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만에 졸업한 연세대 호킹 신형진 군과
명예졸업장 받은 어머니 이원옥 집사
눈과 입을 제외하곤 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희귀병을 가진 연세대 스티븐 호킹 신형진(28,컴퓨터과학과) 씨가 입학 9년 만에 졸업했고 9년간 아들의 학업을 위해 함께한 어머니 이원옥(65) 씨도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연세대 개교이래 적을 둔적이 없는 사람에게 명예졸업장을 처음 수여한 최초의 사례다.
☞ 클릭 (바로가기) 신형진 군의 어머니 이원옥 집사의 간증 동영상 보기(CBS)
http://blog.naver.com/dfgiyo?Redirect=Log&logNo=140129652222
[ 신형진 군 관련 보도 ]
☞ 클릭 (동영상 바로가기)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228224024072&p=imbc
☞ 클릭 (동영상 바로가기)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228211852716&p=sbsi
☞ 클릭 (동영상 바로가기)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304231914161&p=seoul
9년 만에 받은 아주 특별한 졸업장
160cm-24kg, 눈과 입을 제외하곤 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희귀병을 가진 연세대 스티븐 호킹 신형진(28) 씨가 입학 9년 만에 졸업했다. 무던히도 힘들었던 그 시간에는 어머니 이원옥(65) 씨가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감동의 이야기를 들었다.
척추성근위축증. 온몸의 근육이 평생에 걸쳐 천천히 마비되는 희귀병이다. 장기의 근육까지 처절하게 말라붙으면서 온몸의 뼈가 휘어져 격렬하고 만성적인 통증이 수반되는 고통스러운 병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은 물론 호흡하기가 어려워, 20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뜨는 경우도 많다.
올해 연세대 졸업생 중에 이 병에 걸린 학생이 있다. ‘연세대 스티븐 호킹’이라는 별명을 가진, 컴퓨터공학과 02학번 신형진 씨다.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까딱할 수 없는 그가 명문대를 입학하고, 또 졸업했다. 지난 2002년 입학 이후 무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거북이처럼 느리고 꾸준하게 학교생활을 ‘해냈다’. 입과 눈 이외의 다른 장기는 쓰지 못 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비장애 학생들도 버거워하는 전공과목에서 A학점을 받으며 평균 3.5의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타고난 천재라는 말로 치부하기엔 그와 어머니가 흘린 땀과 노력의 시간이 무척 값지다. 형진 씨의 졸업장과 어머니의 명예졸업장은 생사를 오가는 위험천만한 순간,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캄캄한 어둠의 순간을 모두 견뎌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다.
9년 만에 학사모를 쓰다
모든 졸업식장이 그렇듯, 지난 2월 28일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있었던 공대 학위수여식 현장에도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똑같은 학사모를 쓰고 앉아 있는 수많은 졸업생들 속에서 형진 군과 어머니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명예졸업장을 수여받는 어머니와 형진 군은 무대 위에 앉아 있었다. 졸업생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하던 교수들은 모두 형진이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들의 졸업은 일종의 ‘사건’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 이원옥 씨에게 주어진 명예졸업장은 연대에서는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단순히 몸이 불편한 아들과 오랫동안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가 있다. 수업을 듣다가 몇 번 숨이 끊어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도 묵묵하고 성실하게 학업에 임한 학생과 어머니.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을 대신해 노트 필기를 하고, 시험을 보고, 등·하교를 책임진 어머니의 노력에 대한 값진 선물이다. 항상 아들 옆에 있어주던 어머니가 있었기에 형진 씨가 수업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방과 후 술자리며 MT, 학교 축제까지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9년이라는 시간은 지난했다. 휠체어 가방을 넣기 위해 승합차를 타고 매일 개포동과 신촌을 오갔다. 수업을 듣는 동안은 복도에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언제 사고가 생길지 모르기에 늘 긴장하면서 아이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학교의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형진이를 많이 도와줬어요. 대필 도우미도 있었고요. 형진이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까 강의실도 제약이 있거든요. 그건 또 학교 측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고. 여러 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졸업은 상상도 못했을 것 같아요.”
이런 시간을 보낸 덕분에 졸업식이 끝나고 저녁에 마련한 조촐한 파티 자리에는 무려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중·고교, 대학 동창과 교회 지인, 주치의 등 모두가 형진 씨를 응원하던 사람들이었다.
21년 만에 맞은 시간표 없는 생활
졸업식이 끝나고 개포동에 위치한 형진 씨의 자택을 찾았다. 오전에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왔다는 형진 씨와 어머니는 “21년 만에 시간표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며 밝은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거실엔 졸업장과 졸업앨범이 놓여 있고, 축하화분도 한가득하다. 20일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9년 만에 맞은 졸업의 기쁨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들을 상대로 우리 형진이가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IT로 세상을 클릭하다’라는 주제로요. 형진이가 앞으로 이런 분야로 가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처음으로 학생 신분을 벗어나서 본인도 얼떨떨한가 봐요.”(웃음)
아직 형진 씨의 진로는 결정되지 않았다. 과 선배, 교수 등 많은 분들이 자청해서 형진이의 진로를 함께 고민해주고 있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소프트웨어를 연구하는 일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마 4월까지는 진로가 결정될 것 같단다.
아들의 학교 시간표에 맞춰 돌아가던 엄마의 시간표에도 다소 여유가 생겼다. 원옥 씨는 이 시간을 본인을 위해, 또 형진이를 위해 영어를 배우고 있다.
“형진이와 대학에 다니면서 원어민 교수와 영어로 대화할 일이 있었어요. 심부름도 해야 하고, 부탁도 해야 하는데 이야기를 나누려니 진땀이 나는 거예요. 10년 동안 외국계 항공회사에 다녀서 영어에 익숙한 편이었는데도 30년을 안 쓰니까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영어 학원에 다녀요. 하하.”
‘강남역 학원 최고령자’라는 두 딸의 놀림을 받으며 시작했지만 원옥 씨의 도전은 새로운 활력이다. 그녀가 늦은 나이에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형진이의 공부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다. 평생을 아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원옥 씨는 21년 만에 생긴 여가시간도 본인보다는 아들 형진 씨를 먼저 배려하며 쓰고 있었다.
캄캄한 새벽 같았던 대학 시절
생후 12개월, 희귀병이라는 확진을 받은 이후부터 원옥 씨는 형진 씨와 한 몸인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 어둡고 캄캄했던 절망의 순간도, 환희의 순간도 둘은 늘 함께였다.
“형진이가 수업을 듣는 동안 저는 복도에서 기다려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잠이 늘 부족해서 커피를 달고 사는데, 하루는 지갑을 차에 두고 내린 거예요. 차에 달려가서 지갑을 꺼내오면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데, 갔다 오는 사이에 형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꼼짝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어요. 그래봤자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요. 불안해서 잠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요.”
수업 중에 갑자기 호흡이 멎었던 순간도 부지기수다. “대필 도우미 친구가 도와줄 때였어요. 갑자기 형이 숨을 안 쉰다며 사색이 되어서 뛰어나왔더라고요. 그땐 체면이고 뭐고 바로 들어가서 형진이를 흔들고 때리고 난리가 나죠. 교수님과 학생들에게 너무 죄송하지만 그만큼 긴박하니까요.”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도 많다. 겨우 강의실에 앉혀놨는데 10분도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나올 때, 강의실 문 앞에서 갑자기 호흡이 멈춰 좌절했을 때는 하늘을 원망하기만 했다.
다행인 건, 학교의 모든 관계자들이 형진이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줬다는 사실이다. “형진이가 장애 학생들 중에서 제일 상태가 심각해요. 그래서 학교에서 편의를 많이 봐주셨어요. 시설을 경사로로 해주시고, 화장실도 고쳐주시고, 막바지엔 엘리베이터도 만들어주셔서 얼마나 편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지 몰라요.”
아무리 엄마가 붙어 다닌다지만 타인의 도움 없인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형진 씨가 듣는 공과대학 건물은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이 1층과 3층밖에 없었다. 강의실이 다른 층에 있으면 머리카락처럼 얽혀 있는 수강 시간표를 전체적으로 바꿔야 한다. “놀라운 건, 요청을 하면 학교에서 금방 연락을 주셔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어요.”
원옥 씨는 이런 작은 일 하나하나가 있을 때마다 총장님께 편지를 쓴다. 현장에 계시진 않지만 학교 책임자로서 직원들의 선행을 아셔야 할 것 같다는 내용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는다. 몸이 불편한 아이와 함께 지내다보니, 감사한 사람이 참 많단다.
생후 12개월부터 시작된 고단한 삶, 그리고 생명의 은인
형진 씨가 희귀병이라는 확진을 받은 것은 생후 12개월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원옥 씨는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 2004년 미국 방문 중 급성폐렴으로 호흡곤란 증세에 빠졌을 때는 최대의 고비였다. 미군 수송기로 긴급 귀국해야 할 만큼 상황은 긴박했다. 목에 구멍을 뚫고 인공호흡기를 연결한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그때부터 26개월을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학교는커녕 집으로도 갈 수 없었다. 심장이 끊어지는 경험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목에 산소 줄을 연결해서 형진이가 소리를 못 냈어요. 입술로 말을 하는데, 제가 이해를 못하면 글자판을 활용해요. 눈을 깜빡 하면 시작하는 말이 디귿이구나, 니은이구나 연상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소통했어요. 말을 못 하니까 밤에는 늘 아이와 함께 침대에서 잤어요. 자다가 혹시 사고가 나면 안 되잖아요. 기역자로 몸을 최대한 구부려서 형진이 엉덩이에 손을 넣고 자요. 몸을 부르르 떨면 제가 일어나서 괜찮은지 체크하고 그렇게 살았죠.”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원옥 씨는 퇴원하고 나서 집에서 잠을 잘 때도 다리를 구부리고 잤다고 한다. 천안함 사건 현장에 있던 장병들이 아직도 트라우마로 잠을 못 잔다는 뉴스를 보고 크게 공감했을 정도로 그녀의 상처는 꽤 컸다.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냥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보낸 거예요. 책만 보면서. 그런데 우연히 호흡재활 치료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인 강남세브란스 병원의 강성웅 교수를 만나게 됐어요.”
그때부터 형진 씨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호흡과 관련된 근육강화 재활훈련이 시작됐고, 치료를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인공호흡기를 뗐다. 그해 9월에는 학교에도 복학했다.
“근데 또 그 암울한 와중에 재밌는 게, 그때가 형진이 친구들이 군대 갔다가 나올 때였거든요. 제가 형진이한테, 형진아 우리 그냥 군대 갔다 온 셈 치자. 그러니까 얘는 한술 더 떠서, 엄마 나는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 특전사 갔다 온 거야, 하더라고요. 요즘 병원에 갈 때는 예비군 훈련 받으러 간다며 장난치면서 가잖아요.”(웃음)
강 교수를 두고 생명의 은인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은 원옥 씨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병원 측에 지금까지 4억원을 기부했다. 그리고 졸업 기념으로 1억원을 또 기부했다. 형진이 같은 환우들을 위해서 센터를 잘 운영해달라는 마음에서다.
5억 기부, 모두에게 감사하다
알려진 대로 원옥 씨는 기회만 닿는다면 기부를 한다. 형진이를 키우면서 가장 달라진 것이 ‘나눔’과 ‘기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원옥 씨 역시 그 사랑을 되돌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진이가 졸업을 하기까지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예전엔 몰랐는데 기부는 한 번 하니까 또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직접 해보니까 기부의 기쁨이 뭔지 알게 되었어요.”
형진 씨의 아버지는 대기업의 임원이다. 넉넉하다면 넉넉하겠지만, 그렇다고 기부를 마음대로 할 정도는 아니다. 아픈 아들을 키우면서 사람들의 사랑의 나눔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알았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다소 부담스럽지만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나눔이라는 것은 할수록 더 하고 싶은 법인지라 졸업식을 즈음해서 학교에 1억원을 기부했던 원옥 씨는 며칠 전 공대 교수님들과 만난 자리에서 또 기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단다. 형진 씨가 없었다면 절대 몰랐을 나눔의 기쁨, 그녀는 본인에게 인색한 마음이 없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남은 인생의 방향을 그리고 있다.
“제 소원이요? 빠른 시일 내에 약이 나오는 거죠. 아무리 발전해도 근육병 약은 없거든요. 저는 인터넷만 들어가면 신약이 나오진 않았나 확인해요. 임상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올라오진 않았는지도요.”
무던히도 긴 터널을 지나왔다. 또 다른 터널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터널을 만나더라도 이들 모자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그리고 꾸준히 길을 걸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그렇게 살아왔듯 말이다.
(여성조선 뉴스 요약 인터넷자료 인용)
첫댓글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감동입니다 얼마나 큰 힘인지 ..놀랍습니다 아들도 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