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철기시대입니다. 왜냐하면 고조선 이전에 배달국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미 철제무기를 사용한 기록이 있습니다. 배달국 14대 자오지천왕께서-보통 치우천왕으로 불리고 있음-채광주철하여 병기를 제작한 기록이 있거든요.
아래는 원동중의 삼성기 하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자오지천왕이 계셨다. 이 분의 신이한 용맹이 너무도 뛰어나(신용관절神勇冠絶)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동두철액銅頭鐵額) 능히 안개를 일으키며, 구치를 제작하여 광석을 캐내고 철을 주조하여(채광주철採鑛鑄鐵) 병기를 제작함으로써 천하가 모두 외경하였다.
치우천왕께서 황제헌원과 탁록에서 72번이나 싸워서 신하로 삼았는데 이때 치우천왕은 철제무기를 사용했으나, 황제헌원은 청동기(신석기?) 시대의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답니다. 게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화 한단고기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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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입니다...
최근 고고학의 발굴에 의하면 BCE2,400년경 만주 요령지역에 청동기 문명이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유물로 비파형 단검이 발해연안 북부와 송화강 유역의 만주지방, 한반도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었으며, 고조선의 광역과 일치합니다. 청동기 문명의 주인공은 중국 지나족이 아닌 우리 한민족입니다. 배달국부터 고조선 시대에 걸쳐 청동기 문명이 발달한 것 같습니다.
동예의 무천은 고조선의 풍속이라고 적힌 당나라시대 문헌인 토원책부를 발견하였습니다. 고조선 문화의 바탕은 배달국으로부터 내려온 신교입니다. 신교는 고조선의 정치, 경제, 종교, 풍속, 지리를 파악하고 동북아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구소련의 역사학자 유엠 푸진은 '고조선은 최소한 천년 동안 중국과 무관한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참고로 일본과 중국이 왜 역사를 왜곡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릴께요.
옛날부터 중국은 이중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국의 긍지와 자신감은 중화주의에서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의 시원문화가 동이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컴플렉스를 갖고 있습니다. 한무제와 수양제, 당태종이 침략한 것도 이와같은 맥락입니다.
대조영 드라마에서 평양이 함락될때 이세적이 한 말이 혹시 생각나는지요? '그대들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더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한마디로 배아프다는 질투심같은 것이지요.
일본도 마찬가지구요...그들의 국보1호 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한 무수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으로 검증이 되었답니다.
동북아시아가 역사의 진실이 왜곡되어 질서가 바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화와 통일로(협력) 가지 못하는 것이 한.중.일 삼국의 관계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국 고대사를 뿌리채 잡아먹고 있으며, 일본은 언제라도 조선을 잡아먹고 춤을 추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한민족사 왜곡, 말살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중국과 아시아의 패권을 다투고 나서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이러한 불의가 계속되는 한 동북아 삼국은 결코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천자국의 종주권입니다. 그들의 이면에는 항상 뿌리 역사를 먹어 치우고 자기들이 천자국으로 자리 잡으려는 야망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요하문명이니, 홍산문명을 말하면서 자기네 역사를 만년으로 끌어 올리려고 하지만, 배달국과 고조선 시대의 우리의 역사를 저희들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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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잘 아시다시피 단군왕검이 건국하였습니다.
성장했습니다. 고조선은 선민사상이 널리 퍼져있었고 농경사회였으면
제정일치의 사회였습니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 나라을 세우고 아사달을 도읍으로 국호는 조선이라고
하는데 다만 나중에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건국한 또 다른 조선이란
나라와 헷갈리지 않게 조선선이라 이름에 고를 붙여 고조선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농경사회는 말그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고 제정일치는 제사와 정치가
결합된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고조선에 대에 간단하게 설명해드릴께요.
고조선의 성장 (1) 영토 확장 : 고조선의 세력은 기원전 10세기 경에 요동 지방을 국가의 중심으로
하였으며 요하를 경계선으로 할 만큼 강성했다. 2) 연과의 대립 :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중국의 연 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강성하였으나
연의 침입으로 서쪽 2천리 땅을 상실하였으며 중심지를 한반도
북서쪽 지방(지금의 평양 지방)으로 옮겼다. (3) 고조선의 변천 (위만 조선의 성립)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하자 위만은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와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갔다. 마침내 고조선의 왕권이 약한
틈을 타서 수도인 왕검성으로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위만
왕조로바꿔 버렸다. 고조선은 한과 진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통한 경제력과 군사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나라와 강경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한의 침략으로 기원전 108년 멸망하였다.
(1) 사유 재산 제도가 발달한 계급 사회로서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2) 고조선에는 왕 밑으로 상, 대부, 장군 등의 여러 관직이 있었으며 왕권의 부자 세습이
이 루어졌다.
3. 8조 금법 (1) 의의 : 고조선에서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만든 8가지의 법으로서 우리 민족
고유이자 최초의 법이었다. (2) 내용 : 8가지 중 중국의 한서지리지에 기록이 남아 있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3가지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② 다른 사람의 신체에 상해를 입히면 곡물로서 배상한다. ③ 도둑질한 자는 주인의 노예가 되거나 50만전을 배상한다. ④ 그밖에 추측으로 부녀자의 부정함에 대해 나와 있다. (3) 이 8가지의 법을 통해 고조선 사회는 생명을 존중하고, 사유 재산을 인정하였으며,
화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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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신화인가 역사인가
당시 요동은 현재의 요동과 다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삼국지>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즉 고조선과 진나라의 국경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동강 중심설로는 해석할 수 없는 기록이다. 그래서 만주의 요동이 고조선의 중심지라는 ‘요동 중심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채호ㆍ정인보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이후 윤내현ㆍ이덕일 학자 등이 취하는 학설이다. 요동 중심설은 고조선의 서쪽 국경선인 패수를 현재의 대릉하로 보는 시각(다수설)과 그보다 훨씬 서쪽인 난하로 보는 견해로 나뉘며 고조선의 남쪽 경계에 대해서도 청천강으로 보는 견해와 예성강으로 보는 견해, 남한의 끝까지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령지역이었으나 후기에는 중국 세력의 확장에 따라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논리다. 중심지 이동설의 가장 큰 쟁점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이 현재의 평양인가 하는 것과 관련 대동강으로 이동했다는 견해와 만주의 평양 지역이라는 견해로 나뉜다. 요동 중심설과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와 중국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끝나는 옛 요동 갈석산을 경계로 한 만주 전역의 광범위한 영토로 해석한다. 한사군은 어디에 위치했나 한(漢)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물리친 후 그곳에 4개 군(郡)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한사군’이다. 한사군의 설치 여부와 위치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영토에 대한 야욕을 지닌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 정확한 고증이 요구된다. 한사군의 위치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는데 앞서 이병도ㆍ이기백으로 이어지는 주류 사학계의 ‘대동강 중심설’에 따르면 한사군은 ‘낙랑=대동강 유역, 진번=자비령 이남~한강 이북, 임둔=함남, 현도=압록강 유역 동가강’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할 경우 사료와 모순된다. <사기>에 한나라가 조선을 공격하는 과정에 ‘그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 지역에서 발해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며’라는 구절이 있다. 제 지역은 오늘날 산동반도이며 발해는 산동반도 왼쪽에 있는 바다로 한의 수군이 대동강이나 청천강 쪽으로 항해를 했다면 ‘발해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게’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중국의 <수경주(水經注)>는 ‘패수’에 대해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있었다면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 대동강 중심설이 근거로 삼는 대동강 일대에서 발견된 낙랑 유물과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대동강의 낙랑 유물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전한(前漢, 기원전 206~서기 24) 때의 것이 아닌 후한(後漢, 서기 25~219) 때의 것으로 한사군의 낙랑은 만주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의 낙랑 유물은 후한이 멸망시킨 낙랑국의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한사군인 낙랑과 후한시대 대동강 유역의 낙랑국은 전혀 다른 세력이라는 설명이다. 기자조선은 실재했나 기자조선은 한국 고대사의 미스터리다. 기자조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조선사를 포함한 한국사의 체계가 달라진다. 기자(箕子)는 중국에서 은(殷, 또는 商)나라와 주(周)나라 교체기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인물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광복 이후의 사학계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국사 교과서도 기자조선이 빠진채 고조선(단군조선)과 위만조선만 언급돼 있다. ‘기자부정론’은 한반도에 기자와 관련된 은나라 유물(갑골문 등)이 발견되지 않았고 기자가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로 한반도의 청동기 시기(기원전 800~1000년)와도 모순된다고 한다.. 반면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소장은 사료에 대한 고증 부족을 지적하면서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북부 대동강 유역으로 한정하고 기자조선이 고조선을 대체한 국가로 잘못 이해한 데?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 소장에 따르면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인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산동반도의 갈석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기자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식으로는 제후국)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황하유역 유물이나 갑골문자 등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해 온 후 고조선은 도읍을 장당경(藏唐京)과 아사달로 두 번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기자국이 고조선의 서부에 자리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존재하면서 도읍을 옮긴 것이라는 분석이다. 윤 소장은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한 부분으로 한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기자가 무왕에게 조선의 제후로 봉합을 받았다 할지라도 무왕의 신하가 아니었다는 <사기>의 기록은 조선은 무왕의 지배 아래 있는 나라가 아니었고 기자 역시 광대한 조선의 일부 지역의 제후에 불과했다”면서 “기자조선을 역사의 실재로 인정하지 않으면 단군조선도 부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군, 신화인가 역사인가 단군조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한국사 전체의 틀을 결정하는 요체다. 단군조선을 ‘역사’로 보면 한국사를 2000년 이상 끌어올릴 수 있지만, ‘신화’로 해석하면 기자조선(기원전 1100년), 또는 위만조선(기원전 206년) 이후가 한국사의 출발점이 된다. 국내에서 단군조선은 아직 신화에 머물러 있다. 일제하 이마니시류(今西龍)와 그의 제자인 이병도 박사 등에 의해 단군조선이 날조된 신화로 규정된 이래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단군신화를 ‘실재’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단군신화는 구석기ㆍ신석기ㆍ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고조선이 건국되기까지 우리 민족이 성장하면서 체험했던 역사적 사실을 압축적으로 전하는 우리의 상고사(上古史)라는 것이다. 중국 산둥성 가상현에 전한(前漢, 기원전 202~서기22) 때 만들어진 무씨사당의 석실 그림 내용이 단군신화와 흡사한 것이나 고구려 각저총(角抵塚) 고분의 씨름하는 벽화에 곰과 범이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인들이 단군신화의 내용을 알고있었음을 뜻한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뿐 아니라 기원전 7세기 경의 <관자(管子)>, 기원전 6~1세기를 포괄하는 <산해경(山海經)> 등의 문헌에도 고조선이 등장한다. <구당서(舊唐書)>‘고구려조’에는 가한신(可汗神) 즉, 단군을 섬긴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단군조선이 동시대의 주변국에 널리 인식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중국의 위략(魏略, 280~289년에 편찬)에 고조선의 첫 도읍지인 아사달(阿斯達)이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족이나 한족(韓族)과 관련 있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과 <삼국지(三國志)>‘동이전’에 예족(濊族)은 호랑이를 섬기고 고구려족은 큰 굴을 섬긴다고 한 기록은 단군신화의 줄거리와 매우 비슷해 한족, 고구려족, 예족이 우리 민족을 형성한 중심세력이었음을 시사한다. 국내 학계에서는 최근 중국 만주지역(동북3성)인 요녕성의 홍산(紅山)문화에서 가까운 ‘하가점(夏家店)’의 청동기 유물을 주목한다. 그곳에선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대량 출토됐다. 지난 2001년 진주 남강댐 수몰지구와 강원도, 전남 등지의 청동기 유물을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500년 안팎으로 나타났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연대가 기원전 1878~1521년 사이인 것으로 나왔다 고조선의 발상지가 한반도보다 앞선 요동ㆍ요서 지역이라는 학설에 의하면 하가점 청동기 유물과 비교해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한 고조선은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될 수 있다. 더욱이 고조선의 유물인 청동검, 고인돌, 미송리형 토기 등의 연대가 기원전 2000년을 넘나드는 것도 단군조선의 실재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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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 기억속의 창고 원문보기 글쓴이: 아이홀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