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장기려를 서술했다. 이전의 연구나 전기들이 지나쳤거나 외면했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고, 사안에 따라서 그의 선택이나 결정을 문제 삼았다. 그의 유족, 의사 제자, 그의 이름이나 아호를 앞세운 유관 단체의 일관되지 못한 행태 비판했고, 우리나라 의학사나 기독교 현대사의 장기려 서술에 이의를 제기했다. 장기려 타계 이후 28년만에 전면 개정을 했기에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게 제기된 ‘의료보험의 아버지가 박정희다, 아니 민중이다, 민중도 박정희도 아니고 장기려이다’는 논란, 과도한 이념과 세대 갈등, 코로나 사태 이후 일부 개신교가 보여 준 독선적 행태를 소개하거나 의식하며 장기려에게서 대안을 모색했다.
출판사 리뷰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리며 우리 곁을 살다간 장기려는 일본 신사 참배에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았고 독재자 김일성과 전두환 앞에서 소신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의사였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헌신하지만 권력과 돈 앞에 비굴하거나, 민주화 투쟁에 헌신하지만 공동체 내에서는 독재자로 군림하는 인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북한에서 장기려는 번번이 길가는 거지들을 불러 와서 겸상 차려 함께 먹었다. 그의 아내가 굶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남한에서도 지갑을 두고 나왔다고 생각해 그냥 지나쳤다가 병원에서 월급 받은 게 생각나서 되돌아가 거지에게 수표를 주었다. 그가 수표를 쓰려다 경찰에 체포되었기에 장기려의 수표 선행이 드러났다. 차남 집에 머물 때는 가정 일을 돕는 아주머니와 함께 밥상을 차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웬 차별이냐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전쟁 이후 장기려는 무료 병원을 고집했고, 부산대학교 뒤편 창고에 방치된 행려병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의료봉사를 했다. 부산 뇌전증 환자 모임인 장미회 초대 회장이 되어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매월 나가서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기려는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병자든 모두 같은 사람으로 대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룬 의사로서의 성과나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었던 사랑도 귀하지만 사람을 오로지 사람으로 대한 의사였다는 사실만큼 찬란하랴.
*이 평전이 주목한 장기려의 위기
이 평전은 장기려가 평생 맞닥뜨렸던 절체 절명의 위기 순간을 주목했다. 많은 이들이 장기려 직면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에 관심이 없다. 흘러간 옛 노래처럼 몇 가지 미담만을 반복 재생한다. 『장기려 평전』은 한국 전쟁 직전 장기려가 극도의 긴장과 불안으로 구토를 할 정도로 공산당의 감시에 위기감을 느꼈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다. 두 차례나 미 공군의 대규모 평양 공습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 차남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 걸어서 서울까지 내려오는 길을 사실 대로 서술했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양과 부산에서 어떻게 UN군과 국군의 병원에 취직했는지를 추적했다. 빨갱이로 몰리면 즉결 처분 당하던 전쟁의 와중에 특무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일도 그 시대의 눈으로 파헤쳤고, 부산대학교 총장 선거에 홀로 반대표를 던져 또 다시 정보기관에 끌려가 제거될 수 있음에도 비굴하게 물러서지 않았던 사건도 빠뜨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를 평생 고통스럽고 슬프게 만든 분단의 아픔에 한발 더 다가서기 위해 한국 전쟁을 과하다 싶을 만큼 상세하게 다뤘다. 70대 중반에 제도권 교회를 떠나 이름도 없는 종교 단체에 의탁하기 위해 수년 간 고민하고 따져 보았던 세월도 상세히 추적했다. 이런 위기와 선택의 순간에 장기려의 진정한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기려와 교회 개혁
전기가 ‘추앙’에 무게를 둔다면 평전은 장기려의 시선과 문제 의식으로 오늘 우리를 달리 보게 만든다. 교회 개혁은 일평생 장기려의 중요 관심사였다. 1940년에 김교신과 함석헌을 만나면서부터 개인 구원 차원의 신앙을 극복하는 데 매진했다.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 함석헌, 퀘이커 등을 통해 장기려는 사회 구원에 필요한 영감을 얻었고, 1958년부터 30년 동안은 일요일 오후에 〈부산 모임〉이라는 작은 성서 연구 모임을 이끌었다. ‘부산 모임’은 장기려에게 사실상 교회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10월 유신 선포 당시 부산 계엄 분국이 주일 모임을 금지했을 때 일제 강점기하에서 목숨 걸고 신사 참배 강요에 저항했던 신앙인들처럼 행동하지 못한 것을 그렇게 통렬하게 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더욱 근원적인 교회 개혁의 가능성을 ‘종들의 모임’에서 발견했다. 그 이후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불완전한 개혁이라 거침 없이 주장했고, 30년을 계속해 온 ‘부산모임’을 해산했다. 제도권 교회도 떠났다. ‘종들의 모임’의 복음 전도 방식이 예수가 의도했던 본래의 교회이며 그렇게 믿고 사는 게 진정한 교회 개혁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장기려 어록
1973년은 장기려의 일생에서 1927년과 함께 중요하다. 1927년에는 17세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63세이던 1973년에는 의사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에 새로운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가련한 환자를 돌보는 일도 귀하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평화가 더 중함을 느꼈다. 나는 이제부터 평화를 위하여 헌신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참 생명은 죽음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목숨을 아끼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잘 죽는 자가 잘 사는 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은 죽음에 있다. 사랑의 죽음은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의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이제부터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도리어 열심히 이 죽음의 길을 찾을 것이다.”
“경건한 인격자가 되라. 하나님으로부터 진실하다고 인정받는 자, 자기 양심에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자만할 수 있는 자가 되자.”
“지금에 현실, 현실이라고 물거품처럼 터뜨리다가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게와 같은 인간들이 횡행하는 중에서 있어서, 우리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하늘 높은 이상의 소리이다. 영원히 살아 말하는 지도정신이다. 이상과 신앙, 지도 정신의 결핍, 이것이 현대 우리나라와 세계의 근본적 결함이 아닌가. 온 세계 인류는 이러한 이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차별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 이상을 모르는 자이다. 실존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이다. 이제 배부른 자여, 이제 세력을 유지하려는 자여 너희들은 화가 있으리로다. [중략] 양심의 예민도나 도덕의 표준은 거의 다 같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인격의 존엄성은 다 같다. 인격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실존한다. 그러므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관념적 성별의 사상에서 나아가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인류를 거룩히 하여 그 인격을 존경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모든 차별을 반대한다. 크리스천은 어떤 전쟁이든지 반대하며 평화를 환영하는 책임을 느끼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필요한 때에는 내 피를 뽑아 수혈해 가면서 진료에 힘썼다. 그랬더니 1947년 말에 모범일꾼상금(3천 원)을 보사부로부터 받게 되었다.”
“아들이 현실 사회에서 중학교도 못 나온 것은 부모의 마음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백 살이 넘어서 낳은 외아들 이삭까지 바치려 한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구원을 믿었다. 내가 강요한 것이 아니고 택용이 스스로가 하나님을 위해 학교를 그만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사장 아들이 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좋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는 모름지기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의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이세상 정치와 타합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교회라고 믿게 되었다.”
첫댓글 그분이 평생을 바쳐 이룬 귀한 것들이 많지만 사람을 오로지 사람으로 대한 의사였다는 사실만큼 찬란하랴~♡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