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咸陽] - 산촌(山村)에서 선비를 만나다
개평리 한옥
정여창 고택(추사 김정희선생과 흥선대원군이 사랑방 식객으로 오랫동안 머물다 간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사랑채는 선비의 고고한 기품을 품고 있다)이 있는 지곡면 개평리의 한옥마을은 정여창 고택 외에도 노참판택 고가(개평마을에 풍천 노씨의 입향조인 송재 노숙동 선생의 고택으로 15세기의 집터이다 - 풍천노씨대종가[盧氏大宗家]), 하동 정씨 고가 등 100가구가 넘는다. 조선 5현의 한명이었던 정여창 선생의 고택에서는 아직도 지리산 소나무로 술을 빚는다. 늘 푸르고 꼿꼿한 소나무와 선비의 절개를 닮은 500년 세월을 이어오고 있는 솔송주다. 이 술은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며느리가 아직도 그곳에서 빚고 있는 술이기도 하다.
거연정[咸陽居然亭 ]
고려시대 말기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인 현 거연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1901년 중수가 있었다.
광풍루[光風樓 ]
안의면소재지의 진입로 입구, 금호강변에 있으며 1412년(태종 12) 당시 이안(利安)의 현감 전우(全遇)가 창건하여 선화루(宣化樓)라고 이름지었다.
1425년(세종 7) 김홍의(金洪毅)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고 1494년(성종 25) 당시 안의현감이던 정여창(鄭汝昌)이 중건하여 광풍루로 개칭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탔으나 1601년(선조 34) 심종침이 복원하였고 1683년(숙종 9) 장세남이 중건하였다. 1980년 안의면 소도시 가꾸기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남계서원(濫溪)
1552년(명종 7) 조선시대 학자 정여창(鄭汝昌)을 모시기 위해,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졌으며, 1566년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호 일두(一蠹). 김종직의 문인.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 되었다.
남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서원 입구에는 하마비(下馬啤)가 있어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야 한다.
농월정(弄月亭)
화림동계곡의 정자들 중 가장 경관이 좋은 곳에 마지막으로 들어앉은 정자가 농월정이다. 농월정 앞의 너럭바위가 월연암(月淵岩)이다. 농월정(弄月亭)이 달을 음미한다는 의미이고 월연암(月淵岩)이 달의 연못이란 의미이니, 옛날부터 농월정에서 하늘의 달과 월연암에 흐르는 달빛을 즐겼던 것 같다. 농월정은 정자라기보다는 누각에 가까운 규모이다.
계곡 초입에는 농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2003년 불이 나 타버렸다. 고요한 밤에 냇물에 비친 달빛을 한 잔의 술로 희롱한다는 농월정은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지족당 박명부(朴明榑)가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동호정[東湖亭] 서하면 황산리 842번지에 있는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하였다. 남강천 담소 중의 하나인 옥녀담에 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벽송사[碧松寺]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경상남도 전통사찰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로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벽송사삼층석탑과 목장승 2기가 전한다. 이 중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운 것으로 보물 제474호로 지정되었다. 2기의 목장승은 본래 높이는 4m이나 절반이 땅에 묻혀 있으며, 마천면이 변강쇠와 옹녀의 일화를 담은 가루지기타령이 전하는 곳이라 특히 주목을 받는다.
상림 숲(공원)
신라 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에 조성한 숲이라고 전한다. 당시에 홍수의 피해가 심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선생이 뚝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강변에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당시에는 이 숲을 대관림 이라고 이름 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 후 중간부분이 파괴되어 지금같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있고 옛날 그대로의 숲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상림만이 남아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숲인 상림 숲
상림에는 뱀이나 개구리가 전혀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상림에서 뱀을 보고 놀랐다는 말을 들은 최치원이 달려가 “이후 모든 뱀이나 개구리 같은 미물은 상림에 들지 말라”고 한 뒤부터 뱀이 사라졌다는 전설이다.
상림에는 함화루 외에도 이은리 석불,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척화비, 역사인물공원 등 오랜 역사를 품은 비석과 석불이 많다
서암정사[西庵亭寺]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18-7번지에 있는 사찰이다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한 고찰인 벽송사로부터 서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위치하는 벽송사의 부속 암자로서 주위의 천연의 암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응 스님이 자연 암반에 무수한 불상을 조각하고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그린 조각법당을 10여 년간에 걸쳐 완성하였다. 사찰 안에는 대방광문, 석굴 법당, 광명운대, 사자굴 등이 있다.
송호서원
고은 이지활(李智活)을 모시고 있다.
심원정[尋源亭]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하원리의 용추계곡 중간에 있는 중층 누각건물이다. 정심원정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심진동 입구에 있기 때문에 흔히 심진동 심원정이라고도 불렀다.
1558년 거제부사 정지영(鄭芝榮)이 지금 자리보다 좀 더 위쪽 상류에 초가로 만들었는데 임진왜란 중 불에 타 없어졌으며 1770년에 다시 지은 것은 풍수해로 손상을 입었다. 1845년에야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으며 1948년 중수되었다.
안의향교[安義鄕校] 안의면 교북리 148-2
1983년 8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1473년(성종 4) 현감 최영(崔英)이 창건하였고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
1729년(영조 5) 안의현이 없어짐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1731년 현이 복원되어 다시 개교되었다. 1736년(영조 12) 이성택, 최태희 등이 건의하여 중건하였다.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에 있으며 가까이에 민가가 있다.
용추계곡 안의면 상원리
골이 깊고 물이 맑다. 숲과 어우러진 계곡물은 바위에 부딪쳐 은가루를 뿌리고 암반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흐른다.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이 고달픈 세상사를 잠시나마 잊게 한다. 이 곳은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옛날에는 ‘심진동(尋眞洞)’이라 불렸다. 기백산과 황석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이루어 낸 용추의 비경은 자연미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정자인 심원정에서 시작된다. 유학자 돈암 정지영 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그 후손들이 고종 3년(1806)에 세웠다. 심원정을 지나면 삼형제바위, 매바위와 그 아래쪽으로 시퍼런 소를 이룬 매산나소, 꺽지소 등이 멋을 자랑한다.
용추자연휴양림[龍秋自然休養林]
1993년에 개장했으며, 해발 1325m의 금원산 수망령 기슭,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진리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심진동이라 불렸던 용추계곡 입구에 조성했다. 이 일대가 6·25전쟁 직후 빨치산의 은거지였을 만큼 용추계곡은 깊은 골짜기에 풍부한 수량과 다양한 수종의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심원정을 비롯하여 매바위, 상사바위, 용추폭포 등의 비경이 있으며 숲 속에는 취나물, 더덕, 오미자 등이 산재해 있다.
용추폭포
용추폭포에 얽힌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폭포에는 물레방아 굵기의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이 이무기는 용이 되기 위해 신령께 빌어 108일 금식 기도를 하면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다는 계시(啓示)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무기는 온갖 고난을 참으며 매일 매일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내일이면 108일을 모두 채우는 날이다. 그러나 이무기는 용이 된다는 기쁨에 그만 날짜도 잊고 있는 힘을 다해 하늘로 치솟았다. 동시에 천둥이 치며 벼락이 이무기를 향해 때렸다. 함양군에서 직접 운영하는 자연휴양림이 나온다
용추사[龍湫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487년(신라 소지왕 9) 각연(覺然)이 창건하였다.
이용구 징장
1993년 1월 8일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징은 풍물, 사찰 제의, 무당 굿, 궁중 예악, 군대 대열, 신호물 등에 쓰이는 악기로,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방짜징 기술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16세부터 징제작 기술을 전수받은 징울음잡이 이용구(李龍九)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음력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대정, 가질대정, 앞마치꾼, 센마치꾼, 풀무꾼이 한 조가 되어 징을 만든다. 징의 소리를 조율하는 울음잡기는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마지막 완성과정이다. 방짜징은 소리가 웅장하고 울림이 길어 긴 여운을 준다.
징과 2대 5부자의 끊을 수 없는 인연. 오부자공방(용구농악사:鉦匠) (경남 거창군) "부드럽고 길며 웅장한 황소울음이 나와야만 좋은 징"
청계서원
문민공 김일손(金馹孫)을 모시고 있다.
칠선계곡
함양읍에서 마천면으로 가는 길은 지리산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 오르는 길이다. 이 길로 가려면 오도재를 넘어야 한다. 오도재는 옛날 내륙지방 사람들이 지리산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 2006년 건설교통부에서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다. 오도재 정상에는 지리산제일문이 거대한 성루처럼 서 있다. 칠선계곡은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다. 백무동계곡은 장터목과 한신계곡으로 오르는 길목이다.
학사루[學士樓]
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는 본래 함양초등학교(옛날에 객사로 사용)에 있었던 것을 1979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치원이 이 지방 태수로 재직 시 자주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 하여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 객사(客舍) 자리인 지금의 함양초등학교 안에서 교실과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다가 1979년 이곳으로 이전·복원했다.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에 걸린 유자광(柳子光)의 현판을 철거한 것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함양군 마천면 도마마을은 ‘복숭아꽃이 만발하다’는 뜻인데 남해 가천마을과 함께 다랭이 논으로 유명한 곳이다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
수령 약 1,000년으로 추정되는 마을의 수호목이자 상징목이다.
함양향교[咸陽鄕校]
1983년 8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향교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언제 초창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함양에 있던 고려시대의 소소당(昭所堂)이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인 조승숙(趙承肅)의 ‘명륜당기(明倫堂記)’에 따르면, 1398년(태조 7) 무렵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뒤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대성전(大成殿)을 중수하고 동재(東齋), 서재(西齋), 문루(門樓)를 건립하였다.
함화루[咸化樓]
1986년 8월 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함양군이 소유하고 있다. 원래는 조선시대 함양군의 읍성(邑城) 남문(南門)인 망악루(望岳樓)였으나 1932년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
본래의 명칭인 망악루는 ‘멀리 지리산(智異山)이 보인다’는 뜻이며 일제강점기에는 망경루(望敬樓)라 하였는데, 1932년 고적보존회 대표 노덕영(盧悳永)이 지금의 함양 상림(천연기념물 154) 공원에 이건(移建)하면서 함화루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래 함양읍성에는 동쪽에 제운루(齊雲樓), 서쪽에 청상루(淸商樓), 남쪽에 망악루 등 삼문(三門)이 있었는데 지금은 망악루만이 이곳으로 옮겨져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