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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잃고도 쉬쉬하기만
증언자 : 양희영(남) 양희태(남)/양찬모(아버지)
생년월일 : 1961. 7. 30(20세), 1964. 1. 21(17세)
직 업 : 고입재수생, 중학생.(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 10
개 요
광주민중항쟁 기간 중에 두 아들을 잃은 양찬모 씨는 사후에 충격으로 부인까지 잃고 만다. 1980년 5월 22일, 23일에 각각 두 아들의 시신을 찾아 영암 공동 묘지에 안장하고 모든 사실을 숨긴 채 살아왔다. 1984년 유족회에 참여하면서부터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민중항쟁 진상규명 운동에 힘쓰고 있다.
아이들이 걱정스러워 22일 상광
우리 가족은 1980년 5월 18일에 있었던 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해 3명의 가족을 잃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나는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농업을 본업으로 살던 평범한 농민에 불과했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고 본적지인 영광군 신월리에서 중농 정도의 살림을 꾸리며 꾸준히 영농에만 몰두해 왔다.
1980년 5월초까지는 여느 농가처럼 몇 명의 자식은 타지에 내보내고 몇 명은 품에 안아 키우는 화목하고 단란한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로 내보냈던 자식 중에 셋째 희영이와 넷째 희태가 5·18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희영이와 희태는 월산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며 자취를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 사놓은 집에서 살았다.
희영이는 1980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독서실을 다니며 고입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넷째 희태는 1978년에 송원중학교에 입학한 후 1979년에 몸이 좋지 않아 잠시 휴학하였다가 1980년 3월 5일, 2학년으로 다시 복학하여 착실히 학교에 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광주 월산동 집에는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이 군대에 간 뒤라 희영이와 희태 둘이만 살고 있었다. 살림을 따로 내놓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던 나는 1980년 늦게야 광주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희영이와 희태가 아무래도 사내아이들이고 해서 걱정이 되어 그냥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와 아내는 5월 22일 아침 일찍 걸어서 광주로 올라와 월산동 집에 아이들이 없었다. 그때 옆방에 세들어 살던 아주머니에게 아들들이 언제까지 집에 있었느냐고 물으니 전날인 21일에 희영이 친구들 30명 정도가 떼거리로 찾아와 그들이 가지고 온 맥주 등을 마시고 놀다가 함께 나갔다고 했다.
처음에 희영이는 밖에서 친구들이 부르면 시골 갔다고 하라고 세들어 살던 아주머니에게 부탁까지 했는데 친구들이 담을 넘어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함께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 했다. 희태는 그전에 이미 밖으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옆방 아주머니가 아이들이 남광주 쪽으로 몰려가는 것 같더란 말을 해주어 나는 남광주역 쪽으로 방향을 잡아 아이들을 찾으러 나섰다. 아내는 아내대로 찾으러 다니라 하고 나는 나대로 집을 나섰는데 광주천변 으슥한 곳에 버려져 있는 시체도 여러 구 있었다. 도중에 길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이 '어디어디에 가면 시체가 있다더라'든가 도청 쪽엔 못 갈 것이란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우리 아이들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양동에 살고 있는 고향 친구인 정정희를 찾아가 함께 시내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혹시나 하면서도 이상하게 아이들이 살아 있으리란 생각보다는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4명의 시체 속에 셋째 희영이가
그러던 중 오후 5시쯤, 백운동 로터리에서 100미터 거리인 효천행 철길 골목에 4구의 시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살펴보니 셋째아들 희영이가 그 속에 있었다.
우리 희영이는 도망가다가 총에 맞았는지 목 뒤쪽에 총 맞은 흔적이 있었다. 나는 친구 정정희와 함께 5만 원을 주고 봉고차를 빌려 희영이를 영광 공동묘지로 실어다 묻었다. 시외통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때라 나는 남평 쪽으로 해서 사창으로 빠져 겨우 영광 공동묘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영광에 도착해 희영이를 묻은 시간은 저녁 8, 9시경이다. 그날은 시간도 늦고 해서 영광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5월 23일, 날이 밝자 나는 친구 정정희와 함께 문장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 문장에서 택시로 송정리까지 왔다. 시외곽에서 광주로 바로 들어가는 교통편이 없던 때였다. 송정리에서 광주로 들어가는 차가 없어 하는 수 없이 걸어서 광주로 갔다. 집에 도착해 아내에게 희영이의 소식을 전하자 아내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더니 끝내 혼절하고 말았다. 친구 정정희는 광주에 도착하자 자기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아내가 겨우 정신이 들자 뉘어놓고 나는 다시 희태를 찾으러 나섰다.
이번에는 월산동 집을 사들일 때 도움을 주어 친분이 있던 김준옥 씨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전화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화정동 그의 집까지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가 도와주겠다고 해 함께 시민 수송차량으로 제공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이번에는 도청과 시청 등을 돌아다니며 희태를 찾았으나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3구 시체 속에 넷째의 시체가
한참을 돌아다니다 주월동 대동고 근처까지 가게 되었는데 대동고 옆의 골목(도로) 언덕 위에 세 구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죽은 지가 오래 되었는지 시체 3구가 모두 상당히 부패되어 있었고 악취가 심하게 났다. 그 3구의 시체들은 그곳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죽은 다음 그곳으로 실려와 버려진 것 같았다.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형태로 마구 꼬부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 우리 희태가 있었다. 우리 희태는 목에 큰 점이 있어서 상당히 부패해 있었지만 얼른 알아볼 수 있었다. 총에 맞지는 않았고 심하게 두들겨맞아서 죽은 것 같았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분명히 시체를 보면서도 도대체 사실 같지 않았다. 설마설마 하면서 하나라도 살아 있기를 바랐는데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나자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함께 있던 김준옥 씨가 나를 대신해서 인부 2명과 봉고차를 불러왔다. 희태 또한 어쩔 수 없이 영광 공동묘지 희영이 옆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희영이에 이어 넷째아들 희태마저 묻고 광주 월산동 집에 돌아와 나는 24일까지 아내와 둘이서 망연히 시름을 달래야 했다.
5월 25일 넋이 나가버린 아내를 데리고 영광집으로 내려가니 영광경찰서 사건과장 양승균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만약 우리 희영이와 희태가 광주사태 때 죽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남은 식구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니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죽은 자식은 어차피 죽은 것이고, 산 사람이나 살자는 생각에 누가 조사를 나오면 절대 자식 죽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다 보니 유족에서 제외됐는지 지금까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다행히 그때 내가 바로 두 아이의 사망신고를 해놓아서 지금 나의 주장이 거짓이 아님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아내는 정신착란으로 고생하다 죽고
그렇게 누구한테 내놓고 말도 못 하고 그해는 이미 시작해 놓은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도저히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 광주로 이사했다. 양동시장에서 채소 등을 취급하는 가게를 내어 광주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고향에서 사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이사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내는 두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책가방을 메고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희영, 희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는 등 점점 정상인의 모습을 잃어갔다. 아내의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혹시나 분위기를 바꾸면 나아질까 생각하여 월산동 집을 팔고 화정동 제일교회 옆으로 이사를 했다.
아내를 교회에 보내고 그래도 안 되어 조용한 곳에서 쉬면 될 것 같아 여러 군데 절에도 있게 했다. 증심사에서만도 8개월을 지냈고, 김재곤 정신과병원과 기독교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채로 있었다. 광주보다는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지내는 것이 아내에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장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실정이라 나는 1984년에 고향인 영광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처음 광주로 이사할 때 고향에 있는 논밭 을 그대로 두고 왔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쉬웠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던 중 1984년 5월 14일 갑자기 아내가 눈을 뒤집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80년 5월에 팔팔 뛰는 두 아들을 잃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마저 그 일로 목숨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내게는 1980년 5월이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어디 가서 우리 아들이 어떻게 죽었으며 내 아내가 왜 그렇게 됐는지를 내놓고 말 한마디 못하고 지냈다.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 남은 식구들에게 무슨 피해라도 올까봐 속으로만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삭여야 했다. 나는 짓던 농사를 마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아내의 장례를 치른 후 광주 화정동 집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유족회에 나가면서 내 어리석음 깨달아
그제야 나는 5·18 유족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역개발협의회라는 곳에서 천만 원씩인가를 유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면서야 비로소 유족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유족회를 나가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았다. 나를 그렇게 바보로 만들어버린 영광경찰서 사건과장 양승균이라는 작자를 죽이고 싶었다. 나는 도저히 그놈이 나한테 했던 그간의 행태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 그놈 집에 찾아가 한바탕 퍼부어주고 왔다.
여지껏 유족으로 되어 있지 않았던 까닭에 나의 주장이 거짓이 아닌가 하여 서부경찰서에서 조사를 해갔다. 안기부나 보안대에서도 내 뒷조사를 하고 다녔다.
1980년 당시 동사무소나 면사무소에 사망신고를 받지 말라는 지시가 왔었던가본데 내가 사는 영광군 신월리에서는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던지 우리 희영이, 희태의 사망신고를 받아주었다. 그때 내가 두 아이들의 사망신고라도 제때에 해 놓지 않았던들 지금에 와서 나의 주장이 거짓이기만을 바라는 저들한테 무엇으로 증명을 해 보일 수 있었겠는가? 더욱 분통한 생각이 든다.
넷째 희태 같은 경우는 학생이었던 까닭에 5·18 이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것과 그로 인해 1980년 7월 23일에 학교에서 퇴학처분이 내려져 어느 정도 5·18 때 희생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희영이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고 있었기에 내가 사망신고를 제대로 해놓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그때 그 사실을 눈으로 보고 함께 행동했던 증인이 있다 하더라도 간사하기 짝없는 저들은 내가 두 아들을 잃은 5·18 유족이라는 것을 부인했을 것이다.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우리 희영이와 희태를 망월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저들이 방해를 했다. 내가 1980년 5월 23일자로 사망신고를 해놓은 것을 나중에 내가 호적담당 직원에게 돈이라도 주고 작성해 넣은 게 아니냐고 진상여부를 조사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더니 결국에는 자기들 맘대로 호적에 사망날짜를 정정해버렸다. 1980년 5월 23일로 되어 있는 것을 1986년 5월 29일로 바꾼 것이다.
호적에는 정정된 사실이 그대로 적혀 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꼼짝없이 당해야 할 기막힌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묘를 절대로 이장하지 못하게 끊임없이 방해를 해와서 이장을 못하고 있었다.
진실을 밝히는 데 최선 다할 터
그러다 1987년 12월 8일에 유족회의 주선으로 이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대통령 선거로 분위기가 느슨해지면서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이만큼이나마 내 아들들의 죽음이 인정받게 된 것이 다행이라 여겨진다.
1984년 이후 유족회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있다.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경찰들한테 팔이 비틀리고 최루탄 파편을 맞아 머리와 발 등에 부상을 입는 등 당하기도 많이 당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도 않았다. 어느 경찰서건 나한테 걸렸다 하면 다 때려 부숴버렸다. 한번은 나한테 맞은 전경이 나를 고소한 적도 있었다. 내게 고발장이 날아오고 야단이었지만 나는 너희들 할 테면 해봐란 식으로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그 뒤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앞에서 싸우다 보니 광주경찰서 보호실에 갇히는 날도 많았고 장성 갈재 너머나 무주 구천동, 심지어는 강원도 어느 골짜기까지 실려가 내버려진 적도 있었다. 자연히 집안살림에는 등한하게 되어 현재는 거의 재산을 날려버린 상태이다. 현재 운영하는 양동에 있는 식당도 세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안다. 5·18 진상규명을 위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나처럼 억울하게 은폐되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하고 암매장 장소들도 찾아내야 한다. 최근에 주암동 야산에서 16구가 암매장된 곳을 찾았고, 교도소 부근에서도 20구 정도가 암매장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아들들의 시체도 찾았고, 지금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망월동에 묻혀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껏 시체는커녕 어디에 묻혀 있는지조차 모르는 행방불명자 가족들을 생각하면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내 자식들에 대한 진상조사와 보상문제만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보상금이란 것을 받아본 적도 없지만 설사 저들이 돈을 준다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5·18에 대한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야 하고, 전두환, 노태우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이 아니면 국민들의 돈을 모아 보상금으로 내놓은 것을 절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우리들의 자식들을 죽인 원흉들을 당장에라도 잡아다 죽여버리고 싶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더욱 올바른 진상규명을 위해 뛰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조사.정리 임금옥)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