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7 - 시신봉을 내려와 흑호송 지나 북해에서 몽필생화를 보며 시선 이백을 회상하다!
10월 21일 난징 남역 에서 07시 버스를 타고 12시에 황산풍경구 에 도착해 풍경구 전용 버스를
바꾸어 타고 운곡사 에 도착해 케이블카를 타고 新白鹅峰 (신백아령) 에 내려 산길을 걸어
竪琴松(수금송) 을 거쳐 가파른 산 바위에 난 돌계단을 기어올라 始信峰 (시신봉) 에 오릅니다.
황산(黄山) 은 저장성, 강서성, 쉬안청시(宣城市, 선성시) 와 츠저우시(池州市, 지주시) 에 접하고
창강과 첸탕강(钱塘江, 전당강)의 분수령으로남북 40㎞, 동서 30㎞로 72개 산봉(山峰)
이 있는데..... 3대 주봉으로는 롄훠봉(莲花峰 연화봉), 광밍팅(光明顶), 톈두봉(天都峰)이 있습니다.
황산(黄山) 은 신생대 조산 운동에 의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빙하와 자연 풍화에
의한 침식 을 거쳐 기암 괴석 이 형성되었는데 황산(黄山) 의 기송(奇松), 괴석(怪石),
운해(云海) 및 온천(温泉) 을 일러..... 이른바 황산 4절(四绝) 이라고 칭하고 있다고 하네요?
황산(黄山) 의 옛 명칭은 이산(黟山) 으로 중화 민족의 시조인 황제(黄帝) 가
수하들을 이끌고는 이곳에 와서 득도하여 승천 하였다고 하며.....
당나라때인 747년 도교를 신봉했던 현종 이 이 산을 황산 으로 개명했습니다.
달리 한대 유향이 지은 열산전 중 황산기략(黄山记略) 이라는 문장이 있기도 합니다.
황산(黄山) 에 마애석각이 280개소가 있으며 온천(温泉), 옥병루(玉屏楼), 운곡사
(云谷寺) , 시신봉(始信峰), 스즈봉(狮子峰) 및 롄훠봉(莲花峰) 등지에 산재해 있습니다.
석각 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새겨져 있으며 전(篆), 예(隶), 행(行), 해(楷), 초(草) 등 글씨체가
섞여 있다고 합니다. 시신봉 을 내려와 북해 로 길을 잡아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한 나무에서 두개 가지가 뻗어 자란 소나무 를 여기서는 연리송(連理松) 이라고 부른답니다.
길은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 오르막 길은 광명정 봉우리로 통하는 길이고... 오른쪽 아래로 내려
가는 가파른 계단은 북해 에 이르는데 그 사이에 큰 소나무 가 버티고 서 있으니 위에서
보노라면 마치 호랑이 가앉아 있는 모습을 연상 시킨다고 해서 흑호송(黑虎松) 이라고 부른다네요?
우린 오른쪽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 아래 왼쪽에는 오늘밤 우리가 묵을....
우리 호텔 베이하이 삔관 北海宾馆 (북해빈관) 이 바라보이며 그리고
오른쪽 절벽 위에 반원형인 散花塢(산화오) 전망대 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데 강태공, 오지봉, 낙타바위, 필가봉에 요룡석이라.....
그 중에서도 압권은 이백 의 전설이 얽힌 몽필생화(夢筆生花) 인 데,
그가 꿈에서 보았다는 거대한 붓을 세운 듯한 그 몽필생화 (夢筆生花) 입니다!
당나라 시인 이백 (701-762) 은 1,300년 전에 여기 황산에 올라 기이한
봉우리 들을 바라 보다가..... 그만 시흥 이 일어 시 한수 를 읊습니다.
“황산 사천길 높이에 서른 두 개의 꽃봉우리여!
빨간 벼랑들 기둥 틈에 금빛 연꽃들아.....“
사자림 사찰 의 늙은 주지 스님 이 문을 열고 나와보니 흰 옷을 입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선비 가 서
있는지라 안으로 청해 동자승에게 오래된 곡주를 가져오게 하니 애주가 이백 이 마다할리
없으니 마시고는 흥에 겨워 다시 시 한수를 짓고는 붓을 허공에 휙 던져버리고 하산했다고 합니다.
스님이 손을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그새 붓 은 바위 봉우리 가 되고
그 붓 끝 에서 한송이 소나무 가 자라는 것이라!!!
이백 은 자가 태백(太白) 으로 두보(杜甫) 와 함께 중국 최대의 시인이자
시선(詩仙) 이라고 까지 불리는데...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합니다.
그는 쓰촨성 四川省 인 촉(蜀) 나라의 장밍현 彰明縣 출신으로 25세 때 양쯔강을 따라서
강남, 산동, 산시성을 편력했는데 도교(道敎) 에 심취해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습니다.
그의 시는 도교적 발상 에 의한 것으로 맹호연(孟浩然) 과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했는데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바랐습니다.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의 부름 을 받아 장안 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는...
한림공봉 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지만 한낱 궁정 시인 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정치적 야망과 성격 은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으니 이백은 “술 속의 팔선(八仙) ”
으로 불렸고....... 결국 궁정을 쫓겨나 낙양에서 두보 와 지기지교를 맺게됩니다.
두보와 헤어진후 하북성을 방랑하고는 다시 남하해 양주(揚州) 와 금릉(金陵: 南京) 에서
노닐다가 55세 때 안녹산의 난 이 일어났을 때는 이곳 안휘성 선성 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황자 영왕 이 거병하자 막료로 발탁 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 하여 패하였으므로..... 그는 구강현의 옥중 에 갇히게 됩니다.
그후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되었으며 이후 난징과 안휘성 선성을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병사 하였으니 그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 으로 끝납니다.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 을 닦기도 했는데, 방랑은 “대붕(大鵬)의 비상 (飛翔)”
이었으니...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 하였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두보 는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데 비해
이백은 인간을 초월 해 "인간의 자유를 비상"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고 봅니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 까지도 안으로 받아들여 그곳으로 부터 비상 하려고
하였으니.... 그의 시 를 지탱하는 것은 "협기(俠氣) 와 신선(神仙) 과 술" 이라?
성실한 인간의 전형인 "두보의 시는 퇴고" 를 거듭하여 닦아지는데 대하여......
이백의 시 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 가 되는 바람 같은 시풍(詩風) 입니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에 대하여 이백은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 를 장기로
하니....... 인간과 시대에 대해 큰 뜻 을 품었으나 제대로 펼쳐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미산 월가 - 이백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시
峨眉山月半輪秋 (아미산월반륜추) 아미산에 걸린 반달
影入平羌江水流 (영입평강강수류) 그 그림자가 평강강에 비쳐 흐르고 있다
夜發三溪向三峽 (야발삼계향삼협) 밤에 삼계를 떠나 삼협으로 행하는데
思君不見下渝州 (사군불견하유주) 그대 달을 보려고 해도
달은 산 뒤에 숨어 안보이고 배는 그냥 유주로 내려가 버리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