 수도원’을 창설했다는 영예를 지니고 있다. 분명히 창설자와 회원들은 이렇게 지나친 찬사를 거절하겠지만 성인은 고독과 참회 생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브루노는 쾰른에서 태어났으며 랭스에서 유명한 교사가 되었고 45세에 대교구의 사무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을 지지하여 성직자들의 타락상에 맞서서 투쟁했으며, 타락한 자기의 대주교인 마나세를 퇴임시키는 데 참여했다. 이렇게 애쓴 보람도 없이 브루노는 자기 집안이 약탈당하는 괴로움을 겪었다.
고독과 기도 생활에 대한 꿈을 가졌던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자기와 함께 은수자로 생활할 것을 권유했다. 얼마 후 그는 장소가 부적당하다는 것을 느끼자 친구를 통해 약간의 토지를 기증받았는데 이곳은 나중에 그의 수도원 창설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카르투시안이란 말에서 유래한 샤르트뢰즈에 있다. 삭막하고 험악한 지형과 나쁜 기후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길 등은 침묵과 가난을 가져다 주었으며 소수의 인원만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들은 각각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독방들과 기도실을 건축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고독한 가운데 지내며 대축일에만 함께 식사를 했다 그들의 주된 일은 성서 사본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교황은 부르노의 성덕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보좌로 삼고자 그를 로마로 불렀다. 교황이 로마를 떠나 피신해야 했을 때 브루노는 또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주교좌도 거절한 뒤에) 칼라브리아의 광야에서 말년을 보냈다.
카르투시안들은 널리 알려지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브루노가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적은 없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는 1674년에 그의 축일을 온 교회에 공표했다.
만일 항상 관상 생활에 대한 어떤 불만이나 의문이 있다면 카르투시안들이 실천한 공동체 생활과 은수 생활이 극도의 참회 정신으로 결합된 데 대해서는 더욱 큰 수수께끼가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관상을 목적으로 하여 그 회원이 고독과 침묵 중에 부단히 기도하며 자진 보속하여 하느님에게만 사는 회는 아무리 행동적 사도직의 필요가 절실히 요청 될지라도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지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있어서 항상 뛰어난 역할을 감당한다."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7 항)
카르 투시오 수도회는 수도회 중에서 가장 엄격한 수도회이며 그 회의 창립자는 성 브루노이다. 그는 1032년 유명한 하텐파우스가의 아들로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귀족으로 그 아들을 교회에서 경영하는 구니베르토 학교에 보내고, 그 학교를 마친후는 라임스에 보냈다. 브루노는 거기서 투르로, 투르에서 다시 1055년경에 쾰른으로 되돌아와서 학업을 마치고 사제로 서품되었고 다시 1056년에 라임스로 가서 신학 교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그 학교의 학장이 되어, 1074년가지 재직했다. 그가 가르친 제자 중에는 후에 유명한 인재가 된 사람이 많이 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도 그의 제자중의 한사람으로, 그런 인사들은 항상 스승의 은덕을 잊지 않았고, 또 브루토도 그들로 인해 그의 이름이 널리 천하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브루노는 여전히 겸손하고 충실히 하느님을 섬기며 더욱 더 하느님과의 깊은 사랑의 정을 기울였다. 그에게 배운 이들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올바른 길의 안내자, 예지의 스승이며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타인에게 가르친다."
브루노가 교단에 선 지 이미 15, 6년 그의 교사로서의명성과 영관은 더욱 빛날 뿐이었다. 그의 식견은 높고, 학생들에게 학문만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 충실하고 생활에 거룩하도록 인도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브루노에게도 가혹한 시련의 손이 뻗쳤다. 당시 교회의 가장 통탄 할것은 부덕한 사람들이 세속의 왕후 또는 권력자에게 아부해 그 힘으로 교회의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이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성직 매매로써 라임스의 주교좌를 획득했던 자신의 대주교 마나세스도 그 중의 하나였다.
브루노는 이런 사실을 뼈아프게 느꼈고, 어느 집회 석상에서는 열정에 복받친 나머지 이를 통렬히 규탄하는 일장의 연설을 했다. 연설을 듣고 올바른 사람들은 통쾌하게 동감했으나, 그렇지 않고 양심에 가책을 받은 이들은 세속의 유력층과 결탁해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브루노는 수입의 길이 전부 끊겨 한때는 망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사(邪)는 정(正)을 이길수 없는 법이라, 마나세스 대주교는 직책에서 사임했다. 이렇게 그의 훌륭한 정신이 인정되어 그를 규율과 풍기를 엄숙하고 바르게 하기위해 이 모든 일을 눈여겨 본 라임스 교구민들이 그를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겸손된 브루노는 자기와 같은 재능이 없는 사람은 그 중책을 감당할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잠시 조용한 곳에 가서 앞길을 잘 묵상한 후 경건한 동료들과 같이 란굴에 가서 열심한 모레메의 성 로베르토의 의견을 청했다.
로베르토 역시 고독을 즐기고 후에는 유명한 시토 수도회의 창립자가 된 사람인지라, 브루노에게 은수생활을 권유해 인기척이 없고 깊은 산림이 많은 그레노블 교구에 가서 그 주교에게 어느 곳이든지 적당한 장소를 정해줄 것을 청하라고 했다. 브루노는 그의 말대로 6명의 동료를 데리고 1084년에 그레노블에 도착했다. 당시의 주교 성 후고는 그들의 요청을 쾌히 승낙하고 답사(踏査)한 브루노는 한편으로는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그곳은 너무도 자기 이상과 부합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료들과 힘을 합쳐 소성당(기도소)을 하나 지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한 사람에 하나씩 초막을 지었다(개인방). 이는 서로 장애가 안 되게 조용히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게 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했다. 이들이 곧 카르투시오회의 시작이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생활을 하기 위해 노동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베끼는 작업을 하기도 했으나, 그들의 규칙을 글로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소성당에서 기도할 때와 식사할 때나 담소할 때에만 같이 모였고 그 외에는 각자가 공동생활 겸 은수생활을 했다.
브루노는 이런 생활로써 그의 여생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5년후 즉 1090년에 브루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는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로마로 갔으며, 여기서 성직자들의 개혁을 담당하는 교황 고문관이 되었다.
브루노는 순명의 덕을 닦기 위해 할 수없이 그 청에 응했다.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듯한 서운한 심정으로 그곳을 떠났는데, 그 후 다시는 그곳을 방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동료들의 가슴에는 슬픔이 벅찼었다. 그들은 브루노가 없는 샤르트르의 생활은 상상치도 못했던 것이다.
브루노는 로마에 도착한지 지 얼마 안되어 그곳을 떠나 조용한 곳에 가고자 교황께 간청했다. 교황도 겨우 그것을 허락했으나 그대신 그를 레지오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브루노는 다시금 교황께 간청해 겨우 은수생활을 할 허락을 받고, 역시 제자 수명과 조용한 곳을 찾아서 샤르트르에서와 같이 소성당을 세우고 그 주위에 초막을 지어놓고 예전과 같이 엄격한 생활을 하며 몸을 단련하고 덕을 닦았다.
그는 샤르트르에 있는 제자들을 잊을 수 없어 가끔 편지를 보내 그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는 고독한 생활만을 원했으나, 숨은 성덕은 빛을 내는 법이라, 어느 날 사냥 나온 주(領主) 로겔백작이 그를 발견해 그의 준엄한 생활을 보고 탄복하며 많은 선물을 주려 했다. 그러나 욕심이 없는 그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로겔 백작은 그 후로도 가끔 와서 그에게 좋은 의견을 들었는데, 그는 브루노를 존경한 나머지 억지로 전답을 기증해 그와 그의 동료 수도자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델 라 토레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샤르트르 수도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그곳에 성 마리아 수도원을 세우고, 운명할 때까지 거기서 엄겨한 은수생활을 했다. 또한 그는 시편과 성 바오로의 편지들에 대한 주석을 썼다.
브루노는 죽음이 가까움을 알고 제자들을 모아 자기의 부족한 점을 사과하며 신경을 외우고, 1101년 10월 6일에 편안히 운명했다. 그의 유해는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시성식을 거행하지 않았고 다만 레오 10세 교황이 1514년 그의 축일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났다.
성교회의보석. 카르투시안수도회와 성 브루노.
연중내내 눈 덮인 프랑스 알프스산 중턱(해발 1300미터)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 <샤르트뢰즈>라고도 하는 이 카르투시안 수도원은 철저한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원이며, 1081년 성 브루노가 창설한 카르투시안 수도회이다.
사방이 벽으로 갇힌 곳에서 바깥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매일 한끼만의 식사로 소재를 지키며 세상 모든 인간적 재미와 흥미를 떠난 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누리는 이곳 수도승들의 세상을 떠나 홀로 선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한 성소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세상은 이들 수도승들의 희생과 보속을 시대에 뒤떨어진 우둔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 희생과 보속이 쓰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나 해당 되는 말이지,사실 이들에게는 너무도 즐거운 영예이다. 많은 이들은 이들의 은둔생활이 세상을 외면하는 사랑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들이 매일 홀로 숨어서 주님께 올려 바치는 미사성제, 희생과 보속,기도,모든 인간적 아픔등이 누구들 위한 것인지를 안다면! 이들이야 말로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주님께 호소하고 있는것이다. 이 혼탁한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사랑의 주체인 것이다.
이 수도원은 세상의 변천에 동승하지 않고 거의 천년동안 초기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 계승하고 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을 때, 거의 모든 수도회가 더 이상 엄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모두 완화된 규칙을 채택했으며, 흑사병이 지나간 후에도 윈래의 엄률로 돌아오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카르투시안회 만이 단 한번의 회칙 개정도 없이 고유의 엄률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카르투시안 수도승들은 각자 은수처에서 독거생활을 한다. 돌덩어리로 지은 수 백년된 은수처는 3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작업실,장작보관소,화장실이 있고, 2층은 침실,기도실,공부방,성모경당이 있으며, 3층은 바닥 전체에 모래가 깔려있다. 하느님과 함께 숨고 싶을때 사막 같은 이곳에서 기도할 수있다.
하루의 일과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저녁 7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저녁 11시 30분에 다시 일어나서 밤기도를 마친 후 다시 새벽 3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음식은 점심 한끼만 제공되는데,조그만 구멍문을 통해 들어온다. 아침식사는 없고 저녁은 빵과 음료수만 먹을 수 있다. 카르투시안은 어떤 경우에도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콩이나 치즈를 자주먹느다.매주 금요일은 물과 빵으로 때운다. 점심에 먹은 식사가 남았더라도 남겨 놓지 않으며 오후 2시 이전에 음식창을 통해 모두 반납한다.
하루에 3번 - 미사,저녁기도,아침기도때 - 수도승들은 각자의 은수처를 나와 성당으로 향한다. 수도원내의 고풍스러움,조각들,성화들,수도원임을 인식시켜주는 여러 분위기들이 배어있는 복도만 걸어도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수도복 두건을 푹 덮어 쓴 채 성당으로 향하는 수도승들의 모습에 이미 기도할 마음의 준비가 갖춰진다. 이곳의 기도의 양은 타 수도원의 배가 넘는다.
수백년동안 전승된 고유의 성무일도서가 있는데 모두 그레고리안 성가로 되어있어 이 기도의 아름다움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중세기부터 내려오는 가톨릭 전례를 그 원형대로 보존해 온 수도원이다. 모든 전례는 라틴어로 한다.라틴어 만큼 하느님을 아름답게 찬미할 수 있는 언어 또한 없기 때문이라고한다.
전례의 절정은 ’녹턴’이라는 밤기도(성무일도의 아침기도에 해당됨)인데, 자정에 시작해서 새벽 3시에 끝나는 장대한 기도이다. 그레고리안 성가로 읊어지는 모든 시편은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 이곳 수도승들은 거의 모든 시편을 암송하기 때문에 불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은은히 성가로 암송한다. 옆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중세풍의 대성당에 울려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그 여운... 불빛이라곤 감실의 불빛만이 보인다.
수도승들은 봉쇄수도승,평수도승,일반수도승,이렇게 3계층으로 나눠져있다. 봉쇄수도승들은 모두 사제이다. 하루에 세번 성당에 모여 아침기도,미사,저녁기도를 드리는 것 말고는 절대로 각자의 은수처를 떠날 수 없다. 철저히 갇혀서 하느님과의 일대일 관상에 정진한다. 이 사제들은 제대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미사를 드린다. 봉쇄수도승들이 각자의 미사를 봉헌하는 경당이 50여개나 된다. 그렇지만 대성당에서는 평수도승과 일반수도승,그리고 아직 서품을 받지 않은 봉쇄수도승를 위해 한명의 사제가 교대로 미사를 봉헌한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사목적인 지향이 전혀 없고 -심지어 수도원 안의 다른 수도승에게 까지도- 오로지 관상에만 힘쓴다. 세상의 눈으로보면 이들은 세상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한 채, 각자 영신수련에만 힘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갇힘,세상과의 결별,희생,은수를 통해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충을 떠 안고 있는 것이다.
이곳 수도승들은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오후에 산악 행군을 한다. 운동 부족을 보충해서 육체적,정신적 침체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극기 훈련이며,비가와도 이 산악 등반은 취소되지 않는다. 등반은 굉장히 힘든 강행군이다. 도중에 가다 쉬는 일이 없다. 이 날 만큼은 서로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두사람씩 짝을 지어 가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짝을 바꾼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수 있도록 모두 한번씩 만난게 된다.이때 나누는 대화는 영적 주제들 뿐이다.
수도원 내에서의 침묵은 거의 절대적이다. 말 뿐만 아니라 발걸음,문소리 하나하나에도 조심하려고 애쓴다. 대성당입구엔 일렬로 나열된 개인 사물함이 있는데 전할 말이 있을 경우 쪽지를 써서 당사자 사물함에 넣는다. 이웃 사랑이 말 없이도 침묵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녹턴’또는 저녁기도 때 사용하는 카르투시안 성무일과 기도서는 어른 팔 길이만큼 크다. 건강한 수도승이 힘을 다해야 들 수 있을 만큼 무겁다. 그런데 성당에 맨 먼저 도착해서 이 모든 기도서를 꺼내 수도승들 가대에 페이지까지 정확히 펼쳐 놓은 수도승은 70 이 넘은 수도승이다.
신학과정에 있는 수도승들은 수도원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특정 분야의 권위자가 없을 경우,외부에서 신학교 교수를 초빙한다. 이곳 수도승들은 절대 외출을 하지않는다. 수도승마다 그 진척도가 다르기 때문에 진도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각자의 역량대로 따로 지도한다. 신학이 수업을 통한 지식의 주입이 아닌 각 수도승의 관상 생활 자체가 되도록 지도하며, 신학과 철학을 가슴으로 체험하고 이해하며,기도의 삶이 되도록 배려한다.
이곳은 대축일이 오면, 그 전날 물과 빵만으로 단식을 하며 미리 마음을 준비한다. 대축일이라고 해서 평소와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미사나 성무일과가 평소보다 더 아름답고 장대하다는 것 뿐이다.
지난 10월 6일은 이 수도원의 창립자이며 카르투시안 은수 생활의 시조인 브루노성인이 서거한지 900년 된 대축일 이었다. 유럽 가톨릭교회는 브루노의 해로 선포했기 때문에 전 유럽의 눈길이 이 수도원에 쏠렸다.
그러나 카르투시안 수도회는 성인의 은수자적 정신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의미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숲 속 암자 같은 작은 성당에서 조촐하게 미사를 봉헌 했다. 미사의 주례를 맡은 추기경과 지역 주교외에 그 누구도 초대받지 못했다. 이 수도원에게 그날은 더없이 큰 축일이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침묵과 평소와 다름없는 검소한 음식으로 지냈다. 그것은 과연 진정한 대축일의 정신이었다.
대축일 같은 툭별한 날이 아니면,사제는 십자가 상을 향해 미사를 드린다. 인상적인 것은 성찬전례 때 정적과 침묵 속에서 미사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성변화 시키고,거양하고, 교회와 인류를 위해 기도하는 순간이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에 주례 사제도 정적 속에서 속으로 경문을 외운다. 너무 엄숙하고 고요해서 긴장감마저 감돈다. 이 순간 미사 참례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하느님께 최고의 흠숭을 드린다.
현 시대에 주류를 이루는 수도회의 영성은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성교회가 택한 새로운 방향 전환이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결정된 교회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 움직임은 거의 모든 수도회의 영성에 영향을 끼쳤고 실제로 관상수도회조차 이에 동승하는 추세이다.
사랑.기쁨,화합의 영성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에 주신 선물임에 분명하지만, 이영성이 과거의 침묵,고독,희생등 수덕적 영성보다 더 낫고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교회가 몰랐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은 열어 주신 것이지, 과거의 길을 폐쇄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기쁨과 화합의 영성이 현 시대의 주류를 이룬다고 해서 과거의 수덕적 영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톨릭다이제스트 2002년 10월호에서 http://catholicdig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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