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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8. 년도 등의 표기를 바로잡아 다시 올리다.
2017.11.12.15:33 요약본을 정리하여 올리다.
2018.01.09. 12:40. 1805년에 부임한 영월부사 박규순(朴奎淳)의 내력을 추가하다.
2018.01.23. 13:01 1698년까지는 영월군, 1699년부터 1895년까지는 영월도호부, 1896년부터는 영월군 이므로 선생안에서
▷ 이기재(李基栽) 갑신년(甲申年, 1824년 순조 24) 11월 초 3일에 영월군수를 제수 받아~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로 수정
2018.01.23. 13:22 정시윤(丁時潤) 각주에서~을과 4(乙科4)에 합격하여 영월부사(參知議政府事)를 지냈다.~에서
~ 을과 4(乙科4)에 합격하여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지냈다~로 수정하다.
2018.01.25.15:32 영월군수 강봉원, 함기성 을 추가하다. *【근거문헌;『역주 장릉지보유』283쪽】
2023.05.02.21:00. 영월 군수(寧越郡守) 최유건(崔有建).인조 1년 계해(1623) 4월 10일(기사) 찾아내어 추기
『역주장릉지속편』(286쪽)에 <重修拜鵑樓後尋院志感(배견루를 중수한 뒤 서원을 찾아 감회를 적다)> 한시가 기록되어 있고 인물요약이 있어 기록을 추가하다.
2023.08.05.10:42 [추기]중종 1년 10월 2일 정미 3번째기사 1506년 영월 군수(寧越郡守) 장승조(張承祖) 등을 을 도태시키다.
2023.08.5.11:02[추기]영월 군수(寧越郡守) 이각(李殼), 홍사원(洪士源), 맹종인(孟宗仁), 이수지(李守智), 김희성 (金希聖), 박충원(朴忠元) , 이방필(李邦弼), 윤구(尹昫) `윤후(尹昫), 조수헌(趙守憲), 이유훈(李有訓) , 정구(鄭逑), 박준(朴浚), 김정룡(金廷龍) ,정상철(鄭象哲), 김택용(金澤龍) , 구심(具瀋), 이문빈(李文賓), 박지계(朴知誡), 신희손(辛喜孫), 박중규(朴重圭) , 김시경(金始慶) . 이경오(李敬五), 정경원(鄭敬源)
2023.08.10. 15:13 조선왕조실록 영월부사 관련 인물별 기록을 추기하다
영월 부사(寧越府使) 김시경(金始慶), 윤광(尹珖), 이보온(李普溫), 박규순(朴奎淳), 윤효관(尹孝寬), 송응룡(宋應龍), 이용하(李龍夏), 이명우(李明宇), 홍병도(洪秉燾),
2023.12.28 최자섭(崔自涉) 1457년 영월군수 .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의 사위 , 추가기록하다.
2024.02.04 13:51 김복항(金復恒) 세종 8년 9월 18일 1426년)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로 명을 받아 세종임금을 친견하다
<세종 8년 9월 18일 무신 2번째기사 1426년> 추가기록하다.
영월군선생안(寧越郡先生案)
▷ 김복항(金復恒) 세종 8년 9월 18일 1426년)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로 명을 받아 세종임금을 친견하다
<세종 8년 9월 18일 무신 2번째기사 1426년>
▷ 최자섭(崔自涉) 1457년 영월군수 .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의 사위
근거 : 고전번역서 > 도곡집 제1권 / 시(詩)마흔세 번째〔其四十三〕: 세조 때에 영천 최씨(永川崔氏)인 최자섭(崔自涉)이 영월 현감으로 있었는데, 장인인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도와 단종 복위에 가담하였다가 장인과 사위가 동시에 순절하였고, 강릉 최씨인 최시창(崔始昌)도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로 있으면서 아들 면(沔)과 함께 참여하였다가 거사하기 전에 누설되어 아들과 함께 화를 당하였는데, 본문의 ‘여러 최씨’는 이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한미한 집안이었는데, 이곳의 태수가 어찌하여 이들을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시켰느냐고 반문한 듯하나 자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 심호(沈灝) 천순(天順) 임오년(壬午年, 1462년 세조 7) 10월 29일에 부임하였다.
▷ 김우무(金雨畝) 성화(成化) 을유년(乙酉年, 1465년 세조 10) 10월 25일에 부임하였다.
▷ 윤사유(尹師有) 정해년(丁亥年, 1467년, 세조 12) 6월 19일 부임하였다.
▷ 최응현(崔應賢) 임진년(壬辰年, 1472년, 성종 3) 8월 초 9일에 부임하였다.
▷ 윤보상(尹甫尙) 정유년(丁酉年, 1477년, 성종 8) 12월 초 4일에 부임하였다.
▷ 박계금(朴繼金)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 13) 12월 22일에 부임하였다.
▷ 허지(許芝) 정미년(丁未年, 1487년 성종 18) 2월 22일에 도착하여, 같은 해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 박시행(朴時行) 정미년(丁未年, 1487년 성종 18) 5월 29일 부임하였다.
▷ 황진손(黃震孫) 홍치(弘治) 경술년(庚戌年, 1490년 성종 21) 9월 초 9일에 부임하였다.
▷ 신숙근(申叔根) 을묘년(乙卯年, 1495년 연산 1) 9월 22일에 부임하였다.
▷ 한근(韓謹) 경신년(庚申年, 1500년 연산군 6) 10월 10일에 부임하였다.
▷ 윤상노(尹尙老) 임술년(壬戌年, 1502년 연산군 8) 10월 27일에 부임하였다.
▷ 신숙권(申叔權) 을축년(乙丑年, 1505년 연산군 11) 3월 15일에 부임하여, 그 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 장승조(張承祖) 을축년(乙丑年, 1505년 연산군 11) 11월 16일에 부임하였다.
중종 1년 10월 2일 정미 3번째기사 1506년 영월 군수(寧越郡守) 장승조(張承祖) 등을 을 도태시키다.
▷ 김몽남(金夢男)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 12) 11월 26일에 부임하였다.
▷ 김려(金勵) 무진년(戊辰年, 1508년 중종 3) 10월 8일에 부임하였다.
▷ 신괘(辛詿) 기사년(己巳年, 1509년 중종 4) 11월 17일에 부임하였다.
▷ 이각(李殼) 임신년(壬申年, 1509년 중종 7) 3월 초 6일에 부임하였다. 영월부사로 재임 중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중종 11년 3월 27일 무신 4번째기사 1516년
이조가 준직을 서임하는 예와 수령교체 시기에 따른 문제를 건의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영월 군수(寧越郡守) 이각(李殼)·평양 서윤(平壤庶尹) 윤형(尹衡)은 모두 자궁(資窮)143) 한 문과 출신(文科出身)으로 만일 《대전》 대로 준직(準職)144) 을 서임한다면 이들이 마땅히 정(正)145) 이 되어야 하는데, 근자에 정은 과하다 하여 그 직을 낮추어 서임함이 준례이니, 이 사람들의 일을 어떻게 하리까? 농사철인데 가족을 끌고 오게 되면 폐단이 대단할 것이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체직하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근자에 《대전》 대로 준직을 서임하기가 편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으레 낮추어 제수한 것이니 마땅히 이 준례대로 하고, 설사 체직해야 하더라도 또한 가을을 기다렸다 해야 한다."
[註 143]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品階)가 더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되었다는 뜻. 곧 당하 정3품이 되었음을 말한다.
[註 144]준직(準職) : 정3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실직.
[註 145]정(正) : 정3품의 품계로, 봉상시(奉常寺)·내의원(內醫院)·내자시(內資寺)·예빈시(禮賓寺)·제용감(濟用監)·장악원(掌樂院)·사역원(司譯院) 등 관아의 으뜸 벼슬을 말한다.
*중종 15년 6월 28일 갑신 1번째기사 1520년. 간원에서 주서 허백기와 홍사원을 갈기를 청하다
이각(李殼)은 숙천 부사(肅川府使)가 되어 병을 핑계하고 갈려 돌아왔는데도 이제 학관(學官)을 제수하고 또 군직(軍職)에 붙였으니 모두 가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각의 일은 전조(詮曹)에 묻겠다. 나머지는 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신렴(申濂)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 3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 오세창(吳世昌)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 2월 22일에 부임하였다.
▷ 홍사원(洪士源)
*중종 15년 6월 28일 갑신 1번째기사 1520년 . 간원에서 홍사원을 갈기를 청하다
홍사원(洪士原)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때에 지극히 삼가지 않은 자인데 이제 영월 군수(寧越郡守)가 되었으니 모두 가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각의 일은 전조(詮曹)에 묻겠다. 나머지는 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유경조(柳敬祖) 경진년(庚辰年, 1520년 중종 15) 8월 17일에 부임하였다.
▷ 맹종인(孟宗仁)
*중종 19년 6월 28일 신유 2번째기사 1524년
대간이 아뢰기를,영월 군수(寧越郡守) 맹종인(孟宗仁)은 혼망(昏妄)하여 백성을 다스리기에 맞지 않습니다.
다 가소서."하고, 아뢰었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 심광손(沈光孫)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 1524년, 중종 19) 8월 초 3일에 부임하였다.
▷ 조공(趙珙)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 5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 유문함(柳文咸)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 11월 12일에 부임하였다.
▷ 안서(安諝)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 11월 20일에 부임하였다.
▷ 이수지(李守智)
중종 29년 4월 28일 갑자 4번째기사 1534년. 간원이 영월 군수와 충주 목사의 체직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월 군수(寧越郡守) 이수지(李守智)는 배우지 않아 아는 것이 없고 소행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백성들 다스리기에 합당하지 못하며, 충주 목사(忠州牧使) 서후(徐厚)는 백성들 다스리기에는 부지런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폐단만 끼치니, 모두 서둘러 체직시키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주의(朱懿) 을미년(乙未年, 1535년, 중종 30) 11월 초 8일에 부임하였다.
▷ 박수(朴燧)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 5월 20일에 부임하였다.
▷ 박세호(朴世豪)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 정월 27일에 부임하여, 신축년(辛丑年, 1541)정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 권수중(權守中)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 5월 초 4일에 부임, 같은 달 초 8일에 세상을 떠났다.
▷ 연현령(延玄㱓)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 6월 24일에 부임하였으나, 7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 김희성 (金希聖)
*중종 36년 7월 26일 경술 2번째기사 1541년
헌부가 아뢰기를, 영월 군수(寧越郡守)는, 7개월 안에 3원(員)이 잇달아 죽어서 관청의 사무가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흉년을 만나 더욱 심하게 되었으니 이곳의 군수를 택차(擇差)할 때에는 재간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회복시킬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군수 김희성(金希聖)은 천고(賤賈)의 계출(系出)인데다가 인물이 용렬하여 결코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윤허한다." 답하였다.
▷ 박충원(朴忠元)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 9월 초 7일에 부임했으나, 종사관(從事官)으로 차출되어 갔다. 문관이다.
*명종 즉위년 11월 16일 을해 1번째기사 1545년
병조 판서 민제인(閔齊仁)이 아뢰기를, "~신은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사람이 없다 하고, 국체 역시 크게 훼손될까 두렵습니다. 재망(才望)이 있는 자를 다시 가려서 국체를 높이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경이 만약 이 직임에 맞지 않는다면 대신이 어찌 의논하여 차임했겠는가." 하였다.
민제인이 종사관 2인을 서계하니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충원(朴忠元)과 예조 정랑 이홍남(李洪男)이다.】 전교하기를,
"알았다. 박충원에게 하서하여 속히 올라 오도록 하라." 하였다.
▷ 민종건(閔宗騫)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1) 정월 18일에 부임하였다.
▷ 김효준(金孝俊)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 2월 초 7일에 부임하였다.
▷ 이경(李瓊)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 2월 초 7일에 부임하였다.
▷ 최수증(崔壽增)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 11월 초 10일에 부임하였다. 임자년 7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 원옥정(元玉丁)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 8월 초 7일에 부임하였으나 그 해 9월 달에 부모상을 당하여 상체(喪遞)되었다.
▷ 권륜(權綸)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 12월 초 2일 영월에 도착하여,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 3월 초 7일에 세상을 떠났다.
▷ 고세영(高世英)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 4월 2일 영월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병진년(丙辰年, 1556)에 고성의 이수근(李秀根)과 서로 바꾸어 인사이동이 되었으나, 이수근은 도임하지 못하고 교체되었다.
▷ 정두형(鄭斗亨) 형조(刑曹)에서 정랑 벼슬을 하다가 병진년(丙辰年, 1556년 명종 11) 8월 초 4일에 도착하였다. 그 후 무오년(戊午年, 1558년 명종 13) 6월 21일에 인사이동으로 영월을 떠났다. 문관이다.
▷ 이준민(李俊民) 순변사(巡邊使)종사관(從事官)으로 있다가 무오년(戊午年, 1558년 명종 13) 윤 7월 18일에 부임하였다. 그 후 신유년(辛酉年, 1561 명종 16)에 강릉부사로 이임하였다. 문관이다.
*명종 13년 7월 4일 기유 1번째기사 1558년, 이준민(李俊民)을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삼았다.
▷ 변훈남(卞勳男) 장악주부(掌樂主簿)로 있다가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 2월 초 4일에 부임하였다. 그 후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 정월 초 3일에 과만체(瓜滿遞, 만기가 되어서 떠나는 인사제도)로 영월을 떠났다.
▷ 박란(朴蘭) 공조(工曹)에서 정랑(正郞) 벼슬을 하다가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 2월 초 3일에 영월군수로 부임했으나, 그 해 10월에 화재의 책임을 물어 파직되어 돌아갔다. 문관이다.
▷ 조응서(趙應瑞)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 10월 15일에 부임하였다. 융경(隆慶)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 6월에 근무평가인 고과점수에 최하점인 ‘거수(居水)’를 받아 전근되었다.
▷ 김명언(金明彦) 융경(隆慶, 1568년)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 9월 초 8일에 부임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문관이다.
▷ 유간(柳幹)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 11월 초 3일에 도착하였다. 그 후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 조인각(曺仁角) 만력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 2월 29일에 부임하였으나, 그해 7월에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 권대덕(權大德)
▷ 정언규(鄭彦珪)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 9월 초 7일에 부임하였다.
▷ 조대건(曺大乾)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9) 2월 20일에 부임하였다.
▷ 임중신(任重臣)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 11월 20일에 부임하였다.
▷ 심연(沈鍊)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 2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영월 사람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 신세림(申世霖)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 11월 12일에 부임하였다.
▷ 김협(金車夾)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 9월 초 10일에 부임하였다.
▷ 김륵(金玏) 지평걸군(持平乞郡)에서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 8월 초 2일에 도착하였다. 그 후 과체(瓜遞, 만기가 되어서 떠나는 인사제도)로 영월을 떠난 후, 홍문관 교리의 벼슬을 하였다. 문관이다.
*선조18년 (宣祖 十八年) 1585년(을유) 을유에 김륵(金玏)이 이 고을 군수가 되었는데, 감사 정곤수(鄭崑壽)에게 청하여 비로소 제청(祭廳) 3간과 재실과 부엌간을 묘 옆에 짓고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노산군 신주라고 쓰고, 부인 송씨 위패를 배향하여 세시에 제사를 드렸다. 《유천차기》[고전번역서 >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 제4권 > 단종조 고사본말]
[奉化敏節公金玏神道碑] 봉화 민절공 김륵 신도비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운계2리에 있다. 조선 중기 문신 김륵(1540~1616)의 사적(事蹟)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김륵의 본관은 예안,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영천 출생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집사(安集使)로 영남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고, 1593년 경상우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이 되어 ‘시무 16조’를 상소하였다. 뒤에 충청도관찰사·안동부사 등을 지내고, 1612년(광해군 4) 대사헌으로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강릉으로 유배될 처지에서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화를 면하였다.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영천(榮川:영주)의 구강서원(龜江書院)에 배향되었다.[두산백과사전]
▷ 이영서(李榮緖)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 8월 초 6일에 부임하였다.
▷ 윤유후(尹裕後)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 4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 이인원(李仁元)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 10월 20일에 부임하여,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 6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인사이동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월 초 일에 다시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음관(蔭官)으로 적을 토벌하기가 불가하다는 장계가 올라와 다시 인사 이동되었다.
▷ 이공좌(李公佐)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 10월 17일에 부임하였다. 그 후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 11월 18일에 대간(臺諫)들의 장계(狀啓)에 의해 파직되었다.
▷ 이방필(李邦弼)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 12월 초 10일에 부임하여,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 7월 20일에 인사 이동되었다. 무관이다.
*선조 27년 6월 24일 신미 3번째기사 1594년
사헌부가 아뢰기를, 영월 군수(寧越郡守) 이방필(李邦弼)은 사람됨이 탐욕, 교활하여 재물을 거둬들이는 것만을 일삼아 창고의 곡물을 공공연하게 착복하는데다가 너무 가혹하게 수탈하니,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유망(流亡)한 사람이 태반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루도 관직에 있어서는 안 되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정엽(鄭燁) 광흥창(廣興倉) 첨정(僉正)에서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 7월 22일에 군수로 부임,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 9월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인사이동 되었다. 문관이다.
▷ 조윤희(曺胤禧)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 10월 24일에 부임하여,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 3월 16일에 파직되어 돌아갔다.
▷ 박희성(朴希聖)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 5월 12일에 부임하여, 12월 18일에 인사이동 되었다.
▷ 이성남(李誠男)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 정월 20일에 부임하여,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 5월에 인사 이동되었다. 무관이다.
▷ 황언(黃鶠)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 5월 24일에 부임하여, 6월 초 4일에 강원감사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 이희보(李希甫)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 6월 22일에 부임하여 12월에 인사 이동되었다. 무관이다.
▷ 심은(沈訔)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 정월 18일에 부임하여,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 6월에 근무성적이 좋지 않아(고과점수가 최하위등급인 居水를 받음) 전근되었다.
▷ 한백겸(韓百謙)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 8월 초 4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 2월에 동생 준겸(俊謙)이 4도 도예찰부사(四道都禮察副使)가 되자 상피(相避)에 의해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인사 이동되었다. 영월읍민들이 덕정비를 세웠다.
▷ 윤구(尹昫)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 3월 초 1일에 부임하였으나, 그 해 8월 대간(大諫)들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읍민들이 덕정비를 세웠다. 문관이다.
*선조 34년 2월 3일 임신 8번째기사 1601년. 윤후(尹昫)를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삼았다.
선조 34년 8월 25일 경인 5번째기사 1601년, 영월 군수 윤구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김정일(金鼎一)이 와서 아뢰기를, 영월 군수(寧越郡守) 윤구(尹昫)는 전에 강원 도사로 있을 때 근간(謹簡)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많았는데 본군을 제수받고도 아직 고치지 못하고 여전히 비루합니다. 심지어는 일을 보면서 망연하게 두서를 몰라 하리들에게 위임하므로 백성들이 그 해를 받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조수헌(趙守憲)
*선조 34년 9월 14일 무신 2번째기사 1601년. 헌부가 아뢰기를,
영월 군수(寧越郡守) 조수헌(趙守憲)은 일찍이 중한 논박을 받아 공론에 용납되지 못하였는데도 5품이 된 지 겨우 두어 달 만에 갑자기 4품으로 승진했으니, 관작이 외람되어 물의가 비등합니다. 파직하여 개정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정구(鄭逑) 신축년(1601, 선조34)에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기언 제39권 / 동서기언(東序記言) 문목공(文穆公) 광명(壙銘)>
*선조 34년 9월 1일 을미 1번째기사 1601년.정구(鄭逑)를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삼았다.
《실록》을 살펴보건대 ‘정구가 일찍이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있었는데 서행(西幸)007) 할 때 궁인(宮人) 중에 성천부중에 머문 사람이 있었다. 정구는 백성들에게 많이 거두어들여 궁인을 잘 섬겼다.’고 하였다. 아, 정구는 초야에서 자신을 수양한 선비이다. 궁인을 잘 섬기는 것은 비록 세상의 용렬하고 비루한 자라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 아는데, 어찌 정구의 어짐으로 이런 일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는 정구가 정인홍(鄭人弘)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이웃 고을에 살면서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홍의 무리들이 멋대로 무함하고 비방한 것이니, 괴이할 것이 없다.
▷ 박준(朴浚)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 10월 21일에 부임하여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 4월 대간(臺諫)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당상문관(堂上文官)이다.
*선조 35년 4월 21일 임자 3번째기사 1602년
헌부가 아뢰기를,영월(寧越)은 난리를 겪은 이후로 형편없이 결딴났으니, 진실로 적임자가 아니면 결코 소생시키기 어렵습니다. 군수 박준(朴浚)은 가는 곳마다 일을 망친 사람인데 이 쇠잔한 고을에 부임해서도 잘못을 고치지 않고 오로지 가렴주구만 일삼으니 백성이 살 수 없어 온 경내가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파직을 명하고 그 후임자를 충분히 가려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정섭(鄭爕)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 6월 초 9일에 부임하여,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 11월에 대간(臺諫)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 이유훈(李有訓)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 정월 초 6일에 부임하여,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 3월 10일에 암행어사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 선조 38년 8월 1일 계묘 5번째기사 1605년. 영월·정선·춘천·평창·원주·횡성·인제 등 폭우로 인한 참상에 대해 강원도 감사 한덕원(韓德遠)이 아뢰기를, "영월 군수(寧越郡守) 이유훈(李有訓)이 첩정에 ‘이달 17일부터 비가 오락가락 하고 동풍이 연일 사납게 불더니 바다의 갈매기떼가 까맣게 날아왔는데 보기에 매우 해괴했다. 그후 22일 다시 큰비가 억수 같이 퍼붓고 바람이 거세지더니, 불시에 고을을 덮쳐 관사(官舍)·군기(軍器) 및 공해(公廨) 등 여러 채가 일시에 침수되었고 군수는 간신히 피해 나왔다. 이튿날 아침 물이 빠졌는데, 관사의 상방(上房)과 동루(東樓)만 겨우 남아 있고 다른 대소 공해는 모두 휩쓸려 갔으며, 인가 1백 39채도 역시 떠내려갔다. 소·말·개·닭 등은 대부분 익사하고 곡식과 나무는 뿌리채 뽑히거나 말라붙어 완전히 백사장으로 변한 것이 말할 수 없이 참혹하다.’고 했다.
*선조 39년 3월 3일 신미 3번째기사 1606년. 강원도 암행 어사 박안현(朴顔賢)이 아뢰었다.영월 군수(寧越郡守) 이유훈(李有訓)은 유민(流民)의 소를 역(役)을 피하였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잡아다 혼인 때의 잔치 음식으로 쓰는가 하며, 갓 시집간 딸을 아문에 머물러 두었다가 신이 경내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내보냈습니다.
▷ 허징(許澂)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 3월 22일에 부임하여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 12월에 고과성적이 좋지 않아(최하위 등급인 居水)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 김정룡(金廷龍)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 정월 17일에 부임하여, 8월에 암행어사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광해 즉위년 8월 18일 임신 1번째기사 1608년. 강원도 암행 어사 정광성(鄭廣成)의 서계로 인하여 전교하였다.
영월 군수(寧越郡守) 김정룡(金廷龍)과 인제 현감(麟蹄縣監) 이경조(李慶祚)는 먼저 파직을 하고 나서 추문하라.
*광해 즉위년 9월 4일 무자 3번째기사 1608년, 장령 박건이 아뢰기를,
"신들이 강원·충청 두 도의 암행 어사가 조사한 불법 문서를 고찰하였는데, 그 가운데 미곡(米穀)과 잡물(雜物)을 나누어 먹고 사용(私用)한 곳이 있으니, 이것은 당연히 각도에 행이(行移)하여 추고로 처치하여야 됩니다. 영월군(寧越郡)에는 은(銀)을 산 무명에 관한 건기(件記)가 한 장 있는데, 은값의 무명이 20필에 이르렀으나 이 은을 어느 곳에 사용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은을 사는 데 필요한 무명을 백성들에게 받아들였으니, 극히 해괴합니다.
영월 군수 김정룡(金廷龍)과 인제 현감 이경조(李慶祚)를 잡아 가두고, 은을 사서 사용한 곳과 신공을 거두어 사적으로 사용한 연유와 재목을 보낸 곳에 대하여 낱낱이 엄하게 국문하고 법에 따라 처치하여, 한편으로 탐욕을 부리는 나쁜 풍속을 경계시키고 한편으로 남을 주거나 자기에게 납입하는 법을 엄히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정상철(鄭象哲)
*광해 즉위년 12월 16일 기사 1번째기사 1608년. 〈사간원이 아뢰기를,
영월 군수(寧越郡守) 정상철(鄭象哲)은 백성들을 학대하고 자신을 살찌우느라 못하는 짓이 없으며,
~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상철은 체차하라." 하였다.〉*체차 : 다른 사람으로 교체
▷ 정순복(鄭純復)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 9월 25일에 부임하여 11월 24일에 별세하였다.
▷ 김택용(金澤龍)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1) 2월 초 3일에 부임하였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 10월에 대신(大臣)들이 논의하기를 기유년에 전결(田結, 조세를 매기기 위한 밭의 면적)수가 계묘년 양안(量案, 토지대장) 수보다 적다는 이유로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
*광해 2년 9월 23일 을축 4번째기사 1610년, 동부승지 이지완(李志完)이 아뢰기를,"소신이 삼가 엄명을 받들고 영월(寧越) 땅에 가서 노산(魯山)125) 의 묘소에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묘소가 심산 궁곡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며 묘소를 수직(守直)하던 여섯 명도 난리 후에 모두 죽어 황량한 산에 잡초만 우거진 모습이 자손 있는 일반인들의 묘소보다도 오히려 못했으므로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군수 김택룡(金澤龍)이 약간의 승려를 모집하여 몇 칸짜리 암자를 지은 뒤 그들에게 수직하며 초목(樵牧)을 금하게 하려 하나 승역(僧役)이 번다하고 무거워 장차 묘를 보호하며 살 수 있게 할 처지가 못 되므로 매우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오대산(五臺山) 사고(史庫)를 수직하는 예에 따라 본도의 승군(僧軍)을 나누어 배정할 때에도 일체 침해하지 말게 하고 잡역을 완전히 면제시켜 수호하는 일만 전담시킨다면 〈그런대로 영구히 시행할 규정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여 감사에게 이문(移文)하는 것이 타당할 듯한데, 본군(本郡)의 사자(士子)들이 연명(聯名)으로 정장(呈狀)하며 간절히 전달해 주기를 바랐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알았다. 본도 감사에게 하서(下書)하여 각별히 수호하게 하라."하였다.
▷ 이결(李潔)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 11월 19일에 부임하여 임기를 채웠다. 그러나 읍민들이 감사에게 유임을 원하자 이를 허락하여 1년을 더 유임시킨 후,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 4월 18일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전근되었다.
▷ 구심(具瀋)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 6월 초 3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형벌을 잘못 처리한 죄로 대간(臺諫)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
*광해 9년 9월 27일 기축 3번째기사 1617년.사간원이 영월 군수 구심의 패륜으로 탄핵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영월 군수(寧越郡守) 구심(具瀋)은 사람이 패악스러운 데다가 성품도 잔인하여 백성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술에 취해 형벌을 함부로 써서 무고한 자를 장형(杖刑)을 가하여 죽이고는, 그 죄를 고발할까 두려워하여 은밀히 하인에게 미포(米布)와 관곽(棺槨)을 충분히 주어 그로 하여금 매장하게 함으로써 고발할 기한을 넘기게 하였으니, 그 패악스러운 정상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 엄열(嚴悅)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 윤 4월 17일에 부임하여, 경신년(庚申年, 1620년 광해군 12) 10월에 술로 인한 문제로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의해 파직되었다.
▷ 이승형(李升亨) 태창(泰昌, 명나라 광종(光宗)의 연호) 경신년(庚申年, 1620년 광해 12) 정월 초 10일에 부임하여, 천계(天啓)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 11월에 화재의 책임을 물어 파직되어 돌아갔다.
▷ 이문빈(李文賓)
*광해 14년 11월 5일 정유 3번째기사 1622년. 이문빈(李文賓)을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삼았다.
▷최유건(崔有建) 영월 군수(寧越郡守)
인조 1년 계해(1623) 4월 10일(기사) 흐리고 하우(下雨)가 옴
강원 감사의 서목(書目)은 “- 3자 원문 빠짐 - 법에 있어 상피(相避)해야 하니 해조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고, 정선 군수(旌善郡守) 장응명(張應明), 횡성 현감(橫城縣監) 변충길(邊忠吉), 평창 군수(平昌郡守) 이문현(李文顯), 보안도 찰방(保安道察訪) 윤현(尹玹), 영월 군수(寧越郡守) 최유건(崔有建)을 파출하소서.”라는 일이었다. 2023.05.02.21:00. 기록찾아내어 추기
▷ 윤제(尹璾) 광흥창 관리로 천계(天啓, 명나라 연호)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1) 5월 초 1일에 부임하여, 12월에 암행어사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 박지계(朴知誡)
*[사계전서 제44권 / 부록(附錄) 연보(年譜)]갑자년(1624, 인조2) 사계선생(김장생) 77세 6월 갑진일 -22일 당초에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지계(朴知誡)가 상소를 올려 사묘(私廟)를 건립하여~
*인조 2년 2월 17일 신축 6번째기사 1624년.영월 군수 박지계가 세금의 감면과 무사를 강습시키는 일에 대해 아뢰다
박지계가 아뢰기를, "이 역적은 평정되었으나 나라 일에는 오히려 걱정스런 점이 있으니, 모든 일에 있어 간략히 하기를 힘써서 맥도(貊道)022) 를 행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고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무사(武事)를 강습하게 하는 것이 급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종묘와 백관의 예(禮)가 있으므로 자연히 폐해가 백성에게 미치는 것이다."하였다.
[註 022]맥도(貊道) : 북쪽 오랑캐의 조세 제도를 말함. 북쪽 지방에는 오곡이 나지 않고 기장만이 나는데 성곽(城郭)·궁실(宮室)이 없고 묘에 제사지내는 예(禮)도 없으며 제후들을 대접하고 백관(百官)과 유사(有司)도 없으므로 20분의 1을 조세로 받아도 충분하다는 것.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
▷ 조명욱(曺明勖)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 3월 초 3일에 부임하였으나, 수뢰(뇌물을 받음)죄로 파직되었다. 문관으로 당상관(堂上官)이다.
**인조 2년 12월 22일 임인 3번째기사 1624년. 헌부가 영월 부사 조명욱의 파직을 건의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영월 부사(寧越府使) 조명욱(曺明勗)은 부임한 이후 오로지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만 일삼아 형편없는 고을을 날로 결딴나게 하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조명욱은 조탁(曺倬)의 아들로서 평소 한 가지도 볼 만한 행실이 없었다. 일찍이 혼조 때 유희분(柳希奮)의 집과 혼인하고 궁금(宮禁)에 연줄을 대어 중외의 직책을 역임하다가 반정(反正)한 이후 세상의 버림을 받았다. 이괄(李适)의 변란 때 호종(扈從)한 노고가 있었기 때문에 본군(本郡)에 제수되었는데, 여전히 근신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많았다.
▷ 최행(崔行)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 2월 초 6일에 부임하여, 같은 해 12월 고과성적이 좋지 않자(하위등급인 居水) 감사가 장계를 올려 파직되었다.
▷ 김상복(金尙復)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 2월 초 2일에 부임하여, 같은 해 12월에 감사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 신희손(辛喜孫)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 정월 26일에 부임하여,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 2월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
*인조 7년 2월 30일 병진 2번째기사 1629년.암행 어사 심지원이 영월 군수 신희손 등의 불법 행위를 치계하다
강원도 암행 어사 심지원(沈之源)이 영월 군수 신희손(辛喜孫) 등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치계하니, 상이 그를 잡아들여 추국하라 명하였다.
▷ 김수현(金守玄)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 4월 초 6일에 부임하여,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 8월 모친상으로 교체되었다. 영월 읍인들이 청덕비를 세웠다. 문관이다.
▷ 최위(崔瑋)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 10월 17일에 부임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 7월에 국장도감(國葬都監)의 노역에 늙은 군인들을 보낸 이유로 감사(강원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파직되었다.
▷ 이목(李莯)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 11월 초 3일에 부임하여,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 7월 23일에 교체되었다. 문관 당상관이다.
▷ 권혜(權潓)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 윤 8월 초 7일에 부임하여, 무인년(戊寅年, 1638년 인조 16) 11월 모친상을 당하여 교체되었다.
▷ 허제(許稊) 기묘년(己卯年, 1639년 인조 17) 정월 18일에 부임하여,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 11월에 화재(火災)를 당하여 파직 교체되었다.
▷ 채성구(蔡聖龜)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 정월 초 3일에 부임하여, 순치(順治)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 2월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영월을 떠났다. 영월 읍인들이 덕정비(德政碑)를 세웠다. 문관이다.
▷ 최노첨(崔魯詹) 순치(順治)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 4월 22일에 부임하여, 같은 해 6월 전임 평시령(平市令)으로 재직할 때 얼음 장부를 잘못 관리한 일로 대간(臺諫)들의 장계(狀啓)로 파직되었다.
▷ 이유창(李有淐)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 7월 24일에 부임하여,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 5월 22일 강원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해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 손필대(孫必大)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 6월 26일에 부임하여, 무자년(戊子年, 1648년 인조 26) 12월 대간(臺諫)들의 장계(狀啓)에 의해 파직되어 돌아갔다.
▷ 홍명현(洪命顯)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 정월 17일에 부임하여, 신묘년(辛卯年, 1651년 효종 2) 8월에 화재를 입은 책임을 물어 파직되어 돌아갔다.
▷ 전벽(田闢) 신묘년(辛卯年, 1651년 효종 2) 11월 25일에 부임하여,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 6월 근무평가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파직(罷職) 교체되었다. 문관이다.
▷ 이문웅(李文雄)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 윤 7월 초 6일에 부임하여, 병신년(丙申年, 1656년 효종7) 5월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 허서(許舒) 병신년(丙申年, 1656년 효종7) 6월 12일에 부임하여, 같은 해 12월 술을 많이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고과평가에서 최하급을 받아 파직(酒居水以罷)되었다.
▷ 유창진(柳昌辰) 정유년(丁酉年, 1657년 효종 8) 2월 11일에 부임하여, 무술년(戊戌年, 1658년 효종 9) 6월에 고과(考課, 관리의 근무성적을 조사하여 상벌을 정하는 제도)성적이 좋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문당이다.
▷ 김정하(金鼎夏) 무술년(戊戌年, 1658년 효종 9) 8월 18일에 부임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660년 현종 1) 11월에 원주 황장목(궁중에서 사용하는 소나무) 조사관으로 보고를 정확치 않게 했다는 이유로 이내 체직되었으며, 마침내 유배되었다. 문관이다.
▷ 윤순거(尹舜擧) 경자년(庚子年, 1660년 현종 1) 12월 28일에 부임하여, 강희(康熙, 청나라 성조(聖祖)의 연호)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 7월에 장령(掌令) 벼슬에 임명되었다.
▷ 박정(朴靖) 강희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 8월 초 3일에 부임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 10월에 화재를 당하자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 김현문(金炫文)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 11월 25일에 부임하여,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 12월에 세전(稅錢)을 운반하는 인원을 보내지 않아 감사에게 계문(啓聞) 당한 후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 김상중(金尙重) 경술년(庚戌年, 1670년 현종 11) 2월 16일에 부임하여,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 10월 화재가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당상관(堂上官)으로 문관이다.
▷ 구옥(具鋈)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 11월 초 4일에 부임하여, 계축년(癸丑年, 1673년 현종 14) 정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남관이다.
▷ 이상우(李商雨) 계축년(癸丑年, 1673년 현종 14) 3월 20일에 부임하여,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1) 10월 29일에 화재의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남관이다.
▷ 이광적(李光迪) 병진년(丙辰年, 1676년 숙종 2) 정월 27일에 부임하여,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 11월 22일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 정담(鄭儋) 기미년(己未年, 1679년 숙종 5) 2월 15일에 부임하여, 신유년(辛酉年, 1681년 숙종 7) 7월 22일 몸에 병이 생겨 사직하고 돌아갔다.
▷ 조세휘(趙世彙) 신유년(辛酉年, 1681년 숙종 7) 7월 28일 영월부사로 제수 되었으나, 그 해 9월 24일 영월 용정원(龍井院, 서면 쌍룡리)까지 와서 그곳 역참(驛站)에서 별세하였다.
▷ 곽세익(郭世翼) 신유년(辛酉年, 1681년 숙종 7) 10월 24일에 부임하여, 갑자년(甲子年, 1684년 숙종 10) 1월 12일에 물러났다. 문당으로 당상관이다.
▷ 이무(李堥) 갑자년(甲子年, 1684년 숙종 10) 3월 초 3일에 부임하였으나, 고과심사(考課審査)결과 근무성적이 좋지 않아(貶遞) 그 해 12월에 교체되었다.
*영월군수 자삼 이무(子三 李堥)와 강원감사 어진익(魚震翼)이 서로 도와서 금강정을 중수한 내력이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영월군 금강정기(寧越郡錦江亭記) 기문에 언급되어 있다.
▷ 조이한(趙爾翰) 을축년(乙丑年, 1685년 숙종 11)
2월 초 1일에 부임하였다. 그 해 10월 영모전(永慕殿) 동향제(冬享祭)에 생노루를 생략하고 제향을 올렸다는 이유로 나문(拿問)되어 같은 달 11일에 상경(上京)하였다. 문관이다.
1685년 노산군묘우 옆에 육신사를 건립하는데 애쓴 인물이다.
1685년(숙종 11) 봄, 관찰사 홍만종, 도사 유세명, 군수 조이한, 영월에 잠시 머물던(寓居) 최원(崔遠), 영월 고을의 선비 금용성(琴用成)ㆍ엄인석(嚴麟錫)ㆍ고필성(高必成), 호장의 종인(엄흥도의 宗人) 엄민도(嚴敏道)와 함께 공력을 다하였다.
육신사는 1685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7월에 준공하였고 9월의 마지막 정일(丁日)에 사육신과 호장 엄흥도(嚴興道)를 함께 배향하여 첫 제례를 올렸다.*사당의 이름은 육신사(六臣祠), 모셔진 분은 일곱분이어서 실질적으로는 칠신사(七臣祠)이다.
▷ 임이도(任以道) 을축년(乙丑年, 1685년 숙종 11) 11월 15일에 부임하여,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 5월에 대간(臺諫)들의 장계로 파직되어 물러났다.
▷ 박세장(朴世樟)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 6월 26일에 부임하여,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 4월 초 9일에 세상을 떠났다. 문관이다.
▷ 이후항(李后沆)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 6월 26일에 부임하여, 무진년(戊辰年, 1688년 숙종 14) 2월 12일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제수 받아 3월 초 1일에 상경(上京)하였다. 남관이다.
▷ 이희택(李熹澤)
무진년(戊辰年, 1688년 숙종 14) 4월 초 8일에 부임하여,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 10월 15일 부인이 흉한 일을 당하여 장례를 올리려고 상경하자 교체되었다.
▷ 이순원(李舜元) 경오년(庚午年, 1690년 숙종 16) 정월 초 3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4월 초 6일 원주 도회(都會: 유림들의 전체 모임)의 변장 취재 시관(試官)으로 참석하였다가 물의를 일으켜 감사(관찰사)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문관이다.
▷ 김하세(金夏世) 경오년(庚午年, 1690년 숙종 16) 4월 18일에 부임하여, 고과심사(考課審査) 결과 근무성적이 좋지 않아(폄체, 貶遞) 12월 15일에 교체되어 본가로 돌아갔다. 문관이다.
▷ 심양필(沈良弼) 신미년(辛未年, 1691년 숙종 17) 정월 23일에 부임하여, 10월 27일에 화재의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남관이다.
▷ 이야(李埜) 신미년(辛未年, 1691년 숙종 17) 12월 25일에 부임하였으나, 계유년(癸酉年, 1693년 숙종 19) 12월 18일 도사(都事)와 서로 다툰 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문관당상(文官堂上)이다.
▷ 정수명(鄭洙明)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 2월 12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24일에 전임지(前任地)에서 마전(麻田: 삼베 밭)에 대한 세금 상환을 허위로 기록한 일로 계문(啓聞:잘못된 것을 임금께 글로써 아룀) 후 파직되었다. 남당이다.
▷ 최선(崔渲)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 6월 초 7일에 부임하여, 을해년(乙亥年, 1695년 숙종 21) 2월 20일 송사(訟事)사건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 서문미(徐文微) 을해년(乙亥年, 1695년 숙종 21) 4월 초 6일에 부임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699년 숙종 25) 2월 초 6일에 관청창고와 장릉(莊陵)을 봉축하기 위해 쌓아 놓은 능 도감의 나무를 함께 불태워 버린 일로 인하여 강원도에서 장계를 올려 파직되었다.
▷ 김일기(金一夔) 기묘년(己卯年, 1699년 숙종 25) 2월에 능을 봉(封)함에 따라 같은 달 22일에 영월부사로 임명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 6월 15일에 폄체(貶遞, 정기적인 업무 평가)에 의해 물러났다. 문당이다.
▷ 임진원(任鎭元)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 9월 초 6일에 부임하여, 계미년(癸未年, 1703년 숙종 29) 7월 26일 대간(臺諫)들의 게문(啓聞 : 잘못된 것을 임금께 글로써 아룀)으로 인하여 파직되어 물러났다. 남관이다.
▷ 유명웅(柳命雄) 계미년(癸未年, 1703년 숙종 29) 8월 27일에 부임하여, 갑신년(甲申年, 1704년 숙종 30) 여름에 병적부(兵籍簿)를 잘못 기록한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 이수(李洙) 갑신년(甲申年, 1704년 숙종 30) 9월 초 9일에 부임하여, 정해년(丁亥年, 1707년 숙종 33) 정월에 임기가 만료되었다. 이에 영월 읍민들은 감영(監營)에 알려 더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자 강원도에서는 해유(解由)를 계문(戒文)한 후 맥추지간(麥秋之間)인 동년 6월 초 3일까지 더 근무하고 교체되었다.
▷ 박중규(朴重圭) 정해년(丁亥年, 1707년 숙종 33) 7월 18일에 부임하여, 무자년(戊子年, 1708년 숙종 34) 6월 초 10일에 청주목사 벼슬을 제수 받고 영전되어 떠났다.
*숙종 34년 윤3월 24일 신축 1번째기사 1708년, 영월 부사(寧越府使)에 박중규(朴重圭)를 내어 보냈다.
▷ 송규현(宋奎炫) 무자년(戊子年, 1708년 숙종 34) 7월 초 4일에 벼슬을 제수 받고 같은 달 27일에 부임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709년 숙종 35) 11월 19일 화재의 책임을 물어 교체되었다. 남당(南堂)이다.
▷ 정시윤(丁時潤) 경인년(庚寅年, 1710년 숙종 36) 정월 초 1일에 부임하여, 신묘년(辛卯年, 1711년 숙종 37) 2월 사의를 표하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문당(文堂)이다.
▷ 이만선(李萬選) 신묘년(辛卯年, 1711년 숙종 37) 4월 20일에 부임하여, 계사년(癸巳年, 1713년 숙종 39) 8월에 만기를 채우고 교체되었다. 문당(文堂)이다.
▷ 김홍정(金弘楨) 계사년(癸巳年, 1713년 숙종 39) 9월 16일에 부임하여, 을미년(乙未年, 1715년 숙종 41) 3월 21일 병으로 사직하였다. 문당이다.
▷ 남적명(南迪明) 을미년(乙未年, 1715년 숙종 41) 5월 12일에 부임하여, 정유년(丁酉年, 1717년 숙종 43) 8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이성한(李聖漢) 정유년(丁酉年, 1717년 숙종 43) 8월 초 4일에 부임하여, 기해년(己亥年, 1719년 숙종 45) 7월 진영장(鎭影將:조선시대 각 진영의 우두머리 장수)과 상피(相避)관계로 인하여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임순원(任舜元) 기해년(己亥年, 1719년 숙종 45) 8월 21일에 부임하여, 신축년(辛丑年, 1721년 경종 1) 12월에 고과심사(考課審査) 결과 근무성적이 좋지 않아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신필현(申弼賢) 임인년(壬寅年, 1722년 경종 2) 4월 25일에 부임하여, 갑진년(甲辰年, 1724년 경종 4) 6월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 김시경(金始慶) 갑진년(甲辰年, 1724년 경종 4) 7월 27일에 부임하여, 을사년(乙巳年, 1725년 영조 1) 6월 12일 대간(臺諫)들의 계문(啓聞, 대간, 어사, 관찰사 등 신하들이 임금께 글로 알리는 것)에 의해 파직되었다.
*영조 1년 6월 12일 무인 2번째기사 1725년.영월 부사(寧越府使) 김시경(金始慶)은 아내의 상(喪)을 당하여 백성의 돈을 함부로 징수하였으며 금년 봄 구황(救荒)의 정사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유산(流散)되어 산골 마을들이 거의 텅 비어버렸으며,~ 파직(罷職)시키소서."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아뢴 대로 시행하라."하였다.
▷ 윤양래(尹陽來) 을사년(乙巳年, 1725년 영조 1) 7월 24일에 부임하여, 정미년(丁未年, 1727년 영조 3) 4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벼슬이 판서에 올랐다.
▷ 이성조(李聖肇) 정미년(丁未年, 1727년 영조 3) 8월 초 8일에 부임하여, 무신년(戊申年, 1728년 영조 4) 3월 26일에 진상품인 자초용(紫草茸)의 진상을 잘못한 일로 순영(巡營)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 박내정(朴乃貞) 무신년(戊申年, 1728년 영조 4) 4월 초 4일에 부임하여, 기유년(己酉年, 1729년 영조 5) 윤 7월 12일 병으로 교체되었다. 문관으로 당상관이다.
▷ 권익순(權益淳) 기유년(己酉年, 1729년 영조 5) 8월 14일에 부임하여, 임자년(壬子年, 1732년 영조 8) 보리가 익어 가는 윤 5월 17일에 임기가 만료되어 전출되었다.
▷ 권시경(權始經) 임자년(壬子年, 1732년 영조 8) 윤 5월 18일에 제수 받아 6월 13일에 부임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734년 영조 10) 10월에 임기를 마치고 교체되었다.
▷ 이명곤(李明坤) 갑인년(甲寅年, 1734년 영조 10) 11월 13일에 부임하여, 정사년(丁巳年, 1737년 영조 13) 4월 초 4일에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 윤용(尹容) 정사년(丁巳年, 1737년 영조 13) 5월 19일에 부임하여, 10월 11일 정부에서 강도(江都) 유수(留守)로 임명하였다. 문당(文堂)이다.
▷ 조명택(趙明澤) 정사년(丁巳年, 1737년 영조 13) 11월 26일에 부임하여, 기미년(己未年, 1739년 영조 15) 12월 29일 정부에서 대사간(大司諫: 사간원의 책임자로 정 3품 벼슬)에 임명하였다. 문당이다.
▷ 구택규(具宅奎) 경신년(庚申年, 1740년 영조 16) 3월 초 4일에 부임하여, 신유년(辛酉年, 1741년 영조 17) 8월 15일에 사직하였다.
▷ 홍성보(洪聖輔) 신유년(辛酉年, 1741년 영조 17) 9월 15일에 부임하여, 임술년(壬戌年, 1742년 영조 18) 6월 초 7일에 세상을 떠났다.
▷ 김시희(金始熺) 임술년(壬戌年, 1742년 영조 18) 6월 16일에 비답을 받고 8월 16일에 부임하여, 갑자년(甲子年, 1744년 영조 20년) 5월 16일에 교체되었다.
▷ 유건기(兪健基) 갑자년(甲子年, 1744년 영조 20년) 7월 26일에 부임하여, 병인년(丙寅年, 1746년 영조 22) 2월 25일 조정에서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다. 문당이다.
▷ 조하망(曺夏望) 병인년(丙寅年, 1746년 영조 22) 윤 3월 초 9일에 부임하여, 정묘년(丁卯年, 1747년 영조 23) 2월 29일 병으로 인하여 사직하였다.
영조 22년(1746) 2월, 65세에 寧越 府使가 되다.
영조 23년(1747) 2월, 66세에 사직하고 楊湖로 돌아오다. ○ 7월 4일, 졸하다. ○ 9월, 楊根 水南에 장사 지내다.
출처 : 한국문집총간 해제 > 서주집
▷ 이윤신(李潤身) 정묘년(丁卯年, 1747년 영조 23) 4월 초 1일에 부임하여, 무진년(戊辰年, 1748년 영조 24) 6월 7일에 사망하였다. 문당이다.
▷ 김응복(金應福) 무진년(戊辰年, 1748년 영조 24) 8월 13일에 부임하여, 기사년(己巳年, 1749년 영조 25) 12월 15일 고과 성적이 좋지 않아 피직 되었다. 문당이다.
▷ 정권(鄭權) 경오년(庚午年, 1750년 영조 26) 정월 26일에 제수되어, 3월 22일에 부임하였고 신미년(辛味年, 1751년 영조 27) 4월 28일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영전되었다. 문당이다.
▷ 남태온(南泰溫) 신미년(辛味年, 1751년 영조 27) 6월 12일에 부임하여, 계유년(癸酉年, 1753년 영조 29) 10월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이사관(李思觀) 계유년(癸酉年, 1753년 영조 29) 10월 28일에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11월 26일에 부임하였다. 그 후 갑술년(甲戌年, 1754년 영조 30) 10월 22일에 원주목사로 영전되었다. 문당이다.
▷ 윤동준(尹東浚) 갑술년(甲戌年, 1754년 영조 30) 10월 초 3일 조정으로부터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같은 달 29일에 도임하였다. 그 후 병자년(丙子年, 1756년 영조 32) 12월 초 4일에 벼슬을 사직하였다.
문당이다.
▷ 홍종해(洪宗海) 정축년(丁丑年, 1757년 영조 33) 정월 16일에 부임하여, 무인년(戊寅年, 1758년 영조 34) 4월 28일에 벼슬을 사직하고 물러났다. 문당이다.
▷ 이선철(李宣哲) 무인년(戊寅年, 1758년 영조 34) 5월 26일에 부임하여, 기묘년(己卯年, 1759년 영조 35) 6월 15일에 고과심사 성적이 좋지 않아 파직되었다. 문당이다.
▷ 김상구(金尙耈) 기묘년(己卯年, 1759년 영조 35) 8월 26일에 부임하여, 신사년(辛巳年, 1761년 영조 37) 11월 초 1일에 사직하고 돌아감. 문당이다.
▷ 정기안(鄭基安) 임오년(壬午年, 1762년 영조 38) 정원 초 9일에 부임하여, 갑신년(甲申年, 1764년 영조 40) 정월 21일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심발(沈撥) 갑신년(甲申年, 1764년 영조 40) 2월 12일에 부임하여, 병술년(丙戌年, 1766년 영조 42) 6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문당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 정구조(鄭逑祚) 병술년(丙戌年, 1766년 영조 42) 7월 초 8일에 부임하여, 무자년(戊子年, 1768년 영조 44) 12월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이지회(李之晦) 기축년(己丑年, 1769년 영조 45) 정월 16일에 부임하여, 5월 초 4일에 시종원(侍從院)의 시종(승지)으로 전근되었다.
▷ 유진보(柳鎭普) 기축년(己丑年, 1769년 영조 45) 5월 초 9일에 부임하여, 경인년(庚寅年, 1770년 영조 46) 6월 초 7일에 세상을 떠났다. 무당(戊堂)
▷ 윤광(尹珖)
**영조 46년 6월 21일 을미 1번째기사 1770년 대사관 심관이 영월 부사 윤광의 행실이 비루·패악하여 개차를 아뢰다
대사간 심관(沈鑧)이 전계(前啓)를 ~아뢰기를, "영월 부사(寧越府使) 윤광(尹珖)은 행신이 비루하고 패악하여 일찍이 경기의 어느 고을 원으로 있을 적에 이미 대간의 평판을 받았고, 현직에 제수되기에 미쳐서는 여론이 놀라워하였습니다. 청컨대 개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이세향(李世饗) 경인년(庚寅年, 1770년 영조 46) 7월 17일에 부임하여, 12월 15일에 고과심사 결과 성적이 좋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무인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 이만회(李萬拻) 경인년(庚寅年, 1770년 영조 46) 12월 25일 영월부사를 제수 받고 신묘년(辛卯年, 1771년 영조 47) 정월 19일에 부임하였다. 그 후 임진년(壬辰年, 1772년 영조 48) 7월 29일에 문신들을 불러들인다는 전교를 받고 교체되었다. 문인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 구협(具埉) 임진년(壬辰年, 1772년 영조 48) 8월 초 2일에 영월부사를 제수 받고, 8월 21일에 부임하였으나 그 해 9월 25일 집안에 상(喪)을 당하여 교체되었다. 武堂이다.
▷ 신광수(申光洙) 임진년(壬辰年, 1772년 영조 48) 9월 25일 영월부사를 제수 받고, 10월 21일에 부임하여 계사년(癸巳年, 1773년, 영조 49) 12월에 고과 심사(考課審査: 정기적인 감사) 점수가 좋지 않아서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권경(權熲) 계사년(癸巳年, 1773년, 영조 49) 12월 22일에 제수 받아 갑오년(甲午年, 1774년 영조 50) 정월 26일에 부임하였으나 12월 초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 박사윤(朴師崙) 갑오년(甲午年, 1774년 영조 50) 11월 14일에 제수 받아 12월 12일에 부임한 후, 병신년(丙申年, 1776년 영조 52) 12월에 임기 만료로 교체되었다.
▷ 이세택(李世澤) 병신년(丙申年, 1776년 영조 52) 12월 29일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정유년(丁酉年, 1777년 정조 1) 정월 15일에 부임하여 3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 이보온(李普溫) 정유년(丁酉年, 1777년 정조 1) 4월 초 9일에 제수 받아 같은 달 21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8월 20일 대간들의 계문(신하들의 잘못을 임금께 아룀)에 의해 임소(任所)에서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문관으로 판윤(判尹) 벼슬을 하였다.
**정조 1년 8월 18일 신해 1번째기사 1777년
"영월 부사(寧越府使) 이보온(李普溫)은 민홍섭(閔弘燮)을 추종하며 아부하여 사당(祠堂)을 참배했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민홍섭의 음모를 반드시 알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준엄하게 국문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포교(捕校)를 출발시킨 것이 매우 많으니 절도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 이진익(李鎭翼) 정유년(丁酉年, 1777년 정조 1) 10월 초 4일에 부임하여, 기해년(己亥年, 1779년 정조 3) 12월 27일 만기를 채우고 교체되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 이정오(李正吾) 경자년(庚子年, 1780년 정조 4) 정월 16일에 부임하여, 신축년(辛丑年, 1781년 정조 5) 12월 15일에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어석정(漁錫定) 신축년(辛丑年, 1781년 정조 5) 12월 27일에 부사를 제수 받고 임인년(壬寅年, 1782년 정조 6) 정월 11일에 부임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784년 정조 8) 5월 초 8일 임기를 마치고 교체되었다.
▷ 심유진(沈有鎭) 갑진년(甲辰年, 1784년 정조 8) 5월 초 8일에 제수되어 같은 달 25일에 부임한 후 8월 달에 승정원 승지(承旨)로 영전되었다.
▷ 이경옥(李敬玉) 갑진년(甲辰年, 1784년 정조 8) 8월 초 3일에 제수되어 같은 달 28일에 부임하였다. 그 해 12월 15일 고과심사 결과 성적이 좋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문당이다.
▷ 이명준(李明俊) 갑진년(甲辰年, 1784년 정조 8) 12월에 제수되어 을사년(乙巳年, 1785년 정조 9) 정월 11일에 부임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786년 정조 10) 2월 29일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영전되었다.문당이다.
▷ 조원진(曺遠振) 병오년(丙午年, 1786년 정조 10) 3월 초 2일에 제수되어 같은 달 15일에 부임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788년 정조 12) 6월 초 3일에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어 돌아갔다. 문당이다.
▷ 김면주(金勉柱) 무신년(戊申年, 1788년 정조 12) 6월 초 3일에 제수 받아 7월 22일에 부임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789년 정조 13) 6월 20일에 조정의 승지(承旨)로 영전되었다.
▷ 이동욱(李東郁) 기유년(己酉年, 1789년 정조 13) 6월 20일에 제수 받아 7월 초 6일에 부임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791년 정조 15) 3월 11일 자규루를 건립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좌승지로 영전되어 갔다.
▷ 박기정(朴基正) 신해년(辛亥年, 1791년 정조 15) 3월 11일 정조임금의 특별교시로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같은 달 28일에 부임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793년 정조 17) 6월 24일 만기를 채우고 이동되었다.
▷ 정관휘(鄭觀輝) 계축년(癸丑年, 1793년 정조 17) 6월 24일에 왕의 특별교시로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7월 초 2일에 부임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795년 정조 19) 윤 2월 17일에 이동되었다.
▷ 한정운(韓鼎運) 을묘년(乙卯年, 1795년 정조 19) 2월 19일에 제수 받고 3월 초하루에 부임하여, 정사년(丁巳年, 1797년 정조 21) 6월 15일에 정기인사로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이경오(李敬五) 정사년(丁巳年, 1797년 정조 21) 6월 27일에 제수 받아 윤 6월 13일에 부임하였다. 기미년(己未年, 1799년 정조 23) 9월 28일 조정에 명에 따라 이동하였다. 문당이다.
*정조 22년 11월 30일 기축 1번째기사 1798년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이에 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글을 올린 자가 27인이었는데, 영월 부사(寧越府使) 이경오(李敬五),~등
▷ 허질(許晊) 기미년(己未年, 1799년 정조 23) 9월 28일에 제수 받아 임술년(壬戌年, 1802년 순조 2) 정월 초 10일에 내직으로 이동되었다. 문인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 홍낙연(洪樂淵) 임술년(壬戌年, 1802년 순조 2) 정원 초 10일에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같은 달 26일에 부임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804년 순조 4) 4월 11일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재목(材木) 운반의 일이 잘못되어 파직(罷職)되었다.
▷ 이소(李素) 갑자년(甲子年, 1804년 순조 4) 4월 21일에 형조참의(刑曹參議)에서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5월 7일에 부임하였다. 을축년(乙丑年, 1805년 순조 5) 윤 6월 30일에 한양으로 전근되었다.
▷ 박규순(朴奎淳) 을축년(乙丑年, 1805년 순조 5) 윤 6월 25일 정사에서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같은 달 28일 조정의 벼슬을 사임하고, 7월 초 9일에 부임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807년 순조 7) 11월 21일에 만기를 채우고 돌아갔다.
생: 1740년~몰 : ?. 본관은 밀양, 자는 대규(大圭), 호는 비원(肥園),1777년(정조1) 친림토역(親臨討逆)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우부승지, 공조참의 등을 역임. 1805년(순조5) 영월부사에 제수되었고 1807년『장릉지속편(莊陵誌續編)』을 찬진하였다.
**순조 7년 11월 5일 임인 2번째기사 1807년 영월 부사 박규순이 장릉지의 속편을 찬진하고 인간해 광포할 것을 청하다
영월 부사(寧越府使) 박규순(朴奎淳)이 상소하여 《장릉지(莊陵誌)》 속편을 찬진(撰進)하고 인간(印刊)해 광포(廣布)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칭찬하여 권장하고,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해도(該道)에 분부해 간행해 올리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검교 직각(檢校直閣) 홍석주(洪奭周)가 아뢰기를,
"옛날 선조(先祖) 때 일찍이 고 판서 윤광보(尹光普)와 고 참판 이의봉(李義鳳)에게 《장릉지》를 나누어 찬하여 올리라 명하고, 또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두 본(本)을 취하여 합해 하나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주합루(宙合樓)에 간직해 둔 한 본을 《장릉사보(莊陵史補)》라고 일컬었습니다. 무릇 이 여러 본들은 모두 예재(睿裁)에 앙품(仰稟)하였던 것이나, 특별히 사체(事體)가 정중한 바에 있다 하여 짐짓 기궐(剞劂)에 맡기지 않았던 것으로 그 당시 각신 중에 또한 성교(聖敎)를 들었던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수신(守臣)이 올린 바는 책의 크기가 원래의 《장릉지》와는 조금 다른데, 사실이 장고(掌故)에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니, 만약 혹 영읍(營邑)에서 사사로이 인행(印行)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옳게 여겼다.
▷ 윤효관(尹孝寬) 정묘년(丁卯年, 1807년 순조 7) 11월 21일에 제수 받아 같은 달 30일에 조정의 벼슬을 사임하고, 12월 초 9일에 부임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809년 순조 9) 12월 26일 만기를 채우고 돌아갔다. 문당이다.
**순조 9년 1월 11일 신미 1번째기사 1809년 강원도 암행 어사 이상우가 00 등의 실정을 탄핵하다
강원도 암행 어사 이상우(李尙愚)가 서계(書啓)를 올려 ~, 영월 부사(寧越府使) 윤효관(尹孝寬)이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니, 경중에 따라 감죄(勘罪)하였다.
▷ 박명섭(朴命燮) 기사년(己巳年, 1809년 순조 9) 12월 20일에 제수 받아 경오년(庚午年, 1810년 순조 10) 정월 25일에 부임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811년 순조 11) 7월 15일 좌부승지(左部承旨)로 영전되었다.
▷ 이면승(李勉昇) 신미년(辛未年, 1811년 순조 11) 7월 29일에 제수 받아 8월 11일에 부임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814년 순조 14) 6월 초 4일에 만기를 채우고 돌아갔다. 문당.
▷ 이약수(李若洙) 갑술년(甲戌年, 1814년 순조 14) 6월 20일에 부임하여, 병자년(丙子年 1816년 순조 16) 시방(試謗)으로서 전최(殿最)에서 거상(居上)을 받아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박서원(朴瑞源) 병자년(丙子年 1816년 순조 16) 6월 25일에 제수 받아 윤 6월 초 8일에 부임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818년 순조 18) 6월 15일에 이조(吏曹)에 의해서 좌천되어 갔다. 문당
▷ 한익진(韓翼鎭) 무인년(戊寅年, 1818년 순조 18) 6월 25일에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 받아 7월 15일에 부임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819년 순조 19) 12월 15일에 돌아갔다. 문당
▷ 홍이간(洪履簡) 기묘년(己卯年, 1819년 순조 19) 12월 20일에 제수 받아 경진년(庚辰年, 1820년 순조 20) 정월 22일에 부임하였다. 신사년(辛巳年, 1821년 순조 21) 4월 13일에 경직(京職)으로 이동되었다.문당이다.
▷ 한의운(韓義運) 신사년(辛巳年, 1821년 순조 21) 4월 13일에 제수 받아 같은 달 29일에 부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823년 순조 23) 6월 24일에 만기를 채우고 돌아갔다. 문당이다.
▷ 유이환(兪理煥) 계미년(癸未年, 1823년 순조 23) 6월 24일에 제수 받아 7월 18일에 부임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824년 순조 24) 10월 21일에 춘천부(春川府)에서 치르는 복시(覆試)를 그르친 일로 인하여 순영(巡營)의 장계에 의해 11월 초 3일에 파직되었다. 문당이다.
▷ 이기재(李基栽) 갑신년(甲申年, 1824년 순조 24) 11월 초 3일에 제수 받아 같은 달 24일에 부임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826년 순조 26) 2월 29일 병으로 인하여 돌아갔다.
▷ 이희발(李羲發) 병술년(丙戌年, 1826년 순조 26) 2월 29일에 제수 받아 3월 28일에 부임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828년 순조 28) 6월 24일에 만기를 채우고 돌아갔다.
▷ 민정수(閔鼎秀) 무자년(戊子年, 1828년 순조 28) 6월 24일에 제수 받아 7월 15일에 부임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830년 순조 30) 6월 24일에 만기를 채우고 돌아갔다.
▷ 박희현(朴熙顯) 경인년(庚寅年, 1830년 순조 30) 7월 초 3일에 제수 받아 신묘년(辛卯年, 1831년 순조 31) 12월 20일 조정의 명에 따라 좌부승지(左部承旨)로 임명되어 갔다.
▷ 김철원(金喆遠) 신묘년(辛卯年, 1831년 순조 31) 12월 25일에 제수 받아 임진년(壬辰年, 1832년 순조 32) 정월 21일에 부임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833년, 순조 33) 11월 초 9일에 조정의 명을 받아 승지로 임명되었다. 문당이다.
▷ 조종진(趙琮鎭) 계사년(癸巳年, 1833년, 순조 33) 11월 초 10일에 제수 받아 같은 달 30일에 부임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835년 헌종 1) 9월 26일 병이 생겨서 전근되었다.
▷ 권야(權偌) 을미년(乙未年, 1835년 헌종 1) 9월 26일에 벼슬을 제수 받아 10월 19일에 부임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836년 헌종 2) 12월 25일까지 있다가 폄하(貶下)로 전근되었다.
▷ 송지양(宋指養) 병신년(丙申年, 1836년 헌종 2) 12월 25일에 제수 받아 정유년(丁酉年, 1837년 헌종 3) 1월 초 8일에 부임하였다. 정유년(丁酉年) 7월 23일에 병으로 인하여 전근되었다.
▷ 윤사은(尹師殷) 정유년(丁酉年, 1837년 헌종 3) 7월 24일에 제수 받아 8월 초 8일에 부임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839년 헌종 5) 6월에 궁궐 가까이 거처하도록 전근되었다.
▷ 황호민(黃浩民) 기해년(己亥年, 1839년 헌종 5) 6월 29일에 제수 받아 7월 20일에 부임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841년 헌종 7) 6월 24일에 정사에서 대사간(大司諫)으로 전근되었다. 문당이다.
▷ 송응룡(宋應龍) 신축년(辛丑年, 1841년 헌종 7) 6월 24일에 제수 받아 그 해 7월 25일에 부임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842년 헌종 8) 12월 15일 포폄(褒貶)에서 거상(居上)을 받아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헌종 8년 8월 13일 기축 1번째기사 1842년 강원도 암행 어사 이우를 소견하고, 00 등을 차등 있게 죄주다
강원도 암행 어사(江原道暗行御史) 이우(李㘾)를 희정당에서 소견(召見)하였다. 00~·영월 부사(寧越府使) 송응룡(宋應龍)·00 등을 차등 있게 죄주었으니, 어사(御史)의 서계(書啓)로 인함이었다.
▷ 정의명(鄭義命) 임인년(壬寅年, 1842년 헌종 8) 12월 25일에 제수 받아 계묘년(癸卯年, 1843년 헌종 9) 정월 24일에 부임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844년, 헌종 10) 6월 15일 표폄(褒貶, 근무평가)에서 거상(居上)을 받아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임효헌(林孝憲) 갑진년(甲辰年, 1844년, 헌종 10) 7월 초 9일에 제수 받아 8월 초 1일에 부임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845년 헌종 11) 11월 24일에 별세하였다. 문당이다.
*[추기]재임 중 창절서원을 중수하면서 乙巳年 夏( 을사년 하, 1845년 여름)에 지은 <彰節書院重修記 창절서원중수기>
記文 板刻(기문판각)이 창절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 이원회(李元會) 을사년(乙巳年, 1845년 헌종 11) 12월 초 3일에 제수 받아 같은 달 28일에 부임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848년 헌종 14) 3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전근되었다.
▷ 이회구(李繪九) 무신년(戊申年, 1848년 헌종 14) 4월 24일에 제수 받아 5월 18일에 부임하였으나 그 해 11월 18일에 병으로 인하여 사직하였다.
▷ 박종휴(朴宗休) 무신년(戊申年, 1848년 헌종 14) 11월 18일에 제수 받아 기유년(己酉年, 1849년 헌종 15) 정월 13일에 부임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851년 철종 2) 3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해유를 받고 교체되었다. 문당이다.
▷ 임백수(任百秀) 신해년(辛亥年, 1851년 철종 2) 5월 초 6일에 제수 받아 같은 달 23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10월 21일에 신병이 있다는 장계를 올려 전근되었다.
▷ 성호겸(成好謙) 신해년(辛亥年, 1851년 철종 2) 10월 21일에 제수받아 11월 15일에 부임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853년 철종 4) 9월 초 8일에 장계로 파면되었다.
▷ 홍재중(洪在重) 계축년(癸丑年, 1853년 철종 4) 9월 초 9일에 제수 받아
을묘년(乙卯年, 1855년 철종 6) 3월 초 20일 조정의 명에 의해 승지(承旨)로 임명되었다.
*[추기] 부사 홍재중이 재임 중 甲寅年 孟秋(갑인년 맹추.1854년 7월, 철종5년)에 지은 <彰節書院重修記 창절서원중수기>
記文 板刻(기문판각)이 창절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홍재중(洪在重, 1798 ~ ?)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공려(公呂)다. 1837년(헌종 3) 식년시에 갑과(甲科) 3인으로 급제하였다.
실록에는 그의 영월부사 제수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일성록 日省錄』의 1853년(철종 4) 9월8일 조에 "홍재중을 영월부사로 삼아라.[구두로 전교하셨다.]
(以洪在重爲寧越府使[口傳也]"가 보인다.[출처『역주장릉지속편』236쪽 각주
▷ 유흥규(柳興奎) 을묘년(乙卯年, 1855년 철종 6) 3월 초 2일에 제수 받아 병진년(丙辰年, 1856년 철종 7) 6월 15일에 좌천되어 갔다.
▷ 김진우(金鎭右) 병진년(丙辰年, 1856년 철종 7) 6월 24일에 제수 받아 8월 초 1일에 부임하였다. 문당이다.
▷ 송흠익(宋欽翼) 정사년(丁巳年, 1857년 철종 8) 11월 19일에 제수 받았으며, 무오년(戊午年, 1858년 철종 9) 12월 20일에 조정의 명령에 의해 승지로 전근되었다.
▷ 서긍순(徐兢淳) 무오년(戊午年, 1858년 철종 9) 12월 20일에 제수 받았으나, 경신년(庚申年, 1860년 철종 11) 6월 24일에 조정의 명에 따라 맹산군수(孟山郡守)로 전근되었다.
▷ 이진영(李進永) 경신년(庚申年, 1860년 철종 11) 7월 21일에 제수 받아 계해년(癸亥年, 1863년 철종 14) 7월 초 3일에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영전되었다.
▷ 조용재(趙容在) 계해년(癸亥年, 1863년 철종 14) 7월 초 3일에 제수 받아 같은 달 20일에 조정의 직을 내놓고, 영월로 부임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864년 고종 1) 10월 19일 조정의 명에 따라 전주 판관(判官)으로 영전되었다. 문음(文蔭)이다.
▷ 서기보(徐箕輔) 갑자년(甲子年, 1864년 고종 1) 10월 19일에 제수 받자 11월 25일 조정에 직을 내놓고, 12월 초 4일에 부임하였다. 그 후 을축년(乙丑年, 1865년 고종 2) 12월 22일에 장악정(掌樂正)으로 영전되었다.
▷ 이교영(李喬榮) 을축년(乙丑年, 1865년 고종 2) 12월 22일에 조정의 명을 받아 통천(通川)에서 옮겨와 병인년(丙寅年, 1866년 고종 3) 2월 초 9일에 영월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정묘년(丁卯年, 1867년 고종 4) 6월 초 7일에 능주목사(綾州牧使)로 영전되었다.
▷ 이용하(李龍夏) 정묘년(丁卯年, 1867년 고종 4) 7월 초 1일에 부임하여, 무진년(戊辰年, 1868년 고종 5)에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파직되었다. 문음이다.
**고종 5년 10월 21일 갑자 1번째기사 1868년 강원도 암행어사의 서계에 따라 지방관을 죄주거나 표창하다
강원도 암행어사(江原道暗行御史) 신헌구(申獻求)를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에 의하여, ~~영월 부사(寧越府使) 이용하(李龍夏),00 ~등에게 죄를 주고,~
▷ 조은승(曺殷承) 무진년(戊辰年, 1868년 고종 5) 10월 23일에 제수 받아 11월 29일에 부임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870년 고종 7) 12월 21일 승지(承旨)로 영전되었다. 문당이다.
▷ 이재경(李在敬) 경오년(庚午年, 1870년 고종 7) 12월 24일에 제수 받아 신미년(辛未年, 1871년 고종 8) 2월 초 6일에 부임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873년 고종 10) 3월 초 6일 만기를 채우고 이듬해 12월 27일에 승지(承旨)로 영전되었다. 문당이다.
▷ 김창수(金昌秀) 계유년(癸酉年, 1873년 고종 10) 12월 25일 제수 받아 갑술년(甲戌年 1874년 고종 11) 2월 초 3일에 부임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875년 고종 12) 12월 초 5일에 승지로 영전되었다. 문당이다.
▷ 박홍수(朴弘壽) 을해년(乙亥年, 1875년 고종 12) 12월 26일에 제수 받아 병자년(丙子年 1876년 고종 13) 정월 초 10일에 부임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878년 고종 15) 12월 초 5일에 승지로 영전되었다. 문당이다.
▷ 박해철(朴海哲) 무인년(戊寅年, 1878년 고종 15) 3월 23일 제수 받아 7월 27일에 부임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880년 고종 17) 7월 29일 만기를 채우고 전근되었다.
▷ 홍용주(洪用周) 경진년(庚辰年, 1880년 고종 17) 7월 29일 제수 받자 9월 17일 비인(庇仁)에서 영월군수로 영전되어 부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883년 고종 20) 6월 15일에 좌천되어 갔다.
▷ 정원화(鄭元和) 계미년(癸未年, 1883년 고종 20) 6월 25일 제수 받아 7월 25일에 부임하였다. 을유년(乙酉年, 1885년 고종 22) 4월 15일에 승지로 전근되었다. 문당이다.
▷ 김오현(金五鉉) 을유년(乙酉年 1885년 고종 22) 4월 15일 제수 받아 5월 17일에 부임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886년 고종 23) 2월 초 4일 장성부사(長城府使)로 영전되었다.
▷ 이희(李僖) 병술년(丙戌年 1886년 고종 23) 2월 초 4일 조정의 명에 따라 장성부사와 서로 바꾸어서 부임하였다. 그리고 11월 15일에는 제천군수와 바꾸어 전근되었다.
▷ 이인면(李寅冕) 병술년(丙戌年 1886년 고종 23) 11월 15일 제천군수로 있다가 서로 바뀌는 바람에 12월 초 10일에 영월부사로 부임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888년 고종 25) 정월 29일에 고성군수(高城郡守)로 전근되었다.
▷ 우성규(禹成圭) 무자년(戊子年 1888년 고종 25) 4월 17일 단양에서 영월부사로 전근되어 5월 초 3일에 부임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889년 고종 26) 6월 초 6일에 칠곡부사(漆谷府使)로 전근되었다. 문음이다.
▷ 안길수(安吉守) 기축년(己丑年 1889년 고종 26) 6월 초 6일 춘천판관(春川判官)으로 있다가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7월 18일에 부임하였다. 문음(文蔭)이다.
▷ 이명우(李明宇) 기축년(己丑年 1889년 고종 26) 9월 20일 덕산군수(德山郡守)로 있다가 12월 12일에 영월부사로 부임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891년 고종 28) 2월 초 1일 조정에서 또다시 덕산군수를 제수하였다. 음관(蔭官)이다.
고종 27년 10월 17일 계축 2번째기사 1890년 조선 개국(開國) 499년
장릉을 고쳐 보수할 때 공사를 감독한 관리 이하에게 시상하다.
장릉(莊陵)을 고쳐 보수할 때 공사를 감독한 관리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감동(監董)한 도신(道臣) 이원일(李源逸)과 영월 부사(寧越府使) 이명우(李明宇)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 유달준(兪達濬) 신묘년(辛卯年, 1891년 고종 28) 정월 29일 함태(咸兌)에서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4월 25일에 부임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892년 고종 29) 11월 29일 경산(慶山)으로 영전되어 갔다.
▷ 홍병도(洪秉燾) 임진년(壬辰年, 1892년 고종 29) 11월 29일 한산(韓山)에서 영월부사를 재수 받아 계사년(癸巳年, 1893년 고종 30) 임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894년 고종 31) 7월 29일에 전근되었다. 음관이다.
**고종 31년 1월 29일 정미 1번째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의정부에서 금성현에 난을 일으킨 자들을 잡을 것과 금성 현령 이승일, 개성 유수 김세기의 탐오죄를 처벌할 것을 청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원 감사(江原監司) 민형식(閔亨植)의 장계(狀啓)를 보니 사관(査官)인 영월 부사(寧越府使) 홍병도(洪秉燾)가 금성현(金城縣)에서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을 조사하여 보고한 것을 일일이 들면서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을 민란(民亂)이건 저 고을 민란이건 할 것 없이 쌓이고 쌓인 억울함이 터진 것은 형편상 당연한 것이었지만, 백성들이 간악한 무리들의 학정에 견딜 수 없어 그를 제거하려고 하면 관가에 호소하여 감죄(勘罪)하면 되는 것이지 어찌 그 방도가 없다고 걱정하겠습니까? 그런데 감히 무리를 모아 마구 행패를 부리면서 사람을 죽이고 제멋대로 관청 건물을 헐어버렸으니, 인정상으로는 비록 용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은 역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란을 일으킨 두목은 다 도망가서 조사하여 공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도망친 노사준(盧師俊), 박종민(朴宗敏), 박상신(朴尙信), 박진수(朴辰秀)는 각별히 각 진영(鎭營)에 신칙하여 며칠 안으로 잡아다가 엄하게 신문하여 등문(登聞)하게 하고 좌수(座首) 노사규(盧師奎) 이하 여러 놈들은 모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경중을 갈라서 징계하거나 놓아주게 할 것입니다.
전 금성 현령(金城前縣令) 이승일(李承一)은 부임한 지 몇 달 사이에 장죄(贓罪)를 많이 지어 민란이 일어나게 하였으므로 도신의 계사에 이미 파면하였다고 하였으니, 왕부(王府)에서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장전(贓錢)의 실지 액수에 아직도 의문스러운 점이 많으니 추조(秋曹)로 하여금 관문(關文)으로 해도(該道)에 물어본 다음에 그 가동(家僮)을 가두고 일일이 독촉하여 받아서 본도(本道)의 감영(監營)에 내려 보내어 해당 백성들에게 돌려주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엄주흥(嚴柱興) 갑오년(甲午年, 1894년 고종 31) 7월 29일 고성(高城)에서 영월부사로 제수 받아 을미년(乙未年, 1895년 고종 32) 2월 초 2일 탁지부(度支部) 참의(參議)로 승진되었다.
▷ 정경원(鄭敬源) 을미년(乙未年, 1895년 고종 32) 2월 초 2일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3월 12일에 부임하였다. 5월 30일에 평양부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고종 32년 5월 29일 기해 1번째기사 1895년,영월 부사(寧越府使) 정경원(鄭敬源)을 평양부 관찰사(平壤府觀察使)에 임용하고~
▷ 정욱조(鄭旭朝) 을미년(乙未年, 1895년 고종 32) 6월 18일 영월부사를 제수 받아 7월 30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11월 10일 재임 중 별세하였다. 문음(文蔭)이다.
▷ 이인규(李寅圭) 을미년(乙未年, 1895년 고종 32) 11월 30일 부임하였으나, 12월 24일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비도(匪徒) 무리들이 들이닥치자 도망가 버렸다.
▷ 홍재영(洪在英) 병신년(丙申年, 1896년 고종 33) 7월 20일에 부임하여, 정유년(丁酉年, 1897년 고종 34) 12월 초 7일 평창군수로 전근되었다.
▷ 김필현(金弼鉉) 무술년(戊戌年, 1898년 고종 35) 정월 초 4일에 부임하였다.
---자료협조 영월문화원-
▷ 강봉원(姜鳳元)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임인년(壬寅年, 1902년 고종 39) 6월23일 영월군수에 임명되었고, 갑진년(甲辰年,1904년고종 41) 12월13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근거문헌;『역주 장릉지보유』283쪽】
▷ 함기성(咸基成) 영월군수를 역임한 기간은1952년 10월부터 1954년 10월까지이다.*【근거문헌;『역주 장릉지보유』283쪽】
첫댓글 김선생님 고생 많으셧어요
대단하십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