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금은 남편의 사십구제를 치르고 거의 반년 만에 외출이다. ‘불난 집’이란 별명의 막내이모의 성화에 5층 교육장에 들어섰지만, 쭈뼛거리며 맨 뒤쪽에 앉았다. 혹여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마주 칠까봐 화장실도 가지 않고 참는다. 영화관을 말고는 이렇게 많은 사람 틈에 있는 것은 처음이라 몹시 긴장한다. 아무튼 점심을 주는 이런 공짜 교육을 들어줘야 일찍이 혼자된 이모에게 일정한 수당의 혜택이 있다고 했다. 복도 쪽에서 이모가 까치발로 지켜보는 것 같다. 교육은 판매사례를 들어가며 빠르게 진행하지만, 그녀는 한귀는 열어놓고 교재 빈틈에 낙서를 하다 한숨만 쉰다. 세상에 어디 만만한 일 없다지만, 뜨개질만으로 세월을 낚을 수 없고 뭔가를 팔아가며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선뜻 와 닿지 않는다. 이제 ‘선배의 경험’이라는 한 시간짜리 강의만 남았다. 내일부터는 대리점으로 바로 견습을 나간다고 긴장감을 높인다. 그녀는 여전히 볼펜심만 없애고 있는데, 어디서 들어봄직한 특유의 갈라진 목소리가 박수를 받는다. 이름을 써가며 인사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앗!’ 하며 소리를 지를 뻔 한 것을 참고 재빨리 앞사람 등 뒤로 몸을 낮췄다. 세월이 흘러도 목소리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성씨까지 바꾼 이름과 말쑥한 풍모는 옛날의 그 자식이 아니었다. 본명만 썼어도 고개숙인체로 알아챘으리라. ‘세상에나~ 그 악동 놈을 이런데서 만나다니.’ 속말을 하는데, 그자는 뒷자리 그녀 쪽까지 눈길을 던지는가 하면 경험담의 강의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이 사람은 여러분처럼 초년 교육생으로 앉았던 때가 바로 한 해 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연봉 수천만 원 정도는 너끈하게~” 손을 쫙 벌리며 스스로 신이 났다. 교육생들은 숨을 죽이며 듣다가 간간히 웃음과 박수도 터진다. 그녀는 뒷문만 있어도 바로 빠져 나갔으리라.
몇 학급뿐인 변두리 중학생꾸러기들은 고무줄 끊어먹기, 변소 뒤에서 귀신소리내기를 해대며 유난스러웠다. 무리 중에 이웃동네 ‘曺學童’은 더 그악스러워 별명이 악동 녀석이 나타나면 아예 놀이를 접었다. 어느 날 고무줄을 잡고 있는 그녀의 치마 아래로 놀이용 뱀 한 마리를 들이밀어 기절한 적이 있었다. 설상가상 하혈까지 하고, 친구 등에 업혀서 양호실로 가니 선생님께서 놀라 울먹이는 우리에게 ‘초경’이라며 다독이셨다. 당혹함과 창피하여 오랫동안 운동장에 나가지 못했다. 박 아무개는 가짜 뱀에 물려 피를 쏟았다, 악동이가 팬티를 벗겼다는 둥 헛소문은 한동안 연기처럼 맴돌았었다. 그 후 한번씩 때만 되면 얼마나 넌더리를 쳐왔던가. 지금 생각해도 당장 달려 나가 녀석에게 물 한 바가지라도 끼얹고 싶다. 그러다 보니 서너 달째 생리 불순함은 혼자 농사일 감당의 힘겨움 속에 또 다른 악몽을 꾸는 느낌이다.
강의가 끝나자 소위 교육생들은 그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댄다. 소란한 틈을 타 그녀는 슬쩍 나와 화장실에 앉았다. 다시 만날 일은 결코 없겠지만, 이래저래 처지가 옛날과 같아 자신의 가슴을 치고 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도망치듯 계단을 통해 교육장에서 먼 쪽으로 걸었다. 석양빛에 길어진 제 그림자를 발로 차며 타야할 버스도 그냥 보내고 정류장에 망연히 서있었다. 근교에서 땅 몇 마지기 붙여가며 살아온 날들이 허망하고, 경운기 뒤집힌 사고로 먼저 간 남편도 원망스러웠다. 햇살 강한 날에 텅 빈 운동장에 혼자 서있는 느낌으로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경적 소리가 요란하다. 차 밖으로 손짓하는 것은 ‘조학동’이다. 뒤돌아서기에는 너무 늦었고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 먼 산만 바라보지만, 차 지붕에 반사된 햇살이 눈을 찌른다. 그는 차에서 내려와 꾸벅하더니 “사는 동네까지 모셔다드리지요” 라며 조수석 문을 열고 시중드는 몸짓을 한다. 바로 뒤에 버스라도 오면 뛰어 가련만, 읍내아낙들이 불구경난 듯 쳐다보고 있어 머리부터 디밀고 어색하게 타고 말았다. 차는 바로 미끄러지듯 빠르게 나가고, 그의 머릿기름과 담배냄새 때문에 호흡이 답답하다. “시집갔던 동네도 제가 잘 압니다.” 라며 그녀의 최근 신상에 대해서 잘 안다는 투다. 곧바로 “안전벨트 매시지요.” 라며 자기 쪽 안전벨트를 크게 휘익 빼더니 순간 딸그락 한다. 그녀는 앞만 보다가 뒤늦게 말뜻을 알았으나 움켜잡은 오른손은 못 놓고 있다. 왼손으로 허리춤 옆쪽을 더듬다가 잡힌 벨트가 뻑뻑 한가 했지만 바로 길게 당겨졌다. 걸치는 곳을 찾는다는 것이 엉겁결에 머리 위로하여 목 왼쪽에다 둘러쳤다. 벨트 고리는 아래쪽에서 대롱거렸다. 언젠가 고속버스에서 허리에만 묶어 본지라 어깨 쪽에서 나오는 긴 벨트를 어찌 둘러 잠그는지 알 수가 없다. 승용차는커녕 이장네 봉고차 정도 타 본 그녀로서는 어릴 때 천막극장에 들어온 느낌이다. 똥을 피하려다 차를 탄 셈이라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 그가 어찌 매였나 옆쪽을 보지도 못한다. 서울 올림픽 중개가 한참인 라디오 소리도 울림이 커서 의자까지 흔들리고, 진하게 선텐이 된 차창 밖은 일찍 밤안개가 내린 것 같았다. 그자는 한 시절 서울에서 잘 나갔으나 부도를 당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도 고향근처의 이웃도시와 사람들까지 손바닥 보듯 떠벌린다. 흘깃 그녀 쪽을 보는가했지만, 성씨까지 바꾼 것이 내내 찜찜했는지 변명의 목소리는 자꾸 커져갔다. 반면 그녀는 허리를 곧추 세우려고 해도 목에 둘러진 벨트가 그냥 두질 않고, 자꾸 그로부터 떨어져야 할 듯 차창 쪽으로 몸이 기울곤 했다. 만일 그도 옆자리를 처다 보았다면 민망하긴 마찬가지다. 그는 라디오소리를 줄이더니 아까는 긴가민가했다며 강산이 바뀌어도 거기는 옛날 예쁜 그 얼굴 그대로라는 둥, 다른 데에서는 노총각 교수님 소리도 듣는다며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로 앞쪽을 대고 떠든다. 그러나 차가 회전을 할라치면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못한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윗몸은 시계추 모양이다. 학동의 계속되는 자기자랑 떠벌림은 그녀의 귀가를 돌다가 차창 틈새로 나가 비눗방울이 된다. 이참에 대리점으로 나갈 땐 이모와 학동을 연결시키면, 순금 자신에게도 뭔가 행운이 있을 거라는 상상의 무지개를 펼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두워져 내린다면 부탁도 해볼까 하지만, 옆에서 알아차릴까 겁이나 생각을 접는 사이에 친정읍내 가까이 와버렸다. 여전히 목덜미를 잡고서는 이만 내리겠다고 했다. 너무 빨리 와 동네사람에게 들킬 걱정에 오금이 저린다. 마침 삑삑 무전기 소리가 나니까 동네 못 미쳐 갓길에 차를 세우고 그는 훌쩍 내려 차 앞으로 돈다. 그녀도 목에 둘러친 벨트를 재빨리 걷어내느라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상장(喪章) 흰 리본은 차 바닥에 떨어진다. 차문을 안 밖에서 서로 급하게 여는 모양새로 엉거주춤 나오니, 교재파일과 명함을 두 손으로 건넨다. ‘태워줘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귀 쪽에다 나팔을 만들더니 “이런 거 두 번 다시 들으러 오지 마이소! 요지경 세상이랍니다. 동창이니깐, 특별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고는 꽁무니에서 매연을 뿜고 도망치듯 떠났다. 학동의 명함이 그녀의 저린 손에서 툭 떨어지더니 하수맨홀 속으로 빠져 버린다. 목 주위를 자꾸 어루만지는 박순금에게는 석양의 그림자처럼 길고 긴 하루였다./
~조 현 세 월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마라톤과 어머니 (주)건아 컨설탄트 대표 도시계획 기술사 (사)걷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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