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교회 홈페이지에 지난 4월 7일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 강연을 소개하신 <215한우> 님이나 <무문> 님이 바라실지 자신없습니다만 참고 삼으시라고 올립니다.
어제 저녁(4월 6일) 성공회 춘천교회를 찾아갔다.
새로 생긴 전철을 타고 춘천역에 내리니 이미 깜깜해진 밤이었다. 교회는 역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유난히 덩치가 큰 <새봄유치원> 뒤에 가려져 있는 듯한 자그마한 하얀 집. 대신 언덕 위에 올라 있어 흐릿한 주위 가로등 불빛에서도 쉽게 도드라져 보였다. 오늘 밤 8시 여기에서 김용규 철학교수의 강연이 열린다고 했다. 집에서부터 서둘렀는데도 20분 정도 늦게 들어갔다. 성전 안도 역시 조그맣다. 제단을 바라보고 앉은 부드러운 말굽 모양의 회중석이 정겹다. 호흡을 가다듬고서 옆을 둘러봤다. 서른 한명의 청중이 한창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김용규 교수는 최근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란 책을 펴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오늘의 강연 주제도 저술과 무관하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 관할사제 이한오 신부와 어떤 사이이신지, 오늘의 강연 대상이 왜 춘천교회인지는 모르는 채 참석했다. 다만 성공회 교회가 이런 모임을 그것도 늦은 밤에 정성들여 연다는 사실에 마음이 마냥 뿌듯해졌다. 강연회 같은 모임을 통해 교회가 시민단체에 문을 여는 현상은 익숙하다. 알고 있는 곳을 짚어 봐도 금방 서너 군데가 된다. 서울의 명동 향린교회, 청파 감리교회, 서대문 석교 감리교회...대전교회의 <성공회신학 아카데미> 같은 상설강좌에서도 외부 강사를 많이 모신다.
뒷 좌석의 어느 교우가 친절하게 인쇄물을 건네준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오늘의 강연 주제도 같았다. 헌데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펼치는 강연이기 때문일 게다. 현대문명이 처한 위기의 진단과 그에 따르는 처방에서 화자의 의지가 강하게 전달되어왔다. 제목부터 그랬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란 제목과 그 아래에 작은 제목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제안>이 딸려 있다. 그런데 두 시간 남짓 진행된 강연은 매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우선 깨알같이 빼곡 들어찬 인쇄물이 14쪽이나 됐다. 도중에 꾸벅꾸벅 조는 분도 있었는가 보다. 모든 분야에 걸친 사상가들의 이론에서 받았음직한 생경함만은 아니리. 원고를 거의 그대로 읽어 내려가다 시피 했던 강의 기법이 어땠을 런지.
864쪽에 이른다는 <서양~신>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날 강연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서양~신>을 쓴 이유. 종교적인 내용을 인문학적 언어를 빌려 설명함으로써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이 서로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첫째, 비기독교인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 대신 신이란 용어를 쓰는 이유도 특히 철학자나 자연과학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가령 요한 1서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도 ‘최고의 진리와 정의는 사랑이다’로 표현한다. 이와 같이 가치론적으로 나타내는 신학전통을 긍정신학이라고 하는데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 신학이 모두 이 전통 안에 선다. 켄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안셀무스(1033-1109)도 이런 뜻에서 하느님을 ‘최고의 선, 영원성, 권능, 일자성’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신앙과 이성을 균형 있게 유지했던 것이다.
둘째, 성경의 진리를 인문학적으로 설명하여 무신론적 공격에 대처하는 능력을 기른다. 요새 무신론을 주장하는 책들이 범람한다. 스티븐 호킹, 리차드 도킨스 같은 천체물리학자, 진화생물학자들이 그런 이들이다. 그들의 공격은 자극적이고 위험하다. 하지만 무지, 오해, 왜곡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현명하게 대처하면 극복할 수 있다. 셋째, 이러한 설명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위험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이후 최고의 가치가 없어져버렸다. 최고의 가치 대신 인본주의, 계몽, 사회진보, 민중해방과 같은 세속적 가치가 들어앉았다. 신중심 시대의 전근대에서 인간중심의 근대를 지나 시대는 이제 개인중심의 탈근대라고 부를 수 있다. 최고의 가치는 조각나버리고(파편화) 우리는 ‘작은 이야기’만 할 뿐 더 이상 ‘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임마뉴엘 칸트를 흉내 내서 표현해보자.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다. 이 두 이야기를 화합하여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여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실 해법을 알고 있다. (이때 김 교수가 말을 끊고 청중들에게 물었다. 여기저기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라고^^.)
강연이 끝나고 이한오 신부께서 질문 없냐 하면서 회중을 이끌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실상은 질문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질문은 달랑 나 혼자 했지만^^ 꽤 길었다. 그 질문들을 여기에 모두 옮기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제기한 의문의 초점이라면 다음과 같았다.
진단에는 공감하나 처방에는 유보하고 싶은 논점이 많다. 예를 들면 유신론의 대척점에 꼭 무신론을 세워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 사이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킨스나 호킹의 이론을 무신론자란 틀 속에만 가둘 수 있을까. 아울러 60억 인류 가운데 ‘신’없이도 수 천년을 살아온 비-서양을 '신' 아래 다 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비기독교인들과 소통해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인들 쪽에서 보자. 과연 유일신과 그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 원죄와 그에 따른 대속신앙을 내려놓을 수 있겠는지.
김 교수께서 귀를 기울이면서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말과 함께. 또한 비슷하게 문제점을 지적한 학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기한 질문 가운데 유일신에 대해서만큼은 꼭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기독교의 유일신은 배타성이나 폭력성의 근거가 아니다.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의 바탕이라고. 그것이 초기 기독교 신앙이기도 하였다”고. 하기야 이날 김 교수도 강조하였다. 다름 아닌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
과학과 종교는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말로 하는 것이라고.(나도 이 깊은 뜻을 환하게 알지 못한다. 어렴풋 할 뿐.)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서양~신>의 서평이 떴다. 2011년 1월 21일자 <프레시안>에 실린 이진남 숙명여대 교수(교양교육원)가 쓴 글이다. 저술의 방대한 규모에 걸맞게 서평도 간단치 않다. 하지만 참고하시라고 여기에 일부를 인용한다. 늦은 밤 막차를 놓칠새라 부랴부랴 나오는 바람에 이 신부님과 교우들과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다. 인사를 대신해야겠다. 좋은 시간을 마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따옴 시작) 서양 사람들이 쓴 서양의 문명에 대한 각종 소개서들은 그들의 입장과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번역된 서양 문명의 소개서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 우리에게 맞는 서양 문명의 안내서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런데 김용규의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펴냄)은 서양 문명의 가장 핵심에 있는 것들이지만 아직 한국인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들을 들추어내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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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책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보수주의적 성경 해석이라는 편향성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전통에 의거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종교 지도자의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해준다.
특히 신앙이 과학이나 철학을 배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깨닫고 더욱 강한 믿음이 생길 수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 현대 과학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창조론과 관련되는 시간, 물질 등 여러 개념들이 현대 물리학의 이론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언어 놀이나 패러다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진화론이 어떻게 창조론과 충돌하지 않을 수 있었고, 현대에 있어서도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역사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신학, 철학, 문학, 예술,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해박함에 있다. 저자는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존재, 창조주, 인격, 유일자라는 네 열쇳말로 조곤조곤 설명한다. 그 안에서 신의 존재 증명,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그리스도교적 창조의 함의, 신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유일신 개념의 진정한 의미 등 다양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따옴 끝)
첫댓글 새벽강님 좋은 강연의 소감문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춘천 강의까지 다녀 오셨군요...
글씨를 조금 키우면 더욱 좋겠습니다만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더욱 애정과 사랑으로 좋은글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없어서 늦게서야 들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라 바쁘시겠지요. [성사모]의 관리자로서 무문님께도 고맙습니다. 위 강연에 뒷 얘기가 많았으면 했는데 별로 없어요. 그후 이한오 신부님과 강연에 관해 통화했던 바 있지만요. 저자 김 교수님과도 마주 앉아 얘기하고 싶은데 그날은 그럴 시간도 없었네요. 책을 안 읽고 말하긴 그렇습니다만 <서양~신> 과 이날 강연 내용은 차이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날 김 교수께선 "기독교 신자"로서 접근하셨다고나 할까요. 위 서평(이진남 교수)에서도 그런 점이 느껴지지요. /관리자님께. "방"을 너무 많이 쪼개놓은 건 아닌지요. <성공회문학방>같은 모양은 좋지만 나머지는 내용상 많이 겹치지 않나(느낌일 뿐)/ 건강+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