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왕릉
十世(10세)
子 仇衡王(자, 구형왕) <子 世宗君, 武力, 武得>
一云仇亥普通辛丑立辛亥冬鷰子樓大鳴驚動長安王毁樓有太祖玉牒曰鷰子卽壬子傳國羅王不逆天運云
遣太子降于金法興王移居方丈山宮以終餘年俗傳王山中以累石爲四面七級階庚坐
妃諱桂花父{分/叱}水伊丁卯薨陵祔今茂州有影幀所傳缺多未詳
또는 구해라고 한다. 보통 신축(521)년에 왕위에 올랐다. 신해(531)년 겨울에 연자루가 크게 울어 장안(도읍)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왕이 이 연자루를 부숴버리라고 했다. 태조왕이 남긴 글이 있었는데 여기에 적혀있기를 연자는 곧 임자(532년)이니 나라를 신라왕에게 주어야 하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했다.
태자를 보내어 김법흥왕에게 항복하고 방장산궁으로 옮겨서 남은 생을 마쳤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왕산중에 돌을 쌓아 4면 7층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경좌이다.
왕비는 휘가 계화이고 부친은 뿐수이이다. 정묘(547?)에 돌아가시고 능은 붙어있고 지금의 무주에 영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가 빠진 것이 많아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1]의 산음현[2]편>
王山:在縣西十里山中累石爲丘四面皆有層級俗傳王陵云
왕산: 현(산음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중에는 돌을 쌓아 만든 구릉이 있는데 네 면이 모두 층계를 이루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릉이라고 한다.
[1]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에 초판이 만들어지고 1531년에 보완하여 만든 것이 신증이다.
[2]산음현 ; 현재의 산청이다.
<1914년 갑인보>
○陵在駕洛國知品川王山東庚坐今山淸郡西二十里壘石爲邱四面皆七級制度朴古如箕子陵
○능은 가락국의 지품천[1]에 있는 왕산의 동쪽 경좌에 있다. 지금의 산청군 서쪽 20리에 돌을 쌓아서 구릉을 만들었는데, 네 면이 모두 7층으로 되어 있고 만든 방법이 소박하여 기자릉과 같다.
[1]지품천; 현재의 산청을 신라초기에는 지품천현이라 하였다.
<1924년 갑자보>
○陵在駕洛國知品川王山東庚坐今山淸郡今西面花溪里壘石爲邱四面皆七級制度朴古完築矣
○능은 가락국의 지품천에 있는 왕산의 동쪽 경좌에 있다. 지금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이고 돌을 쌓아서 구릉을 만들었는데, 네 면이 모두 7층으로 되어 있고 만든 방법은 소박하게 완성하여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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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11세)
<仇衡王> 子 世宗君(자, 세종군)
諱武宗 辛卯生以六伽倻統合功羅朝始仕角干封金官世宗君南攻時築城良州東界月峯光山甲戌戰死節
配夫人朴氏墓太和城下有碑失傳難尋 賜牌地
휘는 무종이고 신묘(511)년에 태어났다. 6가야를 통합한 공으로 신라 조정에서 처음으로 벼슬하여 각간이 되고 금관땅을 봉지로 받았으며 세종군에 봉해졌다. 남쪽을 침공할 당시 양주의 동쪽 경계인 월봉광산에 성을 쌓았다. 갑술(554)년의 전쟁[1]에서 죽었다.
부인은 박씨로서 묘소는 태화성 아래이고 묘비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아 찾기가 어렵다. 임금이 내려준 땅이 있다.
[1] 백제 성왕과 신라와의 관산성 싸움
<仇衡王의> 子 武力(자, 무력)
戊戌生三兄弟俱以超洛之壯士以父命出仕新羅辛未以居漆夫攻取麗十城設八關所甲戌濟王聖自將十萬來圍王城良州公南攻大元帥月峯下作藏春三十舍濟自東海圍羅王陣公聞怒以匹馬單創擊破濟王滅十万兵還軍成太和關三十六舍等轎山輪山城骨浦漆浦甘文草八沙伐來降
무술(518)년에 태어났다. 삼형제(세종,무력,무득)가 모두 뛰어난 가락의 장사(壯士)로서 부친(구형왕)의 명을 받아 신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신미(551)년에 거칠부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여 10성을 빼앗고[1], 팔관소(?)를 열었다. 갑술(554)년에 백제의 성왕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왕성인 양주를 포위하니, 공(무력)이 남쪽을 공격하였고 대원수로서 월봉아래에 장춘(藏春[2]) 30채를 지었다. 백제가 동해로부터 신라왕의 군진을 포위하니 공이 듣고 노하여 말을 달려 창으로서 백제왕의 격파하고 10만 병사를 궤멸시켰다. 전쟁에서 돌아와서는 태화관의 36동과 교산성, 윤산성을 쌓으니 골포/칠포/감문/초팔/사벌이 찾아와 항복하였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편
十二年---중략--- 王命居柒夫等侵高句麗乘勝取十郡.
12년(551) --- 중략---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고 10개 군을 빼앗았다.
[2]봄을 간직한다는 뜻
○眞平王元年十月十六日戰死節官角干封金官大軍主 墓鷲山下癸坐俱石物賜牌葬山內建鷲仙寺守護
配夫人朴氏巴刀夫人弟 墓祔于公衣帶食器魂墓
○진평왕 원년(579) 10월16일에 전사하니 벼슬은 각간이 되고 금관대군주에 봉해졌다.
묘소는 취산아래의 계좌이고 석물(비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임금에게서 장지로서 받은 산 속에 취선사를 세워 <묘소를> 수호하고 있다.
부인은 박씨로서 파도부인[1]의 동생이다. 묘소는 공의 묘에 붙어있는데 옷과 허리띠와 식기 등을 부장하였다.
[1]법흥왕의 왕비인 보도부인(保刀夫人)을 말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보도의 동생은 오도(吾道)로서 법흥왕이 태자일 때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오도는 화랑인 위화랑과 정을 통하여 옥진궁주(玉珍宮主)를 낳았다. 이를 태자가 알고 오도를 아시공(阿時公)에게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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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仇衡王의> 子武得(자, 무득)
官角干伐首若西州漢山國死節幷享觀晶洞伯仲兄祠故三忠公
벼슬은 각간을 지내고 서주 한산국의 우두머리를 정벌하였다. 죽어서는 관정동에 큰형(세종), 작은 형(무력)과 같이 제사를 드리고 있으며 삼충공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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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世(12세)
<世宗의> 子 率友(자, 솔우)
配鷄林金氏墓所失傳
부인은 계림김씨로서 묘소는 실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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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力의> 子 舒玄(자, 서현)<子 庾信, 欽純, 女文姬,女寶姬>
一云庶云眞興王甲申生以父勳眞平朝蔭仕侍中都督伐任羅伽羅万弩國獻功于國封萬弩郡太守又移良州大都督按撫諸軍事陞角干爲?蘇判府院君己丑伐麗娘臂城以頼子庾信佐功 ○忌九月十九日 ○墓上同原
配金氏諱萬明父新羅宗室肅訖宗 ○墓祔 ○忌十月十一日
또는 서운[1]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갑신(564)년에 태어났다. 부친(무력)의 공훈으로 진평왕 때에 벼슬길에 나아가 시중을 지냈다. 도독으로서 임나가라를 정벌하고 만노국을 정벌한 공으로 나라에서 만노군 태수에 봉하였다. 또 양주대도독 안무제군사가 되고 각간으로 승진하였으며 소판부원군이 되었다. 기축(629)년에 고구려의 낭비성을 정벌할 때 아들 유신이 보좌하여 공을 세웠다. ○기일은 9월19일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 언덕이다.(鷲山下)
부인은 김씨로서 휘는 만명이고 부친은 신라종실인 숙흘종이다. ○묘소는 붙어있다. ○기일은 10월11일이다.
[1]김유신의 부친의 이름은
-.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서현(舒玄)이라 하고 ‘按庾信碑云考蘇判金逍衍 (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다.』하였으니)’ 라는 문구가 있다.
-.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의 김유신 조에 서현(舒玄)이라 되어있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문무왕이 한 말로 서운(庶云)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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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世(13세)
子庾信(자, 유신) <子 三光,元述,元貞,長耳,元望, 庶子軍勝>
初諱庚申號龍華以父命承奉宗家祀眞平王乙卯生于萬弩都郡建吉祥詞月城建孝子碑壬午移居杞械第甲申不負月城公子春秋三顧之誠出世爲探花郞初仕侍中角干以至四十五年統合三韓卽高句麗百濟官太大角干追封純忠壯烈興武王唐授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開九州都督府東方四百郡先生杖履之地有實記失傳
처음 이름은 경신(庚申)이고 호는 용화(龍華)이다. 부친의 명으로 종가의 제사를 맡았다. 진평왕 을묘(595)년에 태어났으며 만노도군에는 길상사가 있고 월성(경주)에서는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임오(622)년에 기계(杞械)의 집으로 이사했다. 갑신(624)년에 월성공자 김춘추가 3번이나 찾아오는 정성을 어기지 못하여 세상에 나아가 화랑이 되었다. 처음의 벼슬은 시중각간으로서 45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삼한을 통합하였다. 벼슬은 태대각간이 되었으며 순충장렬흥무왕에 추봉되었다. 당나라가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의 칭호를 내리고 9주의 도독부를 열었으니, 동방의 400군은 선생의 지팡이 아래(지배하에)있게 되었다. 실기가 있었으나 실전되었다.
○忌癸酉年秋七月初一日 ○陵以王禮葬西州金山麓亥坐壽七十九
○自羅朝至今忠勳府主伯羅以道通官角干尊稱先正先生享于西岳書院有于列聖朝 敎傳世
配金氏新羅太宗娣二女受眷?有古本草傳據 ○聖德王壬子封夫人歲賜租千石丁巳薨以遺願火葬祔陵祭
○기일은 계유(673)년 가을 7월1일이다. ○능은 왕의 예로서 서주 금산기슭의 해좌에 장사지냈으며 나이는 79세였다.
○신라 조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충훈부에서 주관하여 신라의 으뜸으로 통하고 있다. 벼슬은 각간으로서 존경하여 선대의 명신(先正)으로 칭하고 있다. 선생은 서악서원에 모셔져 여러 충신들과 함께 세상의 가르침으로 전하고 있다.
부인은 김씨로서 신라태종대왕 여동생의[1] 둘째 따님으로 첩(眷)이 되었다고 하는데, 옛 책의 초본을 근거로 하였다. ○성덕왕 임자(712)년에 부인으로 봉하고 그 해에 1천석을 내렸다. 정사(717)년에 돌아가시니 유언에 의해 화장하여 합장하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
[1]원문의 娣는 여동생이란 뜻이고,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는 태종대왕의 셋째 딸로서 지소부인으로 되어 있다.
※참고 : 원문 일부 글자의 판독이 어려워 필사본, 1914갑인보 및 1924년갑자보, 기타 보첩 등을 참고하였지만 일부 해독할 수 없는 곳이 있고, 혹 다른 글자로 판독되어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 - 편집자 竹山 註- (퍼온글입니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이해가 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