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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정원] 장영철
씬 1. 서울 근교의 전원마을 전경 (새벽)
아담하고 울긋불긋한 전원주택들이 푸르스름한 새벽에 묻혀있다.
뿌연 여멍속에 산과 들의 푸근한 자태가 드러안다.
씬 2. 재용의 집 마당
주위 경관과 어울리는 말끔한 전원 주택이다.
마당 한쪽에 작고 아담한 화단이 보이고 그 옆으로 소채밭이 꾸며져 있다.
강씨가 소채밭에서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푸성귀를 뜯는 중이다.
낮은 울타리를 경계로 재용의 집과 이웃인 옆집에서
차노인이 맨손체조를 하며 강씨를 힐끔힐끔 엿본다.
강씨가 소쿠리에 푸성귀를 가득 담고 들어가려 하면.
차노인 늙어서 잠 안 오는 게 유센가…? 꼭두새벽부터 왜 땅을 헤집구 난리야…?
강씨 그런 영감은 얼마나 젊어서 식전부터 남의 집을 엿보는거유?
차노인 엿보다니…? 그 집에 뭐가 있다고 엿 봐? 암만 봐두 쭈글탱이 할망구 밖에 없
는데…
강씨 잠 안 오면 가서 간 밤에 채운 요강이나 비우슈. 며느리, 쌩고생 시키지 말구
…
강씨가 집안으로 들어간다.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씩 웃는 차노인.
씬 3. 재용의 방 안
잠든 재용을 흔들어 깨우는 강씨.
재용, 눈을 뜨면…
강씨 밥 먹고 출근 해야지. 오늘 일찍 나가봐야 한다며…
재용 (피곤한 모습으로 상체를 세운다)
강씨 (약사발을 내밀며) 마셔.
재용 아직도 남았어요?
강씨 새로 다렸어.
재용 … (내키지 않는 표정)
강씨 약사발 들 기운 있을 때 부지런히 마셔. 한 평생 청춘인줄 알아?
재용이 약사발을 기울여 벌컥벌컥 마신다.
강씨의 대견한 듯 본다.
씬 4. 동 욕실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재용이 거울을 보며 양치질 중이다.
젊은 혜진이 들어와 뒹서 재용의 목에 냅킨을 둘러준다.
혜진이 행복한 표정으로 재용을 뒤에서 껴안는다.
강씨(E) 몇 번 말해야 알아들어?
재용이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보면 강씨가 재용의 뒤에 서있다.
재용의 목에 걸려진 냅킨…
강씨 양칫물 떨어뜨리면 새로 빨래 해야 돼. 그거 목에 두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아니면 정신 차리던가… (혀를 차며) 쯪쯪… 그저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이 거
쳐야 되지…
강씨가 나가고 재용이 가만히 앞에 둘러진 냅킨을 내려다 본다.
혜진(E) 양칫물 떨어뜨리면 빨래 새로 해야 하는 거 몰라요? 꼭 어린애 같다니깐…
씬 5. 동 식탁
재용과 영이가 식사를 하고 있다.
흡족한 듯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강씨.
재용 안 드세요?
강씨 바쁜 사림들부터 먹어. 나야 언제 먹어도 상관 있나...?
영이 오늘 부모님들 학교 오는 날이야. 학부모 참관 수업한데.
재용과 강씨의 시선이 잠시 만난다.
강씨 그걸 왜 이제 얘기 해?
영이 저 번에 할머니한테 말 했잖아. 할머니가 잊어 버리구…
강씨 몇 시까지 가는 건데?
영이 또 할머니가 올 거야?
강씨 그럼… 내가 안 가면 누가 가? 아빠 바쁜 거 몰라?
영이 저 번 때도 할머니땜에 얼마나 창피 했는 줄 알아? 수업중에 할머니가 내 자리
바꿔달라고 해서 수업 망쳤잖아.
강씨 눈도 나쁜 애가 맨 뒤에 앉으니까 그랬지.
영이 키 순서대로 앉는거란 말야.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용 영이야… 할머니한테 무슨 발버릇이니…
영이 … (뾰루퉁해서 입을 다물면)
재용 (강씨에게) 제가 갈께요.
강씨 무슨 소리야? 내가 가야지. 이 집안엔 내가 나서야 만사형통이라고…
씬 6. 재용 집 마당
재용과 영이, 강씨가 나온다.
옆집, 명철이 진희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며 차에 타는 모습이 보인다.
명철의 차가 떠나자 진희가 다정하게 손을 흔들다가 집안으로 들어간다.
강씨가 재용의 눈치를 살피며 그 모습을 본다.
재용 다녀오겠스빈다.
재용과 영이가 차를 타고 나간다.
한껏 다정한 표정으로 진희처럼 손을 흔들어 보이는 강씨, 차노인이 나오자 안색이 변한다.
강씨 세상 혼자 사는 거 아닌데 남 생각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니우?
차노인 또 뭔 트집이야?
강씨 누가 있으나 없으나 끌어 안고 얼굴 부비니 원 남사시러워서…
차노인 우리 애들…? 아, 젊은 부부가 당연하지 뭘 그래? 왜, 그 나이에도 질투 나나?
강씨 (쏘아보며) 흉물스런 늙은이.. 하긴 그 집안 내력이 어딜 가나…
씬 7. 건축 사무실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다.
재용이 급하게 들어서면서 웃옷을 벗는다.
여기저기 인사하는 사람들.
여비서 (재용을 따라다니며, 빠른 어투로) 남부건설 사장님한테 전화 왔었어요. 박병
원 원장님과 점심 약속 있고요… 오후에 분당 현장 시찰 스케줄 잡혔어요.
재용 고마워. 혹시 커피 한잔 마실 수 있을까?
여비서 (미소. 장난스럽게) 그렇겐 안되겠는데요…?
여비서가 가고 재용, 설계팀을 지나다가 도면을 본다.
재용 이층 전면 유리로 수정하는 거 알지?
청년 어제 늦게까지 일하셨다면서 일찍 나오셨네요? 저희들한테 맡기시고 느즈막히
나오셔도 되는데.
여비서, 커피와 전화기를 들고온다.
여비서 대구 현장이에요.
재용 (커피를 마시며 수화기를 들고) 나야… 설계 기본 골격을 유지하는 선에서 요
구대로 해 줘. 그 쪽도 전혀 문외한은 아니니까… 알았어, 수고.
재용이 수화기를 여비서에게 주려는데 또 벨이 울린다.
재용 예, 한빛 건설타운입니다…… 아, 박전무님… 그렇지 않아도 연락 드리려던 참
이었습니다. 내부 색깔이 맞지 않아서 다시 칠하기로 했습니다… 물론이죠…
염려 마십시오, 예…
재용이 수화기를 여비서에게 건넨다.
길게 한숨 돌리며 청년에게 어깨를 들썩거려보는 재용.
재용 이래도 집에서 늦게까지 수리고…?
청년 (과장스럽게) 죽을 죄를 졌습니다.
씬 8. 재용의 방 안
강씨가 청소를 하다가 침대 밑에서 재용의 속옷을 꺼낸다.
강씨 이게 뭐야… 이런…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른다)
씬 9. 사무실, 소장테이블
재용 (전화중)
강씨(F) 사람이 어째 그 모양이야? 침대 밑이 빨래통이야? 벗었으면 후딱후딱 내 봐야
할 거 아냐. 내가 자네 빤스 한 두번 봐?
재용 (머리를 가볍게 치며) 죄송합니다. 깜빡 잊었어요.
씬 10. 재용 방 안
강씨 (수화기 들고) 다른 건 다 참아도 궁상 떠는 건 못 참아… 자네가 뭐가 부족해
서 홀아비 티내나?… 알았으면 됐어. 오늘 일찍 들어오고…
강씨, 수화기를 내려놓고 빨래를 집어든다.
나가려다가 문득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사진을 본다.
젊은 재용과 혜진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다.
강씨 (사진을 어루만지며) 나, 잘하고 있지? 유서방, 신경쓰지 마. 내가 니 몫까지
다하고 있으니까… 두고 봐라. 니 서방, 세상 어떤 현모양처 부럽지 않게 내,
뒷바라지 다 할 테니…
씬 11. 여자 중학교 전경
(E) 영이의 영어책 읽는 소리.
씬 12. 여학교 교실
학부모들이 교실 뒤쪽에서 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영이가 일어서서 중 1 영어책을 읽고 있다.
대견한 듯 영이를 보고 있는 강씨.
선생님 됐어요. 다음은 누가 읽어볼까…
하는데 난데없는 박수소리…
보면 강씨가 혼자서 힘껏 박수를 치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강씨에게 쏠리고…
영이, 창피한 듯 책상에 엎드린다.
씬 13. 카페 안 (밤)
실내장식이 아담한 홀 안.
스탠드에 재용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
양마담 어쩐일이야? 한동안 안보이길래 배신했구나 했는데.
재용 양경주 배신했다가 어떻게 되게...? 난 더 살구 싶은 사람이야.
양마담 (재용을 유심히 보다가) 요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영 아닌데…?
재용 일은 무슨… 피곤해서 그래. 바쁜 거 알잖아.
양마담 아냐… 피곤한 사람은 어깨가 지치는 법이야. 유소장은 지금 눈빛이 많이 지쳐
있어.
재용 …?
양마담 외로운 사람들의 공통적인 증상이지.
재용 … (픽 웃는다) 돗자리 깔아야겠군.
양마담 (미소) 벌써 이 장사 십년째야. 척하면 삼천리, 척 척 하면 육천리라구.
재용 … (미소)
양마담 참, 장모임은 어떠셔? 그 기운 여전하신가?
이때, 핸드폰 벨이 울린다.
재용 (핸드폰에 대고) 저에요, 장모님. 여기 양경주네 가게에요.
씬 14.
씬 15. 카페
강씨(F) 술먹지 말고 일찍 들어와. 나이도 휠씬 지난 사람들이 친구입네 뭐네 하면서
얼굴 맞대고 있는거 별로 안좋아 보여.
재용 (수화기 들고) 금방 들어갈게요. 영신 자죠?… 예…
재용이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양마담 대단한 양반이야. 젊어서 혼자되고 당신 딸마저 앞세우고도 끄떡 안하시니…
재용 … (표정이 어두워지며 술잔을 기울인다)
양마담 (표정 살피며) 괜히 말 꺼냈나…?
재용 아냐… 벌써 십년이 지난 일이잖아. 괜찮아…
양마담 정말이야?
재용 사람에겐 망각이란 희망이 있다… 자네가 해준 말 아냐…?
양마담 사건인데…? 혜진이 죽고 유소장 모습 보면서 솔직히 난 백년 갈 줄 알았어.
재용 실망했어?
양마담 솔직히 십년도 길었어. 유소장이니까 그만큼 했지.
재용 … (씁쓸히 술을 마신다)
양마담 어쨌든 혜진인 행복한 애야. 살아있는 내가 다 질투가 날 정도야.
씬 16. 재용의 집 안 (밤)
실내복 차림의 재용과 명철, 진희 부부가 차를 마시며 티타임을 작고 있다.
명철 … 근데 이 사람이 반응이 어땠는지 알아요? 당장 얼굴에 노을을 물더니 금방
이라도 입에서 거품이 끓어 넘칠 것 같더라구요.
진희 그럼… 나 말고 다른 애인이 있었다는데… 그것도 같이 동해안으로 삼박사일
여행까지 다녀왔다는데 호로… 별 거 아니에요… 그럴수도 있죠… 즐거워 할
줄 알았어?
명철 친구들이 장난 친 거잖아. 그렇다고 소주를 글라스에 붓고 벌컥벌컥 들이키냐?
친구들 보기 민망하게…?
진희 그만 말해…? 사실이든 아니든 아직 나 화 안풀렸으니까…
명철 왜…? 여기서도 한번 마셔보지 그래?
진희 자구 그럴꺼야?
씬 17. 강씨 방
문틈으로 거실의 명철부부가 보인다.
와… 하고 터지는 웃음소리…
강씨가 잔쯕 못마땅한 표정으로 문을 닫는다.
강씨 (혼잣말) 눈치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인간들… 여기가 지들 금술 자랑하는
데야, 뭐야?
(E) 명철과 진희의 웃음소리..
강씨 (냅다 소리지르는) 애 깨겠다. 좀 조용히 해!!
씬 18. 국도를 달리는 차 안 (아침)
재용 옆 자리에 영이가 가방을 무릎에 놓고 시무룩히 앉아있다.
재용 (힐끔보며) 요즘 무슨 고민 있니?
영이 아니…
재용 엊그레 아빠가 학교 못 가봐서 화난 거야?
영이 그런 거 아냐… (잠시 창밖을 보다가) 엄만 어떤 사람이었어?
재용 왜…? 엄마 보고 싶니?
영이 살아있는 동안 엄마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고 싶어. 딸로서가 아니라 같은 여
자로서야…
재용이 영이의 어른스러움에 내심 놀란다.
재용이 곁눈질로 영이를 훑어본다.
교복 상의에 가슴에 작은 볼륨이 보인다.
씬 19. 카페 안
세련된 옷차림의 선숙이 들어서자 양마담이 놀라며 반긴다.
양마담 이게 누가야…? 사람 간 떨굴라고 작정 한 거야? 못된 기집애… 연락 한번 없
다가 불쑥 나타나면 쌍수 들고 환영할 줄 알았니?
선숙 도로 갈까?
양마담 (미소, 가볍게 안으며) 이서 와… 언제 귀국했어? 미국 물이 좋긴 좋은가 보구
나? 세월이 너만 비켜갔나부다.
선숙 (둘러보며) 언니, 여사장님 분위기 난다. 좋은데…?
양마담 (의자를 내주며) 앉아. 간간히 니 소식 들었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미국 의사
하고 결혼도 했다며? 얼마동안 있을 거야?
선숙 공부 끝내고 아주 왔어.
양마담 코 큰 서방은 어떡하구…?
선숙 결혼 삼주년을 이틀 앞두고 이혼했어. 몰랐어? 꽤 됐는데…
양마담 (분위기 가라 앉으며) 미안하다… 몰랐어.
선숙 언니, 나 취직 좀 시켜 줘.
씬 20. 재용의 사무실
재용이 선숙을 안내하며 소파에 앉는다.
재용 (자료를 훑어보며) 양마담하곤 어떤 사이에요?
선숙 이모 친구예요. 지금은 언니가 됐지만…
재용 이만한 경력이면 실력을 의심하는 게 실례가 되겠고… 왜 페이를 하려고 하죠?
당장 인테리어 사무실을 개업해도 될텐데…
선숙 엘리베이터, 홈런, 복권…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예요. 힘들이지 않고 쉽게 목적
을 달성하거든요.
재용 … (미소) 일 합시다. (손을 내밀며) 유재용입니다.
선숙 (악수하며) 조선숙이예요.
씬 21. 미술 화랑 안
내부가 공사중이다.
선숙이 여기저기 살피며 노트를 하고 있고
재용이 요란한 차람의 화랑 여주인(50대)과 커피 마시며 얘기하고 있다.
여주인 바닥 느낌이 휠씬 좋아졌어요. 조명도 맘에 들구요.
재용 고맙습니다.
여주인 두 달 전에 불란서를 다녀왔었는데 그쪽은 화랑 자체가 미술품이더라구요. 결
국은 오너의 미술적 안목이 예술 자체를 완성시키는거죠.
이때 선숙이 다가온다.
선숙 실내 색깔이 틀렸는데요? 화랑으로서는 치명적이에요.
여주인 무슨 말이에요. 그게? 내가 선택한 색이 문제 있다는 거에요?
선숙 여기는 미술품을 걸어두는 데에요. 주변 색이 작품 자체에 영향을 준다면 주객
이 진도되는 거죠.
여주인 (거만하게) 이것 봐요. 나도 미대 나왔고 안목 하나로 화랑을 운영해 왔어요.
(선숙을 훑어보며, 재용에게) 구구에요? 못보던 얼굴인데…?
선숙 어쨌든 이 색으론 안돼요. 그림 대신 주방기구를 걸어두면 모를까…
여주인 뭐야…? 당신, 뭐 잘못 알고 있나 본데… 여기 주인은 나야…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선숙 물론 주문대로 하죠. 하지만 그림을 푸줏간에 걸어둘 순 없잖아요?
여주인 (안색이 변하며) 뭐… 뭐…?
선숙 모든 인테리어는 실용성 전제로 한 이후에 이름다움을 봐요. 무조건 화려하게
포장만 할려면 굳이 우리가 이 작업을 맡을 필요 없어요. 잘 아는 페인트 가게
에 물어보세요.
여주인 기가 막혀…
여주인이 말을 잃고 재용과 선숙을 번갈아 보다가 불쾌한 듯 밖으로 나간다.
씬 22. 강변도로 쪽을 달리는 재용의 차 안
재용 (운전하며) 방금 우린 고객 하나를 놓쳤어요.
선숙 알아요.
재용 난 서비스 정신을 중요시 합니다. 이를테면 손님에 대한 예의까지 포함한거죠.
선숙 난 이 일을 하면서 한번도 장사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나를 위한
일이고 작품을 위한 일이죠.
재용 … (선숙을 본다)
선숙 미안해요. 소장님이 대장이지만 난 부하가 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재용 … (보다가) 배 안고파요?
씬 23. 해장국집
선숙이 다소 게걸스럽게 먹는데에 열중한다.
재용이 밥을 먹다가 선숙의 못브을 본다.
선숙 (재용의 시선을 의식하고, 쑥스러운 미소) 아침을… 굶었거든요….
재용, 미소를 보이다가 손수건을 꺼내 입 주변을 닦는다.
선숙 사모님이 아주 섬세하신 분인가 봐요…?
재용 … ? (보면)
선숙 날이 선 와이셔츠 깃에 색깔 맞춘 넥타이와 손수건… 평범한 안목은 아닌데요?
재용 (밥을 먹으며) 관찰은 날카로운데 추리는 틀렸어요.
선숙 …?
재용 우리 장모님 안목입니다.
선숙 …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는)
씬 24. 카페 안
텅 빈 홀안에 음악이 흐르고 선숙이 혼자 위스키를 마시며 앉아있다.
음악에 심취하며 생각하는 듯…
양마담 (잔을 들고 와 앉으며) 일 할만 하니…?
선숙 유소장… 어떤 사람이야?
양마담 설력있고 성공한 사람이야. 그쪽 계통에서는 알아주는 베테랑이지.
선숙 그런 거 말구… 아주 개인적인거…
양마담 … (유심히 보다가 픽, 웃고) 너, 관심있구나…?
선숙 (당당하게) 아주 많이…
양마담 타인에 대한 매너와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 있고… 또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십대의 중년…
선숙 거기까진 알아.
양마담 십년 전에 교통사고로 부인을 잃었어. 지금까지도 혼자고.
선숙 … (표정에 생기가 돈다)
양마담 하지만 잘못 찍었어. 누구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이야, 유소장…
선숙 … (보면)
양마담 유소장 옆엔 아주 괄괄하고 기운 센 장모님이 계셔. 부모 없이 자란 유소장한
테는 어머니이자 죽은 아내의 분신 같은 존재지. 나도 옛날부터 안면이 있어서
몇 번 그 집에 가봤는데, 기가 질려. 당신 남편한테도 그렇겐 못 할거야.
선숙 뭘…?
양마담 집착이지… 아니, 집착같이 굳어져 버린 사랑이 맞을 거야. 가까운 친척도 없
이 딸만 바라보고 살아온 인생인데 이제 남은 건 사위밖에 없잖아? 어때, 듣고
나니까 간담이 서늘하지?
선숙 (위스키를 마시며) 내 성격 잘 알잖아. 쉬운 일은 하기 싫어 하는 거…
씬 25. 재용의 집 마당 한켠의 작은 터밭
초록색의 케일 아파리를 정성껏 다듬는 강씨.
차노인(E) (뒤에서) 뭐해?
강씨 (화들짝 놀라며) 아이쿠, 깜짝이야… 도둑괭이를 삶아 먹었나… 왜 뒤쿰치는
들고 들어와?
차노인 그게 뭐야?
강씨 (다시 이파리를 다듬으며) 서양 약풀이유. 이 놈 갈아서 우리 사위 먹일거요.
차노인 (혀를 차며) 자식이 부모 봉양해서 사은 줘도 부모가 자식 챙겨서 상주진 않아.
그런다고 사위가 아들 될줄 알아?
강씨 사위면 다 같은 사위줄 아나? 열 아들 안 부러운 게 우리 사위유.
차노인 자랑스럽기두 하겠다… 에잉… (질투나는)
강씨 이거 이파리까지 다 세놨으니까 해여 밥중에 몰래 뜯어갈 생각 마슈.
씬 26. 재용 집, 욕실 안
(E) 변기통에 물 내려가는 소리.
영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거울을 들여다 본다.
씬 27. 동, 거실
욕실에서 나오는 영이.
강씨가 TV를 보며 마늘을 까고 있다.
영이 … (머뭇거리는) 저.. 할머니…
강씨 (TV에 시선을 둔 채, 드라마에 몰입하며) 저런.. 저런...
영이 할머니…
강씨 응? 왜? 사과 까줄까?
영이 … (말을 못하는)
강씨 (다시 TV에 시선을 두며) 빨리 숙제하고 자. 오늘 숙제 많다며.
영이 … (할 말을 포기하고) 아빠 언제 와?
강씨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전화 왔어. 오늘 못 들어 올 거야…
영이, 처진 어깨로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씬 28. 건축 사무실 (밤)
재용이 혼자 남아있는 실내.
이때 노크소리 들리고 선숙이 들어온다.
재용 (놀라며) 밤중에 왠일이에요? 일 다 안 끝났어요?
선숙이 종이 가방에서 찬압을 꺼낸다.
먹음직스런 김밥이 예쁘게 담겨져 있다.
선숙 야식 좀 가져 왔어요. 아무래도 소장님이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실 것 같아서요.
재용 (의외지만) 고맙습니다. 그렇찮아도 출출하던 참인데… 같이 드세요.
선숙 제껀 여기 있어요.
선숙, 작은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따라 마신다.
재용 (먹으며) 맛있는데요…? 일하는 여성이 이렇게 음식을 잘해도 되는 겁니까?
선숙 … (미소)
재용 … (먹는다)
선숙 소장님은 왜 저에 대해서 한번도 안 물어보세요?
재용 (먹다가 보면)
선숙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화가 나더라구요. 적어두 한 배를 탄 동료구 동진데… 너
무 무관심한 거 아녜요?
재용 (다시 먹으며) 양마담한테 얘기 들었어요. 혹시 실례가 될까봐 피한거죠.
선숙 실례가 된다는 건 과거를 흠으로 생각한단 말인가요?
재용 … (본다)
선숙 난 이쁜 추억보단 아픈 기억을 더 존중해요. 상처가 클수록 세상을 깊게 볼 수
있으니까요.
재용 하지만 마음 깊숙히 골병이 들어요. 쉽게 놀라고… 또다시 아플까봐 지례 겁먹
고…
선숙 용기 없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변명이에요. 변명은 늘 편하죠.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 있으니까…
재용 … (본다)
선숙 난 절대로 날 속이지 않아요. 내 감정, 내 느낌들을 사랑하고 실천하죠.
재용 … (보면)
선숙 … (본다)
씬 29. 재용의 집 테라스 (낮)
재용이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햇빛을 즐기고 있다.
옆집에서 명철부부가 카메라를 메고 나온다.
명철이 재용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재용 어디 가나?
명철 야외 작업 나가는데 자꾸 이 사람이 따라온다지 뭡니까? 다녀오겠습니다.
다정하게 차에 타는 명철부부.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는 재용, 지긋이 눈을 감는다.
씬 30. 국도를 달리는 재용의 차 안 (꿈)
현재보다 좀 젊어보이는 재용 옆에 혜진이 앉아있다.
혜진이 시계를 보며 불안한 표정이다.
재용 그렇게 불안하면 애기 데리고 나올 걸 그랬지…?
혜진 사람 많은데 어딜 데리고 나와요?
재용 사람하군… 다섯 시간도 못 참아?
혜진 아빠하구 엄마하구 같은 줄 알아요? 귀에서 애기 우는 소리가 쟁쟁하다구요…
재용 장모임이 어련히 잘 알아서 보고 계실라구…
혜진 (불안한) 안되겠어요. 좀 빨리 가요, 여보…
재용 (미소) 알았습니다.
엑셀레다를 밟는다.
속력이 붙으며 커트길을 돈다.
갑자기 달려드는 대형트럭… 혜진의 날카로운 비명…
씬 31. 흔들의자에서 깜짝 놀라 눈을 뜨는 재용
눈뜬 재용의 시야에 혜진이 머리 위로 실루엣 같은 햇살을 받으며 보고 있다.
재용, 놀라며 본다.
강씨 괜찮아, 자네?
강씨다… 재용, 길게 한숨 쉬는…
강씨 꿈꿨구먼… 뭔 낮잠을 한밤중처럼 자누…
(E) 초인종 소리
강씨(E) 뉘시우…?
씬 32. 재용 집 거실
강씨가 현관문을 열자 선숙이 서있다.
영이와 함께 책을 보던 재용이 선숙을 보고 잠시 놀란다.
선숙 (재용을 보고 반갑게) 저예요, 소장님.
재용 (어색하게 맞이하며) 어서와요… 여긴 어떻게 찾았어요?
선숙 마을에서 물어보니까 금방이던데요…?
재용 (강씨를 소개하며) 장모님이에요.
선숙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강씨 (선숙을 살피며) 어서… 오슈…
선숙 (영이 보고) 어머, 니가 영이니? 이쁘구나.
씬 33. 마당
강씨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걸어나온다.
차노인 (울타리 밖에서) 누구야?
강씨 같이 일하는 동료래요.
차노인 동룐데 왜 하필 여자야?
강씨 (짜증섞인) 아, 여자가 동료면 안되라는 법있수?
차노인 (눈을 가늘게 뜨고 집 쪽을 보며) 묘해… 여자가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면 보통
정성이 아닌데…
강씨 근데, 이 늙은이가 뭔 소리를 하는거야? 사람 집에 사람이 오는 게 당연하지
뭐가 묘해?
차노인 당연하다며 왜 신경질이야? (다시 시선을 흘기며) 수상해… 냄새가 나…
강씨 냄샌 영감 몸에서 더 나니가 가서 발닦구 잠이나 자슈.
씬 34. 재용 집 거실
선숙이 벽에 걸린 사진을 본다.
재용과 혜진, 영이(두세살)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선숙 사모님이 상당한 미인이신데요… 영이도 엄마 많이 닮았어요. (집을 둘러보면)
집이 좋은 데요?
영이 아빠가 직접 지은거에요.
선숙 분위기가 그래… (영이에게) 참, 영이 선물 사왔는데…
영이 … (재용과 선숙을 번갈아 본다)
선숙 영이 방이 어디디? (작게) 아빠 몰래 주고 싶은데…?
영이 이쪽으로 오세요.
씬 35. 영이 방
선숙이 영이 침대에 걸터 앉아 선물 포장을 푼다.
작은 팬티와 브래지어가 나온다.
영이, 놀라면
선숙 이거 필요하지? 이젠 영인 어린애가 아냐. 예비숙녀야.
영이 … (감동받은)
선숙 (수첩을 건네며) 이것도 받아.
영이 이게 뭐에요?
선숙 (작게) 생리수첩이야.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야 돼. 이런 거 학교에서도 배우
지?
영이 (고개를 끄덕이면)
선숙 영이 나이땐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아. 누군가와 대화가 필요할 때지. 아줌마
하고 친구할까?
영이 … (보면)
선숙 사실 나도 친구가 필요하거든…
영이 (미소) 좋아요…
씬 36. 강씨가 창문 커튼 뒤에서 밖을 내다 본다.
재용과 선숙이 마당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다.
씬 37. 마당
선숙 놀랬어요?
재용 조금요…
선숙 소장님 사는 모습이 궁금했어요. 영이도 보고 싶었구요… 나 자주 와도 돼죠?
재용이 대답대신 뒤쪽을 돌아본다.
창문으로 강씨가 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숨는다.
이때 명철의 차가 들어오며 장난스럽게 클락션을 울려댄다.
선숙 누구에요?
재용 옆집 사는 사진작가에요. 말들이 많은 친구들인데… 한동안 시달리게 됐어요…
씬 38. 재용의 집 거실 (밤)
재용이 신문을 보고 있다.
영이가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고 강씨가 과일을 가져와 깍는다.
강씨 (재용을 살피며 애써 태연한 척) 그 여잔 가정도 없나부지? 일요일에 남의 집
에 다 놀러 오고…
재용 (신문에 시선을 두고) 이혼하고 혼자 살아요.
강씨 어쩐지… 눈자위가 불그르죽죽한 게 팔자께나 세게 생겼어.
영이 혼자 살면 팔자가 센 거야? 그럼, 아빠도 팔자가 센거네.
강씨 (표정 굳어지며) 남자하고 여자가 갔니? 여자한테 서방 잘 만나서 한평생 회로
하는 거 보다 좋은 상팔자가 어딨어?
영이 피, 할머닌 구식이야…
씬 39. 카페
재용과 선숙이 들어온다.
양마담 이게 뭐하는 짓들이야? 한동안 소식 한번 없다가 같이 나타나는 거야?
선숙 큰 거 한 껀 하고 우리 자축하러 왔어. 언니도 동참하는 거지?
오버랩
거품이 넘치는 맥주잔 세개가 부딛힌다
즐겁게 건배하는 세 사람.
양마담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린다.
재용 (마시다가 보고)
선숙 그렇잖아도 이쪽 계통에선 말이 많아. 환상의 커플이래… 우리 일하는 스타일
이 맞나 봐.
양마담 일하는 스타일이야 내가 알바 아니고… 두 사람, 분위기가 좋아. 꼭 오래 된
오누이같아.
재용 … (약간 당혹스러운)
선숙 참, 언니두… 이왕 쓰는 김에 연인이면 연인이지 오누이가 뭐유?
양마담 (깔깔대며) 애가 이렇다니까. 멍석 깔려고 비질만 해도 춤추는 애야. 얘가…
씬 40. 강변도로 (밤)
길게 늘어선 가로등 사이를 걷는 재용과 선숙.
약간의 취기가 있는…
재용 이번에 공사 따낸 건 순전히 선숙씨 공이에요. 인테리어 뿐만 아니라 대외 로
비에도 탁월할 줄은 미쳐 몰랐어요. 수고 많았어요.
선숙 어쩜 그렇게 내가 듣고 싶은 얘기가 쏙 빼놓을 수 있죠?
재용 …?
선숙 일 잘한다… 능력있다… 수고 많았다… 모두 결과로 얘기하는 것 뿐이잖아요.
재용 …
선숙 원인이면서 결과 인 것… (재용과시선을 맞추며) 감정을 알고 싶어요… 나에
대한 재용씨의 감정…
재용 (보다가, 시선 외면하며) 늦었어요. 여긴 택시가 잘 안 잡혀요. 저쪽으로…
하는데 갑자기 선숙이 재용에게 안긴다.
재용, 놀라운 표정으로 바뀌고…
선숙 (안긴채) 자신을 속일려고 하지 말아요. 우린 그 동안 충분히 외로웠어요. 앞으
로도 사랑할 시간이 많고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어요, 우리…
재용 (만류하듯) 선숙씨…
선숙 (더 깊이 파고들며) 제 감정, 이미 다 확인 됐어요… 재용씨의 아픔과 외로움
… 모두 껴안을 수 있어요…. 피하지 말아요… 재용씨 옆에… 이렇게 가까이
있잖아요.
재용, 더 이상 선숙을 떨쳐내지 못한다.
길게 드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
서서히 선숙의 어깨위로 손이 올라가는 재용의 그림자…
씬 41. 재용의 집 (밤)
강씨가 문을 열어주자 재용이 지친 모습으로 들어선다.
강씨 (재용의 조심스럽게 살피며) 술 마신거야? 차는…?
재용 택시타고 왔어요…
강씨 꿀물 타다 줄까?
재용 됐어요… 저 들어가 쉴게요.
재용이 돌아서서 들어가려 한다.
(E) 전화벨 소리…
재용과 강씨의 시선이 잠시 만난다.
강씨 이 밤중에 누구야…?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강씨의 표정이 굳어진다.
강씨 기다리슈… (재용에게 수화기를 건네면)
재용 (수화기를 들고, 강씨를 의식하며) 들어 왔어요… 아뇨… 내일은 집에서 쉴려
구요… 선숙씨도 좀 숴요. 예… 잘자요…
재용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강씨가 잔뜩 불안한 시선으로 재용을 본다.
재용, 안으로 들어간다.
씬 42. 재용의 방
재용이 겉옷을 벗어 걸어두고 힘없이 침대에 걸터 앉는다.
재용의 시선이 젊은 시절, 혜진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으로 간다.
재용이 손을 뻗어 사진을 가져온다.
활짝 웃는 혜진을 바라보는 재용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혜진(E) (놀라는 목소리) 이게… 정말 우리 집이란 말이에요?
씬 43. 마당 (회상)
재용과 혜진이 마당에 나와 집을 보고 있다.
재용 (미소) 맘에 들어?
혜진 (어린애 같은) 믿기지 않아요. 이게… 우리가 살 집이란 말에요?
재용이 팔짱을 끼고 푸근한 미소로 혜진을 본다.
혜진 (마당을 둘러보며) 저쪽에다 꽃밭을 키울 거에요. 저쪽엔 작은 텃밭도 갈거구
요… 참, 크고 흰 개도 한마리 있어야겠죠? 너무 근사해요, 여보…
혜진이 재용에게 안긴다.
혜진의 웃음소리가 맑고 길게 울려퍼진다.
씬 44. 재용의 방
혜진의 사진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재용이 고개를 떨군 채 사진을 어루만진다.
씬 45. 한뼘쯤 열린 재용의 방안을 강씨가 조용히 들여다 보고 있다.
강씨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있다.
씬 46. 욕실
치약을 짜고 잠시 거울을 들여다 보는 재용.
강씨가 넵킨을 재용의 목에 걸어주려 한다.
재용이 넵킨을 잡아 끌른다.
강씨 … (거울속에서 재용을 본다)
재용 이러지 마세요.
강씨 … (보기만)
재용 이런다고 영이 엄마가 살아나진 않아요. 영이 엄만 이 세상에 없어요.
강씨 자네… 그 여자 때문이야?
재용 … (보다가 고개를 떨군다)
강씨 자네가 이럴 순 없어… 천지가 개벽해도… 자네가 이러면 안돼…
재용 (언성이 높이며) 제발 저 좀 그냥 놔두세요!! (돌아서서 강씨를 보며) 이젠 그만
하실 때도 됐잖아요… 전 지쳤어요. 남들처럼 웃고 싶고 쉬고 싶어요. 장모님
이 이러 실수록 숨이 막힌다구요.
강씨 … (무표정인 채 눈물이 고인다)
재용 … (고개를 떨구면)
강씨 피곤해서 그럴거야… 그래, 맞아… 자네… 너무 피곤해서 그래… 목욕물 데워
놨어. 따뜻한 물로 목욕하면 좀 나아질 거야…
재용 장모님!!
강씨 속옷은 침대 위에 내 놨어. 씻고 쉬면 나아질 거야…
강씨가 밖으로 나간다.
재용이 절망스럽게 고개를 떨군다.
씬 48. 주방
강씨가 얼이 나간 표정으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강씨의 초점없는 눈에 젖은 물기가 비친다.
씬 49. 이층 서재
재용이 양주잔을 들고 창 밖을 보고 있다.
고뇌와 짙은 고독이 베어있는 얼굴이다.
씬 50. 주방
소주병이 거의 비워져 있다.
술 취한 강씨가 혜진의 사진을 보며 훌쩍거리다가
강씨 (표정이 단호해지며) 어림없지. 어림없어… 목숨처럼 키운 딸 뺏아가서 훌쩍
저 세상으로 보내더니 이제 와서 뭘 어째? 이빨에 씨도 안 먹히는 소리지…
씬 51. 마당
재용이 쓸쓸하게 걸어 나온다.
잠시 먼 산을 보며 담배를 물려고 하는데 선숙의 차가 들어선다.
선숙과 영이가 차에서 내린다.
영이 (달려오며) 아빠…
재용 (선숙을 보면)
영이 마을 입구에서 아줌마 만났어.
선숙 (다가오는) 영이가 미술대회에서 일등을 했데요.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영이 치, 그건 내가 얘기 할려구 했는데…
선숙 (재용을 살피며) 뭔 일 있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영이에게) 아빠가 별로 안
반가우신가 본데?
재용 아, 아니에요… 어서 와요.
선숙 (미소)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인데요…?
영이 (선숙의 손을 잡아 끌며) 들어가요, 아줌마…
강씨(E) 어딜 들어 올려구!!
서슬 퍼런 강씨 목소리에 보면, 술취한 강씨가 완강한 표정으로 현관 앞에 서있다.
강씨 여기가 어딘 줄 알구 함부로 들어 와… 내 딸이 어떻해서 이룬 집인데… 도둑
년처럼 한꺼번에 가져 갈려구? 안되지, 안돼…
영이 (놀라며) 할머니…
강씨 너 따위한테 안 뼛겨… 이 집안엔 한발짝도 못 들어 놔.
선숙이 잠시 놀란 표정이다.
재용, 난처한 듯 서있고.
선숙 (나서며) 죄송합니다. 제가 분위기도 파악 못하고 불쑥 찾아왔어요. 평온하실
때 다시 오겠습니다.
강씨 흥!! 내가 죽는 날이 평온한 날이야. 그 전엔 얼씬도 할 생각 말어.
선숙이 인사하고 돌아선다.
재용 미안해요… 술 취하셨어요.
선숙 아니에요… (표정을 명랑하게 바꾸며) 제가 어리석었어요. 이 정돈 예상했어야
했는데… (영이에게) 할머니가 화 많이 나셨나 봐. 아줌마, 할머니 화 풀리시면
다시 올게.
영이 … (대답대신 강씨를 쏘아본다)
씬 52. 재용의 집 전경 (밤)
아둠… 풀벌레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씬 53. 강씨 방
잠자던 강씨가 몸을 일으켜 세운다.
머리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대는 강씨.
씬 54. 영이 방
강씨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불이 켜진 채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영이.
강씨가 물끄러미 영이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끄고 나오는 강씨.
씬 55. 거실
희미한 실내등이 내부를 비추고 있다.
영이의 방에서 나온 강씨가 소파에 앉는다.
이때 재용이 사발을 들고 주방쪽에서 나오다가 강씨와 눈이 마주친다.
잠시 시선을 교차하는 두 사람.
강씨 안 잔 거야?
재용 꿀물 좀 탔어요. 괜찮으세요?
재용이 꿀물이 탁자 위에 놓고 옆에 앉는다.
물끄러미 사발을 들여다 보는 강씨.
강씨 자네…
재용 (동시에) 장모님…!
두 사람, 서로 본다.
재용 먼저 말씀하세요.
강씨 자네가 먼저 말해 봐.
재용 …
강씨 …
재용 죄송합니다. 장모님.
강씨 자네가 뭘…?
재용 영이 엄마 죽고 나서 일만 하면 모든 게 잊혀질 줄 알았어요. 미친 듯 바쁘게
살면 외로울 새도 없을 줄 알았는데… 제풀에 제가 지친 거에요.
강씨 …
재용 저한테 장모님이 얼마나 소중한 지 말씀 안 드려도 아시잖아요. 그래서 더 힘
들어요. 전 절대로 장모님을 포기 못하니까요.
강씨 못난 사람…
재용 … (씁쓸한 미소)
강씨 내가 후회하는 게 하나 있어. 젊어서 과부 되고 왜 새 인생을 살 생각을 못했
을까… 하나뿐이 없는 인생, 남 눈치 보고 제 자존심 살리다가 훌쩍 보내 버린
게 후회 막심이야… 자네도 내 짝 날텐가?
재용 … (강씨를 보는 시선에 눈물이 고인다)
강씨 낮엔 미안하네. 술기운도 있었지만 순전히 술기운 탓만은 아냐. 제 딸년 남편
이 새 장가를 간다는데 그 정도 심술로 못 부리나?
재용 장모님… (목이 메이는)
강씨 그 여자, 생년 월일 어떻게 되나 알아 봐. 늦게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 일수록
사주, 궁합, 볼 거 다 보고 빈틈없이 해야 돼.
재용 …
강씨 자네 회사 휴가, 다음주부터랬지? 어디 멀리 다녀올 거 없이 색시감 데리고 집
에서 숴. 실림도 가르쳐 줘야 되고 새 식구 성격도 살펴야 되니까…
재용 친부모처럼 모실게요… 이젠 제 어머니세요.
강씨 그럼…? 나한테 소홀할 생각했어?
재용 … (미소)
강씨 … (재용의 손을 꼭 잡는다)
씬 56. 주방
강씨가 지지고 볶으며 음식 만드느냐고 열심이다.
커튼 너머로 재용과 선숙, 명철 부부의 저녁식사 모습이 보인다.
웃음 소리가 터져 나오고… 화기 애애한 모습이다.
강씨의 표정이 어둡다.
씬 57. 거실
식사중인 네 사람.
명철 (술잔을 선숙에게 건네며) 잔 받으십시오, 형수님….
재용 (주방쪽을 의식하며) 호칭이… 너무 빠른 거 아냐?
명철 무슨 소리에요?
빨리빨리 입에 담아 놔야 분위기도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지요.
안 그렇습니까, 형수님?
선숙 (미소, 잔 받으며) 편하신대로 하세요.
명철 (술 따르며) 우리 형님이 왜 혼자 사시나 했더니 형수님 같은 멋진 분 만나려
고 딴청 피운거지 뭡니까? 뭐든지 시간들이고 공들여서 나쁜 건 없어요. 우리
얼마 만에 결혼 했는지 아세요? (진희를 힐끔 보며) 만나지 반년 만에 전격적
으로 식 올렸잖아요.
진희 그래서…? 지금 후회성 발언이야?
명철 후회? 아니, 내가 무슨 후회를 할려고 그런 후회성 발언을 해? (너스레를 떨며)
우린 그렇게 빨리 만났어도 남들보다 좋다, 이런거지, 뭐…
사람들의 웃음소리…
씬 58. 정원 (밤)
입구쪽의 가로등이 정원을 비쳐주고 있다.
차노인이 화단 한쪽에 앉아있는 강씨를 발견하고 인기척을 내며 다가온다.
강씨, 울고 있었던지 재빠르게 옷자락으로 눈가를 훔친다.
차노인, 못 본 척 하며 옆에 앉는다.
차노인 가서 어울리지 않구 왜 나와 있어?
강씨 젊은 사람들, 흥 깰일 일수?
차노인 이젠 할멈이 시어머니야. 앞으로 더 할일이 더 막중하다구.
강씨 … (길게 한숨 쉬는)
차노인 할멈, 다시 봐야겠어. 고집 불통에 망령기만 가득한 줄 알았더니 어서 그런 용
기가 났어?
강씨 용기가 난건지… 자신이 없어진건기… 나도 잘 모르겠어요.
씬 59. 재용집 전경 (아침)
씬 60. 거실
강씨가 마당으로 나가려는데 선숙이 쟁반에 케일 이파리를 담아서 들고 들어온다.
선숙 화초밭에 물 다 줬어요. 마당도 쓸구요. 더 주무세요. 제가 아침 준비할게요.
선숙이 주방으로 들어간다.
할 일이 없어진 듯 망연하게 서있는 강씨.
씬 61. 요란한 소리를 내며 믹서기 안의 케일이 갈려진다.
녹즙을 컵에 따르는 선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씨
선숙 어머니도 한잔 드세요.
강씨 난 안먹어.
선숙, 미소를 보이며 쟁반에 컵을 받쳐들고 나간다.
씬 62. 재용의 방
선숙이 녹즙을 들고 들어선다.
재용이 가운차림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선숙을 본다.
선숙 일어났데요? (잔을 내밀며) 내가 아침에 직접 따서 갈은거에요.
재용 (받아들고, 미소) 좀 이따가요. 장모님 일어나셨죠?
재용이 나가려고 하자 선숙이 재용을 껴안는다.
재용 (난처한 듯) 밖에 장모님 계시잖아요.
선숙 (안은 채) 이런 아침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좋은 햇살과 사랑하는 사람
이 있는 아침…
행복한 표정으로 안긴 선숙을 재용이 안는다.
씬 63. 주방
재용과 선숙, 강씨와 영이가 아침을 먹고 있다.
선숙이 재용의 밥 위에 젓갈을 올려 놓는다.
선숙 명란적이 안 짜고 맛있어요.
재용 … (강씨의 눈치를 보며 밥을 떠 넣는다)
강씨 … (못본 척 밥을 먹는다)
선숙 영이, 밥먹고 피아노 학원 갈 거지?
영이 예.
선숙 이따가 아빠하고 아줌마하고 서울에 갈건데… 같이 갈까?
영이 서울엔 왜요?
선숙 침대커버며 커튼이며 살게 많아. 집안에 인테리어가 너무 오래 됐어.
영이 내 방도 꾸며줄거에요?
선숙 물론이지.
강씨 … (묵묵히 밥을 먹기만)
씬 64. 강씨 방
강씨가 무료하게 앉아있다가 눕는다.
다시 몸을 일으키는 강씨, 몸을 조금 열어 밖을 살핀다.
재용과 선숙, 영이가 도란도란 오여앉아 즐겁게 시간을 갖는다.
문을 닫고 다시 주저앉는 강씨.
씬 65. 욕실 문을 열어보는 강씨
욕실 안이 새롭게 감각적으로 꾸며져 있다.
씬 66. 주방을 둘러보는 강씨
역시 새롭게 단장된 커튼이며 주방 기구들.
씬 67. 거실
소파가 치워져서 한층 시원해 보인다.
재용과 선숙이 인테리어 책자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다.
주방쪽에서 나오는 강씨.
강씨 찬장 안에 있던 그릇들 다 어디다 치웠어?
선숙 그 헌 그릇들요? 박스 안에 넣어서 선반에 올려 놨는데요? 그거 낡아서 쓰지
못해요. 위생에도 안 좋구…
강씨 그게 어떤 그릇인줄 알아? 영이 엄마가 시집 올 때… (하다가 입을 다무는)
잠시 어색한 분위기…
선숙 죄용해요… 다시 내려 놓을게요.
강씨 아냐, 됐어. 아차피 낡아서 쓰지 못할 물건이야.
씬 68. 정원
한쪽의 소채밭에서 상치를 뜯는 강씨과 선숙.
강씨 (일하며) 손에 흙 묻히는 일 안 해봤지? 상치며 호박이며 깻잎이며 다 내가 심
고 가꾼 거야. 돈으로 치며 몇 푼 안 되는 거지만 싱싱한 놈 따다가 밥상에 올
리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몰라.
선숙 다행이에요. 저도 이런 재미를 알 수 있게 되서요.
강씨 유서방은 비린 음식을 싫어 해. 젓갈 같은 거 상에 올려놓지 말어.
선숙 … 몰랐어요. 제가 좋아해서 재용씨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
강씨 음식에 절대 화학조미료는 넣지 말아. 사람은 수더분해도 음식은 까다로운 편
이야.
선숙 (고개를 끄덕이며) 예…
강씨 술 먹고 다음날은 아침에 꼭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해. 출근시간 늦어서 허둥지
둥 안 하게 미리 목욕물 데워 놓으면 좋을 거야.
선숙 … (일손을 놓고 강씨를 본다)
강씨 (보며) 자네보고 그 사람, 있는 비위 다 맞추라는 얘기가 아냐. 늦게 시작 할수
록 알건 알아야 서로 편해져서 하는 말이야.
선숙 (미소) 명심할게요.
강씨 자네, 일하고 말하는 본새를 보니까 내가 안심이 되는구먼.
씬 69. 거실
재용과 선숙, 강씨가 차를 마시고 있다.
재용이 놀란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는다.
선숙 진작 말씀하시죠. 그럴 줄 알았으면 제가 쇼핑이라도 해 두는건데…
강씨 늙은이들끼리 가는 건데 쇼핑은 무슨 쇼핑… 그냥 관광차 타고 한바퀴 돌다
오는 거야.
재용 그래도 그렇죠. 그런 여행이면 말씀을 하셨어야죠. 제주도면 꽤 먼댄데…
강씨 계에서 가는 거라 특별히 준비 할 것도 없어. 그렇찮아도 바람 한번 쐬러고 했
었는데… (선숙에게) 자네가 있으니까 안심이야.
재용 앞으로 여행 많이 하세요. 그러고 보니까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씬 70. 강씨 방
큼지막한 가방에 옷가지를 넣고 지퍼를 닫는다.
강씨가 혜진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강씨 미안허다. 이게 팔잔걸 어떡하겠니. 육십을 넘게 살았는데 짐을 싸고 보니까
한 가방이 채 안돼…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 서로 원망하지 말자. 누가 잘했
고 누가 잘못했겠니…
강씨의 눈에 눈물이 일직선으로 얼굴을 타고 흐른다.
씬 71. 전원마을 전경 (아침)
영이(E) 할머니… 빨리!!
씬 72. 재용의 집 마당
재용이 강씨의 가방을 차에 싣는다.
강씨와 선숙, 영이가 나온다.
차노인이 울타리 근처에서 강씨를 본다.
차노인에게 다가오는 강씨.
강씨 너무 부럽게 생각하지 마슈. 나두 십년만에 첨 놀러가는거유.
차노인 쯪쯪… (혀를 차며 먼 산을 본다)
강씨 표정이 왜 그래요? 뭐 잘못 씹었수?
차노인 어리석은 사람…
강씨 … (표정이 굳어진다)
차노인 할멈이 이런다고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질 줄 알아?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
강씨 육십 평생동안 날 위새서 살어본 척이 없어요. 내가 편해서 가는 거에요.
차노인 … (말을 잃고 먼 산을 본다)
강씨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구랴… 그 동안 고마웠어요.
영이 (좀 떨어진 곳에서) 할머니!! 차 시간 늦겠어. 빨리…!!
씬 73. 마을 입구 버스 정류소
허름한 길가의 버스 정류소다.
강씨와 재용, 영이, 선숙이 서 있다.
재용 서울까지 제 차로 모시겠다니까요.
강씨 여기서 버스 타면 금방인데 뭘… 터미널서 계원들 만나기로 했어. 여행 한번
가는데 유난 떤다고 흉 봐.
영이 할머니, 언제 오는데?
강씨, 영이를 보다가 꼭 껴안는다.
강씨 (안은 채) 금방 올 거야… 아줌마 말 잘 듣고 얌전해야 돼.
영이 올 때 선물 잊지마.
강씨가 영이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멀리서 버스가 다가온다.
강씨 (가방을 들으며, 선숙에게) 영이 도시락엔 절대 계란부침 올려 놓치 마. 쟨…
계란 안 먹으니까…
선숙 … (문득 강씨의 표정을 이상한 듯 본다)
이때, 버스가 다가와 선다.
씬 74. 버스에 올라타는 강씨
승객들이 몇 사람 없어서 빈 자리가 많다.
강씨가 버스 맨 뒷자리에 앉는다.
창문으로 영이와 선숙이 손을 흔들어 댄다.
팔짱을 끼고 있던 재용이 강씨와 시선을 마주치자 미소를 보인다.
서서히 출발하는 버스.
차 뒷창문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재용과 영이, 선숙…
강씨가 그들을 보다가 바로 앉는다.
서서히 눈을 감는 강씨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