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이 그대를 찾거든 이 나뭇잎을 음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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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으니 어제와 오늘 연이틀을 집 주변에 나무를 심는다. 작년 이맘때 텃밭에 용솔과 노각나무 묘목을 심은 내리에 사는 인부 두 사람이 왔다. 나는 서둘러 아침 일거리를 끝내고 시내에 나가 빵과 우유, 막걸리를 사들고 온다. 일꾼들의 새참이다. 청류재 식물원의 김유신 선생이 십년생 벚꽃나무 십여 그루와 느티나무 세 그루, 백송 두 그루를 보내주셨다. 거기에 실팍한 능소화 뿌리를 다섯 주나 얹어왔다. 여름 한철과 이른 가을까지 줄기에 다닥다닥 매달리는 능소화의 주황색 꽃들은 악덕과 어리석음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망치는가를 말해 줄 것이다. 나무심기에 이력이 난 인부 두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청류재 식물원에 가식을 했던 나무들을 파내 용달차에 싣고 왔다. 용달차 주인이 인사를 하는데 얼굴을 보니 삼죽면에서 지난 여름 밭일을 나왔던 할머니 아들이다. 집을 가운데 두고 뜰의 가장자리에 적당한 간격을 두어 구덩이를 파고 느티나무와 벚꽃나무를 심었다. 두 사람 다 몸집이 크지 않은데 무거운 나무를 다루는 근력이며 삽질하는 게 여간 능란하지 않다. 일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는데 솜씨들이 능숙하니 서두르지 않는데도 일은 빠르게 진척되고 맵시 있어 보였다. 그 중 한 사람은 귀가 어두웠다. 소리지르듯이 말을 해야 겨우 알아듣는다. 나무를 심고 난 뒤 해뜨기 전이나 후에 나무 심은 자리에 호스를 박고 물을 주라고 한다. 흙 위로 물이 올라올 정도로 듬뿍 줘야 한다고 한다. 청류재 식물원 김선생은 그걸 죽을 쑨다고 말했다. 나무 주변의 흙이 죽처럼 물컹물컹 해질 때까지 처음에 주는 물은 듬뿍 주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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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성 장날이다. 일요일이 겹쳐 장터는 꽤 붐비겠다. 장의 한 모퉁이에 묘목시장이 선다. 나는 일죽에서 왔다는 할머니에게 검은콩과 현미 쌀을 산다. 진작 잡곡이 떨어졌는데 엘지마트에서 파는 포장된 잡곡은 미덥지 못했던 것이다. 묘목 장이 서는 곳으로 가 붉은 꽃몽오리를 매단 동백꽃 한 그루, 구상나무, 홍매화, 그리고 모과나무와 벚꽃나무 묘목을 샀다. 천안에서 왔다는 묘목을 파는 아주머니는 이런저런 과수 묘목을 권한다. 작년에 심은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들이 잘 자라고 있으니 과수 묘목은 더 심을 생각이 없었다. 안성 장에서 묘목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청류재 식물원을 들렀다. 어제 일한 인부 두 사람 품삯을 김선생에게 전해주고, 나무에 대한 답례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볼 일을 보고 모과차 대접까지 받고 나서는데 김선생은 기어코 미선나무, 할미꽃, 괴불주머니, 수선화, 부추 따위의 식물원에서 자라는 야생화 몇 뿌리를 캐내 내 손에 들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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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늦게 올해 처음으로 반딧불이를 보았다. 멀리서 푸른빛이 도는 인광을 반짝이며 날던 반딧불이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어깨 너머로 날아갔다. 한참 동안 마당 끝에서 반딧불이의 행방을 쫓는다. 반딧불이의 몸통은 안보이고 인광만 어둠 속에서 점멸하며 날아간다. 방에 들어갔다가 12시쯤 다시 나왔는데 텃밭 끝 풀섶 위에 두개의 흰빛이 반짝거렸다. 반딧불이였다. 나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자욱하게 울려퍼지는 2003년 5월 31일 밤, 두 마리의 반딧불이를 보았다고 기쁜 마음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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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고, 또한 그 문제들의 가닥을 잡아 풀어보려고 골머리를 싸맨 채 하루 낮과 이틀 밤을 보낸 적이 있다. 여태껏 벼락이라도 내려꽂히듯 한 소식을 받은 바 없고, 더구나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의 행복을 거머쥔 사람도 아니다. 서울에서 칠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안성의 물가에 집을 짓고 소박한 삶을 꾸리기 위해 내려온 한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물가에 서서 물을 종일 지치도록 바라보거나, 때로는 손목시계를 풀어놓고 우는 푸른 뱀이나 베티고개 너머의 천주교 베티성지, 서운산 자락 아래의 음달말 소터골 엽돈재 개련이 등과 같은 마을 이름들을 하나씩 외우면서 같은 시각 차가운 국수를 먹기 위해 문을 막 나서는 누군가를 떠올려 보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날은 내가 불임의 메아리와 강의 백일몽과 아무도 따주지 않는 석류 따위를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귀농(歸農)이라고 했다. 낙향(落鄕)이라고 했다. 자발적 소외의 선택이라고 했다. 다 맞는 말이지만 또한 다 틀렸다. 나는 다만 조촐하게 살러 식솔들을 끌고 시골로 들어왔다.
벌써 네해가 지났다. 서른 해 남짓 살던 서울을 버리고 안성으로 내려올 때 내 몸의 진화는 끝났다. 나는 살기 위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생을 도모하기 위해,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 애썼으나,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짜로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늘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 불행하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살았던 게 그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 어쩌면 생을 도모한다고 말하면서 죽음을 도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반생을 협궤열차처럼 흘려 보냈는데, 어느 날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더니 마음은 헐어 누추하고 안쪽으로 몇 개의 궤양과 누공을 안고 있었다. 생은 대책 없이 가여웠고, 횡경막 아래에서 기쁨의 알들을 부화시키지 못하는 벙어리 종달새 몇 마리는 침울해 했다. 마음이 자주 몸을 비우니, 난파선 같은 몸만 반인륜적이고 뻔뻔스럽게 시끄러웠다. 몸을 나간 마음은 어딘가 고아원 복도 같은 차가운 공기가 웅성이는 곳을 떠돌며 쉬지 않고 딸국질을 해댔다. 구석에 기댄 채 녹아 내리는 제 영혼을 뚝뚝 떨구고 있는 검정 우산보다도 내 몸은 쾌활하지 못했다. 이때 딸국질은 의로움 위에 생을 세우지 못한 자의 뼈아픈 자책과 그 자책에 대한 꾸지람의 의전(儀典)이라 여겼다.
무릇 의로움이란 노동으로 생계를 세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며, 땅 위의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을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다. 나는 쓰고 남은 목재 위를 기어가는 민달팽이나 물 속의 띠우묵날도래 한 마리 이롭게 하지도 못하고 고작 투덜거리는 한 헐벗은 영혼을 섬기느라 속진(俗塵)을 뒤집어쓰며, 오욕의 문자(文字)로 내 삶의 페이지들을 채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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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 지은 집에 '수졸재(守拙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낮은 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의 집이란 뜻이다. 수졸재에 와서 비로소 묵은 양말을 벗고 발을 씻어보는 것인데, 그러고 나니 내 잠은 희고 깨끗했다. 잠이 얼마나 희고 고요했던지 잠결에도 마음은 자꾸만 더워지고, 나는 설탕에 재여 말린 생강조각 두어 개를 씹어보듯이 간밤의 꿈들을 단물이 날 때까지 씹어보다가 지난 해 고욤이 서리맞는 늦가을 무렵 산문집을 한 권 펴냈다. 『추억의 속도』라는 제목이 붙은 조촐한 책이다. 그 책의 한 면에 이렇게 썼다. "나는 욕구불만과 분노와 누추와 잔망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적빈의 날들과 깊은 잠과 고요, 그리고 평화를 얻었다. 내게는 이곳이 '도원(桃源)'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무릉(武陵)'이다. 단 한번 밖에 갈 수 없는, 그리고 되물릴 수 없는 삶이 저기 있다." 내 심령은 이곳에 내려온 뒤 일급수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버들치보다 더 씩씩해졌다.
밤을 새운 후회는 때로 근력이 되기도 하니, 이 유벽한 곳의 먼 날들을 앞당겨 어린 나무들을 심는다. 첫해 봄엔 마당가에 석류나무 두 그루, 해당화 두 그루, 홍매화 한 그루, 왕보리수 한 그루, 벽오동나무 두 그루, 산목련 한 그루, 영산홍 몇 무더기, 제법 큰 이팝나무와 층층나무, 수수꽃다리 몇 그루...... 들을 심었다. 텃밭 오백여 평엔 적지 않은 용솔 묘목과 노각나무 묘목을 심었다. 봄 가뭄이 심해 어떤 것은 실패하고, 어떤 것은 창궐하는 풀의 기승 속에서도 숨을 붙이고 살아남았다.
봄엔 연초록 새잎들을 돋는 걸 보며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의 기적 앞에서 건방진 마음조차 옷깃을 여미게 된다. 여름밤엔 반딧불이가 방충망에 붙어 연초록 불을 가냘프게 깜빡이는 걸 오래 들여다보기도 한다. 비오는 날 밤엔 여러 마리의 청개구리가 셀파의 도움 없이 무산소 등정에 나서는 산악인처럼 가파른 유리창을 묵묵히 기어오른다. 이 무위(無爲)의 행위는 어리석지만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장엄한 바가 있다. 폭설이 내려 집 주변을 둘러싼 산의 연봉들이 흰 설의(雪衣)를 입고, 호수의 물마저 꽝꽝 얼어붙은 겨울에는 노루가 먹이를 찾아 집 근처까지 내려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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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몇 해 거른 묵정 밭엔 제 키보다 더 높게 풀들이 자랐다. 풀들은 땅의 풍부한 자양분을 얼마나 많이 끌어다 썼는지 줄기가 어른 손목 정도가 될 정도로 굵다. 낫으로도 잘 베어지지 않아 가만 놔두었더니 숲을 이루었다. 이곳을 산책할 때면 바로 옆에서 꿩 두 마리가 푸드득 하고 날아갔다. 집 아래쪽엔 너구리가 산다. 밤에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이 놈과 마주칠 때도 있다. 밤나무 숲 속을 산책할 땐 청설모 식구들과는 자주 만난다. 구면인데도 이 놈들은 낯을 가린다. 밤나무 꼭대기의 우듬지에 몸을 붙이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가을엔 도라지 밭에 사는 살모사가 이웃집 마실 오듯이 마당으로 내려와 놀다가기도 했다.
시골에 와서 살며 가장 좋은 일은 흙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다. 나는 흙이 좋다. 흙을 밟는 것도 좋고, 밤나무 숲에 들어가 응달진 곳의 흙을 한 웅큼 손에 쥐고 냄새를 맡아보는 것도 좋다. 가랑잎들과 한해살이풀들의 잔뿌리, 미생물들이 한데 뒤섞여 만든 부엽토다. 이 흙의 감촉은 부드럽고, 냄새는 향그럽다. 흙에서 멀어지는 것은 곧 자연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병을 불러오고, 환자를 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골프 스윙이나 복습하는 구질구질한 의사 얼굴을 보는 일이 잦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흙과 가까이 살아보면 안다. 무릇 땅 위에 생명을 도모하는 것들은 저마다의 리듬을 갖고 그에 따라 움직인다. 더 빨리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자연의 리듬에 위배되는 속도를 강요하면 필경 탈이 생긴다. 광우병 소동을 보라. 조급하고 탐욕스런 유럽의 축산업자들이 초식동물인 소들에게 농축된 동물성 가공 사료를 퍼 먹였다. 그 결과 광우병이 생겼고, 죄 없는 소들 수십 만 마리가 애꿎게 도살되는 끔찍한 재앙이 덮쳤다. 할 수 있다면 못된 축산업자 두어 명을 무작위로 뽑아 비장이라도 떼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연의 리듬조차 거스르며 제 잇속을 키우려는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 뻗어갈 것인가, 암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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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로비(Slobbie)임을 기꺼워한다. 나는 속도에 저항하며, 느림의 삶을 살고 싶다. 복숭아나무 종족의 방언들이나 번역하거나, 나무의 빈 가지나 처마에 쇠기름을 매달아놓고 쇠기름을 쪼아 먹기 위해 날아드는 곤줄박이를 바라보며 빈둥거리고 싶은 것이다. 남들 눈에 빈둥거리는 것으로 비치는 그 시간이 내겐 성숙과 우화(羽化)의 시간이라고 굳이 주장하지는 않겠다. "나는 빈둥거리는 게 아니고 성숙중이라고요."라고 말한들 시간을 돈이라고 떠들며 전자계산기를 두드려대는 그들이 알아듣겠는가 ! 나는 천천히 걷고, 천천히 밥 먹고, 천천히 숨을 쉬며 인생을 피안으로 고요히 옮겨가는 명상을 한다. 나는 한유한 시간을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나, 물속에 모래나 나무 껍질로 집을 짓고 사는 강도래와 날도래의 한살이를 관찰하는데 온전히 쓰고 싶다. 자연과 삶의 즐거움을 향유하며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 사람살이의 으뜸이 되는 의무다. 나는 청빈의 미덕, 느림의 미덕, 간소함의 미덕을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그럼프스'(grumps)는 내가 일구어야 할 삶의 새로운 트렌드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럼프스는 "녹색의, 책임감 있는, 욕망을 줄이고, 절제하는 그리고 청빈을 추구하는"(green, responsible, unassuming, moderate & poverty seeking) 영어 단어들의 첫 자를 따 만든 새로운 개념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