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것은/ 류중영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의 불꽃잔치이다.
작은 들꽃들의 인고(忍苦)
긴긴 겨울 눈보라 속
알몸으로 맞서 이긴 엄동
봄 햇살 받아 피는 꽃들
생명은 자신의 육체뿐 아니라
혼을 태우는 불꽃잔치
살아있다는 것은
신께 자신을 온전히 소지사룸이다.
찬연히 빛을 발하다
소리는커녕 형체도 없이 지는
저 생명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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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박판석
나는 왜 그 역을 떠나지 못했을까?
첫눈 내린 그날을 잊지 못하는가?
현대극장 앞 고요히 내리던
소년의 눈(雪)은 역마차와 함께 떠나고
간이역에서 떠난 그를 기다리며
잦은 기침으로 눈 내리는 겨울 하늘
바람 부는 산 아래 흐르는 먼 불빛처럼
눈을 기다리기엔 희미한 거리만 홀로 걸어온다
첫눈은 오래 전 내려 떠나고
그 자리엔 흥건한 추억만 질척거려
첫눈을 기다리다 죽은 새들뿐
이제 나는 그에게서
첫눈을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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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식지/ 위증
모든 사람들과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하루종일 그들이 나를 지나치고
내가 그들을 지나쳤다
내 서식지의 인종들과 나는
서로 완벽하게 무관하다
눈웃음치며 손을 흔들며 무관하고
마주앉아 무관하고 잔을 나누며 무관하다
이 벌판의 초식동물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버림받는다
버림받은 나와 버려진 그들과는 서로 무관하다
버려진 나와 버림받은 그들과의 경계는 엄연하지만
초원은 오늘도 온종일 평온하다
죽기살기로 맞서지만 그들은 쟤네들끼리 낄낄대면서
그들의 경계를 떼어 매고 세렝게티의 강으로 간다
그 강 우글대는 악어들이 보고 싶다
한번쯤 쫓기는 먹이가 될 수 있다면…
사자를 따돌린 임팔라가 될 수 있다면
그 생사의 경계가 진정 얼마나 황홀할까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건진 그 모습이
진정 얼마나 생광스러울까
가던 길 돌아서면 오던 길이고
오던 길 되짚어 돌아서니 길이 저문다
갈래 길들이 어둠 속에 잠기고
길이 길을 내면서 길을 잃는다
귀 기울인다
백 리 밖에서도
살붙이들의 속삭임에 응답하는 고래들처럼
누군가 내게 보내올 음파에 귀 기울인다
천둥소리에도 가려지지 않을 그 주파수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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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생각/ 윤수자
내 나이 스물다섯
“가난은 죄는 아니지만 견디기 힘들다”고 쓴
젊은이가 있었다
가난에 대한 동정이 자랐고 우린
베개동무가 되었다
30년이 지난 어느 날 무등산 한 식당에서
그 젊은이와 나물밥을 먹으며 공연히 목이 메었다
“가난은 죄는 아닌데 참 견디기 힘들더라”고
이번엔 내가 말했다
그도 나도
이마에 주름살이 윤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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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을 오르며/ 윤하연
발이 먼저 오를 때는
산이 보이지 않더니
마음이 먼저 오르니
산이 보인다
한 계단씩 오르며
내려 놓아보는 마음
붉은 시간이
낙엽처럼 떨어진다
천 년을 쌓아서
부부가 되었다는 전설
강물이 휘도록
좁힐 수 없는 지척이다
바람만 스쳐도
들키고 마는 속내
시리게 휘청인다
나 석장승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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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진헌성
플라톤은
모두가 하늘서 살아라 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생각는다
사람도 그러려니와
틀림없이 하느님조차도 하늘서 안 살고
흙 속에서 살 것이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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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 · 3/ 이보영
먼 곳의 기별인 듯 눈발이 날린다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고개 숙인 꽃 한 송이
겨울을 건너온 바람이
깊은 밤을 덮고 있다
뒤도 한 번 보지 않던 어제의 일상들은
버리고 다 버리고 편안하게 누운 고요
살아서 넉넉했던 미소가
조등처럼 깜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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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 조민희
솔 솔 눈 내립니다 하관(下棺)하며 뿌린 꽃잎
눈 녹듯 지워가는 이름을 부릅니다
어두운 골목 어귀를 훑고 가는 캐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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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컵/ 김미라
방바닥에 쏟으면
“또 사고 쳤네.”
화분에 부으면
“어머, 착해라.”
다르지 않아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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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 토기/ 양인숙
옛날옛날 신석기 시대
처음 농사를 짓게 되고
식솔 먹일 식량을 보관하고
내년에 심어야 할 씨앗을
담아두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소중한 저금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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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정밭/ 이성자
할머니가 다리 수술하러
서울로 떠난 지
어느새 2년이 흘렀어
빈 밭이 되어버린 곳에
개망초가 놀러오고
들쥐가 들어와 새끼 낳고
한 번도 제 땅 가져보지 못한 것들
마냥 좋아서 기 펴고 살아
빈 밭은 날마다 그것들 돌보며
두근두근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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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된다면/ 조화련
내가 꽃이 된다면
길섶이나 돌 틈새에 피어나는
쬐만한 꽃이고 싶다.
크고 잘생긴 꽃이 아닌
히야~~
요것 봐라!
길손님이 쭈그려 앉아
신기한 듯 들여다봐 주는
작은 꽃.
꼬마개미, 무당벌레가 앉아도
썩 잘 어울리는-
실바람도 살랑살랑 놀다가 가는
그런
앙증맞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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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헌성 시인의 <모순> 끝행의 끝, "살 것이다라."는
'살 것이다'일까, '살 것이다라고'일까,
잘 모르겠기에 원문대로 옮겨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