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 그레이스 캘리 -
"요코와 내가 만나기 전에 우리는 반쪽짜리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사랑조차,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 존 레논 -
퍼스트 레이디 재클린,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다
사라진 백악관의 위광, 재키의 재혼
지난 8월 재클린은 시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 그리스로 가 오나시스의 융숭한 접대를 받았는데 이 일이 있은 후 10여년간 오나시스의 연인 노릇을 해온 마리아·칼라스는 그의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재클린이 오나시스 개인 소유의 섬 스코피오스에서 1주일을 보내는 동안 오나시스는 잠시도 재클린 옆을 떠나지 않아 이 광경을 보다 못한 마리아 칼라스는 뛰쳐나가고 만 것이다. 이날밤 오나시스는 재클린을 위해 5천달러짜리 5인조 악단을 데려다 밤새 파티를 열고 그칠 사이없이 춤을 추었다.
오나시스와 재클린과의 결혼이 초기에는 순조로왔다고 말하고 오나시스는 결혼선물로 1백만달러 상당의 보석을 선사했으며 40회 생일기념으로 40캐럿 짜리 다이아몬드 반지와 거대한 귀고리를 선사했으나 이 귀고리는 너무나 무거워 재클린은 단 한번 이것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오나시스가 한때 "재키는 자유와 안전을 필요로 하는 작은 새와 같다. 그녀는 내게서 그 두 가지를 가져갔다"고 말했다. 이 전기는 재클린의 낭비벽이 심해져서 결혼 첫 해에 1백25만달러를 의상구입비에 지출했다고 말했다.
에팔르광장 근처 꽃으로 뒤덮인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 와 있는 그레이스 왕비는 언제 어느 때라도 조급한 기색을 나타 내지 않고 차분해 보이는 천품을 갖고 있다. 언제나 엷게 화장하고 있는 그녀는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내 역할은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자 아내로서의 일밖에 없어. 여성들은 집밖에 나가 일할때라도 주부로서의 책임을 망각해선 안되겠지요. 나는 아주 열렬한 여권론자지만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할 일이 따로 있다고 보아요"
히치코크 감독은 그녀를 가리켜 '불과 얼음과 무서운 정열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과시하려 하지 않는 여자' 라고 말한바 있다. 그녀는 1954년 시골 처녀의 감동적인 출세를 그린 영화 '갈채'에서 빙 크로스비와 공연, 아카데미 주연여우상을 따냈었다. 그후 1955년 4월 칸영화제에서 모나코의 레이니에공과 만나게 된 후 두사람은 뜨거운 사이가 됐다. 1956년 4월 18일. 세계의 주목 속에 화려한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그 당시 그녀는 "나는 국왕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성과 결혼할 따름"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82년 켈리는 영화를 찍던 그 장소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재혼하지 않고 끝까지 세기의 로맨스를 지켰다. 기사원문: 2005. 4. 14 [주간한국]
'영혼의 동반자'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비명에 간 로크의 우상 레논
「비틀즈」라는 로크 그룹을 만들어 60년대 전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등장했으며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계속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온 가수 존 레논이 지난 8일 뉴요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불의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때마침 뉴요크를 방문중이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대통령 당선자도 레논의 죽음을 '크나큰 비극'이라고 개탄하고 이 같은 비극을 종식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루종일 가녹음된 그 노래를 들으면서 지내기도 했읍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얼음판을 걸으며'는 우리들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마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어느 아침 존이 창앞에서 해뜨는 것을 지켜보며 이 시에 젖어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읍니다. 그때 그는 이 노래의 출반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읍니다" 사실 노래 속에는 서러운 정서로 아롱진 노랫말이 메아리지고 있다. 요꼬의 노래는 이러하다.〈언젠가 나는 울겠지만/눈물은 그러나 마르고 말겠지/우리들의 마음이 한옹큼 재로 흩어지는 날/그것이 바로 하나의 사연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