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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The first is this: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르코 12,28ㄱㄷ-34 )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Lord alone!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으며,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도 주님의 부활이었다고 외친다. 티모테오는 부활의 증인으로 초대를 받았다(제1독서). 그리스도인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 주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은 이념, 사상, 환상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현재에 계시고, 인간의 현실적 조건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 주시며,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시키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온갖 어려움을 들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아끼고 배려해야 합니다.
사랑은 고정된 틀이 아닙니다. 사랑은 역동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사랑은 거저 베푸는 것이며, 되받지 않아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모든 것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자유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행동이 사랑의 실천인지는 늘 아리송했습니다. 그 답을 제시했던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 선상에 두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면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수록 완벽하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다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에 매달리며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주장을 반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정성으로 율법을 지키듯 온몸으로 사랑하라는 당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계명은 이렇듯 위대합니다. 하지만 힘이 듭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부터 먼저 기억하며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일’의 순서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쉽다고 여겼다면 안이한 자세입니다. 그러기에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죽은 사람도 사랑 안에서 여전히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영원히 머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사랑이 전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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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조용상 신부-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왔다. 이 율법학자는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 사두가이들과 논쟁을 벌인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부활에 관해 사두가이들과 대립각을 세우던 바리사이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자기네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께 계명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곧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계명에 관해 자기네 바리사이들과 같은 견해를 가졌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결과는 율법학자에게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꼬리표를 하나 달아주셨다. 그것은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언뜻 칭찬처럼 들린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말속에 뼈가 있다. 예수님은 어떤 의중으로 이 말씀을 하신 걸까?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그렇다. 율법학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배운 것이 많아 슬기롭게 대답할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늘나라 근처에는 갔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신 말씀의 속뜻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요즘 교우들은 열심히 배우러 다닌다. 성경학교, 신앙강좌, 어려운 신학 세미나까지…. 참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처럼, 많이 배우고 알아서 하늘나라 근처에는 갔지만 배워 안 것을 실행하지 못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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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왜 좀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아주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릇된 하느님 상에 대한 재정립’입니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신앙생활이 부담스럽습니다. 성사 생활도 짐입니다. 매사가 자유롭지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왜곡된 하느님 상을 지니고 있어 ‘쌩고생’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절대로 ‘쫀쫀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칼같이 심판만 하시는 분도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위협하시는 진노의 하느님도 결코 아니십니다.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 애매모호한 분도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와는 너무나 큰 간극 건너편에 계시는 ‘멀고먼 당신’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자상한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따뜻한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그분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우리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나 같은 것이 감히 어떻게’ 하는 사람에게도 기쁘게 다가가셔서 손을 내미시는 겸손의 주님이십니다.
한분으로는 부족해서 세곱배기로 사랑하시는 삼위일체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다 포용하시는 바다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은 다 수렴하시는 하늘같은 분이십니다.
결국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에게서 사랑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들, 하느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자주 묵상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그 사람보다 백배, 천배 더 호감이 가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참 훌륭하다’ ‘참 좋은 분이다’ ‘성인군자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며 칭송하는 그 사람보다 천배, 만배 더 훌륭한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사랑스런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리라 믿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사람도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하느님은 얼마나 더 사랑스러운 분이실까?’
‘이토록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챙기는데, 하느님 사랑의 크기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풍진 세상으로 보내셨을까요?
답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임지를 바꿀 때 마다 들었던 생각입니다.
“왜 좀 더 아이들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 떠날 순간에도 마찬가지 후회를 할 것입니다.
“왜 좀 더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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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일이 비난 받을 때
-김찬선신부-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 좋은 일이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즉시 관심이 그 비난에 꽂히고
이어서 비난하는 사람에게로 시선이 박힙니다.
억울한 마음이 가득 차게 되고
심지어 비난하는 사람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이 마음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커져 더 이상 내 안에서 해소할 수 없으면
그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던지 설전을 벌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거기에 힘을 다 소비하고 맥이 빠져
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고
사랑과 열정 가득하던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티모테오 2서는
말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할 뿐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그러지 말라고 얘기한 다음,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서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데 오로지 힘쓰라고 합니다.
다른 데 힘을 쓰거나 뺏길 여유가 없다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면 그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을 쓴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또는
이웃을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표시이기에
그때 우리의 일은 목적이 잘못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비난받을 때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
우선 경청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 신경을 쓰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의 말이 진정 일리가 있는 비난인지
그가 왜 비난하는지
그 진정성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경청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미움은 없고
사랑은 잃지 않습니다.
다음은 반영입니다.
비난이 옳으면 그 내용을 반영하여 우리의 일을 수정보완하고
비난이 옳고 그름과 상관없는 다른 데 이유가 있다면-
예컨대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그 이유에 맞게 대처를 하고
비난이 옳지도 않고
그 이유도 시기심, 경쟁심, 미움 때문이라면
휘말릴 필요없이 무관심해 버립니다.
그런 비난에 마음 쓰고 휘말리는 것은
똥 구덩이에 발을 담그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All-in(올인), 전념입니다.
다른 데 생각을 쓸 이유도 겨를도 없고
다른 데 힘을 낭비할 이유도 겨를도 없습니다.
다만 일의 목적을 늘 순수하게 견지하면서
성실하신 하느님과 함께 성실하게 그 일을 하고
그 일에 온 힘을 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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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며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
-경규봉 신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로는 오래지 않아 교회가 박해 받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박해의 광풍에 휩싸일 교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마음으로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바울로 자신도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과 복음을 위하여 감옥에 갇혀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 박해를 극복하도록 격려한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 것이며,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받을 것이므로 믿음으로 박해를 이겨나가도록 격려한다. 특히 이단자들과 쓸데없이 논쟁하지 말고,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고 격려한다.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고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손에 붙잡혀 수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을 때에는 모든 것이 허무로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졌고, 유대인들이 무서워 겁에 질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화, 용기와 열정을 갖고 살도록 해주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비록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히더라도 이를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다(사도 5,41). 예수님 체험과 성령의 강림은 제자들을 온전히 변화시켜 주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비로소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관문임을 깨달았다. 예수님의 부활과 영광은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과감히 선포하며,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언한다.
사도 바울로는 디모테오에게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 주님과 함께 살 것이며, 주님을 통해 영원한 영광과 구원을 받을 것임을 굳게 믿고 살도록 권고한다. 박해가 닥칠지라도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이 되셨음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박해는 쉽게 이겨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거짓된 주장을 하고 시비를 걸어올지라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면 그들과 쓸데없는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믿음이 있다면 어떠한 이설이나 유혹도 이겨낼 수 있다. 바울로는 오직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을 통한 구원을 바라면서 그 모든 것을 이겨내도록 권고한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약함을 꾸짖으셨고(마태 6,25이하), 거센 풍랑을 보고 죽게 되었다고 매달리는 제자들에게(마태 8,23이하), 물위를 걷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베드로에게(마태 14,31),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마태 17,20)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셨다. 그리고 하인의 병을 고치려는 백인대장(마태 8,10), 중풍병자(마태 9,2) 하혈병에 걸린 여인(마태 9,22), 시리아페니키아의 여인(마태 15,28)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들의 믿음대로 그들의 청을 들어주셨다.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길이며, 믿음을 통하여 사람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믿음은 하느님 은총의 전달 수단이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며, 기적을 일으키는 통로이다. 따라서 바위처럼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마귀의 그 어떤 유혹도 물리칠 수 있으며, 어떠한 반대나 박해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므로 굳은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 /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믿음으로 구원과 영광을 받으며, / 믿음으로 모든 반대와 박해를 이겨내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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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미소 짓는 얼굴
-김동환 신부-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실지 아침에 생각하셨습니까?
오늘은 여러분 중에는 약간 바쁜신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매우 한가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하루가 바쁘든 한가하든지 간에 좋은 일들로 가득 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런 때에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 다가와서 오늘 하루 동안 행운을 안겨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여러분은 오늘 하루가 좋겠습니까?
한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자, 다들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럼 조금 색다른 생각을 해 보도록 합시다.
오늘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 중에 그 사람들은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좋아할까?.....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내가 그 사람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나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상상 아닙니까?
오늘 내가 그 사람에게 행운의 여신이 되어서 그를 위해서 행운을 불어준다고 상상해 보세요.
즐겁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상상을 자주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빠서 못하신다고요... 어쩌다가 한번이라고요... 전에 한번 해본 적은 있지만 부끄러워서 실천한 적은 없다고요...그럼 지금 당장 해보세요.... 그리고 생각하신대로 옮겨 보세요.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용기를 내어서 꼭 해보세요.... 그리고 이런 상상을 자주하시고 그대로 잘 옮기시는 분들에게 하나 더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나면 미소를 지을까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나이가 아주 많으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일들은 어떤 일들이 있을지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부담 갖지 말고 한번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해 보세요.... 머리 속에 무엇이 떠오릅니까?
그리고 그것을 했다치고 한번 하느님의 미소 짓는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또 환하게 웃으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상상 아닙니까?
매일 아침 이렇게 세가지 상상을 하고 나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고 한번 그대로 해보세요. 아마 그날은 정말 멋진 일들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 일을 알아채시고 그대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런 상상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 방법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루 기쁘고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방금 경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글쎄 파리 한 마리가 제 주위를 왔다 갔다 합니다.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제 풀에 지치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무시하면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윙~~’이라는 소리를 내면서 저에게 접근하는 그 파리를 무시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잠시 기도를 접고서, 파리를 잡으려고 사무실에서 파리채를 가져와 파리 사냥에 나섰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막상 파리채까지 가져와서 본격적으로 파리를 잡으려고 하니까 파리가 눈치를 챘는지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자리를 잡고 몸을 추슬러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시 파리가 제 주변에서 ‘윙’ 소리를 내면서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파리채를 바로 옆에 두고서 기도를 했습니다. 파리가 나타나자마자 파리채를 휘두를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기도가 제대로 되었을까요? 입으로는 기도서를 외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파리 이 놈 오기만 해봐라.’하면서 딴 맘을 먹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겪고 있는 유혹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은 주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이 세상의 한 구성원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셨기에 분명히 좋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파리처럼 아주 작은 악이 들어옵니다.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 세상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변해주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었는지요? 앞선 저의 모습처럼,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작은 유혹 하나 이기지 못해서 머릿속을 온갖 미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613개의 유대교 율법 조항들을 단 하나로, 즉 ‘사랑’ 하나로 정리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생각 따로, 행동 따로의 모습을 통해서 제대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작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사랑은 입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
-이봉하수사-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기본 정신은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절대자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냉담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그들은 각자 여러 가지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들자면 하느님과 싸워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 동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든지,
아니면 하느님보다 성직자 수도자를 너무 사랑하고 따르다가 어느 순간
그들 안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여 실망하고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존재 여부까지 파고 드는 상황에 이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믿음의 주인을 죽는 순간까지 믿고 따르며
사랑하겠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요 남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사랑할 때도 단순히
며칠 몇 달만 하는 것도 아니요, 편하고 기쁠 때만 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렵거나 병들었을 때나 한결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성녀들이 100퍼센트 예수님만 믿고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박경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계명을 교회는 ‘사랑의 계명’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되 마음·목숨·정신·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사랑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바로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하느님께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지요. 기도로써 만나고 감사드리고 믿고 의지하며, 지상의 삶을 끝내고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그 날을 희망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기술’을 우리는 1코린 13장에서 찾을 수 있지요.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으며 바라고 견디어 냅니다. 나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이 내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분신이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너 자신을 사랑해 주어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모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나 자신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며 오늘도 깊이 반성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남긴 언행은 너무도 파격적이고도 의미심장한 것이어서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희자되고 있습니다.
한 농부와의 대화입니다.
“옳은 말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를지도 몰라. 그럴 때 어떻게 하겠어?
그땐 말이지, 칼을 빼서 자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그 사람에게 공손하게 돌려줘.
그리고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라고. 거기까지 가야 돼.”
이러한 그분의 생각은 당신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철저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시골 아낙네가 장일순 선생님을 찾아와 딸 혼수 비용으로 모아둔 돈을 기차 안에서 몽땅 소매치기 당했다며, 그 돈을 찾아달라고 선생님께 매달렸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주머니를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가셨습니다. 원주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놓고 앉아 노점상들과 애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기를 사나흘 하자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들을 죄다 알 수 있었고, 마침내는 그 시골 아주머니 돈을 훔친 작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를 달래서 남아 있는 돈을 받아냈습니다. 거기다 자기 돈을 합쳐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줬습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뒤로도 선생님은 가끔 원주역에 나가셨는데, 그것은 그 소매치기에게 밥과 술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소매치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네. 이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 잔 받으시고, 용서하시라고.”
앞으로 소매치기 같은 것 하지 말라든가 나무라는 말 같은 것은 일절 하시지 않았습니다.(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출판사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덧붙여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랑의 실천 대상인 ‘이웃’이 누구인지 당신의 한 평생 삶을 통해서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가까운 사람들, 절친한 친구들, 괜찮은 동료들 나와 ‘죽이 잘 맞는’ 사람들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웃’은 차원을 달리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이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족들, 열두 제자들뿐만 아니라 압제자 로마인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방인들, 세리와 죄인들, 생활이 문란한 여인들뿐만 아니라 막가는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던 바리사이들...모두가 다 이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 사랑은 늘 멀고도 요원한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그리스도인으 사랑입니다. 한계가 없습니다. 너무나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힘겹게 느껴집니다. 때로 하느님은 너무도 요구가 많은 분이시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한계나 장벽을 두지 않는 너무나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사랑, 힘들기에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 다시 한 번 마음 크게 잡수시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힘겹고도 먼 사랑의 길을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2티모 2,8-15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복 음 : 마르 12,28ㄱㄷ-34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아는 말씀이지요.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이웃 사랑이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그 모습으로 비로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서 있지 않으면 이웃 사랑은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모든 것에 앞서서 그를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요. 다들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기를 원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내고, 그 어떤 귀한 것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안달이 나며,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어서 마냥 행복한 것이 사랑이지요. 그런데 사랑이 시들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만나자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또 무엇을 사달라고 하면 ?나중에?하고 미루게 되지요. 상대방의 요구가 두 번째, 세 번째로 밀려나고 관심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사랑을 실천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 번째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요.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자로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삶의 첫 번째 자리에는 자식이, 남편이, 또 재물과 건강이 먼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 자리에 하느님을 놓지요.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것저것을 먼저 챙기고 서너 번째 차례에 슬그머니 끼워 넣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내 방식대로, 내 편리에 의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모든 것에 앞서서 생각하고 섬기고 함께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삶이 놀라운 것이지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가정도 자식도,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드린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지요. 주는 것 없이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참 사랑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나눔?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셨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몸과 피까지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을 받아 모시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지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가난한 이웃에 대한 나눔의 실천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귀한 것을 나누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지요. 사랑의 첫 번째 표현은 나눔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좋게 보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나쁜 것만을 보는 사람이 있지요. 사랑이 없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끝없이 감싸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찾아내서 분발시켜 주는 것이지요.
24세에 왕으로 즉위한 뒤에 동방 원정을 시작하여 유럽과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에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은 동, 서양에 활발한 문물 교류를 이루었으며 그 영향으로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이 되는 등 세계 문명의 조류를 바꾼 인물입니다. 대제국의 건설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을 때 대왕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를 불러서 전신이 나오는 초상화를 그릴 것을 명령했지요. 평소에 대왕을 존경했던 화가는 기쁜 마음으로 작업에 들어갔으나 곧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오른쪽 뺨에 깊이 패인 상처가 있었고 그것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왕의 훌륭한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화가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묘수를 생각해냈습니다. 대왕을 테이블에 앉게 한 다음 손으로 오른쪽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감싸주는 것입니다. 어떤 비판적인 시각으로 파헤치는 것이 아니지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잘못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단점마저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이렇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기보다는 비판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점차 사라지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친구라는 말이 주는 감동이 많이 사라졌지요. 친구를 위해서 정말 내 목숨까지도 내어놓겠다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부모나 형제, 친구 사이에서도 이득만을 보려고 할 뿐 아주 작은 희생도 전혀 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들이 다 무너지고 있지요. 사랑은, 또 좋은 관계는 귀한 것을 나누고 감싸주고 받아들일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지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하고 1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내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니던 회사의 어느 세미나에 참석하게 된 남자는 사랑은 실천하는 것이라는 강의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이제라도 사랑을 표현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를 했지요. 아내가 전화를 받자 남자는 너무나 쑥스러워 말을 쉽게 하지 못했습니다.
?나야.?
?어머, 이렇게 일찍 웬일이세요??
?저, 당신 말이야…?
?네!?
?저기 말이야.?
?뭔데요??
?…?
?또 늦는다는 말씀이시죠??
?아니, 그게 아니고…?
?아이고, 바쁘니까 빨리 좀 이야기하세요.?
아내의 재촉에 남자는 그만 내뱉듯이 얼른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해.?
?…!?
그 날 저녁 남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의 얼굴에는 13년 동안 보지 못했던 환한 웃음꽃이 활짝 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사랑은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면 달라지지요. 실천한다는 것은 나를 나누는 것입니다.
제대 앞 같은 자리에서 유아세례를 주고 첫영성체를 주며, 또 견진성사와 혼인성사, 장례미사를 봉헌하는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장례미사 때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지요. 삶을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나눔을 잘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나누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눌 때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삶을 무척 힘들게 살다 갑니다. 더더군다나 안타까운 것은 인색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인색을 떨고 욕심을 부리며 쌓아 놓은 재물을 그대로 고스란히 놔두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빈손으로 허망하게 떠나가지요.
내가 가진 것을 다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의 10%만 나누어도 부모자녀 간이나 형제지간, 이웃 사이의 무너진 관계가 회복이 될 것입니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원한다면 목표를 세워 놓고 나눔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 년 동안 쓸 수 있는 돈의 10%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또 이웃에 대해서 좋은 점보다는 좋지 않은 점이 더 빨리 눈에 들어온다면 내 시선을 바꾸도록 노력하십시오. 비난보다는 칭찬을, 지적보다는 감싸는 마음을 우선 갖추시기 바랍니다. 저는 초등학생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는 것과 더불어 친구를 칭찬하라는 보속을 제일 많이 내주고 있습니다. 칭찬은 듣는 사람보다도 하는 사람에게 더 큰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지요. 또 어린이 미사 때마다 퀴즈를 내서 상금으로 삼천 원씩 주는데 그 돈을 쓰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만 써야한다는 조건이지요.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돈을 썼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를 어린이들에게 체험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친구들을 위해 돈을 쓰고 돌아와 발표하는 어린이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나누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풍요로움을 번번이 확인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마디로 나누고 덮어주라는 것입니다.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지름길은 나누고, 감싸주고, 아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쉐마-법, 계명의 정수
-류해욱 신부-
오늘 복음에서 어느 율법학자가 와서 예수께 묻지요.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왜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서 그런 물음을 던졌을까요? 법, 계명 등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율법학자가 그런 물음을 던진 속내를 헤아려 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유대인들 안에 두 가지 경향을 볼 수 있어요. 하나는 법이나 계명을 세분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분화된 여러 율법이나 계명을 다시 가닥을 잡아 큰 줄기를 찾고 몇 가지 핵심으로 압축하는 경향이지요. 세분하는 일은 주로 율법학자들이 하고, 법의 본질을 담아서 압축하는 일은 주로 예언자나 유명한 랍비 등의 대가들이 했지요.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613 가지의 법으로 세분화했는가 하면, 그것을 다시 몇 가지로 모으는 시도가 구약 성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압축했던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다윗은 시편 15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을 11가지로 압축합니다. “야훼여, 당신 장막에 살 자 누구입니까? 첫째,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둘째,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셋째, 남을 모함하지 않는 자이며..... 등등이지요.
이사야 예언자는 누가 야훼의 법을 지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물으며 다시 6개로 압축합니다. (이사 33, 15) 첫째, 옳게 살고, 바르게 말하는 사람, 둘째, 착취로 돈을 벌지 않는 사람, 셋째, 뇌물을 마다고 뿌리치는 사람, 등등.
미가 예언자는 다시 3개로 압축합니다. (미가 6, 8) 첫째, 정의를 실천하는 일, 둘째,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셋째,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등등.
당시 이스라엘의 유명한 랍비들도 몇 개, 또는 하나로 압축하기도 했지요. 예수님 시대 당시에 많은 제자들이 따랐던 가장 유명한 랍비는 힐렐이라는 사람이었는데요. 힐렐파라는 학파가 생길 정도였지요. 그는 당시 법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네 이웃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법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다만 주석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과 비슷하지요. 또 다른 유명한 대가 중의 한 사람인 아키바라는 랍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모든 법의 원칙이다.”고 했지요. 아키바도 예수님과 같은 말을 하지요. 두 분 다 성서를 인용하신 것이지요.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라는 그런 물음을 던진 것은 예수님을 대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면서 가르침을 구한 것이 아닐까요? 다른 어떤 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께서는 다른 대가들처럼 법의 핵심을 구약성서를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예수님도 두 계명으로 압축하시네요.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실상 하나로 압축하신 것이지요. 첫째가는 계명으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신명기 6, 4-5이지요. 신명기에서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는 의미로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하지요. 히브리어로 쉐마라는 말이 ‘듣다’라는 동사의 명령형인데 바로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는 의미로 쓰는 용어가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쉐마,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씀하셨지요.
랍비 아키바도 인용했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 18입니다. 다만 레위기에서의 이웃의 의미는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예수께서는 이웃의 범위를 무제한으로 열어두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지요.
예수님이 하신 중요한 것은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에게서 이웃은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됩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주님, 바르게 하느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 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담화 †
-박상대 신부-
잘 알다시피 마르코복음 1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에 속한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의 대부분(1-9장)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그 마지막 시기에 베드로의 메시아고백을 받으셨고, 이어서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목에서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고(10장),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정화 사건(11,15-19)으로 예루살렘 활동기를 시작하셨다.
예루살렘 활동기는 사실상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외적인 업적보다는 적수(敵手)들과의 논쟁과 대담을 통한 자기계시적 가르침, 그리고 종말과 재난의 예언 등으로 일관된다. 논쟁과 대담은 주로 적수들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으로 이루어지는데 예수의 권한논쟁, 납세에 관한 대담, 부활논쟁 등은 이미 치러졌고, 오늘 복음은 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대담을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고,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오늘은 율법학자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서기관 또는 랍비(스승)라고 불리던 율법학자들은 바빌론 유배(B.C 587년) 이전에는 예언자와 사제들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삼대 지도계급에 속했다. 그러나 유배 이후(B.C 538년)에 들어 사제들은 권위를 잃었고, 기원전 500년경에 활동하던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와 말라기를 끝으로 더 이상 예언자들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메시아 사상이 강하게 싹트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은 모든 희망을 토라(율법)에 두었다. 이 때부터 율법학자들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더욱이 희랍의 통치(B.C 333년)와 로마제국의 통치(B.C 63년)가 이어지면서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힌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구심점을 잃게 되고, 흩어진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그 안에 회당(Synagogue)을 세워 안식일 예배를 드림으로써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지게 된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제사 없이 율법서와 예언서의 봉독과 해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사들이 사제들보다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물론 신약시대에 들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각종 제사는 거행되었다. 율법학자는 상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년간의 정규적인 연구과정을 거친 사람이면 40세의 나이를 채운 자에 한하여 서품을 통하여 누구나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 중에는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뿐 아니라 일반직업을 가진 평신도 출신도 있었고,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에 속한 자도 있었다. 특히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는 모두가 율사들이었다. 율법학자들의 힘은 오직 율법에 대한 지식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했고, 술 달린 긴 예복을 입고 다녔으며, 향연에서나 회당에서 항상 윗자리에 앉았다.
이러한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248개 조항의 행령(行令)과 365개 조항의 금령(禁令)을 합한 613개 조항의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가 예수와 사두가이파 사람들 사이의 토론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호쾌한 답변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이 질문을 하였다(28절)는 오늘 복음의 서두와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34절)는 말미는 순전히 마르코복음사가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오늘도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하다. 613개 조항을 축약하면 십계명이 될 것이고, 십계명을 축약하면 첫째가는 계명이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는 계명이고, 둘째가는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18)는 계명임을 이 율법학자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골자로 선포하신 사랑의 이중계명인 것이다.(마태 22,34-40; 루가 10,25-28 참조)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신 사상의 재확인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율법학자의 답변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큰 성과이다. 그렇다. 야훼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며, 재물을 바치기 전에 하느님이 마음을 알고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호세 6,6)
사랑의 이중계명을 다시 환원시키면 십계명이 되고, 십계명을 다시 환원시키면 수백 개의 계명이 될 수도 있다. 사랑은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도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의 핵심정신을 비켜갈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알고 지키는 자에게 이미 하늘나라를 약속하셨다..........◆
첫댓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피정때 수녀님의 피정 교육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