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옛고을 ´봉성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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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가 공무원 이문학넷포터의 글 |
2005-08-23 06:0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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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면 돌거북 고유제 ⓒ 데일리안 영덕봉화 |
봉화군 봉성면은 봉화군의 옛 고을(縣)이었던 유서 깊은 고장이다. 고구려 때에는 고사마현(古斯馬縣)으로 불려오다가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부터는 옥마현(玉馬縣), 고려에 들어와 제8대 현종 때부터 봉성현(鳳城縣)이라 각각 칭하게 되었다. 봉성은 예로부터 현(縣)이긴 했으나 관아가 설치되고 현감이 배치된 것은 조선왕조 태종3년(1406년)부터이다. 관할구역 또한 현재의 봉성면과 상운면 문촌과 안동시의 태자동 그리고 명호면의 낙동강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과 물야면 북지리 일부에 자리한 비교적 작은 고을이었다. 그런데 1895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안동부와 순흥부 그리고 영주군에 속해있던 지역을 편입시켜 15개면으로 구역을 정하고 봉화군으로 승격과 동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러다 조선말 우리 의병군과 일본 수비대와의 2차에 걸친 접전으로 군소재지의 주요 관아 건물이 소실되자 군청소재지를 춘양으로 옮기고 봉성면으로 격하되었다. 그런데 현 봉성 면사무소의 뒷산 정상은 예로부터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산이 있다. 소위‘금륜봉(金輪峰)’과 또 하나의 이름‘갈마봉(渴馬峰)’이다. 이 산은 옛날에 황소만한 금덩어리를 숨겨두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일제 때에는 금광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이 산은 우리의 전통풍수 지리학설에 천하명당을 27 종류로 구분하고 있는데 전국 어느 곳에도 없는 그 명당 두 종류가 공존하는 곳이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우리의 전통 풍수지리학인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을 살펴보자. 풍수지리학은 바람과 물의 순환 이치[天] 그리고 땅의 형성 과정과 지질적 여건[地]을 연구하여 인간과 동식물[人]이 자연 속에서 좀더 건강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터를 구하는 동양의 지리관이며 경험 과학적 학문이다. 명당(明堂)이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인 환경으로 길지(吉地)를 뜻하는 개념이다. 풍수지리는 그 원리에 따라 실제의 땅을 해석하려는 방법으로 간룡법(看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정혈법(定穴法)· 좌향론(坐向論)· 형국론(形局論)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명당을 상세히 논하고 있는 것은 정혈법이다. 명당은 혈 앞의 땅으로 내명당(청룡, 백호가 둘러싸서 마당을 이루는 곳)과 외명당(安山의 밖에서 朝山에까지 이르는 곳)으로 이루어진다. 청룡과 백호는 둘러싸 호위해 주고, 주산(안산)과 객산(조산)은 서로 영접한다. 이러한 풍수지리에 의한 명당은 좋은 환경을 갖춘 집 자리와 묘소자리를 얻기 바라는 사람들이 땅에 대한 사고가 논리화된 것으로 명당을 찾기 위한 작업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차원에까지 이어져 국도(國都)를 선정하고 흉한 기운이 일어나는 곳에서 비보(裨補)나 염승적 조치를 취하는 등 많은 분야에 걸쳐 이용되어왔다. 그 전통 풍수 지리학설의 천하명당을 27종류의 명당을 간략하게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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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면 돌거북 고유제 ⓒ 데일리안 영덕봉화 | ‘용이 맥을 끌고 내려와서 뒤 돌아본다’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과 ‘임금이 신하에게 예를 받든다’는 군신봉조형(君臣奉朝形),‘봉황이나 금계가 알을 품는다’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뱀이 수풀을 헤치고나온다’는 생사출림형(生蛇出林形),‘지네의 모습을 닮았다’는 오공형(蜈蚣形),‘사나운 범이 수풀을 헤치며 나온다’는 맹호출입형(猛虎出入形),‘장군이 서로 마주 본다’는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배처럼 생겼다’는 행주형(行舟形),‘신선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둔다.’는 선인대국형(仙人對局形),‘달밤에 토끼가 달을 본다’는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소가 누웠다’는 와우형(臥牛形),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여인의 젖가슴을 닮았다.’는 유혈(乳穴),‘구슬을 꿰어 허리띠를 두른 듯한 모습’의 연주옥대형(連珠玉帶形),‘매화 꽃이 땅에 떨어진 모양’의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용이 구슬을 희롱한다’는 황룡농주형(黃龍弄珠形),‘바다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며 굴린다’는 해룡여의농주형(海龍如意弄珠形),‘연꽃이 물에 떠서 피어 있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용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늙은 쥐가 밭으로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금 거북의 모양’인 금구형(金龜刑),‘봉황이 둥지로 날아든다’는 비봉귀소(래)형(飛鳳歸巢(來)形),‘신령한 거북이 물을 마신다’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장수가 칼집에서 날카로운 보도를 꺼낸다.’는 보도갑출형(寶刀出甲形),‘미녀가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미려한 천을 밝은 달빛에 적신다.’는 완사명월형(浣沙明月形),‘거북이 누워 있다.’는 귀미형(龜尾形) 형국 등이다. 그런데 봉성면에 위치한 금륜봉과 갈마봉은 천하의 명당인 동시에 재미있는 유래와 전설이 전해온다. 금륜봉은 배산면양(背山面陽)의 봉황새가 앉는 모양과 ‘봉황이 둥지로 날아든다.’는 형국의 소위 비봉귀소형국(飛鳳歸巢形局)의 명당으로 옛날 성곽 안에 오동나무가 밀림을 이루어 길조인 봉황새가 서식하여 봉성(鳳城)이라는 지명을 명명하였다 한다. 이 금륜봉이라는 산은 조선시대 봉성현의 어느 현감이 중국의 금륜봉과 모습이 닮았다 하여 금륜봉이라고 이름 하였다 한다. 중국의 금륜봉 앞 연못의 검은 물과 같이 봉성현의 선비들이 글을 많이 쓰도록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같이 중국에 있는 금륜봉의 유래를 더듬어 본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 ; 303~361)는 중국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동진(東晋)시대에 살았던 왕희지는 우군장군(右軍將軍)까지 되어 흔히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왕희지는 340년 무렵에 강주(江州 ; 현재 구강) 자사(刺史)로 왔다가 관직을 그만둔 후 여산 남쪽 금륜봉(金輪峰) 아래에 별장을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산수를 감상하며 글을 많이 썼다고 한다. 이때 왕희지가 먹을 갈아 글을 어찌나 많이 썼든지 연못이 거의 흑색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름 하여 세묵지(洗墨池)라 불린다. 유명한 난정서(蘭亭序)를 쓴 절강성 소흥(紹興)과 강서성 무주(撫州)에도 왕희지의 묵지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왕희지가 여산에서 도야하여 우아한 글씨체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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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거북 고유제 ⓒ 데일리안 영덕봉화 |
왕희지와 관련하여 여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여산에 사는 한 도사가 예쁜 거위(鵝)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를 본 왕희지가 거위를 팔라고 하였다. 도사는 돈은 필요 없으니 왕 선생이 도덕경(道德經)을 한 폭 써주면 거위를 그냥 주겠노라고 하였다. 왕희지가 흔쾌히 일필휘지로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가져왔다. 왕희지는 별장 뒤쪽에 아지(鵝池)를 만들어 거위를 길렀는데, 거위에게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거위가 부리를 목으로 돌리는 동작과 발로 물을 헤치는 모습을 세밀히 관찰하고, 이를 붓을 놀리는 데 적용하여 마침내 우아하고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 왕희지가 강주를 떠난 후 왕희지의 별장은 귀종사(歸宗寺)가 되었다고 한다. 귀종사지(歸宗寺誌)에는, 귀종사가 340년에 세워진 절인데 왕희지가 서역승 달마다라(達磨多羅)에게 기증하였다고 하였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금석가인 옹방강(翁方綱)은 묵지기(墨池記, 1787)를 써서, 왕희지가 달마다라에게 기증했다가 후에 서역승 불태야사(佛태耶舍)가 와서 귀종사란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임천(臨川)에도 묵지가 있다고 하지만 여산의 묵지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고증하였다. 또 다른 산 이름 봉성면의 갈마봉은‘목마른 말이 물을 먹으러 가는’모양의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의 명당이다. 이 갈마형국의 혈(穴)앞에는 연못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못이 없으면 연못을 파서 비보(裨補 : 형국의 모자람을 도와서 채워 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마 형국은 ‘목마른 말(생기발랄한 용맥)이 다른 생각 없이 급히 물로 달려드니 지기(地氣)를 응집하여 산의 기운이 발복(發福)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전 봉성현의 소재지에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연못과 인공으로 조성된 연 못이 열 곳 이상 있었다 한다. 그 연못은 구 봉성지서 터와 봉성향교 앞, 현 봉성 복지회관 앞, 봉성장터 등 곳곳에 늘려 있었다 한다.
이 고을은 연못(물)이 있어 사람들이 건강하게 발복하며 살아 갈 수 있으나 물이 없을 경우 원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해(害)를 당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실제 이곳에는 대대로 많은 젊은이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경우 등 해를 당한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고 연세 드신 동네 어르신 들이 들려주었다. 이 같은 이치는 풍수 지리학상 물과 불은 상극으로 물만 있으면 불이 성하게 된다는 것.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물에 사는 거북을 상징하는 바위를 모셔 그 기(氣)에 눌려 불의 화(禍)를 피할 수 있었다 한다. 물론 갈마봉 정상으로부터 좌향과 혈을 맞춰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 거북을 놓았었다. 그로서 봉성장터 앞에 있던 연못에는 달과 별과 함께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무병장수와 잡귀・잡신을 쫓는다는 돌 거북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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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거북 고유제 ⓒ 데일리안 영덕봉화 |
아이러니 하게도 이 곳의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숯불과 연기가 등천하는 고을로 변하게 되어 오늘날 돼지 숯불 요리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그 돌 거북이 제9회 봉성돼지숯불 축제장 정리 공사를 하던 지난 8월초 그‘전설 속의 돌 거북(길이 190cm, 너비 96cm, 높이 86cm)’이 발견되었다. 이에 원래 돌 거북이 있었던 위치에서 조금 벗어난 공터에 안치하고 고유제 및 축제 성공 기원제를 함께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 8월 13일 오전 11시 공민왕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는 유서 깊고 고빛 찬란한 봉성장터의 봉서루(鳳棲樓) 앞에서 경건하게 제례행사가 올려졌다. 이 행사에는 초헌관의 재배(再拜)와 참사자 일동재배, 축관의 독축, 제주와 참사자 전원 재배, 아헌관의 재배, 종헌관의 재배 순 등으로 이어졌다. 이 날 축관이 독축한 축문은 다음과 같이 고했다.“을유 8월 13일 오전 11시 바야흐로 봉성면 번영회원과 축제위원, 그리고 면민 일동은 제9회 봉성돼지 숯불축제 기원 및 돌 거북님 고유제를 천지신명과 갈마산 신령님께 엎드려 고하나이다.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님과 돌 거북님이시여! 옛 고을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뜻 깊은 이곳 봉성 장터에서 제9회 봉성돼지숯불축제 성공기원과 돌 거북 고유제를 전체 축제위원과 봉성면민의 정성을 모아 상서로운 제를 올리나이다. 을유년 제9회 돼지숯불 축제의 유래 없는 대 성공적인 추진이 이뤄지도록 하여 주시옵고, 돼지 숯불 축제를 찾아주신 내외 관광객은 물론 봉화군민과 봉성면민 여러분의 가정마다 자손만대 안녕과 번영을 이루도록 하여 주십기를 엎드려 고하나니, 천지신명과 거북님이시여 이 한잔 술을 흠향하여 주옵소서! 을유년 8월 13일 봉성면 돼지숯불 축제위원 및 봉성면민 일동 배(拜)”. 봉성면민들이 이날 올린 축문과 같이 희망적인 소원과 연못이 하루속히 복원되고 돌 거북을 안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삶의 앞길을 가로막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이곳을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조성 나날이 발전하는 봉성면으로 이어지길 기원한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 ; 303~361)는 중국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동진(東晋)시대에 살았던 왕희지는 우군장군(右軍將軍)까지 되어 흔히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왕희지는 340년 무렵에 강주(江州 ; 현재 구강) 자사(刺史)로 왔다가 관직을 그만둔 후 여산 남쪽 금륜봉(金輪峰) 아래에 별장을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산수를 감상하며 글을 많이 썼다고 한다. 이때 왕희지가 먹을 갈아 글을 어찌나 많이 썼든지 연못이 거의 흑색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름 하여 세묵지(洗墨池)라 불린다. 유명한 난정서(蘭亭序)를 쓴 절강성 소흥(紹興)과 강서성 무주(撫州)에도 왕희지의 묵지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왕희지가 여산에서 도야하여 우아한 글씨체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왕희지와 관련하여 여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여산에 사는 한 도사가 예쁜 거위(鵝)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를 본 왕희지가 거위를 팔라고 하였다. 도사는 돈은 필요 없으니 왕 선생이 도덕경(道德經)을 한 폭 써주면 거위를 그냥 주겠노라고 하였다. 왕희지가 흔쾌히 일필휘지로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가져왔다. 왕희지는 별장 뒤쪽에 아지(鵝池)를 만들어 거위를 길렀는데, 거위에게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거위가 부리를 목으로 돌리는 동작과 발로 물을 헤치는 모습을 세밀히 관찰하고, 이를 붓을 놀리는 데 적용하여 마침내 우아하고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 왕희지가 강주를 떠난 후 왕희지의 별장은 귀종사(歸宗寺)가 되었다고 한다. 귀종사지(歸宗寺誌)에는, 귀종사가 340년에 세워진 절인데 왕희지가 서역승 달마다라(達磨多羅)에게 기증하였다고 하였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금석가인 옹방강(翁方綱)은 묵지기(墨池記, 1787)를 써서, 왕희지가 달마다라에게 기증했다가 후에 서역승 불태야사(佛태耶舍)가 와서 귀종사란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임천(臨川)에도 묵지가 있다고 하지만 여산의 묵지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고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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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제 ⓒ 에일리안 영덕봉화 |
또 다른 산 이름 봉성면의 갈마봉은‘목마른 말이 물을 먹으러 가는’모양의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의 명당이다. 이 갈마형국의 혈(穴)앞에는 연못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못이 없으면 연못을 파서 비보(裨補 : 형국의 모자람을 도와서 채워 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마 형국은 ‘목마른 말(생기발랄한 용맥)이 다른 생각 없이 급히 물로 달려드니 지기(地氣)를 응집하여 산의 기운이 발복(發福)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전 봉성현의 소재지에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연못과 인공으로 조성된 연 못이 열 곳 이상 있었다 한다. 그 연못은 구 봉성지서 터와 봉성향교 앞, 현 봉성 복지회관 앞, 봉성장터 등 곳곳에 늘려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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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거북 고유제 ⓒ 데일리안 영덕봉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