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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1.19.PM7시)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세계 성취의 10종사
저녁 시간 화엄경 공부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공부하는 것은 세계성취품인데 세계가 성취하기까지, 세계가 이루어지기 까지 열 가지 조건을 앞에서 열거했다. 여러 가지 열 가지 조건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3) 세계의 의주(依住)
이번에는 세계의 의주라, 세계가 의지해서 머무는 사실에 대해서 열 가지 의지해서 머무는 것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 한다. 모두 열 가지로 열거한다.
다 이야기 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그야말로 세계바다 미진수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이 있다, 이렇게 끄트머리에 이야기 한다.
가. 10종의 의주(依住)
이시(爾時)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부고대중언(復告大衆言)하사대 제불자(諸佛子)야 일일세계해(一一世界海)에 유세계해미진수소의주(有世界海微塵數所依住)하니 소위혹의일체장엄주(所謂或依一切莊嚴住)며 혹의허공주(或依虛空住)며 혹의일체보광명주(或依一切寶光明住)며 혹의일체불광명주(或依一切佛光明住)며 혹의일체보색광명주(或依一切寶色光明住)며 혹의일체불음성주(或依一切佛音聲住)며 혹의여환업생대력아수라형금강수주(或依如幻業生大力阿修羅形金剛手住)며 혹의일체세주신주(或依一切世主身住)며 혹의일체보살신주(或依一切菩薩身住)며 혹의보현보살원소생일체차별장엄해주(或依普賢菩薩願所生一切差別莊嚴海住)라 제불자(諸佛子)야 세계해(世界海)에 유여시등세계해미진수소의주(有如是等世界海微塵數所依住)니라
그때에 보현보살이 다시 대중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낱낱 세계바다에 세계바다 미진수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依住]이 있으니, 이른바 혹은 일체 장엄을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허공을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일체 보석 광명을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일체 부처님 광명을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일체 보석 빛깔 광명을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모든 부처님 음성을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환술(幻術) 같은 업으로 생긴 대력(大力) 아수라의 형상인 금강수(金剛手)를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일체 세간 주인들의 몸을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일체 보살의 몸을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보현보살의 서원으로 생긴 온갖 차별 장엄바다를 의지해서 머무느니라.
모든 불자들이여, 세계바다에 이와 같은 세계바다 미진수의 의지해서 머무는 것이 있느니라.”
우선 우리 몸만 생각하더라도 우리 몸에 의지해서 머무는 중생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참 많고 많다. 얼른 생각해 봐도 너무 많다.
요즘은 이가 없다고는 하지만 옛날같으면 이도 사람 몸에 의지해서 머물고, 100조나 되는 세포는 말할 것도 없이 지금도 사람 몸을 의지해서 머문다. 사람 몸 하나만 두고 봐도 너무너무 많다. 여기 제가 간단한 해설을 달았다.
의지하여 머무는 것[依住]은 사람이나 다른 중생들이 자신의 취향대로 만들어서 그곳에 머물고 사는 환경이다. 사람들만 보더라도 집집마다 각자의 취향을 따라 집을 꾸미고 산다. 크게 살펴보면 경전에서 말씀하신 내용들이 모두 가능한 경우다. 장식하고 꾸미기를 좋아하는 중생은 장엄을 의지하여 머문다. 걸림이 없음을 좋아하는 중생은 허공을 의지하여 머문다. 주변 바탕의 광명을 좋아하는 중생은 보석광명을 의지하여 머문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중생은 부처님의 광명을 의지하여 머문다. 성스러운 가르침을 받드는 이는 부처님의 음성을 의지하여 머문다. 널리 편안한 중생들은 보현보살의 서원으로 생긴 일체 차별 장엄바다를 의지해서 머문다. 이와 같이 각각의 취향을 따라 환경이 다르게 된다.
벌은 벌집을 머물고, 새는 날아다니면서 허공을 의지해서 머물고, 각자 중생들의 업대로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 수억 수천만 종류가 있을 것이다.
나. 게송으로 거듭 펴다
열 가지 세계성취의 조건들을 이야기 한다. 게송이 보통 열 개가 중심이고, 아홉 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의지하여 머무는 것’은 스물 두 개의 게송으로 되어있다. 제일 많다. 이렇게 까지 된 경우는 없다.
대개 열 게송으로 마무리 되고, 혹은 아홉 게송 열 한 게송 이렇게 되는데 무려 스물 두 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다.
이시(爾時)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욕중선기의(欲重宣其義)하사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관찰시방(觀察十方)하고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보현보살이 그 뜻을 거듭 펴려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설하였습니다.
보변시방허공계(普徧十方虛空界) 하야 소유일체제국토(所有一切諸國土)가
여래신력지소가(如來神力之所加)로 처처현전개가견(處處現前皆可見)이로다
시방 허공계에 두루 한
일체 모든 국토를
여래의 위신력으로 가피하여
곳곳에서 앞에 나타난 듯 다 보도다.
시방 허공계에 두루 한
일체 모든 국토를
시방 허공계에도 꽉 차 있는 일체 국토를
여래의 위신력으로 가피하여
곳곳에서 앞에 나타난 듯 다 보도다
다음에 두 번째 게송이다.
혹유종종제국토(或有種種諸國土)가 무비이구보소성(無非離垢寶所成)이라
청정마니최수묘(淸淨摩尼最殊妙)하야 치연보현광명해(熾然普現光明海)로다
혹 어떤 가지가지 국토는
모두 다 깨끗한 보석으로 이루어졌고
청정한 마니보석이 가장 미묘하여
왕성하게 광명바다를 널리 나타내도다.
혹 어떤 가지가지 국토는
모두 다 깨끗한 보석으로 이루어졌고
청정한 마니보석이 가장 미묘하여
왕성하게 광명바다를 널리 나타내도다
다음은 세 번째 게송이다.
혹유청정광명찰(或有淸淨光明刹)이 의지허공계이주(依止虛空界而住)하며
혹재마니보해중(或在摩尼寶海中)하야 부유안주광명장(復有安住光明藏)이로다
혹 어떤 청정한 광명세계는
허공계에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마니보석바다 가운데서
다시 광명 창고에 안주해 있도다.
혹 어떤 청정한 광명세계는
허공계에 의지하여 머물며
혹은 마니보석바다 가운데서
다시 광명 창고에 안주해 있도다
다음은 네 번째 게송이다.
여래처차중회해(如來處此衆會海)하사 연설법륜개교묘(演說法輪皆巧妙)하시니
제불경계광무변(諸佛境界廣無邊)이라 중생견자심환희(衆生見者心歡喜)로다
여래가 이 대중바다에 계시사
법륜을 연설함이 다 절묘하시니
모든 부처님의 경계가 끝없이 넓어
중생들이 보는 이마다 마음에 기뻐하도다.
여래가 이 대중바다에 계시사
법륜을 연설함이 다 절묘하시니
모든 부처님의 경계가 끝없이 넓어
중생들이 보는 이마다 마음에 기뻐하도다
법륜을 연설함이 다 절묘하시니 그랬다.
보통 경전하고 그 외 어록(語錄)이라든지 논(論)이라든지 기타 경전을 재해석한 소(疏), 초(抄), 별기(別記)이런 이름으로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옛날 목판본 장경에는 경전과 경전을 해석한 소와 초 이런 것을 같은 목판에 새겼다. 우리 어릴 때 강원에 있을 때만 해도 그 목판에서 경전을 찍었다. 직접 찍기도 하고, 먼저 만들어진 경전을 구해서 읽기도 하고 그랬다.
제가 찍고 책을 만들고 한 것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데 보면 경문은 제일 큰 글자로 하고 제일 높이 썼다. 그리고 그다음에 해석, 경을 해석한 소나 초는 한 글자를 낮춰서 소를 쓰고, 거기서 한 글자를 또 낮춰서 초를 썼다. 소에서 설명이 부족한 것을 보충 설명한 것을 초라고 한다. 초도 역시 소보다 또 한 글자를 더 낮춰서 썼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 경문은 큰 글자로 쓰고, 소나 초처럼 경을 해석한 것은 글자를 아주 작게 썼었다. 각주라 해서 경문 한 줄에 두 줄로 작은 글자로 써서 해석을 하였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뛰어난 해석을 했다 하더라도 경하고는 비교하면 안된다, 경문하고는 격이 다르다 이런 뜻이다.
우리가 경을 쉽게 접한다고 해서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그럴 것이 아니다.
경은 확실하게 우리가 달리 취급을 해야 되고, 달리 봐야 한다. 그래서 공덕경이라고 한다.
옛날에 목판에 경을 새길 때 한글자가 아깝지 않았겠는가? 한 글자의 공간이 그렇게 아까운 데도 불구하고, 경문이 아니면 한 글자를 낮춰서 쓰고 또 두 글자를 낮춰서 썼다. 그것만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엄청나게 많다. 한 글짜 들여쓰기가 문제가 아니고 전체 열 줄 이든 백 줄이든 간에 전부 다 낮춰서 썼다.
100줄이면 100자가 소비되는 것이 아닌가? 100자를 새길 공간을 소비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초 같은 경우는 200자를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경우다.
그만치 경전을 존중한다. 그래서 공덕경이라, 화엄경 같은 것을 공덕경이라고 하고 공덕의 표준이 된다 하는 이유가 다 있다. 우리가 똑같이 생각하면 절대 안된다.
요즘은 논문쓰는 사람들이 경문을 인용해서 불교 논문을 쓰면 경문은 오히려 작게 쓰고 자기 글은 크게 쓰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내가 기회있을 때마다 스님들에게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한다. 경문을 크게 쓰고 자기 글을 작게 써야 하는데 옛날 경에 표본이 곳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글은 크게 쓰고 인용한 경문은 작게 쓴다. 세상에 그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참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까 전혀 신앙심 없이 논문을 쓰고, 경의 가치와 의미 이런 것을 모르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경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이 강의를 듣는 분들은 제발 그것을 고칠 수 있으면 다 고치고, 만약에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르쳐 주어야 된다.
부처님 말씀인데, 그래서 우리가 공덕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공을 왜 오는가? 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러 오는가? 그것이 다 부처님께 공양 올림으로 해서 공덕닦으러 오는 것이다.
공덕 닦으러 오는데 우리가 대하고 있는 이 경전에서도 그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서 우리가 경을 대한다면 바로 그것이 공덕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공덕경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이 뭐라고 했는가?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신라 향가, 너무나도 유명한 것 아닌가.
오다 오다 오다 과거 현재 미래 우리가 이 세상에 그렇게 왔다. 왔는데 와보니까 오다 서럽더라. 전부 고해고 화택이고 서럽고 고통스럽고 힘든 삶이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누구 한 사람만 서러운가? 있는 사람도 서럽고 힘들고, 없는 사람도 힘들고 지위가 높은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지위가 낮은 사람, 재산이 없는 사람, 다 공히 우리네다.
서럽더라, 우리네여 우리 모두가 다 서러운 인생을 산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공덕 닦으러 오다, 공덕을 닦으며 살아야 그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딱 이렇게 옛날 신라때부터 국민들에게 가르쳤다. 그런 것을 잘 드러내서 우리가 재음미하고 또 그것을 한 번 들었다 하더라도 자주자주 거론해서 마음에 새겨야 하는데 그런 의미를 잘 모른다.
논문쓰는 형식, 내가 여러 해 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꾸 이야기 하는데, 언젠가 불교논문을 쓰면서 경전을 인용해서 불교 논문을 쓰는 사람들은 부디 그것 좀 고치는 날이 있기를 아주 간곡히 바란다. 감복(減福) 하는 일이다. 불교 논문을 써서 부처님 사상을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리려고 논문을 썼다면 거기에 공덕이 되어야 되고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도 복이 되어야 하는데 감복을 하고 있으니, 복을 감하고 있는 짓을 하니, 그것이 참 안타깝다. 복을 감하는 짓을 하고 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된다.
아는 사람들, 이 방송을 듣는 분들, 자제분들이 혹 불교논문을 쓴다든지 하면 꼭 그것을 가르쳐줘야 된다. 논문한 편 잘쓰고 복을 감하면 되겠는가? 절대 안될 일이다. 그동안 그렇게 써온 사람들은 전부 잘못된 것이다. 전부 잘못된 것이다.
옛날 스님들이 대장경을 새긴 옛날 책들을 목판본경전들을 보면 알 것이 아닌가.
목판본 경전에는 전부 그 아까운 나무로, 말하자면 조각을 하기까지 나무를 베고 그것을 바닷물에다가 몇 년간 담그고 다듬고 했는데 그럼에도 얼마나 소중한 공간인가? 한 자를 쓸 수 있는 공간도 그렇게 소중한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한자를 낮춰서 썼다고 하는 것, 그래서 많은 페이지 수를 더 늘려서 할 수밖에 없다. 여러 장을, 그 한자 낮춰서 쓰느라고 여러 장을 낮춰서 쓰게 되는데 그런 것 까지도 잘 이해를 하면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렇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법륜을 연설함이 다 절묘하시니
부처님 법문이 그렇게 절묘하다.
모든 부처님의 경계가 끝없이 넓어
중생들이 보는 이마다 마음에 기뻐하도다
유이마니작엄식(有以摩尼作嚴飾)하니 상여화등광분포(狀如華燈廣分布)라
향염광운색치연(香焰光雲色熾然)이어든 부이묘보광명망(覆以妙寶光明網)이로다
어떤 것은 마니보석으로써 장엄하였고
혹은 형상이 꽃등불같이 널리 펴 있고
혹은 향기불꽃광명구름빛이 치연(熾然)하며
혹은 아름다운 보석광명그물로 덮여 있도다.
어떤 것은 마니보석으로써 장엄하였고
혹은 형상이 꽃등불같이 널리 펴 있고
혹은 향기불꽃광명구름빛이 치연(熾然)하며
혹은 아름다운 보석광명그물로 덮여 있도다
혹유찰토무변제(或有刹土無邊際)하야 안주연화심대해(安住蓮華深大海)라
광박청정여세수(廣博淸淨與世殊)하니 제불묘선장엄고(諸佛妙善莊嚴故)로다
혹 어떤 세계는 끝이 없으며
연꽃이 만발한 깊고 큰 바다에 안주하였고
혹은 넓고 청정한 것이 아주 뛰어났으니
모든 부처님의 훌륭하신 장엄의 덕일세.
혹 어떤 세계는 끝이 없으며
연꽃이 만발한 깊고 큰 바다에 안주하였고
바다에 의지해서 사는 중생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혹은 넓고 청정한 것이 아주 뛰어났으니
모든 부처님의 훌륭하신 장엄의 덕일세
혹유찰해수윤전(或有刹海隨輪轉)이라가 이불위신득안주(以佛威神得安住)하니
제보살중변재중(諸菩薩衆遍在中)하야 상견무앙광대보(常見無央廣大寶)로다
혹 어떤 세계바다는 윤전(輪轉)을 따르다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안주하게 되니
모든 보살 대중이 그 가운데 가득하여
한량없고 광대한 보배를 항상 보도다.
혹 어떤 세계바다는 윤전(輪轉)을 따르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안주하게 되니
모든 보살 대중이 그 가운데 가득하여
한량없고 광대한 보배를 항상 보도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만 보더라도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 자체가 스스로 자전을 하고 해를 따라 공전도 한다. 끊임없이 그렇게 움직이며 돌고 돌지만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항상 편안히 안주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그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고 제가 어제인가 말씀드렸다. 적응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적응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 또한 위신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심히 살펴보면 모두가 보살들이요, 한량없고 광대한 보배들이다.
혹유주어금강수(或有住於金剛手)하며 혹부유주천주신(或復有住天主身)하니
비로자나무상존(毘盧遮那無上尊)이 상어차처전법륜(常於此處轉法輪)이로다
혹 어떤 것은 금강수(金剛手)에 머물며
혹 또 어떤 것은 천주신(天主身)에 머무니
비로자나 부처님 무상존(無上尊)께서
항상 이곳에서 법륜을 굴리시네.
비로자나 부처님 무상존(無上尊)께서
항상 이곳에서 법륜을 굴리시네
어떤 모양으로 생긴 세계든지 간에, 어떻게 의지해서 머무는 세계든지 간에 비로자나 부처님 세존은 항상 이곳에서 법륜을 굴린다.
혹의보수평균주(或依寶樹平均住)하고 향염운중역부연(香焰雲中亦復然)하며
혹유의제대수중(或有依諸大水中)하고 유주견고금강해(有住堅固金剛海)로다
혹은 보배나무를 의지해서 평탄하게 머물고
혹은 향기불꽃구름 속에서 머물며
혹 어떤 세계는 큰 물을 의지하고
어떤 세계는 견고한 금강바다에 머물도다.
가지가지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하더라도 이 지구상에 의지해서 머무는 중생들의 모습이 참 여러 가지다.
혹은 보배나무를 의지해서 평탄하게 머물고
혹은 향기불꽃구름 속에서 머물며
혹 어떤 세계는 큰 물을 의지하고
물을 의지해서 머무는 중생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어떤 세계는 견고한 금강바다에 머물도다
혹유의지금강당(或有依止金剛幢)하며 혹유주어화해중(或有住於華海中)하니
광대신변무부주(廣大神變無不周)라 비로자나차능현(毘盧遮那此能現)이로다.
혹 어떤 것은 금강깃대를 의지하여
혹 어떤 것은 꽃바다 위에 머무니
광대한 신통변화 다 두루 하여
비로자나 부처님이 이것을 나타내었도다.
온갖 생명이 어떤 환경에 머물더라도 그 머무는 환경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차별하여 평가할 것은 아니다. 거미는 거미줄에 머무는 것이 마땅하고 개미는 개미집에 머무는 것이 마땅하듯이 각자의 생명마다 알맞은 환경과 조건이 있다. 이 모두가 그 생명들 나름대로 광대한 신통변화가 두루한 진리의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의지해서 머문다, 세계의 성취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가 낱낱이 유심히 이 경문하고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면 이치에 맞고 좀더 부연해서 이해하는 길도 있다.
오늘은 화엄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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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 분을 한 번 살펴보겠다.
일일이 다 이름을 열거하지 못해서 죄송하다. 한사람이 상당한 페이지를 저렇게 차지하고 놓으니까 딴 사람이 설 자리가 없다. 그것도 또한 자기 업일 것이다.
오늘 여기까지 공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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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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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의 업대로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 수억 수천만 종류가 있다. 또 각자의 생명마다 머무으기에 알맞은 환경과 조건이 있다. 그것이 그 생명들 나름대로 광대한 신통변화가 두루한 진리의 표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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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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