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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77>
돌산도의 땅이름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이문재의 시 ․‘농담’ 전문)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 시(詩) 100편 중의 한 작품입니다. 아름답고 그윽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맛난 음식을 맛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최고의 여행지라 할 수 있습니다. 여수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여수 10경(景) 중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의 향일암(向日庵)과 여수의 상징적 관광명소인 돌산대교가 있고, 여수 10미(味) 중 담백하고 시원한 맛으로 밥도둑 역할을 한다는 돌산 갓김치와 여수의 대표적 특미인 굴 구이로 유명한 돌산도에 가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많이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섬인 돌산도의 땅 이름 유래에 대해 이곳의 유일한 향토지인 <여산지(廬山誌)>에는 "섬 안에 이름난 8대 명산이 있고 그 산들마다 돌이 많이 있어서 돌산이라고 칭한다." 하였습니다. 지형적 특성이나 땅 이름들이 만들어지는 과정들을 종합해 볼 때 돌이 많은 지역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돌산도는 1984년에 개통된 길이 450m, 폭 11.7m의 사장교(斜張橋)인 돌산대교로 하여 육지와 이어졌습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해상 풍경과 멋진 조화를 이루어, 그 자체가 관광거리인 돌산대교 아래에는 거북선 모형 체험관, 돌산도 일주와 오동도, 광양제철소 등을 다녀오는 크루즈 형 유람선 선착장, 회타운, 해수타운, 해안가 카페 등이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돌산도 일주여행은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해안일주도로 드라이브가 기본으로, 약 46km를 1시간 30분에 일주하는 드라이브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먼저 돌산대교에서 향일암이 있는 임포까지 23km 구간의 동부해안도로를 따라 돌산도의 관광명소들을 찾아 가는 것이 여행의 첫 순서입니다. 돌산대교를 통과하여 동부해안도로를 따라 계속 남쪽을 향해 달리다 죽포를 지나 방죽포(防竹浦) 해수욕장에 도착합니다. 옛날 여천군 안에 삼포(三浦)가 있었는데, 소라면의 대포(大浦), 삼일면의 낙포(洛浦)와 함께 돌산의 죽포도 그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죽포는 유명한 돌산 갓의 최대 생산지입니다.
죽포(竹浦)
이 마을에는 1,000년 나이의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가 있는 언덕을 조산(鳥山)이라 합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의 형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인데, 마을의 주산인 수죽산(水竹山) 능선 끝 부분인 이곳이 닭의 머리에 해당되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느티나무 앞은 돌산도 최고봉인 봉황산(441m) 산행의 들머리입니다. 방죽포(防竹浦)는 길이 300m, 너비 70m에 부드러운 은모래가 깔린 아담한 백사장이 있고 백사장 뒤편에는 200년 수령의 해송 15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어 갯냄새에 솔향까지 은은한 포구입니다. 항아리 속처럼 오목한 분위기에 수심과 경사가 낮아 가족 단위의 피서객이 주로 찾는 곳입니다.
임포(荏浦 · 깨개) · 거무산
방죽포에서 향일암까지는 바다 풍경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끼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길입니다. 해돋이축제가 벌어질 때(12월 31일-1월 1일)면 차량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향일암 아래에 임포마을이 있습니다. 임포마을은 옛날 ‘깨개’라 했는데, 한자로 옮기면서 임포(荏浦)가 되었습니다. 깨는 아주 작은 것을 뜻하므로 개(포구)가 작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옛날 이 마을에선 금오산을 거무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멀리서 보면 우거진 숲이 거멓게 보이므로 ‘검은 산’이라 불렀을 것으로 보이는데, ‘검은산>거믄산>거무산’의 음변을 거친 것으로 보입니다.
깨개절
이 ‘거무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금오산’이고, 금오산에 있는 절이어서 금오암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 이 지역 사람들은 절 이름을 깨개(임포)에 있는 절이라 해서 깨개절, 거무산(금오산)에 있는 절이라서 거무절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낙산사의 홍련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 강화도의 보문암과 함께 전국 4대 관음기도처 중의 하나인 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13년(644), 원효대사가 창건할 당시엔 원통암(圓通庵)이라 불렀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건물이 중심 법당일 때는 그 전각을 원통전이라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하는 원융통’[周圓融通]을 갖추고 중상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圓通’이라 하는 것입니다.
향일암(向日庵)
관세음보살을 모신 건물이 사찰 전체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때는 관음전(觀音殿), 대비전(大悲殿), 보타전(寶陀殿)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향일암은 관음기도처답게 관음전이 2동이나 되었습니다. 위의 관음전은 원효대사가 수도했던 곳인데, 그 후 고려 광종 9년(958) 윤필대사가 수도하면서 금오산의 산명을 따 금오암(金熬庵)이라 개명했다가, 조선 숙종 41년(1715)에 인묵대사가 일출의 찬란함을 보고 향일암으로 불러야만 절 이름이 날 것이라 해서 개명했지만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1970년대에 와서 출입구가 동쪽에 생기면서부터 향일암이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닷가 150m 높이의 절벽 위 암자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경이로움 그 자체로 절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영구암(靈龜庵) · 엄구암(掩龜庵)
향일암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는 암자 주변의 바위들이 모두 거북등무늬를 하고 있어 ‘신령스런 거북’이란 뜻의 영구암(靈龜庵), ‘거북이 엎드려 숨어 있다’ 는 뜻의 엄구암(掩龜庵)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경봉스님께서 개명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거북등무늬는 수천만 년 전 백악기 때 화산용암이 냉각되는 과정에서 체적이 줄어 육각이나 오각의 기둥(주상절리)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지질학적 용어로 튜뮬러스(Tumulus)라는 화산암에서도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점성이 낮은 용암이 흐를 때 표면은 빨리 식어 굳고, 표면이 내부의 압력으로 인해 빵 껍질처럼 부풀어 올라 거북등의 형상으로 갈라져 생기며 '거북등 절리'로도 불린다고 합니다.(박맹언ㆍ부경대 환경지질과학과 교수)
검머리 · 검은너리
절에서 내려다볼 때 임포마을 일대의 지형은 거북이가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서 동쪽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형상입니다. 향일암이 위치한 곳은 몸체에 해당하며, 바다 쪽으로 돌출된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는 거북의 머리에 해당되는 곳으로 검머리(검은머리)라 불러왔으며, 거북의 목 같이 생긴 곳의 해변에는 검은 암반이 깔려 있어 '검은너리'라 불렀다고 합니다. 마을 입구에 마련된 주차장의 돌출부가 거북이 왼쪽 발에 해당되며 반대편에는 거북이 오른쪽 발에 해당하는 암초가 물속에 잠겨 있는데, 그 암초는 '향일암 앞바다에 미륵불이 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우리 유유자적여행자클럽의 카페지기 이종철 교수님은 구글어스로 이곳 물밑을 살펴보면 그 전설의 미륵불이 확인된다고 합니다.
밤섬
주차장이 있는 거북이목에서 더 가면 거북의 머리에 해당되는 산(검머리)이 있는데, 남해에서 들어오는 배를 다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군사작전구역이라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등대가 있는 곳은 일제시대에 대포가 설치되었던 곳이라 ‘대포자리’라 불렀다고 합니다. 거북이목의 주차장을 출발하여 대율 삼거리에서 왼쪽 산등성이 길을 올라 율림치로 향합니다. 대율마을 앞 바다에 작고 예쁜 섬 하나가 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름이 밤섬인데, 생긴 모양이 꼭 밤톨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 이 섬에 이무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1년에 한 번씩 ‘금굴’에서 목욕을 하고 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밤섬 때문에 마을 이름도 대율, 소율이고 고개 이름도 율림치입니다.
율림치 몬당
대율마을의 옛 율림초등학교 자리에는 1998년 12월 17일 이곳 임포리에 침투하던 북한 반잠수정을 격침시켰던 사건을 기념하여 북한 반잠수정 전시관이 건립돼 있습니다. 율림치에는 산악회원들이 타고 온 많은 관광버스들이 주차해 있습니다. 이곳 율림치 주차장의 몬당휴게소에서 금오산-금오봉 산행을 시작하는 등산객들이 많습니다. ‘몬당’ 또는 ‘몬댕이’이라는 말은 높은 고갯마루나 봉우리를 말하는데, 경상도에서는 ‘만당’ ‘만딩이’ ‘만디’라 합니다. 이곳에서 30분이면 금오산 정상(323m)에 오를 수 있고, 다시 30분 후면 향일암 위의 거북등바위 정상에 설 수 있습니다.
성두마을
율림치를 넘어 맨 먼저 만나는 마을이 성두마을인데, 여기서부터 서부해안도로 드라이브코스의 시작입니다. 성두마을 주변에 만리성(萬里城)이 형성돼 있는데, 이 마을에서부터 대미산까지 뻗쳐 있는 긴 성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돌산목장의 울타리로 쌓은 목장성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성두마을은 성의 머리 부분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라고 옛날엔 성머리라 불렀다고 합니다. 한자 지명으로 성두(城頭)라 하여 오다가 해방 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星斗’로 개칭되었으나 1995년 주민들의 청원에 의거 ‘城頭’로 환원되었다고 합니다. ‘星斗’라는 지명은 ‘별을 말로 담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마을은 노인성(老人星)을 잘 볼 수 있는 곳이어서 한자를 바꾸었던 것이라 합니다. 노인성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을 이르는 우리말로 노인성이 보이는 마을은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노인들은 마을의 북동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을 망(望)개산이라 부르더군요. 사방이 확 트여 망보기가 좋다고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작금(作錦)
성두 다음에 만나는 마을이 작금(作錦)입니다. 작금과 성두를 합해 금성리라는 행정지명이 생겼다 합니다. 옛 사람들은 ‘작그미’ ‘작기미’ ‘작구미’라고 불렀다 합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성머리(성두)’로 넘어 가는 ‘성목재’에 옥녀바위가 있는데, 전설 속의 옥녀가 옥녀바위 위에 베틀을 놓고 베를 짰다는 ‘옥녀직금(玉女織錦)’ 풍수설에 따라 ‘作錦’이라 했다고 합니다. ‘작살 +금이’에서 ‘살’과 ‘이’가 탈락되어 작금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작살(자갈의 방언)이 아주 많은 마을 앞 바닷가에 ‘금이’(바닷가의 언덕)가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방죽포 마을 옆 바닷가에는 푸른 솔이 우거진 청솔금이가 있고, 그 외에도 돌산도 곳곳엔 이런 지명이 아주 많습니다. 물이 빠지면 군함 모양이 나타난다고 군함금이, 움푹 들어가서 따뜻하다고 따슨금이, ‘범바구’가 있다고 범금이, 샘이 있었다고 샘금이, 참나무가 많다고 참남금이 등이 그 예입니다. 비단 자갈을 깔아 놓은 듯해서 ‘作錦’이라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신기마을
옛날 작금에서 신기마을로 가려면 눈물고개를 넘었다고 합니다. 겨울에 그곳을 넘어갈 때 워낙 바람이 거센지라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기마을은 원래 산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는데, 1780년경 해일로 인하여 바다 수면이 육지보다 높아지면서 마을을 덮치게 되었는데, 그때의 파도 모양이 칼등처럼 생겼다고 ‘검단(劍端)’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1910년경 마을 뒷산에 도둑이 성행하자 지금의 마을 위치인 바닷가로 옮기면서 ‘새터’라 하다가 한자 지명 ‘新基’로 바꿨다고 합니다.
은적암(隱寂庵)
군내리로 들어와서 제일 먼저 찾아볼 곳은 천왕산(天王山) 은적암(隱寂庵)입니다. 도로에서 500m쯤 걸어 오르면 일주문이 보입니다. 일주문 앞을 지키고 있는 참솔 한 그루의 기품 있는 모습에서부터 암자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은적암은 1172년(고려 명종 2년) 보조국사가 금오도에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송광사를 짓고, 순천 조계산의 송광사를 오가면서 중간 휴식처로 삼았던 곳입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1158-1210)이 모후산(母后山)에서 절터를 잡으려고 나무로 만든 세 마리의 새를 날렸습니다. 한 마리는 순천 조계산 자락의 현 송광사 자리에, 또 한 마리는 고흥 거금도 용두산(적대봉) 기슭의 송광암 자리에, 나머지 한 마리는 훨훨 날아 여수 금오도로 날아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불법의 진리를 퍼뜨릴 땅으로 점지한 이 세 곳에 불사를 일으켜 삼송광(三松廣)을 시창하였던 것입니다. 은적암이 앉은 자리는 풍수지리설로 볼 때 ‘범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범은 사람이 없는 조용한 숲 속에 살기 때문에 隱寂庵이라 했다는군요. 천왕산은 높아서 천왕에 해당된다고 붙인 이름이랍니다. 절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입지 자체가 외부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암자 뒤편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지금의 거대한 일주문이 세워지기 전엔 그 왼쪽에 나라 안에서 가장 작고 낮은 일주문이 있었습니다. 옛 일주문이 있었던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숲길로 들어서니 후박나무, 동백나무가 울창해 한낮에도 녹음이 짙었습니다.
돌산향교
은적암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에 돌산향교가 있습니다. 명륜당 앞에는 100년 이상 된 향나무, 대성전 앞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과 발을 잡아 끕니다. 돌산향교는 광무 1년(1897) 대성전을 처음으로 지었고 광무 2년(1898)에 명륜당이, 그 다음해에 풍화루를 세웠다고 적혀 있습니다.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의 집이었고,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학생들이 휴식을 취한 것으로 보이는 풍화루는 앞면 3칸 ·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입니다.
방답진(防踏鎭)
군내리(郡內里)는 옛날 방답진(防踏鎭)이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엔 돌산읍 소재지입니다. 1896년 돌산군이 설치되면서 행정구역 명칭에 ‘郡’자가 붙었고, ‘內’는 성의 안쪽을 말하는 듯합니다. 군내(郡內), 동내(東內), 남외(南外), 서외(西外), 송도(松島) 등 다섯 마을이 있고, 방답진성, 군관청, 굴강(군선정박장소) 등 역사의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돌산읍사무소에서 돌산항으로 내려가 항구의 풍경을 일별한 다음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서외마을로 향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방답첨사진(防踏僉使鎭)과 선소(船所)가 설치되었던 곳인데, 물이 빠져 바닥이 완전히 드러나 있는 상태인데도 거북선 정박소였던 굴강(掘江)은 원형을 그런대로 잘 유지하고 있는 편입니다. 방답진 수군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좌수영 수군의 한 축이 되어 왜적을 무찌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수영의 거북선 3척 중 한 척이 배치돼 공격의 선봉에 선 핵심 수군진이었습니다.
임란 당시 방답진 수군을 지휘한 장군(당시 첨사)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이름이 같은 이순신(李純信)이었습니다. 마을에 사는 촌로들로부터 선소와 굴강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굴강에는 거북선이 9척까지 정박할 수 있었고, 주변에 심어진 수령 500년 이상의 거목 다섯 그루는 밧줄로 거북선을 매었던 나무라 합니다. 지금 그 나무들 대신 수령 300년가량의 나무들만 남아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고 합니다. 노인들이 어렸을 때는 바닷물이 아무리 빠져도 굴강에는 물이 빠지지 않았고 물이 깨끗해 목욕도 하고 해초를 따기도 했다고 합니다. 썰물 때 이렇게 물이 빠진 이유는 굴강 바깥쪽으로 접안공사를 한 이후부터라 했습니다.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방답진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송시(松柿) · 금천(金川) · 평사(平沙)
군내리에서 나와 송시(松柿)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금천마을이 나오고 평사리까지 이어집니다. 송시마을은 주변에 소나무와 감나무가 유별나게 많아 예전부터 ‘송시밭골’이라 불렀으며, 금천(金川)은 마을 앞 해변에서 마을 뒷산인 노우산(老牛山) 쪽에서 흘러오는 금을 캐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평사(平沙)는 평평한 모래밭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모두 굴밭으로 변해 있습니다.
무술목
무술목은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무술년(1598년)에 이순신 장군이 지형적 특징을 이용해 가막만에 침범해온 왜적을 섬멸했던 곳이어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곳은 옛날부터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가 거의 맞닿아 만조 때는 육로의 넓이가 채 100m도 안 되는 좁은 목이었다고 합니다. 왜적이 이곳을 침범해 오자 이순신 장군이 무술목 양쪽에 있는 대미산(大美山)과 소미산(小美山)에 군사 300명을 매복시켜 놓은 후에 왜적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좁은 수로에 갇혀 우왕좌왕하는 왜선 60여 척, 왜병 300여 명을 섬멸했다고 합니다. 일명 동백골로 불리는 무술목은 1km의 몽돌밭 해변을 감싸 안고 있는 송림이 무척 아름다운 곳입니다.
돌산공원
돌산공원에 올라가면 돌산대교의 좌우로 펼쳐져 있는 여수 내항의 푸른 물빛과 그 너머로 여수시의 전경을 관망할 수 있습니다. 어업인 위령탑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거북선 실물 모형도 보이고, 돌산대교 준공 기념탑 정면 방향에서는 돌산대교와 여수 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정자가 있는 높은 언덕의 꼭대기를 이곳 사람들은 ‘몬댕이’라 부르는데, 정자에서 여수 시가지의 맨 오른쪽을 바라보면 자산공원과 그 너머 오동도가 보이는데, 예로부터 이곳에서는 저녁 무렵에 배들이 항구로 돌아오는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어, 여수 8경 중 제7경(遠浦歸帆)으로 꼽고 있습니다.
장군도(將軍島)
돌산대교 아래 바다에 동그랗게 생긴 작은 섬이 하나 보입니다. 옛날엔 시누대가 많이 자생하여 대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돌산공원 아래의 진두(津頭)와 연결되는데, 조선조 연산군 때 이량(李良) 장군이 대섬과 돌산도 사이의 수중 협곡에 돌과 자갈로써 수성(水城)을 쌓았다고 해서 장군성(將軍城), 장군도(將軍島)라 부르는 섬입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수성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