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ICA, 타슈켄트 직업훈련원 기계과 용접실습교육장 설치
정부 무상원조 전담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 김영목)의 지원으로 지난 1월 24일 타슈켄트 직업훈련원 기계과 용접실습교육장을 설치, 개관하였다. 노동부 Halilov Furqat 차관, KOICA 이경상 사무소장과 Ibragimov Ravshan 직업훈련원장, 직업훈련원 교사 및 학생들과 KOICA 봉사단원들이 참석하여 이번 용접실습장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Halilov 차관과 이경상 소장은 용접은 모든 산업분야는 물론 가정에도 중요한 기술임을 강조하고, 이번 용접실습장 개관을 통한 직업훈련원의 역량 강화와 발전을 기원하고, 양국 간의 지속적인 협력을 축하하였다. KOICA의 지원 하에 기계 분야 최문기 협력요원이 지난해 8월부터 약 6개월간의 준비를 통해 실용적이고 체계적인 시설을 갖춘 용접실습실을 구성하였다. 이번 사업을 통해 실습장 벽 설치, 환풍 시설 정비, 용접 기자재 및 안정장비 구비 등 안전하게 실습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하고, 충분한 학습자재를 갖추어 직업훈련원 기계과의 학생들의 수업 환경을 개선되고, 효율적인 실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총 72명의 KOICA 단원들이 9개 도시에 파견되어 있으며 한국어 교육, 보건의료, 컴퓨터 분야를 비롯하여 경제, 전기, 기계, 원예, 자동차, 태권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 간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출처 = 코이카)
“그래도 우리의 뿌리는 한국인이다”
한국내 거주 고려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매월 발간하는 공식 통계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엔 중앙아시아 고려인을 별도로 통계를 내는 항목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김준태 국민권익위원회 조사관의 ‘고려인 동포 권익구제 방안’ 자료에 따르면, 2013년 8월 현재 한국내 거주 고려인은 최소 2만2000명 이상이다. 우즈베키스탄 국적 고려인이 약 1만5000명으로 가장 많고, 러시아 고려인 약 4700명, 카자흐스탄 고려인 약 2000명 등이다. 체류자격별로는 방문취업(H-2 비자)이 1만2000명, 재외동포(F-4 비자) 8000명, 기타 영주권 및 결혼이민자 순이다. 그러나 불법체류자까지 합치면 실제론 3만 명가량이 국내 체류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고려인 유랑이 멈추지 않는 건 CIS의 신생독립국들이 저마다 자민족 우선정책을 펼치는 탓에, 토착어가 서툴고 러시아어밖에 모르는 고려인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직업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가마저 치솟아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수많은 고려인이 러시아행과 한국행을 택했다. 이렇듯, 수난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같은 민족임에도 고려인들이 한국 땅에서 영영 ‘이방인’에 속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에 온 뒤부터 자신이 ‘아기’가 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조선족과 달리 한국말을 못하니 불이익을 당해도 항변할 수 없고, 몸이 아파도 병원조차 혼자 못 찾아간다. 언어 장벽으로 인해 주민세나 벌금 납부 방법조차 잘 모른다. 고려인에 대한 F-4 비자 발급 기준이 완화되고 있지만, 취업 문턱은 여전히 높다. F-4 비자는 입국이 자유롭지만 전문직이 아닌 단순노무행위엔 종사할 수 없게 돼 있다. 지난해 11월에도 F-4 비자를 소지한 고려인 5명이 안산 시화공단에서 일하다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에 걸려 사흘간 구금됐다가 벌금 100만~200만 원씩을 내고 풀려났다. 두 번째로 적발되면 추방된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에게 “스스로 어느 나라 사람이라 생각하느냐”고 정체성에 대해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 “카자흐스탄에선 저더러 ‘카레이스키(고려인)’라고 했고, 한국에선 ‘넌 동포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러시아에 가면 또 뭐라고 할지 모르죠. 그렇더라도 저는 분명 카레이스키입니다. 단 한 번도 카레이스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다양한 국적, 그러나 우리와 피부색, 얼굴 생김새, 성(姓)까지 같은 이들의 뿌리는 하나다. 다문화가족과 함께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데 소홀함 없이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 밝혔으면서도 선진국 출신의 잘사는 재외동포만 우대하는 한국은 이들에게 과연 따뜻한 모국인가. 고려인들이 사랑하는 시인 김준의 시 ‘나는 조선 사람이다’의 구절구절이 이들의 뒷모습에 오버랩된다. “나는 로씨야 원동/ 이만 강변 조선 사람이다/ 백두산 신령이 먹이지 못해/ 멀리 강 건너로 쫓아낸/ 할아버지의 손자로다./ 로씨야의 ‘마마’보다도/ 카사흐의 ‘아빠’보다도/ 그루시야의 ‘나나’보다도/ 조선의 ‘어머니’란 말이/ 내 정신의 뿌리 더 깊다.”(원동(遠東)은 고려인의 초기 정착지인 연해주 일대를 뜻함) (출처 = 동아일보)
이슬람 세계화의 시초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가 탄생했다. 이는 세계사의 주요 분기점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어느날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포교에 나선 것이 613년이다. 무함마드가 포교를 시작한 후 이슬람교는 봄날 마른 들판에 바람을 타고 번져가는 불길처럼 급격히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슬람 세력이 커져가면서 무함마드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발휘해 630년 신도군을 이끌고 메카를 정복했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할 당시 이슬람 세력은 메카와 메디나를 비롯해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지배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채 20년이 안 되는 사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공동체는 종교적 최고 지도자이자 정치·군사 분야의 지도자인 칼리프(Caliph)가 정복지역을 확대하면서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해갔다. 무함마드 사망 2년 후인 634년에는 칼리프가 아라비아 반도를 완전히 손에 넣었고 635년에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정복했다. 동로마 제국은 속주 다마스쿠스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패퇴하고 시리아는 온전히 이슬람의 지배 하에 놓였다. 이슬람 세력은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 서쪽으로 서아시아,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진격했고, 642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해 이집트를 이슬람 세력화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진격해 698년에는 거의 모든 지역이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슬람 세력이 짧은 기간에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진출한 데는 산맥이 없고 평지만 있어 아라비아 말을 타고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었던 지형적 요인도 한몫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인들이 먹는 식량의 3분의 1을 공급하던 최대 곡창이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갔다.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쿠란’으로 상징되는 이슬람 세력의 거대한 물결은 7~ 8세기에 걸쳐 전성기 로마 제국의 동쪽 영토인 소아시아 지역은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사마르칸트·카불 지역까지 뒤덮었다. 로마 제국 영토 중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 본토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동유럽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사라센’이라는 말은 그리스·로마인들이 아랍인을 부르던 ‘사라케니(Saraceni)’에서 유래했다. 애초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을 사라센인이라고 불렀으나 점차 아랍인들의 지배하에 있던 베르베르인, 무어인을 포함해 지중해 건너편 북아프리카에 사는 이슬람교도 전체를 사라센인으로 불렀다. 7∼8세기 지중해는 ‘이슬람의 바다’였다. 사라센 해적들이 휩쓰는 이탈리아 반도 연안의 지중해는 무법의 바다였다. 사라센 해적들의 거듭된 침입에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에는 약탈로부터 항행의 안전을 지켜줄 해군력도, 해적을 소탕할 여력도 없었다. 비잔틴 제국은 근동·북아프리카·소아시아를 이슬람 세력에 빼앗기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받았다. 북방에선 슬라브 족이 침입했다. 랑고바르드 족이 지배한 이탈리아 남부 일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탈리아 반도 연안은 사라센 해적의 노략질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해안지역 주민들은 자구책으로 해적선이 침입하는 것을 미리 알고 피할 수 있도록 감시탑인 망루를 건설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해안도시와 사르데냐, 시칠리아 섬에는 지금도 곳곳에 이탈리아어로 ‘토레 사라체노(사라센의 탑)’라고 부르는 해적 감시탑이 남아 있다. 오늘날 이들 망루는 맑고 푸른 지중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됐지만, 당시에는 사라센 해적의 침입으로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아픔을 말해주는 상징물이었다. 현재의 터키, 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의 국기들은 초승달에 별이 그려진 모양을 하고 있다. 무함마드가 마흔 살이 되던 해 히라의 동굴에서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던 날, 밤하늘엔 초승달과 별이 나란히 떠 있었다고 한다. 622년 메카의 귀족들에게 박해를 받아 메디나로 떠나던 날 밤하늘도 똑같은 모양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에서는 초승달을 어둠을 지나 밝음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징으로 여긴다. 이슬람 국가들 중 처음으로 국기에 초승달과 별을 사용한 것이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연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래서 오스만의 침입을 받은 유럽인들에게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은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출처 = 동아일보)
CIS 한인 역사와 인물 담은 연감 만든다
옛 소련권 국가 모임인 독립국가연합(CIS)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고려인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연감(年鑑)’ 제작 사업이 추진된다. 이경종(55) 러시아·CIS 한인회총연합회 회장은 24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구소련이) 개방된 이후로 23년이 흘렀고 한인도 많이 진출했다”면서 이 같은 사업 계획을 소개했다. 이 회장은 무엇보다 올해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맞아 연감 제작을 추진하게 됐다며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과 고려인들이 정체성을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 옛 소련권 지역에는 1864년 조선인들의 첫 이주가 시작된 뒤로 현재 약 55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현지 영주권자를 포함한 한인 동포는 4만∼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회장은 “연감은 구소련이 개방된 뒤 23년이라는 시간을 주로 다루겠지만 고려인의 이주 역사와 현재도 실리게 될 것”이라며 “고려인 동포들이 지금까지 일궈온 것들과 현지 동포 기업들의 현주소를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CIS권에 사는 한인 동포들과 고려인 간의 간극을 좁히는 게 러시아·CIS 총연의 최우선 과제라며 “재외동포 정책을 담당하는 분들이 이런 부분을 깊이 들여다봐 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 회장은 CIS는 국가 간 거리가 먼 탓에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행사를 국가별, 주요 거점 도시별 한인회가 개별적으로 열기로 했다고 전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18년째 거주하며 원단과 건축자재 사업을 하고 있는 이 회장은 세계 최대 동포 무역단체인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의 차세대무역스쿨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는 월드옥타의 무역스쿨을 통해 공부한 30∼40대 한인들이 러시아와 CIS 지역의 선대와 후대 한인들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출처 = 연합뉴스)
2014년 화두는 기후변화
중앙아시아에서는 기온이 1,5도만 올라가도 농업 수확량이 30%까지 떨어져 농업에 심각한 손해를 끼친다. 이로인해 농업으로 인한 수익은 거의 절반 가까이 떨어져 취약한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처럼 세계경제포럼 전문가들은 이상기후현상, 기후변화, 식량위기, 수자원 위기를 2014년의 최대 위협으로 꼽았다. 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경제 성장율 감소때문에 해마다 세계경제는 공업생산의 1,5%, 즉 1조2000억달러를 손해보고 있다고 밝혔다. 2030년이 되면 그 피해액은 두배로 늘어날것으로 전망한다. 후진국에서는 경제적 손실액이 공업생산의 11%에까지 도달할수 있다. 환경전문가들은 중국의 광할한 지역들과 아프리카까지 매우 넓은 지역들이 위험지구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기후변화는 홍수와 해일, 태풍, 전염병 등 여러가지 재해들을 함께 동반하여 더욱 위험하다. (출처 = ruv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