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차를 하면 일제 경찰이 탑승해 검문을 할 것이다. 물론 이 순간을 잘 넘기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온 만큼 불안 속을 헤맬 지경은 아니다. 윤덕경의 반짝이는 제안에 따라 진건은 지금 일본 세이죠오 중학 교복 차림으로 좌석에 앉아 있다.
만약의 사태를 염려해 ‘有島武郞’ 명의로 위조한 학생 신분증도 상의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나카무라 기치조中村吉藏의 저서 《Ibsen》, 입센 연구 논문들이 게재되어 있는 일본 문학계 동인지 《新思潮》, 역시 입센과 관련해서 키타무라 토코쿠北村透谷가 쓴 글이 실려 있는 일본 동인지 《文學界》 등도 지참했다. 그것들은 진건이 서울 보성고보 유학 이래 일본 도쿄 세이죠오 중학 재학 기간까지 《인형의 집》 등 입센의 작품을 열심히 탐독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들이다.
윤덕경은 정치나 역사 관련 책들이 아니므로 검문을 당할 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옆자리의 여성 승객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조언했었다. 철저하게 일본 청년으로 위장하라는 도움말이었다.
오늘 새벽 현진건은 대구역에서 차표를 끊을 때 ‘일본인 여성이 없나’부터 부지런히 살폈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순사가 내지인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일본인 여성 손님은 없었다. 진건은 실망하지 않고 객실을 샅샅이 배회한 끝에 일본인 할머니 옆의 빈 좌석을 발견했다. 젊고 잘생긴 일본인 청년이 동석하자 할머니는 아주 반가워했고, 남대문역(현 서울역)까지 아무 탈 없이 도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날은 진짜로 ‘운수 좋은 날’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내릴 때 짐을 차 바깥까지 옮겨드렸는데, 갓난 아기를 안은 젊은 일본 여인이 승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젊은 여인의 짐을 들고 객실 안으로 들어왔고, 자연스레 자기 옆 자리에 동석하게 인도했다. 그 후 입센 관련 책을 읽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진건보다 대여섯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일본 여성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푸센니 칸신가 타카이데스네. (입센에 관심이 많군요.)”
여성의 말에 진건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와타시마 쇼오세츠카 시보오나노데 소레오 욘데이마스. (제가 소설가 지망생이라 부지런히 읽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젊은 일본 여성은,
“쇼오세츠카시보오노 히토! 스고이 가쿠세에데스네. (소설가 지망생! 대단한 학생이군요.) 와타시노 유우진노 나카니모 코오타츠샤가 이마스요네. (나의 벗 중에도 입센 이야기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이가 있지요.)”
하면서 아주 호의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윽고 상당히 전문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노라와 도오낫타데쇼오카? (노라는 어찌 되었을까요?)”
진건이 잠시 숙고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드디어 전문적인 답변을 보냈는데, 평소 입센에 관해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공부를 해둔 보람이 있었다.
“로진와 노라가 우에지니스루카 후우조쿠텐니 잇타토 단겐시마시타. (루쉰魯迅은 노라가 굶어죽었거나 사창가로 갔을 거라고 단언을 했지요.) 와타시와 소노 단겐니와 도오이시타쿠 나이노데스가 난센스와 마다 소오시타 레베루다토 오모이마스. (저는 그 단언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은 아직 그런 수준인 것 같습니다.)”
일본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를 하였다.
“와타시타치 니혼노 단세에가 한분이조오 가쿠세에토 오나지 레베루노 시소오오 못데이타리 이이사카이니 나루노니 혼토오니 잔넨데스네.(우리 일본 남성들이 반 이상 학생과 같은 수준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사회가 될 텐데 정말 아쉽네요.)”
“호메스기데스.(과찬이십니다.)”
“이이에. 와타시노 칸가에데와 …, (아니에요. 내가 보기에는 …,) 가쿠세에와 세카이타이센모 한타이시 소오데스. (학생은 세계대전(미주)도 반대할 것 같아요.)”
진건이 ‘일본인 중에도 더러 이런 사람들이 있었지….’라고 유학 시절을 회상하면서 대답한다.
“오나지 진루이도오시데 시니 코로스센소오오 스루 코토와 노조마시쿠 나이데스네. (같은 인류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요.) 민나가 뵤오도오니 헤에와오 쿄오주시나가라 쿠라세바 이이토 오모이마스. (모두가 평등하게 평화를 누리면서 살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헤에본나 히토타치가 아마리니모 오오쿠 기세에니 낫테이마스.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고 있어요.) 큐우햐쿠 반닌모 시보오시타토 키키마시타. (900만 명이나 사망했다고 들었어요.) 센소오오 오코시타 히토타치와 베츠니 이마스요.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따로 있지요.) 카레라노 나카니와 다레모 시니마세. (그들 중에는 아무도 죽지 않아요.)”
진건이 밝은 낯빛으로 다짐말을 했다.
“도오칸데스. 타쿠산 마난데이마스. (동감입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와타시모 못토 잇쇼오 켄메에니 벤쿄오시마스. (저도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었으니 일본 순사가 진건을 일본인으로 믿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게다가 신의주역에서 순사가 다가왔을 때는 아기를 화제로 삼아
“와라우 토키와 토쿠베츠 키레에데스 (웃을 때는 특별히 예뻐요.)”,
“아토데 오오키쿠 낫타라 샤카이노 시도오샤니 나루데요소 (나중에 크면 사회의 지도자가 될 겁니다.) 가이켄가 스데니 카리스마가 야돗테이루 우에니 후츠우카시코쿠 미에나이데쇼오! (외모가 벌써 카리스마가 깃들어 있는데다 보통 똑똑해 보이지 않잖아요!)”
등등의 말로 일본인 여성을 신나게 웃도록 만들었으니, 순사는 검문할 마음도 먹지 않고 지나갔다.
진건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상념에 사로잡힌 때는 평양을 지나칠 순간뿐이었다. 그 전후는 내내 일본 여성과 갖은 잡담을 주고받았다. 쉴 새 없이 일본말로 떠듦으로써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온몸으로 증언해야 언제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밀정의 눈을 속일 수 있다. 진건은 다만 기차가 평양을 통과하는 동안만은 자신도 모르게 무슨 생각에 빠져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둘째가 갑자기 어인 일이냐?”
지난 2월 초사흘 오후의 일이다. 현경운은 자신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홍매화나무 아래에 거름을 주고 있었다. 진건도 마루에서 뜰을 바라보며 ‘꽃은 언제 피려나?’ 하는 생각에 잠깐 잠겼지만, 이내 심드렁해진 탓에 방으로 들어와 소동파의 〈적벽부〉를 읽기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둘째라면 진주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 석건 형을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진건은 ‘浩浩乎如憑虛御風호호호여빙허어풍 而不知其所止이부지기소지 飄飄乎遺世獨立표표호유세독립 羽化而登仙우화이등선’ 부분을 접어놓고 방을 나섰다. 결혼 이후 인교동 처가에서 살아왔는데, 그날은 ‘저녁 먹고 가거라. 대구지물상사 들러 종이 좀 사 오고…’라는 아버지의 전갈에 아내와 함께 계산동 친가로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진건이 마루로 나와서 보니, 과연 둘째형이 당도해서 이제 막 마루로 올라서려는 참이었다.
“고헌이 일제에 피체돼서 공주 형무소로 압송되어 갔습니다.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오늘 밤에 몇이 모이기로 했습니다.”
(미주)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을 가리킨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는 “World War” 또는 “Great War”라고 불렸다. 미국에서는 “World War I(약칭: WW1)”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