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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29일 화요일
[(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고 이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겨자씨와 같고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과 같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둘이 한 몸을 이룸은 큰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21-33
형제 여러분,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33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겨자씨와 누룩은 계속 자라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복음이 점점 많은 이에게 전파되는 것이 그래도 눈에 보였을 것이고, 사도들 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뒤 중세와 근대에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교회가 점점 확장되었고, 아프리카(고대부터 복음이 전해진 지역들도 있다.)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물론 지금도 선교 지역들이 있고 외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지역들이 있지만, 그러지 않은 곳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유럽을 보면서 성장을 말하기는 어렵고, 아시아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통계상으로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도 실제로 느껴지는 교회의 활기는 수십 년 전보다 못하여 보입니다. 그러면 겨자씨는 자라나고 있을까요? 반죽은 부풀고 있을까요? 그런데 사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커져 가고 있을 때 필요한 말씀들이 아닙니다.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게 여겨질 때 필요한 말씀입니다.
흙 속에 묻혀 있는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고, 반죽 속에 섞여 있는 누룩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래도 씨앗이 있고 누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들은 박해 속에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무관심과 실망과 불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아직 씨앗들이 살아 있으니 희망을 가집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당신의 현존을 더욱 크게 드러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인데, 비가 내리고 난 후, 2월 말이나 3월 초가 되면 갈릴래아 호수 인근에 노란 겨자꽃이 여기저기 예쁘게 피어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다는 표현을 할 때, 좁쌀만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자씨만하다고 합니다. 좁쌀도 작지만, 겨자씨도 실제로 보니 참 작더군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그 나라른 겨자씨만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8-19)
바꿔 말하면 그 작디작은 겨자씨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씨앗 안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보잘 것 없는 나, 죄투성이인 내 안에도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더 작아 보이고, 더 큰 죄인처럼 여겨지는 이웃 안에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작고 낮은 이를 총애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부르십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 시선으로 볼 때 작고 낮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루 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저녁이면 온몸이 녹초가 됩니다. 강도 높은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형제자매들의 처지와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하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체험하지 못할 작은 삶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다가 넘어지면 상처나 충격이 만만치 않은데, 낮은 밑바닥에 있다 보니 웬만한 넘어져도 그다지 충격을 입지 않습니다.
손님들을 위해 바비큐 기계를 열심히 돌렸습니다. 기계를 본격적으로 돌리기에 앞서 대대적으로 숯불을 피워야 하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어찌 어찌 하다 보면 손이나 팔, 얼굴에 숯칠을 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깔깔대며 웃습니다.
한푼이라도 절약하겠다며 이런 저런 수리나 공사를 직접 하다가 비전문가이다보니 완전 엉뚱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헛수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참 많이 배웁니다. 그 삶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더 당신의 현존과 사랑, 자비를 크게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더 작은 자가 될 때, 더 밑으로 내려갈 때, 더 확연히 우리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 나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아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며 자신도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며칠 전 20년 전에 제가 보좌를 할 때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왔을 때 병자성사도 주고 기도도 해 주었지만, 그 이후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바빠서 임종 직전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동안 전화도 한 통화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스러워지면 나도 고통스럽고 나 때문에 누군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면 그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겨자씨가 뿌려질 필요가 없고 누룩이 넣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는 공부하기 싫은 11살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엄마가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4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뜻이 살아있다면 자녀를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면 자기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상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바쁘다, 바쁘다만 하고 살다가 아플 때 연락도 못 하고 그냥 떠나보낸 나에게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희윤 마리 스텔라 수녀님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어느 날 저에게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던 자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자매는 남편과 한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나와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의 대답이 “수녀님 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희 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난 너희가 더 중요하고,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바빠… 바빠서…” 하면서 늘 동동거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멀리서 보이면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건너고, 전철이 출발할까 봐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빠른 환승 게이트가 어디인가 찾아보고.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바쁘게 사는 일’에 길들어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빠 보이는 저의 모습이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바쁜 마음과 몸 또한 죄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연피정이 생각납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늘도 바라보고,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도 가만히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멈춰 서서 그분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분들은 고마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무심코 지나갔을 많은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이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가만히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부르기 시작했고, 곧 영국군도 자신들만의 캐롤을 부르며 참호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양측 군인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의 땅'에 모여 음식, 담배, 기념품 등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까지 거행했으며, 인류애를 공유하는 이 순간에 양측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희망과 선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으며,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공유된 인간의 가치와 연결이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책, 영화, 노래를 통해 기념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을 쓴 스님도 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휴식도 되어주고 빵도 되어줍니다. 저는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머리로는 강론 준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남부 사제 모임을 다녀왔습니다. 칸쿤에서 있었습니다. 9개 주의 사제들이 모였습니다. 숙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다가, 마지막 날에는 근처 성당을 찾아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서울 교구 5명, 마산 교구 2명, 청주 교구 2명, 부산 교구 2명, 인천 교구 2명, 전주 교구 1명, 수도회 1명, 이렇게 15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회의 중에 신심 단체의 담당 사제를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꾸르실료, 성령기도회, 레지오, 엠이의 담당 사제를 정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미 꾸르실료의 담당 사제를 맡고 있었고, 신부님 한 분이 성령 기도회 담당 사제를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엠이와 레지오 담당 사제는 추후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담당 사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북부에 있을 때는 담당 사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엠이 당당 사제를 맡았습니다. 엠이 봉사자들과 주말을 함께 했고, 코로나 시기에도 피정을 했습니다.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중남부에도 성령기도회 담당 사제가 정해졌으니, 내년에 성령 대회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엠이와 레지오도 담당 사제가 정해지면 더욱 활성화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사제들이 겨자씨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사제는 미사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공동체는 말씀과 복음 그리고 미사를 통해서 성장하고, 열매 맺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부부는 기도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자녀들은 말씀과 복음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열매 맺습니다. 사제가 권위만 내세우려 한다면, 한국에서 했던 방식으로만 사목하려고 한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부부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가정에도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번 사제 모임을 통해서 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중남부 한인 공동체가 큰 나무가 되어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부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훈아의 ‘사랑’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나훈아의‘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행여 당신 외로울 때/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행여 당신 우울할 때/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참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전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감추어졌던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12명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볼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인
성 나르치소(Narcissus)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 +215년경
같은이름 : 나르치수스, 나르키소,
나르키수스
그리스인인 성 나르키수스(또는 나르치소)는 연만한 나이에 예루살렘의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어느 주교보다도 교구 내의 규율을 엄격히 실시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예루살렘 회의에서 로마(Roma)의 관습들을 지지한 것 때문에 반대자들의 강력한 반란으로 주교좌를 물러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그는 몇 해 동안 사막의 은수자 생활을 하다가,예루살렘 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주교좌로 복귀하였고, 성 알렉산데르를 보조자로 임명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나이가 116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 콜만노 (Colman)
활동년도 : +632년경
신분 : 주교
지역 : 킬막두아그(Kilmacduagh)
같은 이름 : 콜만, 콜만누스, 콜먼
6세기 중엽 아일랜드의 킬타르탄(Kiltartan)에서 태어난 성 콜만누스(Colmannus, 또는 콜만노)는 클레어 카운티(Clare County) 산에서 독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숨어 살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주교직을 부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야생초와 물만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결국 굴복하여 킬막두아그의 초대주교가 되었다. 성 콜만누스는 수탉과 생쥐 그리고 파리를 기다리며 살았다고 하는데, 수탉은 그의 성무일도 시간을 알려주고 생쥐는 졸음을 쫓아주었으며 파리는 신호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복녀 키아라 바다노
년도 : (1971-1999)
지역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복녀 키아라 바다노"는 젊은 나이에 투병생활을 시작한 복녀 바다노는 자신의 고통을 희생으로 봉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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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저에게는 아직 심장이 있고 그렇기에 언제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
복녀 키아라 루체 바다노는 1971 년에 이탈리아 사세노에서 태어나, 1990 년에 골육종이라는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열 여덟 해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영웅적인 성덕으로 살았습니다.
9 세 때에 포콜라레 운동에 입문하여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키아라 루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합니다. 16 세 때 '골육종'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했으나 오히려 그녀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밝은 모습으로 힘과 용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투병 생활중 키아라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십자가상의 수난을 나누고자 하는 원의와 명료한 정신을 유지하고자에서 진통제인 모르핀 투약을 거부했습니다:
“It reduces my lucidity and there’s only one thing I can do now: to offer my suffering to Jesus because I want to share as much as possible in his sufferings on the cross."
"그것[모르핀]은 저의 의식의 명료함을 감소시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저의 고통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을 가능한 많이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입원했던 투린의 병원 의사 안토니오 델로구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Through her smile, and through her eyes full of light, she showed us that death doesn’t exist; only life exists."
"그녀의 미소를 통해서, 그리고 빛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을 통해서, 그녀는 우리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직 생명만 존재합니다."
그녀를 문병온 포콜라레 운동 친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At first we thought we’d visit her to keep her spirits up, but very soon we understood that, in fact, we were the ones who needed her. Her life was like a magnet drawing us to her."
"처음에 우리는 그녀의 사기를 붇돋아 주려고 병문안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곧 우리가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 자석과도 같았습니다."
Cardinal Saldarini heard about Chiara’s illness and visited her at the hospital. He asked her, “The light in your eyes is splendid. Where does it come from?” Chiara simply replied, “I try to love Jesus as much as I can."
또한 살다리니 추기경께서 키아라의 병을 전해 들으시고 병원을 방문하셨는데 키아라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의 눈빛이 아주 반짝이는구나. 어디에서 그런 빛이 온 거니?" 키아라는 단순히 답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가능한 많이 사랑하려 노력합니다."
항암치료가 실패했음에도 복녀 키아라 루체 바다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f I had to choose between walking again and going to heaven, I wouldn’t hesitate. I would choose heaven."
"내가 만일 다시 걸을 수 있는 것과 하늘나라에 가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하늘나라를 택할 것입니다."
1989년 출혈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복녀 키아라 루체바다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Don’t shed any tears for me. I’m going to Jesus. At my funeral, I don’t want people crying, but singing with all their hearts."
"저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말아 주세요. 저는 예수님께로 갑니다. 저의 장례식에서 저는 사람들이 울기를 원치 않고 마음을 다하여 노래하기를 바랍니다."
복녀 키아라 루체 바다노는 2010 년 9월 25일 시복되었고 축일은 10월 29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