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보가 3백 몇가지가 되지만 그 가운데 건축물은 의외로 적다. 스물몇개뿐이다.
이 적은 국보 건축물들 가운데에서도 경북 영천에 있는 은해사 거조암의 영산전은 일반인들에게 그리 친숙한 건물은 아니다. 어쩌다 고려시대 건축물 목록 등에서만 보게 되는 낯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거조암 영산전을 보지 못했다. 오랫 동안 이 건물을 보고 싶어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 드디어 영산전과 만났다. 영산전이 나를 부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네트워크인 서울건축학교와 이건창호가 함께 진행하는 대구건축기행 소식을 듣고 바로 참가 신청을 했던 것은 답사지에 영산전과 대구가 끼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건물을 드디어 직접 볼 수 있었다.
사진이나 이야기만 듣고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건물이었다.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쉽게 담아내기 어려운 그 어떤 것이 영산전에 있었다. 비가 억수처럼 내린 축축한 날이었지만, 건물을 만나는 순간 영산전이 나를 압도해왔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선 좀처럼 느끼기 힘든 묵직함 그 자체를 뿜어내는 집이었다.
![P1080628.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22470_89493.jpg_M800.jpg)
억수같이 내렸던 비가 조금 가늘어질 무렵, 영산전에 도착했다. 잘 닦은 주차장에서 먼저 맞이하는 건물은 입구가 되는 누각 영산루다. 영산전은 그 너머로 지붕만 살짝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그 지붕의 힘은 이미 감춰지지 않는 것이었다. 길고도 긴 지붕이 머리만 내민 그 모습이 이미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있다.
![P1080630.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104136_57312.jpg_M800.jpg)
조금 더 가가가면 지붕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옆과 옆에 건물을 거느리고 있는 이 지붕의 제왕같은 건물이 영산전이다.
![P1080623.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109155_65965.jpg_M800.jpg)
경내에 들어선 순간, 마음 속에서 절로 `아'하는 감탄이 튀어나왔다.
크다. 그리고 단순하다. 장식도 색깔도 거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집이 눈 앞에 펼쳐졌다. 찾아온 사람에게 다가와 말을 말을 거는게 아니라 그냥 앉아만 있으면서 오는 사람을 맞는 듯한 건물이었다.
![P1080625.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101286_95705.jpg_M800.jpg)
다시 봐도 간단함 그 자체인 건물이다. 사찰을 꾸미는 화려한 창문인 꽃살도 없고, 단청도 없다. 묵직한 기둥, 흙색 벽, 막돌허튼쌓기로 쌓은 소박한 돌 기단부. 그리곤, 모든 것을 말해주는 지붕뿐. 바로 그 지붕이 영산전 그 자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건축물의 크기는 흔히 칸수로 표현한다. 칸은 건물 중간 기둥과 기둥 사이인데, 저 건물은 7칸이다. 사실 우리 전통 건축물 중에서 7칸 건물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리고, 조선시대 저만한 건물을 만들었다면 아마 칸수는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한동안 묵묵히 쳐다봤다. 지붕이란 무엇인가, 집은 어떤 것인가 많은 질문을 하게 만드는 건물이었다.
집에서 지붕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햇빛과 빗물을 막아주는 기능 이상으로 지붕은 집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집의 인상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지붕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상을 헤어스타일이 좌우하지만, 지붕은 집의 느낌을 그보다 훨씬 강력하게 좌우한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때, `빨간 뾰족 지붕집' `초가집' `기와집' `슬라브집' 같은 지붕 모양으로 설명한다. 새마을 운동 때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꾼 것은 지붕이 가지는 상징적 이미지를 바꾸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만큼 지붕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고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담는 아이콘 역할을 해왔다.
우리 전통건축은 이런 지붕의 역할이 특히나 크다. 뜨거운 여름과 겨울의 태양 고도 차이를 감안해 크고 웅장한 지붕이 건물 위에 올라탄다. 중국과 일본 전통건축물과 우리나라 건물을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지붕이다.
이 전통 지붕은 크게 세가지다.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그리고 맞배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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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맞배지붕은 가장 앞선 형식이자 가장 간단한 형식이다. 책을 펼쳐 집에 올려놓는 모양으로, 옆에서 보면 ㅅ 자 모양이 된다. 조선 이후 팔작지붕이 주류가 되었는데, 이전 고려시대 건물들은 저 맞배지붕이 많다. 역시 고려시대 건물인 저 영산전 지붕이 맞배지붕이다.
맞배지붕은 가장 단순하고 팔작지붕처럼 화려한 맛은 없어도 그 힘은 오히려 가장 세다. 가장 기본적인 구조가 갖는 아름다움에 명쾌한 힘이 담겼다. 영산전의 저 지붕은 그런 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집은 역시 지붕이 말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영산전의 놀라운 포스는 결코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없었다. 직접 봐야만 느낄 수 있는 건물이 바로 저 집이었다.
![P1080619.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68127_20578.jpg_M800.jpg)
영산전은 기록에 따르면 1375년, 600여년전 지은 건물이다. 지금 건물은 이후 지은 것이지만 고려시대 것으로는 몇 안되는 오래된 집이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국보 14호로 일찌감치 지정되었다.
이 건물에 밴 그 오랜 세월은 건물 나무 결만 만져도 쉽게 전해져 온다. 세월이 익은 빛깔, 그 주름이 나무에 그대로 담겼다.
그리고, 이 영산전이 독특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다른 절에선 볼 수 없는 건물인 동시에, 건물 내부의 모습도 다른 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을 감춰놓고 있다.
이 건물은 당연히 부처를 모시지만 실제 모시는 주인공은 다른 존재다. 바깥에서 창문을 보면 금세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P1080605.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34098_62679.jpg_M800.jpg)
저 줄지어선 이들은 누굴까 싶어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놀라게 된다.
![P108061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92615_88466.jpg_M800.jpg)
나한들이다. 영산전 내부는 모두 나한들의 세상이다.
건물에 모신 나한은 모두 526분. 그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 그리고 해학적이다.
이렇게 나한을 주로 모시는 공간은 우리 사찰에선 드물다.
![P1080606.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27452_56857.jpg_M800.jpg)
왜 나한일까?
나한은 `스스로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동시에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말한다.
불교 초기 이야기를 보면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 뒤 바라나시로 간다.
당시 바라나시는 많은 종교들이 일종의 각축장을 벌이는 설법의 무대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막 깨달음을 얻은 그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들어줄 사람은 없고 주변에 있는 것은 사슴뿐.
그는 풀밭으로 가서 사슴들을 모아놓고 최초의 설법을 했다. 당시 그를 따라 출가한 네 사문들이 사슴들과 함께 그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진정 그가 깨달은 자라는 것을 알고 부처의 세계에 진정으로 입문하게 된다.
이 최초 설법 뒤 석가는 500 나한들을 모아 본격적인 설법을 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널리 알린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연상케 하는 장면으로, 이 설법을 했던 장소가 영취산이었다. 이 영취산을 줄여서 영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당시 영취산 설법 모습을 `영산회상'이라고 한다. 이 영산회상을 노래로 만든 것이 영산회상곡이요, 그림으로 그린 것이 영산회상도다. 그리고 설법 내용을 요약한 경전이 묘법연화경, 곧 줄여 말하는 법화경이다. 그리고, 이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영산전이다. 영산전은 그래서 당연히 석가와 나한들의 모습을 담는 건물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들 나한을 모시는 나한신앙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한전 곧 영산전이 있는 사찰들이 여럿 있었고, 그 중 남아 전하는 곳이 바로 이 거조암 영산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산회상을 기록한 법화경의 내용이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법화경에는 수많은 비유와 상징이 나오는데, 그 중 신약성경과 비슷한 것들이 여럿 있어 오랫 동안 많은 논쟁을 낳았다. 쓴 포도나무에 관한 비유, 돌아온 탕자 이야기 등이 성경 내용과 아주 흡사한 탓이다.
그래서 일부에선 시대가 나중인 신약이 법화경을 베꼈다는 파격적 주장까지 나왔다. 그리고 예수의 행적이 30대 초반 이전, 그러니까 16살 이후 30대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점도 이런 의혹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가설 가운데에 하나가 예수가 이 청년기에 인도로 가서 법화경을 접했고 이런 경험이 이후 신약내용으로 이어졌을지 모른다는 것이 있다. 또는 예수가 이 시절 이집트 광야로 가서 최초의 수도원 운동에 참여했다는 가설도 있다. 예수가 최소 4개국어에 정통했다는 기록도 이런 추정에 영향을 미쳤다.
좌우지간 이 나한들은 모두 500여명인데, 일반적으로는 예수의 12대 제자처럼 석가의 핵심 수제자인 10대 나한이나 16대 나한 정도를 모시게 된다. 5백몇명이나 되는 나한을 모두 모시려면 절집이 엄청나게 커져야 하는 것도 이유다.
그런데 이 영산전은 526 나한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래서 드물고, 또 특이한 곳이다. 한마디로 `오리지날 영산전'인 셈이다.
![P1080612.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17980_78846.jpg_M800.jpg)
재미있는 저 표정들을 보라. 이 나한들은 고려시대 것은 아니고 조선시대 흙으로 빚은 소조상들이다.
원래는 이렇게 생생한 표정과 색깔이 있지 않았다고 한다. 20여년 전인가 한 미대 교수가 자청하고 나서 일일이 조상에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너무 해학 위주로 그린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은데, 어찌됐든 영산전을 특별한 곳으로 만든 것은 틀림없다.
![P1080613.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80913_72894.jpg_M800.jpg)
영산전은 그 디자인만으로는 창고를 연상시킬 정도로 무뚝뚝하고 간단한 건물이다. 건물 바닥에도 마루가 없이 그냥 맨 바닥이다. 지금은 그 위에 장판을 깔고 나한을 올려놨다. 창문도 여닫이나 미닫이가 아니라 그냥 창이다. 건축의 진화단계로 보면 한참 전 것이어서 지금 우리가 보면 엉성할 정도다.
그럼에도 이 건물이 사진으론 보여줄 수 없는 포스를 뿜는 것은 고려시대 건물들만이 가지는 강력한 힘 때문일 것이다.
농담삼아 "고려 건물은 창고라도 남아있기만 하면 국보"라고 말한다. 그건 단순히 오래되어서만은 아니다. 고려 건축이 지니는 특별함 때문이다.
고려의 건물은 조선의 것과 달랐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고려는 넉넉한 경제력과 화려함과 규모를 추구하는 미감으로 크고 웅장한 집을 지었다. 반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고 물질보다 정신세계를 중시한 조선은 자연스럽고 소박한 건물들을 선호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 건축의 특징이 자연과의 조화, 자연미의 추구 등으로만 생각하지만 고려의 건축은 분명 그와 다르다. 저 영산전은 그런 고려의 문화를 보여준다.
영산전을 보면서 느낀 것은 고려 건물의 힘, 그리고 맞배지붕의 힘이었다. 맞배지붕 집으로 우리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천안 독립기념관의 간판스타 `겨레의 집'이다.
![27836.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img.hani.co.kr%2Feditor%2Fuploads%2F2010%2F09%2F13%2F102879_7321.jpg_M800.jpg)
겨레의 집은 동양 최대의 맞배지붕 집이라고 한다. 건물 크기는 실로 거대하다. 높이가 45미터, 길이는 축구장만한 126미터에 이른다. 지붕 넓이만 3000평, 구리기와 4만여장을 올렸다. 중국의 상징 천안문보다도 크다.
거조암 영산전은 길이 30미터, 건물폭 10미터다. 크다고 하지만 겨레의집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럼에도 나는 겨레의집 이상으로 건물의 크기가 압도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영산전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왜 일까. 건물의 비례, 주변 공간과의 상관관계에 따른 것이겠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이 건물을 더욱 커보이게 하는 듯했다.
정직한 목구조의 구조미학, 500나한이란 독특한 풍경, 그리고 고려시대 건물의 묵직한 힘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대구 근처를 갈 기회가 있으면 거조암 영산전을 한번 들러보시길 권한다. 600년 넘은 고려 건축의 포스가 당신을 반겨줄 것이다.
by 구본준 http://blog.hani.co.kr/bonb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