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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기습을 받아 사로잡혔다가, 해방되었다가, 다시 사로잡히기를 반복한 풍운산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있었지만, 침착함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동료 노육과 함께 잡혀들었고, 그들을 사로잡은 무리들은 두 사람을 재판에 넘겼습니다. 고발을 한 사람은 물론 그 둘을 잡도록 명령한 신사, 왕작신 이었습니다.
왕작신이 풍운산을 비롯한 배상제회 신도들을 고발한 죄목은 상당히 광범위 했습니다. 우선 그는 배상제회의 신도들이 형제의 결의를 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 수가 수천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청나라는 조직적인 민간 단체에 대해 노이로제같은 반응을 보이는 나라입니다. 또한, 그들이 "구약" 이라는 외국의 요사스런 책들을 근거로 지역 내의 사직(辭職)을 짓밟고 있고, 향촌주민을 속여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원을 모독하고, 향로를 뒤엎고 박살냈다는 점 등을 지적했습니다.
풍운산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덕적이며, 배상제회가 합법적인 조직이라고 주장했으며, 교리가 요사스럽고 사악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유교의 경전인 상서와 시경에서도 상제를 경배하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배상제회는 평화롭게 하느님을 숭배하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시키기 위해, 풍운산은 배상제회의 책과 교리를 요약한 피사본을 제출했습니다.
동시에, 풍운산은 자신을 미심쩍게 보고 있는 심문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 시켰습니다. 청나라는 서양열강과 새로운 조약을 맺었고, 따라서 외국 종교는 허가되었으며, 그러한 조약에 따라 청나라의 양광총독은 이미 외국 선교사들과 중국인이 '하나이신 진정한 하느님'을 숭배할 자유가 있다는 조서를 공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풍운산이 사방에 가득찬 적대자들 앞에서 합리적인 변론을 하려고 애쓰고 있을 동안, 홍수전은 먼 칙척이 되는 사람의 집에 머물면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왕작신이 단련을 풀었을 당시, 그는 현지에 있지 않았기에 화를 당하지 않았던 겁니다. 물론 홍수전도 풍운산이 감옥에서 썩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간결한 문장으로 진정서를 써서 지현에게 제출했지만, 풍운산을 비난하는 토호들의 세력이 대단히 막강하여 그런 진정서만으로는 효과가 없어 보였습니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홍수전은 양광총독을 직접 만나, 생소한 국제법 상의 문제를 따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양광총독은 풍운산이 언급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대체로 이런 사건에서는 지현이 피고인을 지독하게 고문할 뿐만 아니라,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낡은 감옥이라는 곳 자체가 대단히 더럽고 병들이 가득한 곳이었기에, 홍수전은 서둘러야 했습니다. 이미 풍운산과 같이 잡혀왔던 노육은 ─ 병 때문인지, 고문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 사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홍수전이 서둘러 광저우에 당도했을때, 그가 찾던 양광총독은 베이징에 있는 황제의 소환으로 그곳을 떠난 뒤였습니다. 홍수전은 잠시 자기 집에 들렀지만,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고 다시 서쪽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기간은 한달이었는데, 홍수전은 풍운산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풍운산을 구한것은 다름아닌 풍운산 본인이었습니다. 풍운산은 적대 세력들 속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대단히 논리적으로 변호했고, 또한 배상제회 신도들도 풍운산을 구하기 위해 지현에게 성토를 올리고 ─ 십중팔구 뇌물도 찔러준 끝에 ─ 마침내 풍운산이ㅡ 주장이 받아들여서 그는 석방되었던 것입니다. 대신, 더 이상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는 계평 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관리가 풍운산을 감시하면서 그의 고향인 관록포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로 사람을 여러번 놀라게 하는 사나이인 풍운산은 이 과정에서도 신기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관록포로 호송되어 가는 도중, 그는 자신을 호송하는 두 명의 관원을 설득시켜, 되려 이들을 배상제회의 일원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풍운산은 아직 홍수전이 광저우로 간 사실만 알고, 돌아온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관록포가 있는 화 현으로 향했습니다.
아슬아슬한 시간의 오차끝에, 풍운산과 홍수전은 또다시 엇갈렸습니다. 홍수전이 귀환했을때 풍운산은 떠난 뒤였습니다. 홍수전이 광저우로 떠났던 것은 1848년의 봄이었고, 풍운산이 그 해의 초여름 정도에 관록포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4월 무렵인 '늦봄'의 시기가 비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 배상제회 집단은 새로운 유력자를 발견했습니다.
양수청(楊秀淸) 이었습니다.
태평천국의 역사를 서술할때, 양수청의 등장은 참 미묘한 부분입니다. 그의 등장 자체는, 당시 어려움에 처해있던 배상제회의 결속을 다지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양수청의 움직임은 파국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적절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양수청 역시 '하카' 즉 객가였습니다. 과거 홍수전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객가가 많은 매현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은 가난한 숯쟁이였습니다,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던 그는 배상제회가 말하는 구원의 메세지에 깊은 감명을 받아 배상제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하느님 아버지'의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배상제회가 숭앙하는 상제(憑依)가 양수청에 빙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당시 양수청은 중병에 걸린 상태로, 잠을 자는것도 밥을 먹는것도 말을 하는것도 귀로 듣는것도 불가능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양수청에 '빙의' 된 '하느님' 은, 사람들이 진정한 군주가 홍수전이라는것을 알지 못하고 상제를 배반하였기에 큰 벌을 주려고 하지만, 특별히 자비를 베푸노니 양수청을 대신 보내어 속죄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양수청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진정한 전능자의 음성일지, 양수청 본인의 간교한 계략일지, 혹은 병중에 튀어나온 헛말일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부분은 홍수전과 풍운산이 없는 배상제회로서는, 이러한 양수청의 '빙의' 가 신앙을 유지하고 그들을 단합시키는데 유리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윽고 배상제회 공동체로 돌아온 홍수전은, 양수청의 이 목소리를 진정한 신의 음성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결정은 생각해보면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바로 홍수전 스스로 '신의 음성을 전하는 대리자' 로서 양수청의 권위를 인정해버린 겁니다. 먼 훗날을 생각하면 비극의 시작이지만, 태평천국의 천왕(天王)과 동왕(東王)이 아닌, 신의 뜻을 갈구하는 유생과 가난함 속에 구원을 찾으려던 숯쟁이였던 당시의 그들로서는, 미래가 어떤 잔인한 방식으로 닥쳐올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달 뒤, 마찬가지로 객가 출신이며, 또한 찢어지게도 가난한 농민이었던 소조귀(蕭朝貴)라는 인물도 이러한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조귀는 하나의 도구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홍수전은 그 역시 받아들였습니다. 양수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홍수전이 그의 권위를 인정해준 셈입니다.
소조귀의 '빙의'는 한 시간 이상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빙의된 상태의 소조귀, 아니, '예수 그리스도' 는 홍수전과 배상제회의 신도들에게 다양한 메세지를 전하고,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최신' 노래를 그들에게 가르쳐주었으며, 하느님의 시를 참을성 있게 가르쳤습니다. 또 교리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다만, 다만 이 "예수 그리스도" 가 전하는 교리는, 홍수전이 이미 자신의 저작에서 언급했던 이야기들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둘의 권위는, 곧 '상제' 가 내려온 양수청은 천부하범(天父下凡)으로, 그리스도가 내려온 소조귀는 천형하범(天兄下凡)으로 지칭되었습니다. 만약 홍수전이 처음에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면, 그들의 권위가 확고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던 처음의 홍수전은 그들을 묵인했고, 그 순간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서 위상이 확고해진 양수청과 소조귀는 태평천국 내부에서 지위가 대단히 상승했습니다. 반면에 풍운산의 지위는 비교적 약화되었으며, 교조의 지위를 가진 홍수전도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습니다. '교조' 가 대단하다고 한들, '신'에 대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시점에서 배상제회가 믿고 있는 종교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멀어지고 토속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종교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849년, 홍수전은 관록포에 도착했고, 얼마전 아버지가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그곳에서 머물된 홍수전은 여름이 되자 풍운산과 함께 다시 배상제회의 옆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배상제회는 계평 현의 북쪽에서 서쪽 지대에 걸쳐 네 개의 확고한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종교 집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중국 주재 영국함대는 바다에서 중국의 해적들을 쓸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해적 소굴을 완전 소탕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움직임으로 인해, 해적들은 내륙으로 올라와 광시 성 근처로 몰려들었습니다 . 동시에 천지회와 관련된 비적의 폭동도 짦은 시기에 10여 차례가 벌어졌고, 이에 따라 치안이 악화되면서 조정 역시 예의주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 홍수전은 계평 현 근처에 있는 4개의 배상제회 공동체를 끊임없이 이동했습니다. 밤 11시 무렵이 되면, 일단의 조직을 갖추고 어두운 불 속에서 덮개를 씌운 등불을 하나 들고는, "모두가 함께 무리를 이루었으며, 앞장서는 자도 뒤처지는 자도 없" 이, 조용히 밤길을 걸어 새벽이 끝나기 전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홍수전은 어느날 그런 조심스러운 움직임도 없이 이동하다가 도적을 만났지만, 다행이도 별다른 문제 없이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는 소조귀의 몸을 빌려 홍수전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질책했고, 홍수전은 사과했습니다.
그런 위협을 무릎쓰고 네개의 공동체를 끊임없이 이동하는것은, 물론 조직을 관리하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계속해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조직이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도 모르고, "선택받은" 양수청과 소조귀외에 하느님의 말을 한다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 중, 그 말이 헛소리인지, 진실성이 있는지 파악해서 조직의 분위기를 유지하는것이 홍수전이 할 일이었습니다. 또, 돈 문제도 있습니다. 배상제회의 조직을 유지하려면 흘러들어온 유랑민이나 빈민들에게 베풀어야 했으며,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배상제회의 신도들 중에서도 많은 돈을 기부할 수 있는 유력한 집안들의 존재는 중요시 되었습니다. 그러한 집안 중에 하나가 석(石) 씨였고, 그 석씨에서 배상제회에 가입시킨 젊은이가 다름 아닌 석달개(石達開) 였습니다.
석달개, 이 미래의 익왕(翼王)이자, 훗날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절망 속에 신음하는 농민, 그리고 빈민들이 아련하게 그 전설을 이야기 하게 되는 인물은, 당시에 19살이었습니다.
또다른 인물로 위창휘(韋昌輝)가 있습니다. 그 역시 객가이지만, 그는 부유한 지주로 수재 자격을 돈으로 사들였습니다. 다만 대단히 가난한 출신인데다 사실상 무학(無學)인 양수청과 소조귀는 그런 위창휘의 신분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풍운산과 위창휘를 비난하고 대신 소조귀를 칭찬하는 그리스도(소조귀)의 강림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보면, 이 시점에서 소조귀와 양수청의 지위는 이미 상당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1849년 무렵, 배상제회에 대한 토호들의 공세가 더욱 심해지면서, 일부 신도들이 감옥에 갇히는 일들이 또 발생합니다. 홍수전은 그들을 규명하기 위한 모금 운동 등도 벌였지만, 결국 그들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홍수전이 타도해야할 '마귀' 는 사실 모호한 존재입니다. 세상을 어지럽힌다고 하는데, 과연 그 대상이 누구인가? 그러나 이러한 탄압은 역설적으로 배상제회에게 있어서 확실한 '적대 세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1849년부터 1850년 초 무렵,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과, 그들을 섬기며 배상제회를 탄압하는 관료들이, 없어져야 할 '요괴'와 동일시되어 언급되는 경우가 태평천국 관련 기록들에서 부쩍 많아집니다. 배셍제회 신도들이 '날조된 죄명' 으로 잡혀서 처벌을 받게 되는 청조의 관아는 이제 그들에게 '요괴의 소굴' 로 묘사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시대상황이 이어지며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배상제회에 몰려들었고, 그들의 규모는 이제 만명 단위를 넘어서는 거대 집단이 되었습니다. 배상제회가 커질 수록 여타 세력의 견제도 더욱 강력해졌으며, 숨막히는 듯한 긴장감이 커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배상제회 신도들의 가족을 유괴하여 돈을 요구하는 일들이 빈번해졌습니다. 홍수전은 배상제회 신도들의 가족을 공동체로 데려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관록포에 살고 있는 홍수전 본인의 가족도 말입니다.
1850년에 이르자, 당시를 나타내는 태평천국 관련 기록 등에서는 점점 '군사 용어' 가 더욱 많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 해 4월, 홍수전은 황제가 입는 용포를 입었고, 7월, 그리스도는 그에게 "천국을 위해 싸우고, 모든 강산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온 세상에 천부와 천형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 라고 권고했습니다. 그 무렵, 각지에서 결집한 배상제회의 회원은 미리 정해진 몇몇 촌락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8월과 9월, 각지의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군사를 모집하고 무장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10월 중순, 홍수전은 자신의 근거지 일대에 밤새도록 횃불과 등불을 밝히고, 적의 기습에 곧바로 대응해낼 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10월 29일, 경계는 더욱 강화되고, 총동원령이 내려져 전투태세에 만반을 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옵니다. 또한 홍수전은 화약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풍운산은 멀지 않은 미래를 깨닫고, 군사문제의 가장 기본적인 수신호체계를 고안 했습니다.
그의 기본 전략은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단위를 편성하여, 분명한 표식과 깃발을 통해 각 부대를 구분하느 ㄴ것입니다. 오장이 4명을 통솔하고, 양사마가 오장 5명 및 그 휘하의 부하들을 합쳐 25명을 통솔하며, 양사마는 가로 세로 75cm의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양사 4명 및 그 부하를 합친 104명은 조금 더 큰 깃발을 가진 졸장의 명령을 받고, 이러한 등급은 여수, 사수, 군수에까지 이르게 되어, 군수는 휘하에 총 1만 3,155명을 이끌게 됩니다.
각각의 단위는 서로 다른 색깔의 깃발을 사용하여 구분할 수 있게 하고, 각각 계급에 따른 표식과 심지어 암호명까지 서로 주어졌습니다. 풍운산은 야간의 비상사태에 사용할 소리 암호까지 고안했습니다.
부대의 단위를 더욱 적게 만들어 전투에서 효율을 극대화하는건 스웨덴의 사자왕, 구스타프 아돌프(Gustavus Adolphu) 이래 근대의 추세였지만, 물론 풍운산이 북방의 사자왕을 보고 이를 흉내낸것은 아닙니다. 그는 "주례" 에 근거를 두고 군사단위를 만들었지만, 양수청과 소조귀는 풍운산이 쓸데 없는 짓을 한다며 비난했습니다. 사실, 그 둘은 서로를 비난할떄도 있었습니다. 다른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양수청과 소조귀가 "학습의 필요성이 있다." 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 둘은 "실천적 경험이 고루한 학문보다 낫다" 면서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서도, 긴장감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1850년 말이 되면 한번에 수천이나 되는 인원들이 배상제회에 몰려들었으며, 청조의 비적 소탕을 피해서 8개 이상의 비적 집단이 배상제회에 합류했습니다.
12월 초, 이제 분명히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청조가 이끄는 정규군은 지방신사들이 이끄는 단련과 함꼐, 4개의 배상제회 근거지 중 하나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청나라 정규군은 배상제회를 공격한다기 보다는 그 이전부터 주목하고 있던 천지회 집단의 하나로 보고 그들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일례로 12월 8일의 상소문을 보면,
"계평의 금전 주변과 평남의 봉화, 화주, 옥림주 등에 다수의 비도가 모여 있습니다."
라고 하여, 아직 배상제회의 실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미 폭풍은 시작되었습니다.
첫댓글 이제 시작이군요!
드디어!!!
포,, 폭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