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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왕비가 될 거요’
후작부인 마담 드 퐁파두르의 처녀 시절 이름은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이하 퐁파두르 부인으로 통일)이었다. 그녀는 1721년 12월 29일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과 어머니 마들렌 드 라 모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랑수아는 부유한 세무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연인이었던 재무관 파리스 드 몽트마르텔 혹은 궁전 관리부 총감 샤를 프랑수아 드 투르넴이 실제 아버지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강하다. 드 투르넴은 퐁파두르 부인의 법적 후견인이기도 했다.
다재다능한 지식과 예술적 재능을 가진 소녀
 어린시절 퐁파두르 부인은 이 시대 상류층 소녀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프랑스 푸아시의 수도원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동그란 눈과 얼굴을 가진 이 소녀는 아름답고 총명하여 왕비가 될 법하다고 일찍부터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고 9세 때에는 한 점장이로부터 ‘이 아이는 왕의 마음을 차지하고, 여왕(reine)이 될 것’이라는 운명의 예언을 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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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부인은 재정관 일을 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고, 태생적인 귀족은 아니었지만 부유한 집안과 후견인의 도움으로 당시 최상류층 여성이 받았던 모든 교육을 받았다. 당시 여성들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었지만 상류층의 여성들은 그에 준하는 고급 교육을 따로 받았다.
그녀들은 살롱에서 동등한 수준으로 남성들과 대화할 수 있어야 했다. 반드시 음악 교육을 받아야만 했고, 적절한 예법을 갖추고 무도회에서 춤을 출 수 있어야 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푸아시 수도원을 나온 이후 사교계에 나갈 준비를 하며 악기 연주와 성악이 포함된 음악, 데생과 판화가 포함된 미술, 수학, 춤과 예법, 각국 언어와 역사, 수사학, 시문학, 철학 등 당시로서는 모든 방면에 걸친 최상급의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초상화에 지구의가 등장하는 것처럼 지도 제작 및 지리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퐁파두르 부인은 총명했을 뿐 아니라 성격도 활발했고 모든 방면에 걸쳐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전문 성악가와 배우들로부터 연기수업까지 받았던 그녀는 극작가 몰리에르의 작품을 비롯한 여러 목가극을 연기했고, 라모나 륄리의 오페라 아리아를 직접 부를 정도로 성악 실력도 탁월했다. 기타, 만돌린,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 연주에도 능했다고 한다. 춤에도 능했던 것은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마담 드 몽테스팡과도 같은 점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그녀가 거주했던 벨뷔의 성에 개인극장뿐 아니라 파리의 ‘드 랑트르솔 클럽’, 베르사이유 소극장에서 직접 배우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파리에서 가장 지적인 살롱 여주인으로 유명하던 마담 드 테생과 마담 드 조프랭이 그녀의 멘토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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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부인은 이 두 명의 지적인 여주인들로부터 살롱 운영에 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과의 교우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가장 훌륭하고 지적인 고정손님(아비투에 habitué)들은 특별히 이 두 명의 마담이 운영하는 살롱, 그리고 마담 데티욜이 운영하는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다. 마담 데티욜의 살롱과 극장에는 15~20명 내외 소수의 최고 귀족들만이 초빙되었다. 문사들은 매일 저녁 사교생활을 즐겼는데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주로 마담 테생, 수요일에는 정치와 철학 토론으로 명성이 높았던 마담 드 조프랭이나 마담 데팡의 살롱에 주로 모였다. 명성 높은 살롱에 초대받는 것은 선택받은 소수만의 특권이었다. | |
루이 15세의 정부로 간택되다
 이렇게 아름답고 총기와 재능이 넘쳤던 퐁파두르 부인은 19세에 후견인의 조카인 샤를-기욤 르 노르망 데티욜과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의 뒷배경에는 재정적 이유가 있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결혼을 통해 귀족 신분을 얻었고, 샤를-기욤은 에티욜의 영지를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서 두 아이가 태어났으나 첫 번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고, 둘째 알렉산드랭-잔느는 팡팡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다. 그리고 곧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의 간택을 받게 된다. 루이 15세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서거 후 이미 5세(1715)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 국무를 수행할 수 있는 나이로 인정받았던 13살(1723)까지를 섭정기라 부른다. 이 시기는 전쟁이 많았던 태양왕 때와 달리 예외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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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 시몽 벨 [루이 15세에게 약혼녀 초상화를 보여주는 큐피드] 1724 캔버스에 유채, 99x124cm, 국립 베르사이유 성 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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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부인이 새로운 정부로 간택된 1745년 경의 프랑스는 사회 안정을 바탕으로 그 어느때 보다 풍요로운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겠지만 궁정에서의 사랑이라든지 혼사와 같은 큰 일은 단순히 둘 만의 사적인 일이 될 수는 없었다. 하룻밤 상대가 아닌 왕의 공식 정부로 승인받는 일은 그 자체가 왕족의 정식 혼례만큼이나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한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의 첫 만남을 우연을 가장해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도록 꾸민 방식 자체가 그랬다.
퐁파두르 부인과 루이 15세의 만남은 - 시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궁신들에 의해 주의깊게 간택된 후 - 암묵적으로 우연을 가장해 계획된 사건이었다. 1745년 루이 15세는 두 번째 공식 정부였던 샤토루 공작부인과의 사별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왕은 (궁신들의 추천에 의해) 베르사이유 근처 데티욜 영지 사냥터에 사냥차 나왔다가 퐁파두르 부인을 보게 된다. 직접적 만남은 그 해 황태자 루이 드 프랑스와 스페인 왕녀 앙팡타 마리아 테레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가장 무도회에서 이루어졌다. 목녀로 변장한 퐁파두르 부인은 나무덤불로 변장한 루이 15세와 마주쳤고 둘은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가장 무도회에서 만나고(2월 25~26일), 곧이어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에게 이혼을 명령하고(5월 7일), 후작부인의 작위를 하사하여 베르사이유로 불러들인다(6월 24일). 그러나 왕실 측근, 귀족 및 궁신들에게 공식 정부로 정식 소개되기까지는 절차가 필요했다. 가을 무도회에서 국왕의 사촌인 드 콩티 공녀의 정식 소개절차를 거쳐 비로소 왕의 공식 정부로 소개된다(9월 14일). 그때까지 퐁파두르 부인은 상류사회 예법과는 또다른 궁정 예법과 베르사이유에서의 행동 양식을 빠르게 익혀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기를 보다보면 언제나 궁금한 것이 있다. 왕과 궁신들의 눈에 띄어 남편과 이혼을 하고 왕의 파트너가 되었다지만, 공식 정부로서도 세 번째인 후궁의 지위를 떠맡는 것이 어떤 느낌이었을까? 아무리 어린 시절 ‘이 아이는 왕비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녀는 이미 정식으로 결혼한 한 아이의(둘을 낳았으나, 하나는 사별하여) 어머니였던 것이다. 권력과 재물에 미친 탐욕스러운 여인도 아니었을 뿐더러, 자신의 살롱과 개인극장까지 소유하고 나름대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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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데티욜과의 첫 결혼이 작위와 상속을 위한 중매혼이었지만, 막상 공식 정부로 간택이 결정되고 난 후 퐁파두르 부인의 내밀한 감정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당시 ‘지상에 내려온 신성’으로 간주되는 절대군주에게 거역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로 무조건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소녀시절 우연히 마주친 점장이의 예언처럼 이 아이는 ‘왕의 여자’, 왕비가 될 거라는 예언이 실현되었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젊고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는 퐁파두르 부인은 왕을 취하게 만들었다. 루이 15세의 간택을 받은 것은 아마도 영광이었으리라. 베르사이유 궁전에 입성하며 퐁파두르 부인은 가슴 두근거리는 가운데 기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또한 태생적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출신으로 태어나 왕의 여자로 최고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절대군주의 왕명이 떨어진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는 있을 수 없었다.
현명하고 지적인 여성으로의 이미지 구축
 나중에 공작부인 작위도 받지만 마담 드 퐁파두르는 평생 ‘후작부인’으로 불리웠다. 비슷한 연배의 황태자와 정비 마리 레슈진스카는 당연히 마담 드 퐁파두르를 좋게 보지 않았다. 부르주아 출신의 퐁파두르 부인은 자신의 지위가 취약함을 내내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찬미했으나 그녀가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험담하는 이들 또한 많았다. 심지어 동그란 눈과 타원형의 얼굴, 노래할 때 그녀의 비브라토 음성을 풍자해 처녀시절 성이었던 ‘푸아송 poisson(프랑스어 푸아송은 본래 물고기라는 뜻이다)’을 꼬집어 험담하는 [물고기 노래 Poissonade]라는 시가 회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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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셰 [잔느 앙투아네트, 퐁파두르 부인] 1758 캔버스에 유채, 81.2cm×64.9cm, 포그 아트 뮤지움 |
세브르 도자기 <출처 : wikipedia> |
초상화가 그려진 세브르 도자기 <출처 : loicwood.at en.wikipedia> |
악의를 품은 풍자에 깊은 상처를 입은 퐁파두르 부인은 곧바로 ‘벨 사방(학식있는 여인)’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알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1755년 그리고 이듬해 살롱전에서 드 라 투르와 부셰가 그린 후작부인의 초상화를 본 모든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화가가 그녀를 비길데 없이 아름다운 뮤즈로, ‘계몽의 수호자’이자 ‘철학자’로 그려냈다고 평했다. 실제 그녀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벨 사방’이었다. 박식하여 대화가 매혹적이고 재치있었을 뿐 아니라 미술에도 재능이 있어 데생도 전문적인 수준이었다. 이같은 예술적 취향은 후일 ‘쉬느와즈리’(중국 취향)이 가미된 세브르 도자기 산업의 후원에 반영되었다. 세브르 도자기는 전통적인 프랑스 리모주 도자기에 중국식 채색그림과 장식을 더한 도자기로 독특한 로코코풍을 가지고 있었다. 세브르 도자기 산업은 이 지방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역대 프랑스 왕의 미녀들은 루아르 강변을 따라 각자의 유명한 고성을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성들에는 오늘날까지도 그녀들의 이니셜과 엠블렘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새겨져 있다. 퐁파두르 부인은 디안 드 푸아티에와 가브리엘 데스트레 특히 마담 드 몽테스팡의 선례를 따라 화가, 시인, 철학자 및 과학자, 인문학자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성의 건축과 실내 인테리어, 정원 조경에도 고루 힘썼다. 벨뷔의 성과 베르사이유 정원 안의 ‘오두막’ 그리고 그녀의 한시적인 거주지들 에티올, 크레시, 메나르스, 슈와지 성과 파리의 오뗄, 퐁 샤르트랭 등의 건축과 디자인에는 모두 최고 취향을 가진 여성적 손길이 닿아있다.
국왕의 진실된 친구이자 강력한 조언자
 퐁파두르 부인은 두드러지지 않고 온화하게 정치적 문제에도 개입했다. 오스트리아 대사와 평화 협상한 것은 그 주요한 성과의 하나다. 비록 그녀의 노력이 기대한 만큼 좋은 결실을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외교 혁명’을 이루어냈다고 평가 받는다. 또한 퐁파두르 부인의 동생인 마리니 후작 역시 로마의 아카데미 드 프랑스에서 수학한 세련된 미감과 뛰어난 행정적 능력으로 베르사이유의 궁전 관리부 총감으로서 봉사했다. 마리니 후작의 고대 양식의 추앙은 후일 신고전주의 도래의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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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드 퐁파두르가 정치 문제에 있어 귀감으로 생각했던 모델은 루이 14세의 마지막 정부이자 정비 대신 실질적 아내 역할을 해냈던 마담 드 멩트농이다. 마담 드 멩트농은 루이 14세가 정부 대신들 및 각국 대사들과 중요한 회합을 열때 언제나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조언을 했다. 회의실 한 켠에서 자수에 열중하며 정무를 듣고난 후, 막후에서 국왕과 가신들에게 보석같은 조언을 건네곤 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마담 드 멩트농의 모든 서한집, 수기를 출판되는 즉시 모아 읽었다고 한다. 마담 드 멩트농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국왕과 정치를 바른 길로 이끌고자 조언하고 예술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왕의 여자들이 지닌 권력은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힘이었다고 한다. 화가 드루에가 제작한 말년의 초상화에서 마담 드 퐁파두르가 타피스트리 짜는 기구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은, 언제나 타피스트리를 짜거나 자수를 놓으며 한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게 국왕에 조력한 마담 드 멩트농을 의식한 것이라고 한다. 마담 드 퐁파두르는 최고 레이디로서 베르사이유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를 당시, 과거 마담 드 멩트농이 사용하던 아파르트망에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녀를 본받고자 했다. 루이 14세가 실질적 왕비로서 마지막까지 함께 한 사람은 마담 드 멩트농이었다. 마찬가지로 퐁파두르 부인은 더 이상 루이 15세와 연인관계가 아니게 된 1752년 이후에도 공식 석상에서 공식 정부의 지위를 가지고 국왕을 보조했다.
마담 드 몽테스팡이 고혹적이며 육감적인 미녀로서 기악과 발레에 뛰어났고 건축가 망사르와 르 노트르를 등용해 건축과 정원 후원에 집중한 반면, 마담 드 멩트농은 열렬한 독서가로서 글쓰기, 문학, 역사, 지리학, 그림, 음악, 신학에 정통했다고 한다. 마담 드 멩트농은 생 시르에 살롱을 열어 그녀 시대의 최고 지식인들 극작가 라신, 페늘롱, 보쉬에와 같은 문사들을 초대해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이 재능있는 두 여인을 합친 것과도 같아서, ‘새로운 마담 드 몽테스팡, 새로운 마담 드 멩트농’으로서 찬미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녀의 이른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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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최정은 / 미술 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및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대한 책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 있다.
발행일 2011.01.12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k Proje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