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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요법 사랑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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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발해사 [8]: 백두산 화산 폭발과 발해 멸망
사랑지기 추천 0 조회 65 14.11.21 07: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자료출처 : 박현배의 발해사

 

일반인들이 발해사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觀隙?백두산 화산 폭발과 발해 멸망일 것이다. 발해 연구자들의 부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제기 되는 백두산 화산 폭발설을 검토해 보았다.

 

 

발해가 화산 폭발로 멸망했다는 주장이 인터넷 상에서 사실인양 빠르게 유포되고 있다. 오래 전에 발해사 홈페이지를 통해서 의견을 개진했지만, 질문은 계속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과학적인 증거라며 예를 제시하는 글도 있었기에, 구체적인 내용으로 화산 폭발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발해가 폼페이처럼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사료를 중심으로 하여 화산 폭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가 화산과 지구과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차후에 이 부문을 보충할 계획이다.

발해는 화산 폭발로 멸망 했을까? 상경용천부도 폼페이처럼 지하에 고스란히 유적이 묻혀져 있는 것인가? 백두산 폭발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상정할 수가 있다. 정말 발해 멸망시에 화산 폭발이 있었는가? 화산 폭발이 사실이라면 발해 멸망에 결정적인 원인 제공을 했는가? 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설의 주장

발해 멸망과 관련하여 백두산 화산 폭발에 주목한 것은 다름아닌 일본학자였다. 7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헤이안 시대의 주거지역을 발굴하다가 화산재가 발견 되면서 분석한
결과 이 화산재가 편서풍을 타고 날라 온 백두산 화산재였다는 것이다.

좌측 사진은 일본에서 발견된 백두산 화산재 층이다.

B-Tm ash(백두산-토마코마이 화산재)라 불리는 이 화산재 성분은 일본 화산의 화산재에선 거의 볼 수 없는 알칼리 성분이 많은 규장질의 화산
유리로 되어 있었다.
사진 출처:유정아,<<한반도30억년의 비밀 3부-불의시대>>,도서출판 푸른 숲,1998,p.95.

1990년 일본의 도쿄 메트로폴리탄 대학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백두산 화산 폭발과 그
환경적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발해의 멸망을 백두산 폭발에 의한 원인으로 분석하였다.
일본의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이 백두산 폭발로 인해서 반경 수백킬로가 초토화 되고
이런 이유로 인해서 발해가 급작히 멸망했다는 것이다.


좌측 사진은 백두산 화산재가 발견된 장소이다.붉은 점이 발견된 장소인데 해양 시추에 의하면 1~16cm 두께의 화산재가 서쪽으로 갈수록 두꺼워 진다고 한다.

일본 혼슈 북부 및 홋카이도 일원 곳곳에서도 약 1~5cm 두께로 쌓인 화산재층이 발견되고 있다.
사진 출처:유정아,<<한반도30억년의 비밀 3부-불의시대>>,도서출판 푸른 숲,1998,p.96.

이미 1980년대 말 일본 NHK에서도 화산 폭발설과 관련한 발해 멸망을 언급했고 90년
대에 들어와 국내에서도 백두산 화산 폭발과 발해 멸망에 관해서 방영하였다. TV를 본
사람들은 발해의 멸망이 백두산 화산 폭발로 자연스레 생각했을 것이다.

10세기 초에 백두산 화산 폭발이 있었다?

중국, 일본, 러시아의 지질학자들이 백두산 화산회층에서 채취한 탄화목에 대해서 탄소연
대를 측정 하였다. 그 결과 일본 마치다 교수(81년,83년)는 915년~1334년, 러시아의 지자
코프(89년)는 1054~ 1349년, 중국의 류뤄신(98년)은 1215년에 백두산이 화산폭발이 있
었던 것으로 밝혀내었다.1)

중요한 사실은 백두산이 정확히 언제 폭발했는지 지구 과학자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대략 10세기로 추정할 뿐이다.

물론, 백두산이 폭발한 것은 사실이다. 지구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폭발의 규모와 시기이다. 화산은 폭발력과 분출물의 높이에 따라 결정된다. 과거 화산
분출에 대한 폭발력은 작은 화산 입자들의 쇄설 정도에 따라 추정한다. 보다 폭발적인 분
출이 덜 폭발적인 분출보다 화산 쇄설물을 훨씬 더 세밀하게 조각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분출물의 높이는 화산 물질의 분산 정도를 토대로 계산 된다. 즉, 화산 쇄서물들이 얼
마나 멀리 그리고 폭넓게 분포되었는지 조사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우
높은 분출을 한 화산은 화산 쇄설물들을 멀리 그리고 넓은 지역에 퍼뜨릴 것이다.

10세기에 있었던 백두산 화산 폭발의 규모를 살펴보자. 화산재가 일본까지 날아갈 정도
였다면 그 규모는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연구에 의하면 이 때의 백두산은 약 50㎦ 에 해당
되는 분출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금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된 필리핀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할때 그 10분의 1에 해당
되는 분출물이 쏟아져 나왔음을 생각하면 백두산의 폭발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2) 그럼 1991년도에 대폭발한 피나투보 화산을 살펴보자.

우측 사진은 1991년에 폭발한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의 모습이다. 10세기에 발생한 백두산 화산 폭발이 피나투보 화산보다 10배 규모라면 대략 상상이 가지 않는가?

사진 출처:유정아,<<한반도30억년의 비밀 3부-불의시대>>,도서출판 푸른 숲,1998,p.129.
1991년도에 있었던 피나투보 화산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고자 하는 분은 아래를 방문하기 바란다. 미국 지질 조사 화산 프로그램 홈페이지이다.
-US Geological Survey Volcanic Hazards Program-
http://volcanoes.usgs.gov/Hazards/What/Lahars/RainLahar.html#Pinatubo

600년 동안 조용하던 이 화산은 1991년도에 폭발하였다. 산을 중심으로 반지름 20km 안이
완전히 두꺼운 재로 쌓여버렸으며 화산 쇄설물은 홍수처럼 범람하여 산을 타고 10km 이상
흘러나갔다고 한다.3) 피나투보 화산의 불기둥은 30km 상공까지 솟구쳐 성층권으로 퍼져
나갔다.

이런 경우, 기후 변화가 발생한다. 다음해 12월 개기월식 때 달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것은 피나투보 화산재에 의해서 대기권이 가려져 버린 것이다. 다시 백두산으로 돌아가 보자. 피나투보 화산의 예를 들어 비례 관계로 계산해 본다면 10세기의 백두산 폭발은 최소한 반지름 200km 안이 초토화 된다고 볼 수 있다. 분출 규모가 피나투보의 10배이기 때문이다.

확대
910년~930년에 백두산이 폭발하여 발해가 멸망했다는 것이 백두산 폭발설의 주장이다. 요사에 나오는 이심이라는 표현은 바로 자연 재해를 당한 발해인의
민심이 동요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두산이 대규모로 폭발한 것이 사실이라면 20년간 요동을 둘러싼 발해와 요의 전쟁과 멸망 후 전개되는 광복 운동 및 후국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해
야 하는가?

10세기 초에 백두산이 폭발했다면 비교적 가까운 고려도 영향을 받게 된다.

사서에 기록된 10세기의 역사적 진실은?

이처럼 대규모의 폭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료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엄청난 자연
재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시기의 천재지변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이 시기에 <고려사>는 지진 외에 자연 재해가 없어 생략했다. 내용은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효공왕 10년(905년)여름 4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효공왕 11년(906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신덕왕 2년(912년) 여름 4월,서리가 내렸다.지진이 있었다.
신덕왕 3년(913년) 봄 3월 서리가 내렸다.
신덕왕 4년(914년) 여름 6월, 참포의 물과 동해의 물이 맞부딪쳐서,물결 높이가
20장 가량 솟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멈추었다.
신덕왕 5년(915년) 겨울 10월,지진이 있었는데 우레같은 소리가 났다.
신덕왕 6년(916년) 봄 정월,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경명왕 5년(921년) 여름 4월,경주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8월,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위의 기록을 살펴 본다면 화산 폭발로 추정되는 내용은 없다. 냉하가 발생한 기록도, 급격한
기후 변동을 나타내는 기록 역시 없다. 경애왕 시대인 924.925.926년에는 자연 재해 기록이
없어 생략 했다. 삼국 사기가 고대 천재지변을 잘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10세기 초에 대
규모의 화산 폭발이 있었는지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앞의 주장처럼 반경 수백킬로가 초토화 될 상황이었다면 분명 사료에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11세기에 일어난 한라산 폭발 기록을 보도록 하자.

穆宗 五年六月 耽羅山 開四孔 赤水湧出 五日 而止
목종 5년 6월,탐라산에 네 개의 구멍이 열리고 붉은 물이 샘솟았는데 5일만에 멈추었다.


<고려사>에 나오는 한라산 폭발 내용이다. 목종 5년은 1002년인데, 화산의 폭발 모습을 가장 잘 설명 하고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도 백두산 화산이 폭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13년, 1597년, 1668년, 1903년까지 폭발이 있었던 것이다. 소규모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 이러한 폭발 기록이 남아 있기에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는 10세기에 백두산이 폭발했다는 기록은 없다.(송기호 교수는 발해 멸망 직전에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지만, 필자는 그 기록이 어떤 사서에 나오는 기록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기록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한다는 점 이해하기 바란다.)

수백킬로를 초토화할 규모였다면 한반도 하늘은 화산재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고 낮에는 태
양을 볼 수 없는 상황이 연출 되어 사람들은 자연의 재앙이라고 하여, 왕이 직접 나서 제사
를 지내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대응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폭발설 중에 사료의 증거라고 제시하는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자. 수십년간 이어진 발해와
요의 전쟁은 요사에 잘 기록 되어 있다. 발해와 요는 요동을 사이에 두고 당이 몰락한 가운데 동아시아의 패권 자리를 두고 전쟁을 벌린 것이다. 발해가 멸망하기 2년 전, 발해는 요의 요주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하고 자사를 죽인 후 거란인을 약탈하여 돌아온다. 그 해 여름, 요는 발해를 공격하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화산 폭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925년 9월을 주목하고 있다. 즉, 8.9월에 화산 폭발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발해인의 망명 때문이다. 비록 화산 폭발이 발해 전체를 멸망으로 이끌지는 않았지만 화산 분출의 영향으로 막대한 인명 소실과 재산상의 피해, 거기에 민심의 혼란까지 야기시켜 망명을 결심하게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925년 9월 발해의 상황을 살펴보자. 이 시기에 발해에서 고려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고려사> '태조세가'를 보면 발해 장군 '신덕' 등 500인이 고려로 망명하고 같은 달에 예부랑 '대화균', '대균로', 공부랑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이 100호를 이끌고 고려로 들어왔으며 12월에는 발해 좌수위소장 '모도간'과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1천호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 망명자의 공통점은 대부분 대씨 성을 가진 왕족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문인 외에 무인도 포함되어 있다.

우선 이들은 중앙 정부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다. 자연스레 의심을 가져본다. 백두산이 이 시기에 폭발했다면 근처의 압록부, 현덕부, 남해부 사람들이 먼저 고려로 망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은 화산 폭발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부와 주를 관리하는 도독이나 자사, 수령 등의 이름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망명 인원도 1500호를 넘지 않고 있다. 수백킬로가 초토화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럼 폭발설의 주장처럼 많은 발해인들이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쇄설물 때문에 폼페이처럼 최후를 맞이하여 대부분 사망했기에 망명 인원이 적은 것인가?

926년에 전개되는 발해인의 항쟁

화산 폭발설의 주장에 따른다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반지름 200km 는 초토화 된 상황이다.
이 안에 있는 지역들은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고 수많은 성과 집들은 화산 쇄설물에 의해 파괴,불타 버려 황폐화 되어 버렸다. 곳곳에 불타 버린 시체와 가축들이 널려 있었을 것이며
부상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만 들릴 뿐이다. 당연히 살아남은 자는 소수에 불과할 것라고
추측 할 수 있다.

화산 쇄설물의 위력을 확인해 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기 바란다. http://volcanoes.usgs.gov/Hazards/What/Tephra/tephra.html

아래의 그림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926년 상경용천부 함락 후 전개되는 발해인의 항쟁 지역과 대규모의 화산 폭발에 의한 피해 지역을 필자가 그린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200km 이면 발해 3경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이고 나머지 수도인 '상경용천부'와 '남경남해부'만이 최소한의 피해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편서풍의 영향으로 날아간 화산재는 발해의 '정리부'와 '안변부'를 통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확대
926년에 전개되는 발해 지방 정부와 요의 전쟁은 결국 1년만에 막을 내리지만 요는 발해 대부분의 지역을 포기하게 된다.

물론 요의 최종 정벌 대상이 중국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발해인의 저항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는 되풀이 되어 요나라는
발해 옛 땅에서 일어난 금에게 멸망
을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하지만 926년 전개되는 발해 부들의 투쟁은 '막힐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백두산 근처에 있는 부들이다. '장령부'의 경우 6개월간 요와 전투를 벌렸으며 백두산 지역이던 '압록부'는 '장령부' 를 지원하기 위해서 회발성에 기병 7천을 지원했다. 장령.압록부 소속 발해 군대는 회발성에서 요와 접전을 벌렸는데, 더욱이 그 해 7월 중경현덕부 소속인 '철주'에서 자사 '위균'이 군민들과 항쟁하였다.

'철주'는 백두산에서 대략 10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던 주이다. 또한 일본으로 날아가는 화산재의 길목에 위치한 정리.안변부 역시 항쟁에 참여하였다. 특히 '정리부'는 3번이나 걸쳐 요에 대항하였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초토화된 지역의 사람들이 가장 치열하게 항쟁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말이다. 폭발설에 따른다면 잿더미 속에서 요에 대항할 힘을 가질 수도 없으며, 굳히 요의 군대가 공격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화산 폭발설의 한계

앞에서도 언급 했지만 화산이 정확히 언제 폭발했는지 모른다.

Global Volcanism Program (GVP) (지구 화산 현상 프로그램) Volcanic Activity Reports(화산 활동 보고서)를 참조하도록 하자.백두산의 내용 중에 발췌한 것이다.(http://www.nmnh.si.edu/gvp/
volcano/gazet_b.htm)

Baitoushan
Jilin, China 41.98°N, 128.08°E; summit elev. 2,744 m

"... Satellitic cinder cones are alligned along a NNE trend. one of the world's largest known Holocene explosive eruptions took place from Baitoushan about 1000 AD, depositing tephra as far away as northern Japan and forming in part the present caldera. Four historical eruptions have been recorded since the 15th century..."

가장 큰 규모의 폭발 중에 하나라고 소개하는 백두산에 about 1000 AD 가 보인다. 이 보고서에서도 백두산의 화산 폭발에 대해서 정확한 연도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두번째, 화산 분출물의 종류와 분연의 방향에 따라서 상황히 달라질 수가 있다. 1980년대 폭발한 세인트 헬렌즈의 예를 보자. 당시 세인트 헬렌즈의 분출은 TNT 화약의 10~50메가톤에 해당되고,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500배 이상의 폭발력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분연이 수직으로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에 램이 말하는 소위 분연의 영향권인 27km 이하였으므로 기후에 영향을 적게 미치었다.4)

1982년에 폭발한 멕시코의 엘치촌 화산은 규모는 세인트 헬렌즈보다 소규모였으나 그
이 수직적으로 올라가 더 많은 화산회나 가스를 성층권에 주입하였다. 또한 분출물은 아
류산 가스를 많이 포함하여 이것을 기원으로 하는 에어로졸이 성층권에 많이 생성됨으로써 그 영향이 컸다.5)

백두산이 대규모로 폭발 했더라도 분연이 옆으로 확산 되었다면, 또한 그 분출물의 종류에
따라서 피해 규모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발해 지역은 온난화로 인해서 농작물 생산
이 가능하였다. 만약 화산 폭발로 기후가 변화했다면, 발해 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났거나 아
니면 외부로 군사적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다. 당장 먹을 식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발해사 전공자들의 폭발성 부정

발해사 전공 출신인 송기호 교수나 한규철 교수 역시 화산 폭발설의 멸망 가능성에 회의적
이다. 송기호 교수는 '발해를 찾아서'에서

"...우선 상경용천부에 남아 있는 현무암 덩어리는 백두산 분출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 아니
라 경박호 부근의 용암 분출로 형성된 것이다. 즉, 남아 있는 발해 유적들이 모두 현무암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용암이 분출하더라도 한 도시를 완전히 덮지 않는 한 멸망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화산재는 비옥한 토지를 제공해 준다 .화산 폭발이 빈번한 일본이 망한 적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령 그 원인으로 발해가 멸망하였다면 거란 태조가 굳히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 곳에 쳐들어 왔을 리 만무하다. 태조가 이 곳을 공격해 온 것은 그들이 중원으로 공격하기 위한 전초 작업으로 배후 세력을 없애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화산이 폭발하여 쇠퇴하였다면 이들이 배후 세력으로 인식될 리는 것 없었을 것이다..."

.. 좌측 사진은 작년 7월 필자가 중국의 화룡시 두도 평야에 있는 서고성 유적을 찍은 사진이다. 이 지역은 백두산에서 불과 수십km 떨어진 곳이다. 대규모로 화산이 폭발했다면 이 성의 유적은 사라지던가 아님 땅 속에 파묻혀 있어야 한다.

우측에 나무가 보이는 곳이 북쪽 성벽이고, 저 멀리 보이는 논두렁이 아마 동쪽성벽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성 안은 논으로 변해 버렸다. 이 지역은 주위 수십 km가 평야 지대이다.

필자도 현지 주민들로부터 발해가 화산 폭발로 멸망했다는 전설이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결국 10세기 초, 백두산이 폭발하여 발해가 멸망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아마도
백두산은 발해가 멸망한 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폭발한 것이 아닐까?


백두산은 언제 폭발했을까?

현대에 들어와 화산 폭발과 기후는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세기에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화산의 분출로 인하여 유럽과 북아메리카는 냉하로 시달렸다. 런던에서는 여름 기온이 2~3도나 떨어졌으며 뉴잉글랜드에서는 6월 6일과 11일에 대설이 내렸다. 낮은 기온으로 인해 농사는 흉작이 되었던 것이다.6) 이것은 화산 분출로 인해서 대기층에 먼지가 축적 되었기 때문이다.

#화산 쇄설물의 종류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를 방문하기 바란다. http://volcanoes.usgs.gov/Hazards/What/Tephra/tephra.html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살펴보도록 하자. 냉한 같은 이상 난동 기후를 살펴본다면 백두산 화산 폭발과 연관지어 생각 할 수 있다. 사료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아래 내용은' 김연옥' 교수가 정리한 글이다.(김연옥,<<기후변화>>,(주)민음사,1998)

<고려사>,<증보문헌비고>

-냉하-

1185년 여름에 파리가 없었다.
1309년,1310년 여름에 추워서 겨울옷을 입는 사람이 있었다.
1367년 갓옷을 여름에 입었다.

-이상 난동-

1278년 강물이 얼었다.
1143년,1324년,1384년 동사자가 있었다.


이상기후 변동이 심했던 시기를 살펴보자. 바로 고려 말이다. 공민왕 재위 시기인 1352년~1374년 동안 기근은 13회에 이르렀으며, 대풍, 우박, 대무가 빈번했으며 대수해가 5회, 한
발이 있었던 해가 8회에 달했다. 그 외에도 기온은 이상 온난과 이상 저온을 되풀이하였다.7)

공민왕 대의 이상 기후를 살펴본다면 이 시기에 화산 폭발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냉하는 화산 폭발과 관련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발해의 멸망 원인은?

925년 여름 발해 왕실에서는 정치적 내분이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미 문왕 이후 25년간 발
생한 내부의 정치 투쟁은 6명의 왕을 교체시켰다. 그 앞의 고구려 역시 귀족간의 세력 다툼
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발해 역시 924년 요의 군대를 막아낸 후,요의 주력군이
서쪽으로 빠지자 자연히 봉합되어 있던 내부적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왔다.

결국 고려로 망명한 발해인은 정치 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인 것이다. 부여성의 전투와 달리
발해의 운명을 걸고 출병한 3만 군대는 힘없이 무너지고 군을 지휘한 노상은 도망가서 투
항해 버렸다. 거란도를 이용하여 기습적으로 침략한 요의 대군에 발해는 무너져 버린 것
이다.

발해는 고구려와 달리 짧은 시간에 수도가 함락 되었지만 당과 같은 몰락의 과정을 겪지 않
았다. 반란이 일어난 기록도 없으며 지배층의 착취로 인한 피지배층의 불만이 터져 나온 사
례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인선왕이 항복하자 성 안의 백성들이 분개하여 왕에게 압력을 넣
어 다시 요와 전투를 벌린 것은 백성들이 발해라는 국가에 애착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방 세력의 이탈 역시 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흔들림이 없었다. 비록 수도는
함락되어 중앙 정부는 멸망했지만 발해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발해의 후국들이 그 역
사를 계속 이어 갔던 것이다.

문헌.고고학 상의 접근의 한계로 인해서 발해의 멸망 원인은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화산 폭발로 발해의 멸망을 설명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수수께
끼의 왕국이 아니라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역사로서 발해사를 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주)

1) 원종관. "압록.두만강 대탐사." 중앙일보, 제15면,2000.10.18 .
2) 유정아,<<한반도 30억년의 비밀 3부-불의 시대>>,도서출판 푸른 숲,1998,
p.97.
3) 유정아,1998,앞의 책, p.128.
4) 김연옥,<<기후 변화>>,(주) 민음사,1998,p.283.
5) 김연옥,1998,앞의 책,p.283.
6) 김연옥,1998,앞의 책,p.282.
7) 김연옥,1998,앞의 책,p.170.

참고문헌)

김연옥,<<기후 변화>>,(주) 민음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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