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향문학상 응모작 수필 3편
운과 귀인은 누구에게나 온다
외 2편
이름 ; 정하선
나이; 1945년 2월 13일
전화; 010 3388 2332
이메일 ; junghasun88@hanmail.net
사진 ; 파일 첨부
운과 귀인은 누구에게나 온다
정하선
저는 ‘사랑의 택시‘ 기사입니다. 며칠 전 tv에 출연한 분의 얘기다.
30대에 건설회사 사장으로 잘 나갔었는데 보증 한 번 잘 못 서서 전 재산 다 날리고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유서를 써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목포 유달산에 가서 바다를 보면서 맥없이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노부부가 다가왔습니다. 곁에 앉으며 물었습니다. “여기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는지요. “
그래서 지나온 얘기를 대충하였습니다. 노인이 하시는 말이 자기들도 부산에서 큰 신발공장을 하다 부도가 나서 도망쳐온 곳이 목포였다고 하였습니다. 목포에 와서 안 해본 일 없이 하다 보니 지금은 그런대로 살게 되었다고 하면서, 당신 얼굴과 귀를 보니 돈이 붙게 생겼으니 빨리 서울로 다시 올라가서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박스를 줍든지 아니면 수위나 경비라도 해서 살 도리를 하지 왜 이러고 있느냐고 하는 말을 해주었는데, 그 말이 마치 망치로 머리를 쾅,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 길로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중 하루는 교통회관 앞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데 이렇게 줄을 서있느냐고 물었더니 택시기사 시험을 보려고 원서접수를 하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도 할 수 있을까 하고,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이면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원서를 사서 접수를 하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두 번 만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택시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손님이 타도 ‘어서 오십시오. ‘ 하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손님도 제대로 못 받는 형편으로 운전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승객 한 분을 태우고 상당히 먼 거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승객과 가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게 되었는데. 그 손님이 하는 말이 자기는 3일 후에 외국으로 떠나간다고 하면서 이 택시의 이름을 지어주고 떠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택시 이름을 ‘사랑의 택시’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이 이름을 붙이고 다니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이름을 택시에 붙이고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택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녔더니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고 이용을 해주어서 지금 대성공이라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분 하는 말이 ‘언제나 재기할 수 있는 운은 누구에게나 다 있고, 누구나 귀인을 만나는 기회는 온다.’라는 신념을 갖고 살아가라고 하는 말을 하였다.
혹시라도 의지가 꺾이는 일이 있거나 어깨 쳐지는 일이 생기면 이 분의 말을 되새겨보면 힘이 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 써본다.
보증은 부자간에도 서주면 안 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고 산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어디 그대로만 살 수가 있는가.
운과 귀인은 누구에게나 온다는 말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운명의 신은 기회를 안겨 주리라. 평생에 좋은 기회는 세 번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살아온 길도 가끔 뒤돌아 볼 때가 있는데 크든 작든 열심히 살 때 기회는 생각지 않은 곳에서 예상치 못한 좋은 일을 가지고 찾아왔었던 것 같다.
낭떠러지에 선 사람이 있다면 어깨 다독거려 말해주고 싶다. 쾅하고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이 가도록.
방음벽
단,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말해본 적이 없다.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은 적도 없다. 남의 의견에 반박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개 끄덕여 긍정도 한일이 없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본 적은 더더욱 없다.
오직 듣기만 한다. 듣기만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같다.
예쁜 소형차가 지나가면서 귀여운 목소리로 응석을 부려도, 고급 승용차가 지나가면서 거드름을 피워도, 낡은 트럭이 지나가면서 삶의 고통을 호소해도, 대형 트레일러들이 지나가면서 우락부락한 굉음을 내뱉으며 위협을 해도 말이 없다. 고개 한 번 끄덕여주는 일도 없다. 듣기만 할 뿐, 그저 속으로 삭히고 만다.
세상길 굴러가는 수많은 소리를 듣고 있지만 모른척한다. 아니 듣지 않은척한다. 불평은 물론이지만 맞장구 칠 줄도 모른다. 격려의 말도 칭찬의 말도 할 줄 모른다. 참고 있다가 언젠가 한 번쯤 툭 쏠 것도 같지만 그런 일도 없다. 인색하다고 할 정도로 무표정하다. 표정이 없는 사람. 나의 친구 중에 표정이 없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친구들이 어쩌다 모여서 화투놀이를 하면 그 친구의 패는 아무도 짐작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패가 잘 들면 얼굴이 환해지고 못 들면 얼굴 표정이 어둡다. 속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하기가 어렵고 위험할 것도 같다.
길을 달려가는 차량들, 보기에는 그럴 것 같지 않은 차량도 가슴에 담아둔 매연 같은 말들을 쏟아낼 때도 있다. 저 마다 무슨 소리든지 소리를 쏟아내며 달린다.
어떤 차는 빨리, 어떤 차는 느긋이, 어떤 차는 옆 차를 들이받을 듯이, 어떤 차는 앞지르기를 하면서 질주를 한다.
크고 작은 소리는 물론, 매연조차도 듣고, 보고, 마시면서도 아무 말이 없다. 그들이 내뿜는 그런 행동들을 보는 즉시, 듣는 즉시 마음속에 깊이 감출뿐이다.
하는 행동들을 보고 듣고 있으면 입이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참고 있을까.
사람의 귀는 두 개 밖에 없어도 있는 말 없는 말 다 듣고 한 개 있는 입으로 부풀려 옮겨 화를 만드는 일이 허다한데, 천 개의 귀 만 개의 귀로 다 듣고 있어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헛소문이라도 될까 봐 그러는 것일까. 누군가 너에게 평생 묵언권이라는 벌칙이라도 내렸단 말인가.
그런 타의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오직 소리와 고요의 경계를 자신이 책임지고 지켜야 한다는 단호한 각오라도 세우고 있는 자의인 것 같다. 스스로 제 몸을 다스리고, 제 마음을 다스려 침묵함으로 수신제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의연히 앉아있는 모습이 군자의 도를 넘어 이미 성인의 반열에 든 것은 아닐까.
말이 없으면 부처님. 부처님은 미소라도 짓고 있는데 얼굴엔 미소도 없다. 침묵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바위 같기도 하다. 그러나 바위와는 또 사뭇 다른 면이 있다. 바위는 묵직한 감이 바로 느껴지는데 바위의 묵직함보다는 어쩜 얄팍함이 보이기도 한다. 수천 개의 귓구멍으로 듣고 간직한 말들 언젠가 자신이 수렁에 빠지게 되면 모두 세상에 쏟아내 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것 같은 우려의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 세상에 있는 기기들, 사물들의 소음을 들으면서 자신만이라도 이 세상을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묵언의 시위인가. 소리 없는 대결인가. 그러나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꾹 다물고 있는 저 입.
lp판이나. 녹음테이프, usb는 침묵하고 있다가도 때가 되면 자신이 들은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하고 만다. 말을 담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기란 이 세상 그 어떤 일 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tv는 하루 종일 남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는다. 저 혼자 저 말만 한다. usb는 저가 들은 것만큼만 정직하게 말을 한다. 보탬도 덜함도 없다. 재판장의 증인석에 앉아 선서라도 한 증인 같다. 녹음기는 옛날 저의 할아버지인 축음기가 그랬듯이 아름다운 노래를 하다가도 가끔 술 취한 사람같이 한말 또 하고 한말 또 하고 횡설수설할 때도 많다. 씨도둑은 못 면한다고 했던가. 그래도 축음기는 남의 말을 엿듣거나, 혹시나 잘 못 들은 말을 일부러 귀에 담아두려 하지 않았는데, 녹음기는 남의 말을 훔쳐 듣고 고자질도 하는 모양이다. 그로서 패가망신하기도 한다지만.
그런 그들의 세상을 보면서 말을 안 하기로 다짐이라도 한 것인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폼이 말을 할 생각조차 없는 듯하다.
방음벽도 남성과 여성이 있을까.
담쟁이넝쿨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리개로 얼굴을 가린 수줍은 여성 같다. 저런 여자라면 입이 무거워 말을 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근육을 드러내고 당당히 서있는 모습을 볼 때는 햇볕에 탄 구릿빛 근육질의 남자 같기도 하다. 저런 남자도 입이 무거운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성성을 가졌든, 남성성을 가졌든 입이 무거운 집안에서 나고 자라 점잖음이 몸에 배어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말로서 자기의 일생을 망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말로서 자기를 잘 살려 대성공을 한 사람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명한 한 마디의 연설을 하여 청중을 감동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킨 위인이 있는가 하면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도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말을 하는 것보다 말을 하지 않음이 더 좋은 것인가. 그렇다고 방음벽을 어느 누구도 성인이라고 칭송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말로서 말 많은 세상이라 해도 저 방음벽은 말이 누가 되어서 자신을 망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방음벽은 언제 보아도 진실성과 성실성이 보인다. 묵묵히 제 자리에서 제 할 일을 수행하고 있는 말단 직원처럼.
요사이 층간소음 때문에 더러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층과 층 사이에 저 방음벽을 눕혀놓는다면 가만히 누워서 소리는 떡 먹듯이 다 먹고 고요만 뒷전으로 밀어 시침을 뚝 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런 정도면 저의 장점을 슬그머니 자랑할 것도 같은 데, 자랑은커녕 그런 내색을 하는 표정도 본 일이 없다. 지나는 바람결에 소문으로도 들은 일 조차도 없다.
내가 시골 살 때 서울 구경을 와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잔 일이 있다. 그때 밤새도록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 수세식 변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 어쩜 듣기 싫은 잡음들이지만 그때는 그 소리들도 듣기가 좋았었다. 지금 도시에서 살면서 소리에 무디어져 있어도 그때 들은 소리들이 정겨움으로 다가설 때가 가끔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저 방음벽도 소리에 무디어져 버린 것인가. 나처럼 언젠가 질주의 소음이 추억의 꽃으로 그 가슴에서 피어나려는지. 그러면 그때 한 마디 하려는지, 평생 입 다물고 있었지만 모든 소리들이 다 아름다움이라 말하고 싶었다고. 그래서 마음속 깊이 감싸 안고 있었다고.
2013. 5. 7
상추 값이 금값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것보다는 손으로 집어먹어도 흉허물이 없어서 좋다,
두서너 이파리 들고 흔들어 물을 탈탈 털고, 밥 한 숟가락 떠 얹고 된장 떠 넣고 풋고추 툭 분질러 얹어, 쌈을 싸서 볼이 미어져라 먹어도 보기 싫지 않아서 좋다.
기름진 돼지고기와도 잘 어울리고 비린내 나는 생선회와도 잘 어울린다. 꼭 고기가 아니라도 된장 쌈을 해도 좋다. 고추장 쌈을 해도 좋다. 누구와 어울려도 싫어하는 내색은 찾아볼 수 없다. 속으로도 한 점 어떤 씁쓸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접시에 얹어져도 바구니에 담기어도 자리 탓은커녕 싫어하는 기색을 본 적이 없다. 언제 어느 곳에서 만나든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으며 어릴 때 같이 자란 동무처럼 편안하게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부잣집 마님의 좀 교만한 밭에서 자라도 교만함이 없다. 젊은 새댁의 가난한 텃밭에서 자라도 마음이 움츠러드는 내색을 볼 수 없어서 좋다.
내가 징병신체검사를 갔을 때의 일이다. 면사무소에 11시까지 집결해서 머릿수 점검한 뒤 트럭 타고 군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1시가 넘었다. 식당 앞에 내려놓았을 때 우물가에 상추 씻어놓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그곳으로 가 상추를 싸 먹었다. 그러자 모두들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가 순식간에 상추가 동이 났다. 나도 두어 쌈 했더니 상추에 된장만 싸서 먹었는데도 허기가 가시었다. 그때 한 쌈 더 하라면서 상추를 집어 나에게 주고 웃던 얼굴이 오늘 저녁 달로 떠오른다.
마을 회관 옆 돌담 안집에 살던 손이 크다고 소문난 덕천 아주머니는 여름날 가끔 감나무 그늘 밑 평상에 도리상 펴고, 밥 따뜻이 지어 열무김치랑 찔그미(칠게) 찢어 넣고 고추장 두서너 숟가락 퍼 넣은 뒤 상추 서너 주먹 쥐 뜯어 넣어 밥 비벼서 둘러앉아 먹으라고 했었는데,
상추 값이 금값이다. 며칠 전 마트에 갔더니 야채류가 100g에 2500원이라 써 붙여져 있었다. 400g 한 근이면 만원이다. 상추 한 박스에 8만 원이라고 며칠 전 보도에서 보았는데 한 박스면 10만 원 꼴이다. 돼지고기보다 비싸다. 돼지고기는 한 근이 600g. 한 근에 삼겹살이 만 원 정도 간다. 삶아먹는 살코기는 삼사천 원이면 살 수 있다. 상추에 돼지고기를 싸 먹은 것이 아니고 돼지고기에 상추를 싸 먹는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언제나 이맘때가 되면 상추 값이 금값이 되었지만 올해는 긴 가뭄과 갑자기 많이 온 비 때문에 다른 해보다 여름 채소 값이 더 비싸다.
상추 한 박스를 5천 원에 사서 애들과 나누어 먹었던 때가 불과 두어 달 전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농작물 값이 다 그렇다. 귀하면 비싸고 흔하면 싸서 탈이다. 다른 작물들은 년 단위로 굴곡이 있지만 상추는 계절 단위로 굴곡이 있다. 순해서 복 받아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많은 굴곡을 겪은 여인의 인생이다.
집에 오니 보들보들한 어린 상추가 한 바구니 식탁에 놓여있었다. 가까이 사는 큰딸이 가져다 놓고 간 거다. 상추며 풋고추· 토마토· 부추· 가지· 풋호박· 오이 등 골고루 많이도 가져다 놓고 갔다.
사위가 김포 고촌에 주말농장을 한 오십 평 얻어서 이것저것 골고루 심어 가꾼다. 나도 가끔 가지만 내가 못 갈 때면 딸이 가거나 사위가 가서 이것저것 수확하여 갈 때마다 집에 푸짐하게 가져다 놓고 간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해도 고맙다.
아내가 내일 고기 사서 싸 먹자고 한다. 내가 그냥 싸 먹으면 맛있겠다고 저녁에 먹자고 하였다. 어린 상추라 연하고 보들보들하다. 평생 상추 꼴을 못 본 것처럼 맛있는 상추쌈을 하였다. 입도 비싼 걸 잘 안다. 귀하면 더 땅긴다. 비싸면 더 맛있다.
상추가 봄에 막 나와서 얼마 동안은 매일매일 먹어도 맛이 있다. 어느 정도 먹으면 맛이 떨어지고 손이 멀어진다. 여름휴가철 이때가 되면 또 귀해지고 맛이 있다. 가을 김장거리인 무·배추와 같이 심어서 어린 상추가 나올 때가 되면 그때가 또 맛이 있다. 가을 채소가 휘늘어지면 상추보다 배추쌈이 더 맛이 있어진다.
우리 가족들은 외식을 할 때 고깃집에 가면 상추를 많이 주는 걸 좋아한다. 가족들이 다 상추를 좋아한다. 가뭄에 비처럼 상추를 조금씩 감질나게 주는 집에 가면 상추를 자주 달라고 하기가 미안하다. 말은 안 해도 뭔가 부족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지금처럼 상추가 비쌀 땐 고깃집에 잘 가지 않는다. 비싼 상추를 더 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다.
야채 셀프 집에 가거나, 우리 식성을 알고 상추를 많이 가져다주는 시골사람 같은 집에 가면 만족감이 배가된다.
주말농장에 가면 1번 아저씨는 한여름인 이때 먹을 상추를 아주 잘 가꾸어 놓는다. 곁에서 보면 여름상추가 안 된다는 말이 무색하다. 봄 상추가 거의 절정에 이를 무렵 상추씨를 파종하는 모양이다. 상추를 파종하고 비닐터널을 씌워 양옆을 걷어 올려놓고 위에 차광 망으로 그늘을 만들어주어 기르고 있었다. 지금 몇 년째 그렇게 기르는 것을 보았다. 이웃이라 사위도 자연적으로 거기서 배워 여름상추재배를 했나 보다. 두 주일 전쯤 밭에 갔을 때 상추가 조금씩 자라 있더니 지금 딱 먹기 좋을 정도로 자라서 이렇게 뜯어다 놓고 간 것이다. 긴 가뭄도 이겨내고 잠시일지라도 폭염도 이겨내고 잘 살아온 상추도 딸과 사위도,
고맙다.
2017, 8 , 5
|
첫댓글 아, 정하선님 응모작 수필을 안고 오셨군요.
먼저 '구절초향기' 회원 되심을 환영합니다
그래요. "운과 귀인은 누구에게나..." 오지요.
인공위성님 반갑습니다 신청부터 해 주시고
카페 가입과 수필 응모를 환영합니다
먼저 [가입인사방]에
그 다음 [매일인사장]에 인사한줄 남겨주시고
바로 아래 [끝말잇기장] 잼나게 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것이 응모작품 발표전에 카페오신 기쁨이요 보람이랍니다
응모작 접수합니다.
좋은 성과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