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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원 교역의 범위와 기능
한기문(경북대 사학과 교수)
머리말
1. 사원 교역의 배경
2. 사원 교역권의 범위
3. 사원 교역품의 범위
4. 사원 교역의 기능
맺음말
머리말
고려시기에는 불교가 보편화되면서 사원이 교단의 거점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능을 하였다. 그 중 교역의 문제를 살펴보려는 것이 본고의 목표이다. 교역은 물물 거래와 물자와 화폐의 거래 등 다양할 수 있다. 고려시기 상업은 개경의 京市가 상설화되었고, 지방에는 읍치내에 虛市로 운영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광범한 분포와 조직과 관리체계가 公的으로 존재한 사원에서 이러한 교역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았다. 연구 자료가 인멸되어 부족하고, 또한 그동안 연구자의 고려시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불교제도 정리를 배제한 『고려사』에 반영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점도 작용하였다.
사원경제의 차원에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사원이 보유한 재정과 사원전 등에 치중한 연구였고, 교역의 문제에 초점을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통 요지에 위치한 院의 기능과 사원이 소유한 말[馬]을 통한 원격 교역 가능성을 제시한 선구적 연구가 있다. 사원의 대내외의 商行爲를 새로운 자료로 정리한 논고도 있다. 고려시대 사원 교역장의 유형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들 연구는 사원 교역 문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각과 기반을 제공하였다.
본고는 위의 개척적 선행 연구를 토대로 사원 교역의 배경으로서 사원의 분포나 조직, 사원내의 수요 등을 이해하고, 사원 교역권의 범위, 교역품의 범위 등을 살펴본다. 그리고 사원 교역의 여러 기능을 정리하여 고려 사원의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고자 한다.
1. 사원 교역의 배경
교역의 장소는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 곧 수도 개경과 각 지방 단위의 경우는 읍내 치소가 가까운 곳 등이 그에 해당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통 요지 곧 교차지나 험한 고개 길, 수로상의 요지 등에도 교역의 장소로서 적절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지역에는 거의 예외 없이 사원이 자리한다.
개경의 경우 고려 국왕 교화의 출발지로서 皇宮과 국가 제사 시설이 정비되어 있으며 지배층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개경 10만호를 인구로 바꾸어 보면 50만 정도의 규모가 되고 고려 전체 인구 300만에 대비하면 1/6 정도나 된다. 국가불교의례의 사원이 있었고, 불교 종단의 중심 사찰도 밀집하였다. 태조 진전이 있는 봉은사, 팔관회 행사의 중심 법왕사, 국왕 축수도량의 외제석원 등과 화엄종의 영통사, 천태종의 국청사, 유가종의 현화사, 선종의 보제사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전기 車天輅의 『五山說林草稿』에 따르면 고려 말 개경 성내에는 명찰만 300개가 있고 그 가운데 演福寺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개경의 사원 수의 추이는 태조대 25사에서 고려말 300여 사로 12배에 이르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태종 6년 3월 禪敎各宗合流寺社를 정할 때 ‘新舊都各寺, 各道界首官, 各官邑內資福, 邑外各寺’ 라 하여 각관 즉 군현 단위의 邑內 곧 치소 가까이에 자복사가 위치했다. 태종 7년 12월 의정부의 요청을 허락한 諸州資福寺에 대해 山水勝處 大伽藍으로 亡廢사원을 대체한다는 것에서 諸州의 자복사가 대체로 읍기의 중심부의 치소와 가까이 위치하였으나 亡廢한 경우는 山水勝處의 사원으로 대신한 것이다. 각관 읍내의 사원이 폐사가 진행되고 있는 조선초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지만, 고려시기에 각 행정 단위에 자복사가 존재했음이 짐작된다. 더구나 읍내 치소 가까운 중심지의 표지로서 자복사는 교역의 장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교통의 요지에 사원이 건립된 예가 많았음은 崔瀣와 李穡의 글에서 알 수 있다.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에 탑묘가 서로 바라보고 있다” 라고 한 것이나 “사원이 민가와 섞여 있고 내 옆과 산곡에는 사원이 아닌 곳이 없다” 라는 표현들은 이를 말해 준다. 황해도와 평안도 경계선에 있었던 慈悲嶺의 羅漢堂이나 금강산 서북 고개의 험함과 휴식처가 없는 곳에 설치된 금강산 都山寺, 상주와 충주 사이의 고개길에 위치한 하늘재의 大院寺, 문경 견탄가에 설치한 犬灘院 등의 예는 고개길에 위치한 사원이다. 임진강가의 慈濟寺의 課橋院, 벽란강가의 普達院, 대동강가의 永明寺, 남한강가의 神勒寺, 낙동강가의 元興寺 등은 나루에 두어진 사원 예이다. 그리고 현종대 직산현 주변에 설치한 弘慶寺, 개경에서 동남방으로 가는 길목의 파주 惠陰寺 등도 교통요지에 성립된 예이다.
사원 교역이 가능한 것은 사원의 시설 규모와 상주 인원, 그리고 각종 의례의 설행 등으로 사찰 자체의 수요가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원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집회의 정기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가늠할 수 있다. 전국적 대규모 정기 의례는 정월 燃燈會, 3월 經行, 7월 盂蘭盆齋, 11월 八關會, 국왕 탄일 축수도량 등과 3년 1회의 仁王百高座道場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각 종단의 정기 승려대회 곧 조계종의 普濟寺 담선대회, 유가종단의 玄化寺 정기대회, 화엄종단의 興王寺 정기회, 천태종단의 國淸寺 정기회 등이 열렸다. 이 때 종단내의 승려들이 모여 사상적 교유만이 아닌 물적 수요는 물론 교역도 했을 것이다. 그 외 지방 사원 결사체, 특정 사원에서 기일을 정한 법회가 열릴 때도 그 사원에서는 자체의 수요품 조달과 참여자들을 위한 百貨의 교역이 있었을 것이다.
대규모 승단의 유지를 위해 사원의 寺莊에는 田土와 鹽盆 등의 재산만이 아닌 수공업 기술자들을 보유한 경우도 있어 여기서 생산되는 手工業品의 잉여분은 사원 교역을 통해 유통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조달이 어려운 불교전적, 향, 불구, 도자기 등은 商人을 통해 수입되어 역시 사원 교역을 통해 사원 의례나 개인 승려의 수행과 생활에 소요되었다.
이상에서 사원의 입지는 세속과 통할 수 있는 곳에 있어 교역할 수 있는 중심지로서의 표지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사원에는 부정기적인 것은 물론 정기적 의례와 승려대회, 결사체로 된 사원은 승려는 물론 세속인의 참여하는 불교 교리와 신앙이 있어 그에 따른 수요품이 늘 필요한 곳이기도 하였다. 사원은 이처럼 입지와 대규모 물품이 소요되는 곳이어서 교역이 가능한 곳이 될 수 있다.
2. 사원 교역권의 범위
개경에는 상원 연등회때 奉恩寺에 이르는 길 곧 京市에 교역장도 아울러 열렸을 것이다. 특히 祖眞拜謁儀式을 위해 국왕이 위의를 갖춘 행렬과 길거리 공연까지 포함한 燈夕이 행하여졌으므로 야간 시장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등석시에 부녀자들의 모임이 있어 특정 관료의 정책에 항의한 사례도 있어 부녀를 위한 百貨 교역 등의 시장 기능도 짐작된다.
팔관회 때는 法王寺 인근에서 지방봉표조하자로 온 향리들이 참여한다. 하표는 원정, 동지, 팔관, 성상절일에 각 지방 계수관 이상에서 올라 왔고 이를 중서성에 보내 그 문장을 품평하여 공시하였다고 한다. 하표만 공문서 형태로 오지 않고 지표원으로서 조하자도 왔을 것이며 이들은 각 지방의 향리들이었을 것이다.
이 때는 송, 동서번, 탐라국의 외국인 조하자들과 상인들이 교역장을 열어 사원과 관청, 기타 개인적 물품을 교역하였을 것이다. 『고려사』에 법왕사에 행차하고 외국인 조하자의 私獻이 있었다는 기사로 보아 법왕사와 관련된 교역장이 섰다. 법왕사의 위치는 황성안이므로 황성 밖 곧 광화문 밖의 경시도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팔관회의 법왕사 경우 교역 범위는 국내 전국적이면서 동시에 국제적이라 할 수 있다.
국왕 생일에는 外帝釋院에서 7일간 축수도량이 열렸다. 외제석원은 내재석원과 달리 황성 밖이고 자세한 위치는 미상이지만 송악산에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이때도 지방 계수관 조하자가 참석하여 교역장이 열렸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원의 교역 범위는 전국적이다.
개경에는 현종대 방명을 정할 때 사원에서 유래한 방명이 다수 있다. 특히 북부방에는 法王坊, 興國坊, 慈雲坊, 王輪坊, 舍乃坊, 內天王坊 등이 있다. 사원명에서 유래한 방명이 나타난 것은 사원이 그 방에서 가장 중심된 시설이고 그에 따라 사원의 교역장 곧 시장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개경에는 坊市가 없다고 하였지만, 사원 중심의 坊市 존재 가능성은 있는 것이라 하겠다.
개경의 사원간 교역이 성립된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庚辰年에 乳岩 아래에 油市를 세웠는데 이 때문에 지금도 俗에서 利市를 乳下라 부른다.
위는 『삼국유사』 왕력 태조조에 개경 10사 창건 기사 다음에 이은 기록이다. 乳岩 아래에 油市를 세웠으며 지금 곧 일연 당시에는 항간에서 利市를 乳下라 이른다고 한 것이다. 경진은 920년(태조 3)에 해당한다. 그런데 乳岩은 현종 15년 5부 방리를 정할 때 중부의 한 방명으로 정리되어 留岩坊이 되는데 乳岩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乳岩과 留岩은 상통한 것으로 생각된다. 乳岩은 바위 이름이 아니고 절 이름인 것이다. 그 작명 유래는 李穀의 「천태불은사중흥기」에 따르면 현신한 藥師佛이 留岩寺의 우물안에 숨어 버리자 광종이 그 사원을 확대하고 改額하여 佛恩寺로 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면, 油市는 乳岩寺의 교역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후대 留岩坊의 방명도 乳岩寺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겠다. 유암하에 유시가 있으므로 乳岩寺 아래의 油市는 곧 寺下市인 셈이다.
油市는 사원경제에 필요한 燈油를 공급하는 시장이며 그 대상 사원은 일연이 10대사를 제시한 다음의 기사이므로 개경 10大寺라 추측한다. 후대 ‘乳下’라는 것은 ‘乳岩’의 轉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시는 상설점포는 아니라고 짐작된다. 유시 기능은 사원의 관장하에 그 이득은 長生庫를 윤택하게 하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 유시는 유암사 부근의 여러 사찰의 등유를 공급하는 교역 범위를 가지는 셈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개성 오관산 아래의 靈通洞은 널찍하게 평탄한 곳에 수십개의 인가가 있어서 대대로 浣布 곧 직물을 세탁하는 것을 업으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오관산 지역의 綿紬洞名에 보듯 포백 생산이 저명하였다는 사실은 이 기록 이전부터의 사실이라 추정한다. 영통동은 고려 초부터 화엄종의 거찰이자 景德國師, 大覺國師가 주석한 바 있는 오관산 靈通寺가 있음으로 생긴 동명과 관련 지울 수 있고, 포백 생산자 주거이지만, 이곳이 영통사의 교역장인 것은 아닌가 한다.
그 외 개경의 보제사, 현화사, 흥왕사, 국청사 등은 각기 조계종, 유가종, 화엄종, 천태종단의 승려 대회가 매년 정기적으로 열려 종단내의 중앙과 지방 사원 소속의 승려들 간의 수요 물품교역이 있었을 것이다.
지방의 경우 읍내 치소 가까이 資福寺가 위치하고, 각종 지역 중심의 불교 정기 의례 곧 연등회, 경행, 우란분재, 불탄절, 팔관회, 聖上 節日 도량 등이 행하여지고 있다. 자복사는 도시의 상징적 衛護의 표지적 기능도 하여 지역내의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이다. 이에 따라 자복사를 중심으로 교역의 장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상주 계수관에 상주 관내 사원 관계자의 모임이 있었고 그 모임은 상주 관청 법석에 참여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고려후기 了圓의 『法華靈驗傳』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승 亡名이 尙州 小寺에 머물렀는데 항상 음양점복으로 閭里에 출입하였는데 남녀가 모두 환영하였다. 화복을 묻고 댓가로 의식을 제공하였다. 하루는 官廳에서 연 法席에 상주내의 諸寺의 典香者가 모두 모였는데 망명은 비록 참여하였지만 다만 음양승으로 말석에 있었다. 모두 소홀하기를 풀과 같이 하였다. 야반에 이르자 등촉이 꺼지고 거의 잠든 무렵에 홀연히 광명이 燈火와 같았다. 무리가 모두 놀라 일어나 찾으니 망명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黑業을 부끄러이 여겨 내면으로 懺悔하고 단지 蓮經을 외우기를 여러 해 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승이 모두 탄복하고 공경하였다. 海東傳弘錄에 나온다.
위는 망명의 법화경 영험 사례를 말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상주가 명시되고 이 지역을 다녀간 天頙의 저술로 지금은 전하지 않는 『해동전홍록』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험 사례 자체를 제외한 상황 설명은 사실로 보아도 될 것이다. 여기서 관청 주관 법회는 아마도 전국적 정기 행사인 연등, 경행, 우란분재, 성상절일 도량, 인왕도량 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법회에 상주내의 諸寺 典香者 곧 주지들이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규모 법석에 수반되는 많은 수요품은 물론 기타 교역도 가능한 교역장이 이 때 열렸을 것이다.
관청 법석의 주관 주체와 장소는 자복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규보가 상주 읍치 지역에 들어 와 旅舍에 머물면서 資福寺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에 따르면 상주 자복사는 治所와 가까운 읍치 중심부에 있었다. 경주 계수관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일연의 기록에 따르면 經行 때에 經秩을 피람하여 재난을 피하였는데 그 경질이 東都 僧司 곧 경주 승사에 보관하였다는 것이다. 승사는 곧 자복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관청 법석의 주관은 자복사라 하겠고, 자복사 교역장도 아울러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복사 교역장은 지방 정기 시장인 虛市의 기능과 그 위치가 비슷하다. 지방 허시는 고대부터 聖所를 중심으로 형성된 官市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자복사가 읍치내의 성소를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면, 자복사 교역장은 지방 허시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기 적어도 계수관 단위의 교역장은 상주 계수관의 사례와 같이 국가적 정기 불교 의례에도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계수관 이상은 정기 불교 의례가 모두 시행되었겠지만, 그 이하의 경우는 연등회, 경행 등이 시행되었다. 연등회는 향읍에도 시행되었다 하고, 경행은 현단위까지 시행된 것을 명시하였기 때문이다.
고려후기 지방 결사체로 유명해진 覺華寺, 水精社, 盤龍社, 東白蓮社 등은 학승과 세속인이 참여하여 그 규모가 매일 수백에서 수천이 모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교역장 역할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安國寺, 龍門寺 등의 50일 期日을 정한 담선대회의 경우도 부정기적이지만 교역장 성립의 가능성은 있다. 매일 수백명씩 모인다는 사실로 보아 그 사찰 인근 지역의 교역 범위를 가진 예로 볼 수 있다.
산지 사원일 경우는 사원의 속원이 도심에 진출하거나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어 물자의 교역에 참여했을 것이다. 예천 용문사의 경우 예천 치소 가까운 교통 요지에 頭川院을 경영한 것은 물자 교역의 창구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정집』에 따르면, 금강산 長安寺의 사원 재산은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었고, 개경에 京邸와 京市 市肆를 소유하였다. 다음은 관련 기사이다.
예전부터 있던 전지에 이르러서는 국법에 의하여 結의 수로써 계산한다면 千五十結이 된다. 전지로서 成悅, 仁義縣에 있는 것이 각각 二百結, 扶寧, 幸州, 白州에 있는 것이 각각 百五十結, 平州, 安山에 각각 百結이니 바로 成王이 희사한 것이다. 鹽盆은 通州의 臨道縣에 있는 것이 하나, 京邸는 開城府에 一區, 시장의 점포에 있어서 사람을 고용한 곳이 三十間이다.
위에서 보면, 장안사의 전지는 성열, 인의, 부령, 행주, 백주, 평주, 안산 등지에 1050결의 전지가 분산되어 있고, 염분도 통주 임도현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와 아울러 京邸가 개성부에 한 곳 있다고 한다. 이 경저는 규정하기 어려우나 京邸主人이 있어 상업교역에 역할을 하였다 하여 교역과 관련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고, 물류 창고라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市廛에 있는 점포에 사람을 고용하여 운영하는 곳이 30간 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금강산 장안사는 여러 곳에 분산된 전토와 염분을 소유하고 있고 그 생산물의 일부는 개성부의 소유 경저와 시전 점포를 통해 교역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안사의 경우는 개경에 직접 京邸 및 시전 점포를 소유한 예이다. 이로 보아 지방 명산의 유명 사원 중에는 개경에 까지 교역의 범위를 넓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雙城摠管 趙侯가 山僧 戒淸과 의논하여 건립한 금강산 都山寺는 산내 사원들의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관련 부분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요충지 臨道縣에 땅 여러 頃을 사서 佛寺를 창건하여 聖壽를 축수하는 도량으로 만들고 봄 가을로 粟을 배로 실어 드나드는 자를 먹이고 그 나머지는 산중의 여러 절에 갈라 주어서 겨울과 여름에 먹을 것으로 삼게 하고 이런 일을 해마다 하기로 정한 까닭에 이름 붙이기를 都山이라 하였다.
위에서 도산사는 금강산 일대의 여러 산중 사원의 식량을 공급하는 교역 중심 사원으로 경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요충지 임도현에 세워진 사원이고 봄과 가을에 배로 식량을 운반한 것으로 보아 水路와도 연결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해마다 어느 시기를 정해서 이루어진 일이라 명시하였다. 이 때 식량만 교역한 것은 아니고 기타 사원 필수품도 아울러 교역된 것은 충분히 추측된다.
수로나 고갯길의 교통 요지에 성립된 사원의 경우 사원간 혹은 민간의 유통 사업에도 역할을 하였다. 원흥사가 강가에 위치하고 여기에 많은 배가 모여 들었던 사실은 다음 시에서 알 수 있다. “ 만리 가을하늘 기러기떼 돌아가니 / 푸르른 강가의 옛 절을 찾았노라 / 문밖에는 떠들썩 돛배들 모여 있고 / 적적한 바위 끝에 방장이 깊어라 / 뜰엔 솔과 대 중들은 부귀하고 / 강을 낀 절경이니 절간은 풍류로워 / 숲 속에서 만날 날 묻지를 말아다오 / 속된 이름 버리고 퇴직하고 오리다 ”
이 시구는 1196년 이규보가 방문하고 거기서 읊은 것이다. 낙동강변의 원흥사 앞에 商船이 모여들고 왁작지껄한 분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보아, 상선의 중간 기착지로서 교역의 장이 섰을 것이다. 원흥사가 낙동강의 많은 물류를 담당한 상선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 사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에 상선이 다닌 사실은 詩序에도 ‘상선의 피리 소리 멀고 가까운 데서 서로 들린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龍潭寺에서 犬灘 龍源寺로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지은 다른 시에도 ‘저기 가는 저 외로운 상선 / 아득히 어느 곳으로 가는 고’ 라 하여 낙동강을 이동하면서 만난 상선을 말하였다. 위의 인용 시에서 ‘뜰엔 솔(松)과 대(竹), 중(僧)들은 부귀하고’ 라 하여 상선의 중간 기착지로서 또는 교역장으로서 원흥사가 부유한 사실을 시사한다. 원흥사는 남한강 수계와 낙동강 수계를 연결 지울 수 있는 중간에 위치하여 원격 사원 교역의 유형에 속한다. 낙동강 원흥사의 예와 유사한 대동강가의 永明寺, 남한강가의 神勒寺도 수계 원격지 교역 범위를 가진 사원이었다고 생각된다.
海路의 안녕을 기원했던 비보사사 莞島의 法華寺, 태안 知靈山 安波寺, 紫燕島 濟物寺 등의 예가 있다. 이들 사원은 완도, 태안, 자연도 등에 위치하는데 1123년 서긍이 남송 항주에서 고려에 온 항로상에 위치한다. 또한 이들은 해외 상인 특히 남송 상인들이 개경으로 가던 길목에 위치하여 여기서도 중간 교역을 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고려 말 완도 법화사와 가까운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신안선’은 중국에서 이곳을 경유 일본 東福寺로 가던 무역선이었다. 이 지역의 사원이 교역장이 되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최근 해저 태안선에서 발견된 각종 물표는 선상의 활동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해로상의 주요 지역에 위치한 태안 안파사에 船商의 활동이 있었을 것이다. 제물사는 고려에 왔다 여기서 죽은 송 사신 宋密을 추복하여 송 사절이 올 때마다 제를 올렸던 사원이었다. 이 사원은 규모가 작은 사찰로 알려졌으나, 가까운 곳에 있는 濟物院亭은 이규보 시에 따르면 몇 채의 건물을 가진 것이었다. 제물원정은 제물사의 속원으로 경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교역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예성강의 지류인 漢橋川에 위치한 見佛寺도 중국 상인들이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중국 물품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이를 말해 주는 예는 惠素가 이 절에 주지로 있으면서 사탕 100병을 거주하는 안팎에 진열하면서 ‘이는 내가 평생 즐겨하는 것이고 내년 봄에 商舶이 오지 않으면 어찌 구하겠는가’ 라 한 데서 알 수 있다. 곧 ‘商舶’ 海商 船舶이 오게 됨으로써 구할 수 있다는 것으로 견불사가 상박이 오는 곳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해로상에 위치한 사원 중에는 국내 원격 교역뿐만 아니라 국제 중계 무역 장소로서 기능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 사원 교역품의 범위
정기적인 불교 의례와 정기적 대규모 승려 대회에서 필요한 물품은 다양하였을 것이다. 불교 의례의 경우 그 비용이 국가 재정을 흔들 정도였음은 성종대 최승로가 지적한 바가 있다. 명종대의 내용이지만 팔관회경비의 폐가 크다는 표현에서 경비지출이 컷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불교의례에 따른 여러 물품 교역의 전체 규모도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에 따른 물품은 사원에서도 생산되었다. 고려시기 사원은 농장을 구비하여 차, 먹, 자기, 불구 제작 등의 사원 수공업과 농작물의 생산과 축적도 상당하며, 이의 보관과 운영을 위한 存本取息의 寶를 운영하기도 한다. 寺莊 경영의 사례는 通度寺, 修禪社, 長安寺 등의 구체적 사례가 있다. 통도사의 茶所와 사방 장생표석, 수선사의 존본취식을 여러 사원에 分穀長之한 예나, 장안사가 여러 군현에 분산된 전토와 鹽盆 등을 소유한 예가 있다.
『보한집』에 따르면 時義가 歸正寺에 주지할 때 그 사의 寺莊에 陶工이 있었다. 이 때 安戎 태수가 각종 도기를 구하려 하자 주지 時義가 구해주면서 시를 붙인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사원에는 寺莊을 두고 거기에 농작물은 물론 도공이 있는 곳에는 기와, 술통, 항아리 등의 수공업품도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장의 수공업품은 그 寺의 住持가 처분권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기에 사원 의례와 승려들이 주로 사용한 고급 향류는 송에서 수입되었다. 沈香, 丁香, 木香, 安息香 등은 고려 자생이 아닌 향으로 수입된 근거가 『고려사』에 나온다. 침향은 나무 벌채 수지의 수집한 것으로 가장 귀한 향이면서 한방 약재로도 사용된 것인데 주요 산지는 베트남이다. 정향은 정향수의 꽃 봉오리를 말린 것으로 부패방지, 살균, 입안 냄새 제거에 사용된다. 주요 산지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군도이다. 향의 수입과 함께 香卓, 香具 등도 수입된 예가 있었다.
그 외 승려들의 개인 지물과 관련된 물품 곧 金塔, 銀貨, 銀盒, 茶, 수정구슬, 袈裟, 銅磬, 銅鉢 등도 기증되거나 받은 예가 『대각국사문집』에 다수 보인다. 이들 가운데는 송에서 제작된 것이나 고려에서 제작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생산된 도자기도 수입되었다. 각 사원지에서 발견되는 중국 도자기류는 이러한 면을 잘 반영한다. 禪源寺의 경우 송에서 단청의 원료를 구입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초조대장경판의 판각사업이 송판, 거란판 등을 참조하여 완성되어 가면서 장경도량과 인왕경을 중시하는 백고좌도량, 경행 등이 지방 군현단위까지 확산하는 국가의례로 강조되면서 경전에 대한 신앙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각 사원에도 藏經을 갖출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곧 대장경판의 완성으로 印本이 확산될 수 있었고 이로써 경장시설인 大藏堂이 사원마다 정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대장당 시설에 경전신앙을 할 수 있는 轉輪藏이 시설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대장경판이나 다양한 사간판을 보유한 곳에서는 대장경을 위시한 불교전적을 인성하여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초조대장경판의 판각사실과 재원 마련이 명시된 현화사비 내용에서, 玄化寺가 대장경을 보급하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종은 玄化寺를 창건하면서 송으로부터 대장경을 수입하고 그것을 板刻하여 대장전에 갖추었다. 여기에 설치한 般若經寶는 開版한 般若經 600卷, 三本華嚴經, 金光明經, 妙法蓮華經을 印施하여 보급하기 위한 기금이었다. 부모의 追薦을 위해 매번 가을 7월 15일 부터 각기 3日 3夜에 걸쳐 彌陀會와 彌勒會를 열도록 하고 이 經寶를 설치하고 있어서 경전을 간행하여 追薦하는 의식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현화사는 적어도 4종의 경전을 여러 사찰이나 개인에 보급하는 중심 사찰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興王寺의 경우는 초조대장경판이 大藏殿에 보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義天에 의해 이곳에서 장소를 간행하는 교장사업이 진행되고 敎藏司가 설치되고 이를 지속할 수 있는 재원인 敎藏寶의 존재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초조대장경판이 이곳에 최종 소장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많은 불전이 인성되어 많은 사찰에 보급하였을 것이다.
金山寺에는 혜덕왕사 韶顯이 廣敎院을 짓고 다수의 경전을 판각하여 보급하였다. 窺基의 장소 32부 353권을 수집 간행하고 釋迦, 玄奘, 窺基 및 海東六祖의 상을 사찰에 모시게 하였다. 원측을 계승한 신라의 유식학 전통 이른바 西明派에서, 중국 법상종의 정통을 표방하는 慈恩派로 선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광교원의 성립은 흥왕사의 교장사와 대비되는 것으로 그 설립이 국가적인 것은 아닐 것이라 한 견해가 있다. 그 성격이 어떠하든 법상종 관련 교장이 대거 판각 되어 보급하는 중심 사찰이 된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海印寺에는 雜板으로 알려진 寺刊板이 다수 전한다. 재조대장경이 조선 태조때 옮겨 오기 전에 이미 그 종류와 분량을 알 수 없는 많은 사간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왕때 李穡이 懶翁의 제자를 보내 이 곳에서 대장경을 印成하여 가져 왔고 그것을 靈通寺에서 교정을 보아 神勒寺 大藏閣에 보관하였던 사례가 있다. 이로 보아 해인사에는 사간판이 있었고 이를 인성하여 보급하는 중심 사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浮石寺는 고려초 圓融國師의 하산소가 된 화엄종풍의 사원이다. 여기에는 三本華嚴經板이 전존하는데 주로 잔판이다. 字細字密한 것이 특이점인데 丹本을 저본으로 한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다수의 사원에서 인본을 낼 수 있는 사간판을 보유한 사원이 존재했을 것이다.
閔漬가 鄕板으로 이루어진 대장경 곧 鄕本이 이름난 사찰에 구비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고 언급한 바 있어 재조대장경판이 널리 인성되어 여러 사찰에 보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鐵山 瓊에 의해 중국으로 移安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鄕本 大藏經이 중국에 수출된 셈이다.
『浹註華嚴經』, 『華嚴科鈔略』, 『大不思議論』 등 불교연구서적을 송과 요에 그 판각을 주문하여 수입한 예는 『소동파전집』과 『대각국사문집』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의천이 추진한 주문 제작은 興王寺의 敎藏寶라는 재단의 기금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高麗’ 2字가 추가된 金剛經, 1095년의 대흥왕사판 금강경 등 총 7,300 여질이 의천에 의해 시납되었다 한다. 흥왕사에서 만들어 진 불전이 宋 杭州 惠因院에 供與된 사실로 보인다. 의천은 遼의 道宗에게 원효의 장소를 올린다는 표를 쓴 사실이 있다. 이로 미루어 원효의 華嚴經疏를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의천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하면서 원효의 화엄경소를 본래 8권이었던 것을 10권으로 만든다고 언급하였으므로 흥왕사 교장사에서 만든 것을 전한 것이다. 흥왕사 교장사는 한 때 불전의 대내외 공여의 최대 사찰로서 위상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報法寺의 경우는 尹桓이 수선사 法溫 화상과 더불어 수리하고 江浙에서 大藏經을 구입하여 머무는 西堂을 비워 경전을 보관하는 시설로 하고 윤환의 부인의 기일 3월 5일과 윤환의 출생일 8월 4일을 매년 전장하는 의례로 정하고 윤환이 세상을 버리는 날을 또한 전장일로 삼으려 하였다. 장성 淨土寺의 경우에도 復丘가 그의 제자를 중국에 보내 대장경을 구입해온 바 있다.
불전의 교류는 이처럼 국내 사찰 곧 현화사, 흥왕사, 금산사, 해인사, 부석사 등에는 경판과 교장판을 보유하고 인성할 수 있는 시설과 인력 그리고 재단이 마련되어 국내의 大藏과 敎藏을 필요로 하는 사원에 그 인성본을 보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흥왕사의 경우는 해외로부터 소장하지 못한 불전을 주문·수입하기도 하고 흥왕사판 교장을 공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향본 대장경이 중국에 역수출된 예도 있었던 것이다.
4. 사원 교역의 기능
사원은 광범한 분포와 연계망을 형성하고 세속과의 관계가 깊고 광범하여 사원 교역은 고려 사회에서 다양한 기능을 하였다. 국가유통체계상 공적 위치에 있는 사원이 대행한 측면을 들 수 있다. 개경 사원 중에는 대규모 국가제전이 시행되고, 종단 승려대회가 있었던 만큼 유통체계상 전국적 중심 교역장이 되었다. 유가종의 현화사, 화엄종의 흥왕사, 선종의 보제사, 천태종의 국청사 등이 종단내의 전적 등의 교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팔관회, 성상 절일의 도량과 관련된 법왕사, 외제석원 등은 전국적으로 지방 봉표 朝賀者가 참석하였을 것이고 이 때 전국적 교역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법왕사에는 외국 조하자의 私獻이 있어서 국제 교역의 기능을 했다.
지방 행정단위의 중심 사원인 자복사 역시 국가 불교 행사에 따른 정기적 교역장 가능성이 높았으며 지방 정기시로 알려진 虛市와 같은 것은 아닌가 한다. 산중 사원 중에는 지방 도심에 分院을 소유하여 교역 창구로 활용하기도 하고, 규모가 크고 위상이 높은 사원 중에는 개경에 京邸와 市肆를 소유하여 그곳을 통해 교역을 한 경우도 있었다. 산중 여러 사원의 교역장으로서 중심 사원이 마련된 경우도 있었다. 수로와 고갯길 등 교통 요충지에 위치한 사원이나 屬院은 원격지 중계 교역의 기능을 했다. 해로상에 위치한 사원 중에는 국내 원격 교역뿐만 아니라 국제 중계 무역 장소로서 기능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사원의 교역장은 주로 행상 곧 陸商과 船商이 원거리 부등가 교환의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려 사회에서 광범한 기반을 가진 불교 사원의 다양한 유형의 교역은 고려 사회의 유통체계에 광역성과 보편성을 제공하였다. 고려사회는 고려전기의 경우 본관과 거주지가 대개 일치하여 폐쇄적 사회였다. 이러한 부분을 불교를 주된 기반으로 한 사원 교역이 폐쇄성을 완화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원 교역은 사원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고려시기 사원은 寺院田이 분급되어 국가의 공적 운영 기반이 부여되었지만, 그 운영의 여하에 따라 많은 사원들이 재정적 편차가 나타난다. 사원전이 부실해지는 고려후기의 경우에는 교역과 대부 이식이 사원 유지재정으로 중요성이 점증하고 있음을 본다. 常住寶의 형성과 운영에서 그러한 일면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원이 각종의 교역에 나서게 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李穡은 고려말 사원 개혁을 주장하면서 ‘爲利之窟’ 이라는 표현을 쓴 데서 짐작된다.
사원 교역에는 典籍의 유통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대장경판과 교장판을 소유한 현화사, 흥왕사, 금산사 등이 있었다. 해인사, 부석사, 인흥사, 단속사 등에는 다양한 사간판이 조조되었다. 이에 따른 전문 刻手僧, 전문적 교감 學僧이 있어서 고급 출판문화가 발달하였다. 이를 수요로 한 각 종단의 다수의 사원과 개인이 존재하여 불교는 물론 기타의 知識文化가 보편화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사원 교역은 각 종단의 사회적 지위확보를 위해서도 활발히 하였다. 瑜伽宗의 경우 교통관련 郵亭 시설과 法華經에 바탕한 中道 化城 사상에 따른 여행객의 편의 제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유가종단의 사원은 특히 교통요지에 다수의 사원을 분포하고 그 종단의 주된 도상인 彌勒像을 마애나 입체상으로 많이 조성한 특징이 보인다.
여행객에 관한 편의는 순례자들을 위한 면도 있지만 곧 교역 상인들과의 친밀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 종단의 사원이 屬院을 경영한 예가 많다. 院에 관한 기록을 보면 대개 商旅들의 혜택을 보게 하려는 의도에서 운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원 교역은 상려의 편의성과 그들의 정신적 편안함을 위해 각종 도상과 신앙을 제공하여 그 교역을 안정화하는 역할도 하였다.
사원 교역은 각종 의례나 승려 대회와 동반됨으로써 사회적 소통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였다. 개경의 燃燈會 소회일 奉恩行香에 따른 길거리 공연과 燈夕時의 야간 통금이 해제된 것은 百貨의 시장과 함께 개경민들이 상호 소통하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太祖信仰을 통한 국가이념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성행된 의례의 하나이지만, 교역의 흥행에 더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각 행정단위의 資福寺가 관련되어 매년 열린 輪經會의 경우 醉飽娛樂이 동반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폐단이 언급되어 금하였다고 하지만 계속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시 지역민의 소통과 단결시키는 역할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교역에는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상징적 장소와 흥행을 위한 기회의 제공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사원 교역에 따른 부수적 기능으로 민의 일체감, 소통, 나아가 국가적 단결력을 제공하는 기능도 하였다.
맺음말
고려시대 사원 교역의 배경, 범위, 물품, 그리고 기능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를 요약하여 제시함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한다.
사원은 그 입지가 세속과 통할 수 있는 곳에 있어 교역할 수 있는 중심지로서의 표지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사원에는 부정기적인 것은 물론 정기적 의례와 승려대회, 결사체로 된 사원은 승려는 물론 세속인이 참여하는 불교 교리 연구와 신앙이 있어 그에 따른 수요품이 늘 필요한 곳이기도 하였다. 사원은 이처럼 입지와 대규모 수요 물품이 있는 곳이어서 교역이 가능한 곳이 될 수 있다.
사원 교역의 범위는 개경권과 지방 계수관권, 특정 水系나 산간지 중심권, 개경과 지방연계권, 해안권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개경 내에는 각 坊마다 사원이 존재하여 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교단 중심 사원과 국가 불교의례 사원이 존재하여 전국은 물론 국제적 교역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방 계수관은 국가 정기 불교의례의 거점지이며 각 행정단위에도 資福寺라는 사원이 존재하여 교역의 거점이 되었다. 특정 수계나 산간지에도 사원이 존재하여 광역 교역의 거점이 되었다. 특정 사원은 산간에 있으면서 개경에 京邸, 店鋪를 소유하여 교역 창구를 가지고 있었다. 해안에도 다수의 사원이 해상들의 중개 교역에 참여 하였다.
사원 교역품은 의례와 승려 대회에 소요되는 것과 상주 승려들의 일상 식료와 소요품이 있었다. 교학 연구에 필요한 經典과 敎藏 등도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으며 이는 해외에 주문 혹은 공여의 대상이 되었다. 고급 승려들의 持物도 국내외 교역품이었다. 寺莊에서 생산된 다양한 수공업품 역시 사원 교역품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사원 교역의 기능은 다양하였다. 먼저, 공적 사원의 광범한 분포와 조직으로 인해 국가 유통체계에 廣域性과 普遍性을 제공하였다. 사원 재정의 운영상 중요한 역할은 물론, 사원의 출판물을 유통함으로써 知識文化를 확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사원이 가지는 불교 신앙성과 福田 의식을 통해 商旅들에 안정감을 제공하는 기능도 하였다. 나아가 사원 교역에 의례와 결합하여 소통의 기회를 제공하여 민들의 一體感을 높이는 기능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