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항가리의 부다페스트, 아침 9시에 주차장에 주차비를 정산하고 주차되어 있던 차를 아파트 앞으로 끌고와서 잠시 세워놓고 짐을 실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우리가 있든 5층에서 승강기로 짐을 미리 도로옆에 내려 놓고 대기 하고있었다. 잠시 동안 이지만 일방통행인 좁은 도로를 막고있는 차가 불안하다.
다행히 다른 차들의 소통에 별 지장을 주지않고 차를 출발 시킬수 있었다. 출발 운전은 양여사가 한다. 아침에 정신맑고 시력 좋을 때 운전하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양여사는 오후가 되어 피로가 몰려오면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특성이 있는 관계로 얼마전서부터는 아침 첫 운전대는 양여사가 잡고있다.
한시간을 가면 이선생의 생리주기에 맞춰서 반드시 세워 생리문제를 해결해야 하므로, 이때 운전대도 바꾼다. 그래서 한시간 간격으로 3운전자가 운전을 교대하는 룰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는 항가리에서 슬로바키아로 갔다가, 체코의 프라하와 체스키 크룸로프를 거쳐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간다.
항가리를 벗어나서 처음 들리는 코시체와 레보차는 슬로바키아의 아름다운 작은 도시 특히 코시체는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이쁜 도시 다시 오고싶은 도시였다.
코시체는 슬로바키아에 위치한 도시로 코시체 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24만 2천 명(2001년)이다. 여자 테니스 선수인 마르티나 힝기스의 고향이다. 코시체의 성 엘리사벳 성당
코시체는 슬로바키아 동부에 위치한 현대적인 공업도시이다. 호르나트 강에 접해 있으며 헝가리 국경까지는 20킬로미터, 우크라이나의 국경까지는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성 엘리사벳 성당은 동방정교회 성당이 아니라 로만 카톨릭성당이다. 동방 정교회 성당은 성상이 없는 데 로만 카톨릭 성당은 있다.
코시체의 성 엘리사벳 성당, 성상의 유무는 성서 해석의 차이로 생긴것,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726년 성상 파괴령을 내리고 서로마제국의 로만 카톨릭은 따르지 않는 다. 이후 동방교회 계통은 성상이 없고, 성당에 성화만 있다. 주로 프레스코화
코시체는 1290년에 헝가리 왕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도시로 승인받았다.
교역로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중세에는 상공업이 발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체코슬로바키아령이 되었지만 1938년에 헝가리로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에는 코시체에 임시정부가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뒤에는 코시체 정부 강령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면서 슬로바키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코시체 주는 슬로바키아 북동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코시체이며 면적은 6,752km2, 인구는 775,509명(2008년 기준), 인구 밀도는 115명/km2이다.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헝가리와 국경을 접하며 서쪽으로는 반스카비스트리차 주, 북쪽으로는 프레쇼프 주와 접한다. 11개 행정구를 관할한다. 코시체시의 시내 중심을 흐르는 수로가 이체롭다.
레보차 마을 중앙에 있는 교회, 14세기에 지은 '성 제임스 교회'로 1510년경 거장 파울(Master Paul) 이 완성한 유럽에서 제일 큰 제단이 있다고.
레보차는 슬로바키아 동부 프레쇼프 주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64.042km2, 높이는 570m, 인구는 14,731명(2006년 기준),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남아 있다. 2009년 6월 28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레보차 1241년과 1242년 사이에 있었던 몽골족의 침공으로 파괴된 뒤부터 독일인들이 건설했으며 1249년 문헌에서 "Leuch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1317년 왕립 자유 도시로 지정되었고 1321년 도시로 승격되었다.
15세기 폴란드와 헝가리를 연결하는 무역의 경로로 여겨지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철과 구리, 모피, 가죽, 옥수수, 포도주가 수출되었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레보차(Levoča)는 유서 깊은 중세 도시로, 13세기~14세기에 요새 안에 만들어 졌으며, 유적지가 확장될 때에 포함되었다. 유적 대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다.
스피슈 성, 레보차에 있는 스피슈 성은 서부 슬로바키아의 평원에 솟은 언덕에 있다. 이 유적지에는 일찌감치 신석기시대(기원전 5000)부터 사람이 거주하여 청동기시대까지 이어졌다.
1세기에는 요새 정착촌이 세워져 당시 푸초프(Púchov) 사람들의 정치·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모라비아(Moravian) 왕조 시대(9세기)에도 요새로 쓰였다.
이 성은 12세기 초에 건설되었으나 원래의 건축물은 지질학적 단층 위에 건설되어 무너졌다. 오늘날 남은 성은 13세기 전반에 동쪽의 타타르족 침입에 대비하여 건설한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궁전은 1249년에, 성은 1270년에 완성했다.
동부 유럽에서 가장 큰 성으로,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 중유럽과 동유럽의 성보다도 프랑스와 영국의 현대식 성과 견줄 만하다.
위쪽에는 아성과 뜰이 있고, 성곽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 안뜰이 2개 있으며, 바깥뜰은 주출입구와 수비 병사들이 주둔하던 구역의 흔적과 대부분 폐허가 된 큰 감시 망루로 이루어졌다.
스피슈스케 포드흐라디에 마을은 성 아래쪽에 정착촌으로 건설되었다. 당시에는 요새의 일부였으나 곧 성과 별개로 독립 마을이 되었다. 최초로 지은 교회는 타타르족의 습격으로 파괴되었다. 1258년~1273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다시 지었는데, 처음에 성을 건설했던 이탈리아의 석공들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1321년에 도시로 특권을 인정받았으며 15세기 색슨족 공동체에 공급하는 직물 제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 앞에서 발굴한 유물에는 원형 요새를 두르고 있던 해자의 흔적, 대장의 주택 터, 원형 탑의 흔적이 있다. 14세기 초 마티아스 카크(Matthias Cak) 군대가 심하게 파손한 뒤 고딕 양식으로 다시 짓고, 출입문이 있는 큰 정착촌이 들어서면서 넓어졌다. 1780년까지 요새로 쓰이다가 대화재 후 폐허가 되었다.
당시 도시의 많은 부분이 재건되고 요새화되었으나 종교 개혁 이후 경제적으로 쇠퇴했다. 도로가 14세기에 정식으로 배치되었고 15세기에 넓어졌다. 화재가 난 뒤 주택 대부분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다.
도시 중심에는 성모 마리아 교회(the Church of the Blessed Virgin Mary)가 있고, 주변에는 타운하우스가 둘러싸고 있다.
스피슈 성(Spišský Hrad)에는 13세기~14세기 동유럽의 군사·정치·종교 건축물이 모여 있으며, 당시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 양식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스피슈 성에는 중세의 무기들이 전시되어있고,
중세의 고문모습이 살벌하게 묘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