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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장 주석
고창병이 나은 사람(누가복음 14:1-6)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Ⅰ. "인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며 "먹고 마시러 오셨다." 평민들의 사회가 비록 "평판이 나쁠지라도" 그 사회를 없애지 않으며, 바리새인들의 사회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너뜨리지 않으시며, 어느 누가 초청하든 반갑게 찾아가 가능한 한 그들 모두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려 하였다. 그는 이제 한 마을의 치안담당관으로 보이는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셨다"(1절). 하나님께서 그의 날에도 육체적인 소생을 위한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살펴 보라. 또한 우리는 그와 같은 자유를 오용하여 향락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도 잊지 말라. 그리스도는 다만 안식일이라도 꼭 해야 만 하는 식사를 위해 그 집으로 들어 가셨다. 안식일에 드는 음식을 특별히 주의해서 과식하는 일이 없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안식일에는 모세와 이드로처럼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어야"하며(출 18:12)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행한 것처럼 주의 날엔 "쉬러 가기 전에 기도하러 가는" 자들처럼 "먹고 마셔야" 한다. 그리하여 그날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Ⅱ. 그는 "선을 행하려고 들어 가셨다." 그는 어느 곳을 가든 "신을 행할" 기회를 찾았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자들"만 고치신 것이 아니다. 이제 "주의 앞에 고창병든 한 사람이 있었다"(2절). 그 병자가 스스로 찾아 왔거나 그의 친구들이 그를 그리스도께 고쳐달라고 데리고 왔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선하신 축복으로 그를 "앞질러 택하셔서" "그가 부르기도 전에" 그에게 대답하셨다. 비록 "그리스도에게 나설"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앞에 있게" 되는 것,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참으로 행복한 것임을 명심하자. 이 사람은 아마 상당히 심하게 "고창병"을 앓고 있어서 대단히 부어 오른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가 이 식탁에 손님으로 초대 받았다기 보다는 그 바리새인의 친척으로서 그 집에 머물러 있던 중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가능성 있는 일이다.
Ⅲ. 그는 그를 배척하는 죄인들의 질서를 참고 견디셨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1절). 그를 초대한 바리새인은 뭔가 그를 걸고 넘어갈 구실을 찾아내려고 계획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실을 아셨을 텐데도 그곳에 가신 이유는 자신이 가장 간교한 그들과 싸워야 할 자이며 그를 "지켜보는 자들"의 눈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감시 받고 있는" 자들은 "방심치 말아야" 한다. 하몬드(Hammond) 박사의 견해처럼 자기의 손님으로 초대한 자들을 해할 구실을 찾는다는 것은 접대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초대한 자는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은 "새를 덮치려" 앉아 기다리는 "새사냥꾼"처럼 "평화를 내세우면서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하고 그들의 의견을 물으셨을 때(이미 그들의 생각을 통해 그리스도는 답을 들으셨다. 그들의 생각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는 대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 혹은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도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비난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일이 합당하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 일로 그를 걸고 넘어갈 구실로 삼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합당하지 않다"고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아무리 철면피라 할지라도 그와 같이 당연하고 자명한 이치를 부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은 종종 아무리 악한 자들이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합당하고 선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을 행함으로 박해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그리스도는 많은 "선행"을 베푸셨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그와 그의 이름에 "돌을 던졌다."
Ⅳ. 죄인들이 아무리 반대와 "방해"를 할지라도 "선을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막을 수 는 없다. 그는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다"(4절). 아마 그는 그 사람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고쳐 보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그의 겸손을 나타낸 것이며 그의 적들을 "흥분시키지" 않은 것은 그의 지혜, "온순한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적대자들의 방해도 우리가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또한 그런 경우가 닥치더라도 상황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공격을 최대로 줄이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명심하자. 혹은 그를 "데려다가" 즉, 그에게 "손을 얹고" 그를 치료하였다고 볼 수 있다. evpilabo,menos-즉 그는 그를 포옹하였다. 다루기 힘들 정도로 몸이 부어 있었지만(고창병에 걸린 사람들은 보통 그 몸이 비대해진다) 그는 그를 자기 팔로 안고 원래의 모습으로 고쳐 주었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겠지만 고창병 치료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병까지도 한순간에 완전히 치료하셨다. 그리고 그를 보냈다. 그는 단지 수동적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그 치료받은 사실"로 인해서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달려들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죄가 많은 자들에겐 이것도 역시 모순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Ⅴ. 우리 주 예수께선 그와 논쟁하려는 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시기 위해 "자신을 변명하셨다"(5,6절). 그는 여전히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고 계셨다. 이런 경우에 종종 쓰던 식대로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예를 들어 말함으로써 그를 비난하는 그 비난이 결국은 자신들에 대한 비난이었으며 지금까지 "교활"하게 흔들던 평화의 깃발을 이제 "수치스럽게" 항복의 깃발로 흔들 수밖에 없게 만드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 내지 않겠느냐?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릴 자가 있겠느냐?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리면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 아니냐?" 그들이 이처럼 가축을 구해 내는 것은 "가련한 가축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 소유의 소"나 "나귀"이며 돈으로 바꿀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에 대한 율법을 어기면서도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위선의 뚜렷한 증거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그리스도에게 잘못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그들은 다만 그처럼 꾸미고 있을 따름이다)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적인 선행"에 대해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처럼 기적을 행함으로 그가 받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고 그로 말미암아 백성 가운데 명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를 위한 선행을 위해선 없어선 안 될 것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곤 한다. 이 질문이 그들을 "잠잠케 만들었다."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치 못하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면 그 정당함이 드러날 것이며 그 앞에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겸손할 것을 요구하심(누가복음 14:7-14)
우리 주 예수는 여기에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게 될 때에 나누기 유익한 대화의 한 예를 보여 주신다. 우리는 그가 제자들만 있을 때 그들과 나눈 대화는 참으로 "유익하며 지키기에 합당한"것들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고 있는" 적대자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있을 때에도 기회만 있으면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지적하며 그들을 교정시키려고 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 앞에 있는 자들은 악한 자들이었으나" 그는(다윗처럼, 시 39:1, 2) "입을 다물고 옳은 것을 말씀하시지 않은"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를 흥분시키는 요소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의 마음이 그의 안에서 뜨거워지거나" "그의 영이 떨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 식탁에서 "굶주린 무리처럼 떠들어대는 위선자들의 무리"들의 대화처럼 저속한 대화를 금해야 될 뿐 아니라 그저 평범한 대화의 한계를 넘어서 식탁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고 평상적인 일들을 통해 "영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그런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의로운 자의 입술은 "많은 사람을 먹이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고관들 사이에 앉아 계셨다. 그러나 지위 같은 것은 거들 떠 보지도 않는 사람처럼 말씀하셨다.
Ⅰ. 그는 "상좌에만 앉으려고" 애쓰는 손님들에게 책망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겸양"의 교훈을 주신다.
1. 그는 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상좌"를 좋아하며 식탁 끝머리로 가려 하는지 눈여겨보셨다(7절). 그는 전에는 이런 것으로 해서 그들을 책망하신 적이 있었다(11:43). 여기에선 그 비난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각 개인에게 하시고 있다. 그리스도는 "각자에게 그 분량대로"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높은 자리를 고르느라고" 얼마나 애쓰는지 아셨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들어오면 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둘렀다.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도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종교적인 집회에서 뿐 아니라 식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시며" 그것을 기억해 두신다.
2. 그는 이처럼 적극적인 자들이 종종 "수치스럽게" 밀려나 창피를 당하며 오히려 겸손하게 있던 자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 겸손으로 "존경받는" 것을 보셨다.
(1) 들어올 때부터 가장 높은 자리를 생각하고 들어온 자들은 "평가 절하"되고 "보다 명예로운" 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미끄러 내려오는 경우가 허다하다(8,9절). 우리는 어디를 가든 그 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세상적인 지위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소양과 그 업적 등으로 우리보다 "더 명예로운" 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늘 눈여겨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좌석을 권하는 자들이 많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좌석을 권해야 하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잔치집 주인은 손님들의 위치를 배열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명예로운" 자들이 합당한 좌석에 앉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처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낮은 자가 그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면 당장 찾아가 "이 분에게 자리를 내어 주십시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모른 채 더 높은 대우를 받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울 것이다. 자만은 "창피"를 낳게 되며 마침내 "타락"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들어오면서 낮은 자리에 앉는 것으로 만족했던 자들은 높임을 받게 된다(10절). "가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 너를 초대한 친구의 손님들은 모두 너보다 높은 지위와 인격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인정해 버려라.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너에게 찾아 와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라. 잔치집 주인은 공정하므로 네가 식탁 가장 낮은 자리에 네 스스로 가서 앉았다는 사실로 너를 그냥 그 자리에 앉게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높아지는 것"은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너는 너와 함께 앉아 있는 자들 앞에서 공손과 존경으로 행동하라. 그들이 처음에 너를 어떻게 보았든 너를 높은 자라 여길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곳일수록 그 겸손은 더 빛날 것이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너를 겸비한 자로 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값진 명예이다. 우리 구주께선 여기에 솔로몬의 충고를 인용하신다(잠 25:6, 7).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 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유대 랍비 문헌에 나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세 사람이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한 사람은 제일 높은 자리에 앉으며 나는 제후이니까 하였다. 다음 사람은 그 다음 높은 자리에 앉으며 나는 현자(賢者)이니까 하였다. 나머지 한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며 나는 비천한 자이니까 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와서 비천한 자를 제일 높은 자리에, 제후를 가장 낮은 자리에 앉혔다."
3. 그는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풀어 설명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족하기를 배우라고 분부하신다. 자랑과 욕심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과 자기 부인은 진실로 명예로운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 우리는 다른 예를 통해서도 "인간의 자랑은 그를 낮추며 마음으로 겸손한 자에겐 명예가 주어지고, 겸손한 자가 명예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Ⅱ. 그리스도는 또한 이처럼 많은 "부자"들을 잔치에 초대한 주인에 대한 책망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그 주인은 집에 부자들을 초청해 식사 대접은 잘하였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초청하거나 아니면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물을 공평하게 나누어주어야만 했어야 했다. 가난한 자들은 마련된 음식을 즐기지도 못했고 그처럼 호화스런 음식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처지였다(느 8:10 참조). 우리 구세주께선 여기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화려한 집안 치장이나 손님치례로 쓰는 것보다는 자선 사업에 쓰는 것이 훨씬 나으며 그 받는 보상 또한 큼을 깨우치고 있다.
1. "부한 이웃 청하기를 탐하지 말라.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자를 초청하지 말라(12절)." 그렇다고 그와 같은 초청을 일제 "금하라"는 말은 아니다. 친구나 친척간에 우호를 도모하기 위해선 그와 같은 초청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주의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1) "그런 초청을 습관 삼아 하지 말라. 그런 일에는 최소한으로 경비를 줄여라. 보다 보람있는 일, 자선을 베푸는데 그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일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곤란한 일인지는 너희도 알게 되리라. 부자 한사람을 위하여 차리는 음식으로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솔로몬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다"고 경고하였다(잠 22:16). "너희 친구에게 주되 네 도움이 필요 없는 자에게 주지 말고 네 가난한 친구에게 주어라"(플리니의 편지에서).
(2) "그것으로 자랑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아하수에로 왕처럼 단지 나타내기 위해 잔치를 베푼다"(에 1:3, 4).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잔치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며, 자신의 환상을 낭비한다.
(3) "네가 그들에게 청함을 받아 그대로 대접받기를 목적으로 대접하지 말라." 이것이 우리 구세주께서 그와 같은 잔치를 벌리는데 대해 비난하신 원인이다. 너희는 보통 너희도 그들에게 초대를 받아 너희가 낸 만큼 도로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손님을 접대한다. 너희가 너희 친구를 대접할 때 내놓았던 만큼 그들도 너희에게 진기하고 다양한 음식으로 대접하게 되면 만족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너희의 탐욕과 사치를 조장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너희가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2. "가난한 자들을 청하라"(13,14절). "너희가 잔치를 배설하거든 귀하고 값진 것으로 차리지 말고 값이 비싸지 않은 평범한 음식으로 적당히 차리고 생계 수단이 없거나 생활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을 초대하라. 그들이 자선의 대상이다. 그들에겐 생활 필수품조차 없다. 그들을 대접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기도로 너희에게 보답할 것이다. 부자들은 생각조차 안하기도 쉬운 감사를 너희에게 할 것이다. 부자들은 떠나서는 너희를 비난할지 모르나 그들은 떠나서도 너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들에겐 너희에게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너희는 잃는 자가 되었다. 또는 큰 손해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는 최고의 이익과 보장을 얻은 셈이니 의인들의 부활시에 너희가 갚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의인들의 부활," 의인들의 "미래 상태"가 다가올 것이다. 그 세계에 바로 그들을 위한 행복의 나라가 그들을 위해 마련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의인의 부활시에" 자선을 베푼 자들은 기억될 것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자선 그 자체가 "의로움"이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이 세상"에선 보답을 받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사물들을 최상의 것이 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최상의 인물에서 그런 "세상 것"으로 보상해 주실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부활"의 때에 충분히 보상받게 될 것이다. 가장 오랜 여행자에게 가장 값진 보답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선을 베푼 자들은 결코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축복을 받은 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보상은 "부활의 때까지" 계속 연기되고 있다.
관대한 초청(누가복음 14:15-24)
이 내용은 우리 구세주께서 초대받으신 그 잔치를 "영적으로 풀이한" 또 다른 말씀으로 일상 생활 중에서도 이와 같이 의미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좋은 본을 보여 주시는 내용이다.
Ⅰ. 대화의 실마리는 손님으로 함께 초청 받았던 자 중의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질문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잔치에 대하여 지킬 사항을 말씀하시자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 되도다"고 대꾸하였다(15절). 이 말은 랍비들 사이에 평소에 주고받던 말이라고 주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1. 이 자가 여기서 이 말을 끄집어 낸 목적은 무엇일까?
(1) 아마 이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손님들을 꾸짖으시고 이어서 그 집 주인을 책망하시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화를 내게 될까봐 선수를 쳐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려 그 말을 했거나
(2)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방금 말씀하신 겸손과 자선에 대한 좋은 규범에 감탄하면서도 그들은 아직도 사물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는 불쌍한 상태를 보고 실망하여 앞서 들은 선한 법칙이나 다른 선한 규칙이 그대로 행하여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 그 나라에 살게 되는 자는 "복 있을 것이다"고 말하게 되었거나
(3) 아니면, 그리스도가 방금 가난한 자에게 베푼 자선이 보상을 얻기 위한 "의로운 자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자 "그렇습니다. 주님. 의로운 자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을 그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게 될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식탁으로 대접받는 것 이상으로 큰 보상입니다"고 맞장구쳐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을 보충한 것이거나
(4) 아니면, 그리스도가 지금까지 교훈의 말씀을 하시다 끝마치시고 입을 다무시자 그처럼 즐거운 교훈의 말씀을 놓치기 싫어 다시 계속 말씀해 주시기를 강구하는 의미에서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는 것만큼 그리스도를 자극시키는 단어는 없다고 여긴 것 같다. 스스로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없는 자들일지라도 간단히 입을 열어 그 대화가 계속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지금 그가 꺼낸 말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진리였으며 그들이 "음식을 먹으며 앉아 있는" 그 상태에서 꺼낸 것은 참으로 "적절했다." 우리도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하늘나라와 영적인 진리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살려야 한다. 성경도 그 진리를 일상적인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비교하면서 진리를 캐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을 받을 때에도 그것들을 통하여 보다 귀한 것, "하나님의 은헤의 선물을 깨닫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육체적인 휴식을 취할 때 이런 생각을 함이 적절하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 되도다."
(1) 은혜의 나라, 메시야의 나라에서. 그 나라는 곧 임한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들이다.
(2) 영광의 나라에서. 그 나라는 부활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영원한 잔치"이다. 그 곳 식탁에 앉을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다시 그곳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Ⅱ.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 주 예수는 비유로 설명하셨다(16절 이하). 그리스도 그가 한 말에 동의하셨다. "그것은 사실이다. 메시야 왕국의 특권을 소유하게 될 자는 행복하다. 그렇다면 과연 그 특권을 소유할 자는 누구일까? 그 특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너희 유대인이냐? 아니다. 이방인들이 오히려 그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비유의 내용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비춰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자비.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하나님께선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들이 먹고 쉬고 즐길 수 있게 하셨다(16절).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혜 안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인간들의 영혼을 위한 "음식"과 "잔치"가 될 만한 것들이 있다. 죄인들의 영혼은 자신의 부족함과 불행을 알고 이것을 찾게 된다. 그것을 "잔치(Supper)"라고 부른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에선 하루의 일과가 끝난 저녁 식사시간에 주요한 잔치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복음의 은혜가 이 세상에 퍼지게 된 때는 세상의 종말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풍성한 은혜는 우리들 시간의 저녁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
(2) 이 잔치에 와서 참여하라는 은총의 초대.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일반적인 초대. 그는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과 유대 백성들에게 자기의 복음의 혜택을 향유하라고 초대하셨다. 얼마가 오도라도 모자름이 없는 풍성한 은혜가 준비되어 있다. 이사야 25장 6절에 이미 "만백성을 위한 잔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참된" 집을 지키고 계실 뿐 아니라 그 집을 "열어 놓고" 기다리신다.
[2] 잔치 시간이 다가오자 특별히 기억하여 초대한 자들을 찾아 나섰다. 종들이 초대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 곳곳으로 흩어졌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성령이 오시고 복음 교회가 세워짐으로 전에 초청을 받았던 자들은 "즉시" 오라는 독촉을 받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복음의 신비가 이제는 모두 밝혀졌고 복음의 의례가 이젠 완전히 성립되었으며 세상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가 이제 형성되었고 성령이 주어졌다. 이것이 지금 우리를 향한 부르심이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응해야 할 때이다. 바로 지금이다. 더 오래 있어선 안 된다. 바로 지금이다. 마냥 연기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나 곧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 오라. 미루지 말라. 초청에 응하라. 너희가 환영받을 것임을 믿으라. 친구여, 와서 먹으라. 사랑하는 자여, 마시라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라."
2. 복음의 은혜가 맞본 차가운 대접. 초청 받았던 손님들은 오기를 꺼려하였다. 그들은 "가고 싶지 않다"고 솔직하고 간단하게 말하지 않고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다"(18절). 누구나 그와 같은 간곡한 초청을 받았다면 "하나같이 승낙하고" 잔치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와 같은 초청을 마다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은 모두 핑계를 찾거나 아니면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고 그의 은혜의 손길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유대 민족의 보편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초청을 핑계 대고 마다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복음의 소명에 가까워지기를 꺼려하는 일반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체면 때문에 거절을 표명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두 avpo. miaj-즉 하나 같았다. 어느 누구든 예를 대면 "모두 일사천리로 따랐다."
(1) 여기에 "상인"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그들이 산 것을 급히 가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밭을 샀다." 그는 좋은 조건으로 "땅 조금을 샀다." 그래서 과연 그 땅이 좋은가 아닌가 살펴보기 위해 "가 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의 마음은 오직 그의 재산을 늘이는 데에만 있었으므로 그의 친구에게 예의를 지키거나 자신에게조차 정성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그 마음이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고 "집에 집을 세우고 밭에 밭을 넓히는" 일을 즐겨하는 자들의 귀는 복음의 초청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지만 이 얼마나 경솔한 핑계인가! 땅을 보러 가는 일은 다음 날로 미루어도 될 것이다. 땅이 하루가 지난다고 자리를 옮길 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지금 가서 시험해 봐야겠습니다. 가서 내 맘에 드는지 여부를 가려야겠습니다. 그러니 이번만은 용서하십시오." 전자는 세상에서 정도 이상으로 "만족을 즐기려"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세상에 대해 정도 이상으로 "만족을 즐기려" 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세상에 대해 정도 이상으로 "걱정"하고 "관심" 가지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은혜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둘은 모두 영혼보다는 육체를, 영원에 속한 것보다는 한정된 시간에 속한 것을 더 추구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어떤 의무에 대해 깨우침을 받았을 때 의무를 잊고 있었다고 용서를 비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핑계 조건으로 내세운 것들을 살펴보자.
[1] "보잘 것 없는 일들." 큰 관심을 쓰지 않아도 될 일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기로 초대받았다. 그래서 부득이 땅이나 소를 보러 가는 일은 미루어야만 되겠다"고 했어야만 했다.
[2] "정당한 일"이다. "그 자체가 정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너무 마음을 두면 그것은 오히려 신앙 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세상 일로 인해서 우리가 영적인 것을 멀리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가장 주의해야만 한다.
(2) 거기엔 또한 "새로 장가를 들어" 부인을 두고 식사하러 갈 수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20절). "나는 장가를 들었으니" 당분간은 "가지 못하겠노라." 그는 가지 "못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가지 않겠노라"고 말했어야 솔직했다고 하겠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의 의무에 대해 "반감"을 가질 때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갖은 핑계로 둘러댄다. 그는 "결혼했다"고 했다. 결혼한 사람은 1년 동안 전쟁에도 면제된다는 사실이 율법으로도 보장되어 있는 것(신 24:5)은 사실이나 모든 남자들이 매해 참석하는 주님의 잔치조차 마다할 핑계는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 모든 잔치의 모형이 되는 복음 잔치에서야 결혼했다는 사실이 어찌 핑계가 될 수 있으랴! 우리와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당신이 내게 준 그 여인이 내게 먹게 하였나이다." 이것이 아담의 핑계였다. 그런데 이번엔 "여인이 나로 먹지 못하게 하나이다"라고 핑계를 대고 있다. 그는 부인과 함께 가서 먹었어야 했다. 그 둘은 모두 환영받았을 것이다.
3. 종들이 주인에게 가지고 온 소식은 주인이 초대한 친구들로부터 받은 무례한 행동뿐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그를 과소평가하고 있는가 밝히 드러났다(21절). "종들이 돌아와 그대로 고하였다." 주인 혼자 식사를 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고 걱정하며 보고하였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와서 자리를 함께 할 것으로 여겼던 초대받은 손님들이 이제 와서 다른 볼 일 때문에 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은 사실을 과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고하였다. 목회자들도 그들의 목회 성과를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만 한다. 은혜의 제단에선 특히 그래야만 한다. 신도들의 "영혼이 풍요해짐"을 보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들의 "수고가 헛된"것이 되었을 때엔 그들의 "불평"을 그대로 하나님께 고해야만 한다. 목회자들은 후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도 이처럼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증인으로 선택되어 불(不)신앙으로 고집하는 자들에 대해 그들도 공평하게 초대를 받았었다고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아들인 자를 위해서는 "보소서, 당신께서 제게 이 자녀들을 주셨나이다"고 증언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교인들은 목회자들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사도들은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저희 목회자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기 때문이다"(히 13:17).
4. 이와 같은 무례한 행위에 대한 주인의 당연한 조처.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21절), 복음의 손길을 업신여기는 자들의 무례함과 그로 말미암아 하늘나라 하나님께 끼치는 불경스런 행위는 그에겐 대단히 불쾌하였고 또 그것이 당연하였다. 자비를 악용함으로 무서운 진노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내린 심판은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였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축복의 땅을 멸시하였을 때 감사할지 모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린 심판과 같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시매 저들이 그의 품안에 쉬 임을 얻지 못하더라."에서의 장자권처럼 은혜를 멸시하면 은혜를 상실하고야 만다. 그리스도를 "소유할 만 할 때에" 소유하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자할 때에" 소유하지 못한다. 초청 받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초청을 없이 여기면 그 초청이 취소되고 만다. 문이 닫히면 어리석은 처녀들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5. 식탁을 손님으로 채울 걱정. "(주인은 종에게 말하길)가라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초청하되 상점에서 나오는 상인과 상점 문을 닫는 장사꾼은 청하지 말라. 그들은 핑계를 대려할 것이다(장부정리를 하러 세금 계산소에 간다거나 친구와 술 한잔하러 술집에 간다고 핑계 댈 것이다). 다만 기꺼이 오려고 하는 자들만 초청하라. 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 흔히 보이는 거지들을 데려 오라." 종들은 주인의 식탁에 그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면 그것은 주인에게 욕된 일이라 하여 주인의 명령에 반대를 제의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곧 그와 같은 손님들로 잔칫자리를 가득 채웠다. "주여, 명 하신대로 하였나이다." 유대인들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하고 있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메시야의 식탁 손님으로 자기가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니라 평민과 죄인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저는 자들"이다. 그런데 아직도 손님을 더 받을 자리와 음식이 남아 있었다. "가라. 다시 가되 길과 산 가로 나가라. 시골로 가라. 가서 방황하는 자들과 저녁이 되어 밭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자들을 찾아가 강권하여 데려 오라. 폭력을 쓰지 말고 설득시켜 데려 오라. 그들에게 진지하게 대하라. 왜냐하면 이번 경우에는 그들에게 이 초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조롱이 아님을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끄러워하며 주저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과연 환영을 받을 것인가 선뜻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전히 설득되었다고 느껴지기 전엔 떠나지 말라." 이것은 "이방인들을 부르심"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였을 때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돌아섰고" 결국 이방인들에 의해 교회는 채워졌다. 이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진실된" 영혼을 위해 마련된 은혜는 결코 "소용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 누가 "거절"하더라도 그 복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것으로 위로를 받으셨다. 즉 "이스라엘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는 "이방인의 빛으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사 49:5, 6). 교회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인간의 불(不)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을 헛된 것으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이 그리스도에게는 가장 귀하고 부요한 자로 환영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가난한 자들"처럼 세상적인 조건이 좋지 못한 자들, "병신이나 소경이나 저는 자들"처럼 육체적인 불구자들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성과를 보였음을 수시로 보게 된다. 여기서도 그리스도는 우리로 가르치시기 위하여 얼마 전에 말씀하셨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며 말씀하신다. 즉 우리가 식탁에 초대할 때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고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신다(13절).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광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자연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동정과 사랑을 볼 때 우리도 자극을 받게 된다.
(3) 복음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던 자들과 복음에 복종하리라 곤 보여지지 않던 자들을 통해 복음은 놀라울 정도로 큰 성과를 성취한 예를 수없이 보게 된다. 천민과 창녀가 오히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이처럼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느니라." 제일 앞서 나가고 있는 자들을 믿지도 말고 가장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자들을 보고 실망하지도 말자.
(4)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은 복음 잔치에 초대하는 일에 대단히 신속하고 끈기 있어야 한다. "빨리 나가라(21절).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모든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오늘 오라 하라. 오늘이라고 부르는 때가 지나기 전에 오라고 하라. 그들을 강권하여 데려 오라. 그들을 인정의 줄과 사랑의 끈으로 묶어 데려 오라." 종교 문제를 다룬다고 인간의 양심을 강제로 몰아 설득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물며 인간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억지로 주장하는 것은 더욱 삼갈 일이다. "너희는 주의 만찬을 받아야 한다. 안 받으면 너희는 재물에 쌓이고 매여 결국 그 안에서 죽고 말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강권은 분명 이런 식의 독단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 이성의 설득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울 무기는 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5)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혜택을 누리기 위하여 찾아 왔지만 그래도 아직 "남은 자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무한하며 측량한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안에는 모든 인간에게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나누어 줄 만큼 넉넉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아무도 거절하지 않는다.
(6) 그리스도의 집은 비록 "크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채워질" 것이다. 선택된 자의 숫자가 찰 때가 바로 그 때일 것이며 "그에게 찾아 간" 자들은 모두 "그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자기 부정의 필요성(누가복음 14:25-35)
그리스도가 교훈을 하시되 그의 말을 듣는 대상에 따라 "각기 자기 음식의 분량에 따라" 얼마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가 살펴보자. 바리새인들에겐 겸손과 자선을 가르치셨다. 그는 이제 그의 뒤를 따르는 무리들, 그를 따르려는 열성을 보이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권하시는 이 말씀은 그들이 제자직을 받기 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제자의 직분을 이해시키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Ⅰ. 그리스도와 함께 다닐 때 무리들은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25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많은 자들이 사랑을 바라고 갔으며 또 많은 자들이 친교를 바라고 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이제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함께 섞인 무리"를 여기서 볼 수 있다. 교회 안에도 그와 같은 무리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목회자들은 "진실된 자와 악한 자를 분별하는데"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Ⅱ. 그들의 "열성"을 보시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동정"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나선 자들은 최악의 상태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1. 그는 그들에게 닥칠 최악의 상태가 무엇인가 알려 주셨다. 그것은 그들 "앞에서" 그들을 "위해" 겪으신 어려움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마음속에 "그의 제자"가 되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며 그들이 그의 나라에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계셨다. 그들은 그가 "누구든 나를 따라와 나의 제자가 되면 풍성한 재물과 명예를 누리게 되리라. 내가 그를 높은 인물로 삼으리라"고 말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1) 그들은 지금까지 "사랑하는" 것들을 "떠나" 피조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위로를 버린 채 그를 따라야만 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들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려야만 하였다(26절).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어느 것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우리가 버려야 할 서들을 기꺼이 버리지 못한다면 "신실한" 제자가 될 수 없으며 "꾸준하고" 변함없는 충성을 다할 수 없게 된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되 그것을 "제물"로 삼아 그것을 버림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며(바로 순교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죽을 목숨을 사랑하지 않았다), "유혹"으로 여긴다면 그것을 버림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기의 고향을 떠났고 모세는 바로 궁전을 떠났던 것이다. 여기서는 "집"이나 "땅"에 대한 언급은 없다. 철학에서는 이것들도 "유혹"의 동기로 간주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선 이를 좀더 높은 차원에서 보려고 한다.
[1] 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친족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상대적으로 "그들을 미워해야"한다. 라헬이 더 사랑을 받게 되었을 때 레아가 "미움"을 받았다함 같이 그리스도보다는 그들을 "덜 사랑해야" 한다. 그들을 어떤 한도내에서 미워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위안과 만족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으로 흡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레위가 "그의 부모에 대하여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함"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신 33:9). 부모에 대한 의무와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가 갈등을 일으켰을 땐 단연코 그리스도께 우선권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인" 하느냐 아니면 우리 가족과 친척에게 "배척"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부닥쳤을 땐(이런 문제는 초대 교인들에게 수없이 많았다) 우리는 단연코 그의 사랑을 잃는 것보다 가족을 잃는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2] 누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거나 그의 진리와 그의 길을 떠나게 되는 경우를 당하느니 보다 차라리 우리의 생명이 치욕의 "사슬"에 매여 잔인한 "죽음"을 통해 "빼앗기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다. "영적 생명"의 쾌락과 "영생"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소유함으로 이와 같은 "고된 의무"가 일어날 경우엔 가장 힘든 시험은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친척이냐, 생명이냐 이것을 결정하는 일이다. 평화스런 시기에도 이와 같은 시련은 종종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를 포기하며, 친척이나 친구의 의를 상할까 두려워 혹은 고객을 잃을까 두려워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혐의가 지워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2) 참으로 "무거운" 것을 기꺼이 "지겠노라" 하는 자라야 제자가 될 수 있다(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즉(하몬드 박사의 말대로) 그는 "내 편"이 아니다. 나를 따르는 일은 필연코 박해가 뒤따르는 것이기에 그 십자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십자가 처형"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모두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처럼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일했다. 그들은 모욕을 받는 것에 만족하여야 한다. 수치와 치욕의 짐을 져야만 한다. "교수대를 진 자"란 명칭(Furcifur)보다 더 수치스런 말은 없다.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즉 제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언제 십자가가 놓여 있더라도 그것을 지고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르실 때에도 그는 십자가를 지고 있어야 한다. 그 십자가를 진 채로 그리스도께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서 용기를 얻고 그에게서 보상을 받으리라는 소망 속에 살아야 한다.
2.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라고 당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겪어야 할 어려움을 사실 그대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우리 역시 그를 따르는 제자의 직분을 감수하기에 앞서 그 문제를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도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할 때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 볼 것을 부탁하였다(수 24:19). 계속하지 못할 것이면 아예 시작부터 안 하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작하기 전에 계속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혜 있는 행동이며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합당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을 자세히 음미해 보아야 한다. 사탄은 제일 좋은 것은 보여 주고 가장 나쁜 것은 감춘다. 왜냐하면 사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는 가장 나쁜 것을 상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선하심은 무한하다. 시작을 충분히 검토하는 것이 유종의 미를 거둔다. 특히 고난의 때엔 더욱 그러하다. 이제 우리 구세주께서는 이와 같은 일의 필요성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첫째 비유는 우리 신앙 생활의 "비용"에 대해 잘 검토할 것을 알려 주고 두 번째 것은 신앙 생활의 "위험"을 충분히 인식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1) 신앙 생활을 하기로 작정한 것은 곧 "망대를 세우자고" 결심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비용"을 먼저 계산해 보아야 한다(28-30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 혹은 자신을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자 할진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는 그의 일꾼들이 계산해 온 액수보다 더 많은 액수로 예산을 짜야 할 것이다. "끝까지 지을 수도 없는 망대를 짓기 시작하다가"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먼저 자기 돈주머니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1] 신앙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자는 "망대를 짓기로" 결정한 자와 비교된다. 그러나 그 탑은 하늘에 대항하여 쌓았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끝나고 만 바벨의 탑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순종함으로 쌓아서 "마지막 돌까지 쌓아지게 되는" 탑을 뜻한다.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깊이 기초를 파고 반석 위에 터를 잡아 차곡차곡 쌓아 올라갈 때 하늘 만큼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2] 이와 같은 망대를 지으려는 자는 먼저 "앉아서 예산해야만 한다." 자기들의 죄를 사함 받을 대가를 치러야 하며 가장 아끼던 것을 팔아야 하며,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 쌓아 올린 자신의 명예와 재산과 자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것들, 어쩌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지불해야 될지도 모른다. 이 모든 대가를 계산해 보고 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 대가와 비교해 본다면 어느 것이 더 클 것인가 나타날 것이다. 그는 아무 값없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것이다.
[3] "이와 같은 망대를 짓기" 시작한 자는 계속 그 건축을 진행시키지 못한다. 오래 참고 견디지도 못한다. 이것이 그들의 단점이다. 그들에겐 용기와 결단력도 없고 뚜렷한 원칙조차 없다.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 이 망대 "건축을 끝낼" 자는 우리 가운데 하나도 없다. 다행히 그리스도께서 "내 은혜는 너희에게 풍족하다" 하시므로 우리가 그 은혜를 구하고 쓰기만 하면 우리는 부족함 없이 그 은혜를 쓸 수가 있는 것이다.
[4] 종교 생활을 시작은 잘 했다가 도중에 "그만 두는 것"처럼 창피한 일은 없다. 사람들은 그 끈기가 없어 도중에 그만 두었다고 "야유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한 것을 잃었으며"(요 2:8) 우리가 수고하고 고난받은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갈 3:4).
(2) 그리스도의 제작직을 수행하려함은 "전장에 나가는" 사람과 같다. 따라서 그 전쟁의 "비참함"과 부닥치게 될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31, 32절). 이웃 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는 임금은 과연 자기편이 유리한가 그 힘을 비교해야 하며 만약 불리하다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1]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전쟁 상태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전쟁"이 아닌가? 우리는 사는 동안에 단칼에 베어버려야 할 적들이 수없이 달려든다. 매 걸음마다 싸워야 할 지경이다. 우리의 영적인 적들이 그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든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그의 군사가 되기 전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에게 닥칠 고난은 이겨낼 수 없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우리 힘 만으론 우리 보다 "2만" 배나 강한 힘으로 달려오는 땅과 지옥의 권세를 감당해낼 수 없다.
[3] 위 두 가지 비유를 통해 볼 때 우리는 세상을 버린 것처럼 꾸몄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과 박해가 시작되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세상과 최선의 관계를 유지함이 낫다.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재산을 버릴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젊은 부자"는 "내심을 속이고" 주와 함께 머물러 있기보다는 차라리 "근심하며"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 잘된 일이었다. 이 비유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즉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조심스럽게" 시작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5장 25절의 "너희의 적들과 속히 화해하라"는 말씀과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첫째, 죄를 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인다. 전혀 엉뚱한, 불법적인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그 통치자가 정당하고 올바른 합법적인 통치자를 대상으로 반역을 일으킨다.
둘째, 아무리 자만심이 강하고 겁 없는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적수는 될 수 없다. 그 힘의 차이는 여기서 상상하듯 "만 배" 혹은 "2만 배" 정도로 설명할 수조차 없다. "우리가 주님을 화나게 유도 할 수 있을까?" "그보다 강할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의 분노의 힘을 재본 이가 누구냐?" 이것을 생각할 때 그와 화해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우리가 "화해의 조건"을 보낼 필요는 없다. 이미 그 조건은 우리에게 내려 왔으며 여기엔 예외란 없고 그것은 최대한으로 우리의 이익을 보장하고 있다. 그 조건들을 수락하고 화해하도록 하자. "진노가 아직은 멀리 있는 동안" 시간이 있을 때 화해를 하자. 이러한 경우에 지연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며 후에 부탁할 때 상당히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33절에 기록된 이 비유의 해석을 보면 그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될 때 미리 준비해야 할 마음의 상태에 대해 가르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솔로몬은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라고 하였다(잠 20:18). "칼을 뽑은 자는 칼집을 멀리 버린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과 같이 유익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신앙 생활의 첫발을 내딛도록 하자. 즉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려는 자는 "박해를 받아야" 계속 "거룩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배교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신과 성품에서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경고하였다. 배교나 타락은 그들을 전혀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34, 35절).
(1)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선한 목회자들은 특히 그러하다(마 5:13). 그리고 그 소금은 선한 것이며 대단히 유용하다. 그들은 교훈과 모범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들을 부패하지 못하게 방지하고 그들을 독려하여, 그들에게 맛을 나게 하여 키운다.
(2) 반면에 세상에 가지고 있는 것을 내버리지 않고 오히려 신앙 생활을 포기하여 자연히 정욕적이고 세상적이고 그리스도 정신은 하나도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타락된 그리스도인은 "그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화학자들이 말하는 노폐물(caput mortuum)과 같아서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덕행이나 선행을 행할 능력이라곤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자들이다.
[1] 그것은 맛을 회복시킬 수 없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아무리 해도 짜게 할 수는 없다. 이 말은 배교자를 회복시키는 일은 극히 힘든 일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표현한 것이다(히 6:4-6). 기독교가 그들에게서 세상 욕심과 정욕을 치료하지 않으려 하고, 지금까지의 치료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면 그들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기독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그것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 차라리 똥처럼 땅에 거름을 주기도 합당치 않을 뿐아니라 거름더미에 버려도 썩지 않는다. 도저히 제거할 방법이 없다. 정신과 태도가 타락한 신앙인은 가장 무미건조한 짐승과 같다. 그래도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조금 있어 그가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너무 "어줍어" 아무도 그 말에 자극받지 않는다. 그의 말은 "천치가 중얼거리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3] 그것은 버리게 된다.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을 버리듯 "내어버리느니라." 그와 같은 사이비 종교인은 교회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그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의 명예와 특권, 가로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그들에게 물들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우리 구세주는 모두 이것을 명심하고 주의할 것을 당부하심으로 말씀을 끝맺으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리스도의 말씀, 특히 우리는 배교의 위험을 안고 있으며 배교자에 의해 우리도 함께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그 말씀을 듣는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