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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스님은 증오(證悟)를 부정했던가 ? (5)
김호성 교수의 이른바 ‘돈오의 새로운 해석’에 대하여
글/ 박성배(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부룩대학 비교학과 종교학 교수)
다음은 김교수의 논문 가운데서 의심나는 대목, 동의할 수 없는 대목, 또는 문제삼을 만한 대목들을 모은 것이다. 대목 대목마다 응답'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하게 필자의 의견을 붙여놓았다. 모두 후일의 보다 나은 대화를 위해서이다. 김교수가 이번 논문을 통해서 제기한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보조국사의 깨달음에 대한 그 의 색다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깨달음과 깨침의 문제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고 서로 합의하는 바가 있다면 여기에 모은 잡다한 문제들은 그리 큰 걱정거리가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표시된 페이지는 김교수의 〈돈오돈수적 점수의 문제점>이 수록된 <김지견박사 화갑기념논문집>(민족사, 1991)의 페이지를 가리킨다.
(문제 1) (p.459 중간) 오늘날 (한국)의 돈오점수와 돈오 돈수의 논쟁은 인도• 티베트•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같은 頓門(頓宗) 안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의 결합양식에 대한 대립적 인식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응답] '깨달음과 닦음의 결합양식'이라니? 왜 하필이면 수학이나 형식논리화에서 쓰는 결합양식'이라는 말을 썼을까?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선지식들의 대립이 두 단어의 결합양식 때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깨달옴과 닦음의 관계를 이러한 표현으로 정리하는 김교수의 깨달음과 닦음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선지식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 같다. 철저한 분석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 2) (p.459 하단, 주 2) 현재의 돈오점수설에 대한 비판들은 모두 돈오돈수= 돈오, 돈오점수= 점수'의 구조로 이해하고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박성배교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점은 후술할 것이다.
(응답) 현재의 돈오점수설에 대한 비판들을 이렇게 모두 일반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선 필자의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후술한다' 했으나 어디서 후술했는지 발견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도 김교수가 이해하는 돈오점수설에 대한 비판들과 실제의 비판들 사이에 거리가 있는것 같다. 이 점 또한 더 깊이 따져들어가야 할 대목이라 생각된다.
(문제 3) (p.461 상단) 교판론敎判論과 회통론會通論의 상호대립과 상호작용의 역사로 불교사를 이해하면서, 그 중에서 희통론의 흐름이 보다 주류이며 정당한 것으로 보는 필자(김교수)의 사관에 비추어 보더라도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의 조화• 회통을 시도하는 박교수의 그 같은 노력은 대단히 뜻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응답)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필자는 그러한 회통을 시도한 적이 없다. 그러나 평자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김교수가 불교사를 회통론과 교판론의 상호관계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착상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회퉁과 교판을 도식적으로 대립시킬 때 양자는 그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역사가들이 흔히 도전과 응수를 역사발전의 공식으로 이용하듯 그렇게 잘못 이용될 위험성이 있다. 불교인의 회통과 교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회통은 반드시 교판으로 나타났고 교판은 또한 회통을 전제했었다. 불교역사상 위대한 회통론자치고 교판을 하지 않았던 분이 있었던가? 위대한 교판론자치고 회통을 하지 않은 자 있었던가? 중국 불교사에서 대표적인 교판자로 소문이 난 천태지의 대사의 경우를 보자. 그의 실제 공헌은 교판보다는 瞑想의 이론을 심화시킬대로 심화시킨 지관법이나 일념삼천의 사상일 것이다. 천태의
이런 면을 김교수는 교판이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회통이라 부를 것인가? 한국 불교사에서는 원효대사를 희통의 대표로 꼽는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저술을 통해서 그가 빼놓지 않고 하고 있는 일은 철저한 교판작업이다. 교판에 아전인수의 치우침이 없지 않았고 회통에 諸說混合의 홈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경우이고 그것들의 본래 사명은 어디까지나' 교판을 회통으로 그리고 회통올 또다시 교판으로' 접목하고 맥올 통하게 하여 죽은 것을 살려내는 데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문제 4) (p.461 상단) 그러나 아무리 회통이 요청된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혼합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논리의 내적 정합성을 띠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 입장에서 박교수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응답) 다시 김교수가 생각하고 있는 회퉁이 도대체 어떤 것이냐는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통을 교판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한, 거기에는 회통을 혼합 이상의 것으로 꿰뚫어 볼 안광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다시 말하면 모든 회통은 혼합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서양인들에게는 동양인의 회퉁이라는 경험을 담을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동양의 회통을 싱크래틱 (syncretic)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종의 혼합이라는 것이다. 겉만 보고 속을 못보면 이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신학교에는 한국 학생들이 많다. 교수들이 가장 골치를 앓는 것은 한국 신학생들의 성경 이해는 엉뚱 할 때가 많다고 한다. 그 원인은 성경을 한국 말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한국 말로 번역된 성경의 단어들은 모두 동양사상 속에서 성장한 말들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문헌인 기독교 성경을 읽고도, 읽은 다옴 독자의 마음속에서 성장하고 있는것은 동양사상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의 마술적인 성격이다. 반대로 서양사람들이 영어로 번역된 동양의 불경을 읽고 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는 것온 동양이 아니고 서양인 경우가 있다. 그 좋은 예가 회통을 싱크래틱으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김교수는 그의 논문 도처에서 불교적인 경험을 담은 말을 서양의 풍토에서 발생하고 형성된 서양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쓰고 있었다. 필자는 김교수가 변증법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어리둥절해질 때가 많았다. 김교수가 필자의 논문을 회통론으로 분류해 놓고 결국 그 속에서 회통의 천적인 ’혼합’ 밖에 보지 못했다면 그는 처음부터 이를 회통론이라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문제 5) (p.461 중간) 첫째, 박교수는.. 임제와 종밀이 상호모순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연 그럴까? 종밀선과 임제선은 하나로 조화되거나 회통될 수 없는가?
(응답) 필자가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성철스님이 그렇게 본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성철스님은 왜 돈오점수설을 비판했는가'를 설명하는 논문의 첫 장에서 언급하였다. 이 장의 이름으로 보나 전후 문맥으로 보나 이것이 성철스님의 주장이라는 것은 명백한데 어째서 이를 필자의 주장으로 단정하기에 이르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교수는 여기서 종밀과 임제의 회통을 제의해 놓고서 실제로는 증오를 부정하고 간화경절문을 폄가(貶價)했었다. 그러고도 양자의 회통이 가능할까?
(문제 6] (p.461 하단) 둘째 - 보조의 돈오점수설에 대한 ‘선문정로’의 비판논리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으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대전제 - 보조의 돈오점수의 돈오는 해오이다.
소전제 - 해오는 지해이며 지해는 교이다.
결론 - 그러므로 돈오점수는 선이 아니라 교이다. 따라서 보조는 선사가 아니라 교가, 구체적으로는 화엄선이다.
(응답) 김교수는 눈에 안 보이는 속보다는 눈에 보이는 겉을 문제삼고 따라서 말이 의미하는 내용보다는 말 자체의 형식을 따지는 데에 더 깊은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필자가 이렇게 느끼느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에 나오는 삼단논법으로 《선문정로)의 비판논리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김교수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삼단논법이란 전체에 관하여 참인 것은 부분에 관하여서도 참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유편무(遍有遍無)의 법칙에 의거하여 보편적인 원리로 부터 부분에 관한 지식을 이끌어내고 일반으로부터 特殊를 추정하는 일종의 연역적인 추리방법에 불과하다. 禪이란 원래 이러한 연역추리의 허를 찌르고 나온 사상이다. 성철스님이 《선문정로)에서 돈오점수설을 교가의 학설이라 낙인찍고 보조선을 화엄선이라 부르며 보조국사를 교가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김교수는 성철스님의 이러한 주장을 동원된 삼단논법의 결론으로 이끌어내기 의해 대전제와 소전제를 만들어 넣었다. 여기서 대개념은 지혜(知慧)요, 매개념(媒槪念)은 解悟요 小槪念은 頓悟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엔 ‘모든 해오는 지해’이다 라는 말이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 노릇을 하고 있어 사실상 대전제로 되어 있고 '돈오점수의 돈오는 해오이다’ 라는 말이 소전제가 되고 결론은 ‘그러므로 돈오는 지해이다'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필자가 김교수의 삼단논법을 아리스 토텔레스의 표준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문제는 대 전제이다. 과연 모든 해오는 지해인가? 누구나 이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여기에서 연역추리의 허점이 여실이 드러나고 만다. 어떤 경우는 해오가 지해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해오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또한 해오를 성취한 개개인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지 않고서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해오를 지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피장파장이 되고 마는 것이므로 결국 이러한 삼단논법은 여기서 하나도 참을 드러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문정로)의 비판논리를 김교수처럼 삼단논법으로 정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백보를 양보해서 《선문정로) 에서 돈오점수설 비판은 겉으로 나타난 외형적인 부정작업이었다. 그런 외적 비판의 내부에는 항상 돈오돈수설이라는 긍정작업이 있다. 다시 말하면 돈오돈수설 비판과 돈오돈수 주장은 내외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관계를 성철스님의 주장에 따라 파사(破邪)와 현정(顯正)의 관계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성철스님에게 있어서 돈오점수 비판은 파사요 돈오돈수 주장은 현정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반드시 함께 다루어야 한다. 겉만 다루고 속을 다루지 않으면 절름발이이다. 그러나 김교수는 《선문정로)의 비판논리라고 말하면서 파사인 겉만을 다루고 현정인 속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김교수의 관심사가 겉을 다루는 데에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문제 7) (p.461 하단에서 p.462 상단까지) 박교수는 이러한 삼단논법에서 대전제와 소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대전제는 보조 스스로도 명언한 바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전제 즉 돈오점수의 돈오 즉 해오는 과연 지해인가? 필자(김교수)의 견해로는 해오는 지해가 아니라고 본다. 대전제와 소전제를 긍정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그 결과까지 긍정해야 하는데, 박교수는 위의 소전제는 받아들이면서도 그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므로 모순에 빠지고 있다.
(응답) 바로 앞의 응답에서도 밝혔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여기에 끌어들이는 것은 성철스님이 제기한 문제 즉 깨침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김교수 는 필자가 '해오는 지해'임을 받아들이면서도 성철스님의 보조평에 동의하지 않아 모순에 빠졌다고 말했다. 본문에서도 필자가 누차 밝혔지만 보조국시는 해오를 지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해오의 경지에서는 지해의 영향인 지애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보조사상을 말하는 한, 이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필자는 ‘해오는 지해'리는 전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모순에 빠지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는가? 필자가 이해하는 바로는 선이냐 교나를 따지는 따위는 보조국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禪家면 어떻고 敎家면 어떻단 말인가? 임제선이면 어떻고 화엄선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런 것을 따지고 앉아있는 한, 보조국사의 진의는 전달 될 수 없을 것 같다.
(문제 8) (p.461 상단) (박교수가)지해의 수용을 상황논리에 의해서 정당화하고자 하나 설득력이 약하다.
(응답) 김교수와 필자는 서로서로 관심사가 다른 것 같다. 말은 같은 말을 쓰지만 서로 서로 가리키는 바가 달라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다. 보조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知解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의 논문에서 지해를 거론할 때마다 문제의 초점은 거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김교수는 필자가 지해를 중심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먼저 살폈어야 했었다. 김교수는 필자가 무엇을 정당화하고자 한다고 생각했기에 말을 이렇게 심하게 할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필자는 분명히 ‘해오는 지해 '임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필자가 무엇을 밝히고자 하는지도 모르면서 설득력이 약하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공평치 못한 일인 것 같다. 김교수는 P. 466 상단에서도 필자에 대해서 똑같은 평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응답은 지금과 똑같다.
(문제 9) (p.462 중간) 과연 돈오면 돈수인가? 돈오는 반드시 돈수와만 조합이 가능한가? 돈오와 돈수의 조합에 문제는 없는가?
(응답) 왜 김교수는 여기에 또 ‘조합組合’이란 말을 썼을 까? 조합이란 말이 돈오와 돈수의 관계를 제대로 표현하는 적당한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양자는 두 개의 딴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많은 돈오돈수 반대자들은 돈수를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해괴한 것으로 생각하고 노발대발한다. 보조국사는 돈오돈수를 돈오점수의 종착점으로 보았고, 성철스님은 돈오점수를 돈 오돈수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성급히 단정적으로 판단하려 말고 우리 모두 돈수의 정체를 먼저 파악 해야 할 것이다.
(문제 10] (p.462 중간) 한국 선의 현실에 대한 비평에서 박교수는 어디까지가 《선문정로)의 견해이고 어디까지가 박교수 자신의 견해인지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언급하고 있는데 .......
(응답) 이 문장온 필자의 논문 가운데 첫장인 “1. 성철스님온 왜 돈오점수설을 비판했는가”에 나오므로 성철스님의 주장을 필자가 해석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거의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온 필자의 글투에서도 ‘•••••안 맞는다는 것이다' 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등등의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이것은 자기의 말이 아니라 남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문제 11] (p.465 상단) 하나로 회통된 한국 선의 이론 과 실천의 전통속에서 유독 《선문정로》에서 처음으로 겉다르고 속다른 병리라고 보고있는 것일 뿐이다.
(응답) 겉다르고 속다른 것이 병이란 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병을 가지고 있지 않는 종교인은 거의 없 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병은 시대 따라 사회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요즈음의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불교적 수행을 하면서 속은 기독교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기독교인이면서 속엔 불교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러면서도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면 이는 입으로는 동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몸은 서쪽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종의 병리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겉은 임제요 속은 종밀'이란 말은 이런 말이다. 실제로 필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무수히 보았다. 이것은 추상적인 일반론이 아니다. 순간순간 개개인의 마음 단속을 위해 던져진 경책의 몽둥이 같은 말이다. ‘하나로 회통된 한국 선의 이론과 실천의 전통 속에서 •••••' 운운하는 김교수는 그 말투로 볼 때 나라의 나쁜 점은 안 보고 좋은 점만을 이야기하는 낙관론자와 비슷하다.
(문제 12) (p. 465 중간) 따라서 종밀식과 임제식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택하라고 하는 돈오돈수설의 견해는 올바른 불교사 이해가 아닐 뿐더러, 그러한 논리를 수용하고 있는 박교수의 견해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한국선을 화엄선과 임제선의 혼돈으로 보는 역사의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응답) ‘하나를 택하라'는 성철스님의 말씀은 실제로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사람들에서 겉다르고 속다르면 공부에 해롭다고 경계하는 말씀이고 김교수가 ‘올바른 불교사의 이해'를 운운하는 것은 역사를 놓고 학문을 논하는 마당에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양자는 따로따로 떼어서 따져나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두 개의 다른 문제를 혼동하여 말하면 대화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김교수가 ” 한국선을 화엄선과 임제선의 혼돈으로 보는 역사의식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앞의 경우와 똑같이 두 개의 다른 문제가 합쳐져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교수가 한국선을 보는 역사의식을 문제 삼는 것과 성철스님이 요즈음 참선하는 사람들의 병통을 지적하는 것은 따로 떼어서 따져 나가야 할 것이다.
(문제 13) (p.466 중간) 구체적으로 박교수가 보조의 해오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보조국사는 불경을 읽음으로써 깨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는 그것이 궁극적인 깨침 즉 증오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불경을 읽고서 얻는 깨침을 궁극적인 증오와 구별하기 의해서 종밀은 해오라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아직도 지해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보조 자신의 진술이 아니라 박교수의 比量(anumana) 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논문의 도처에서 보조 저술에 근거한 聖言量(sabda)과 자신의 比量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밝혀두지 않아서 이해에 어려움이 많다. 위의 인용구를 통하여 볼 때 해오를 ‘불경을 읽음으로써 얻는 지적인 깨달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응답) 따옴표로 표시된 필자의 글은 김교수가 그의 주 24)에서 밝힌 것처럼 1991년 10월 14일 송광사에서 배부한 필자의 논문, 별쇄본(p.8)에서 인용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첫째는, 필자가 논문의 도처에서 보조국사의 저술에 근거하여 聖言量과 필자 자신의 比量을 분명하게 구별해 놓지 않아서 이해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한 대목이다.
김교수의 이해 곤란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모르겠다. 김교수는 필자의 글을 인용한 다음, "이러한 이야기 는 보조 자신의 진술이 아니라 박교수의 비량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고 말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명백한 것이 그 다음 문장에서는 "양자가 구별이 안되어 어려움이 많다"는 투로 바뀐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할까? 필자의 글에는 네 개의 문장이 있다. 처음 세 문장의 주어는 모두 보조국사로 되어 있다. 문장의 형식으로 보아서도 이것은 보조국사가 한 말이 아니라 필자가 보조국사를 소개한 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명백하다는 김교수 의 첫 발언은 맞다. 짐작컨대 여기서 김교수가 하고 싶은 말은 성언량과 비량을 구별하는 일이 아니라 “보조국사는 불경을 읽음으로써 깨칠 수 있다고 믿었다"는 필자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보조국사는 불경을 읽음으로써 깨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든가 또는 '그런 깨침온 증오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필자의 보조 이해는 틀렸다'든가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라 짐작된다. 만일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문제를 그렇게 깨끗하게 제기해야지 왜 불필요한 성언량이니 비량이니 하고 빙빙 도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필자는 왜 김교수가 이 자리에 불필요한 인도논리학의 전문용어인 성언량과 비량이라는 개념을 그것도 범어까지 동원하면서 갖다 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보조국사가 불경을 읽음으로써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런 깨달음은 아직 구경각이 아니라는 데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직접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문제 14) (p.466 하단) 그러나 보조는 해오 즉 돈오점수의 돈오를 지해가 아닌 견성(見自本性)으로 보고 있다.
(응답) 해오는 지해가 아니다'라는 말은 김교수가 그의 논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해오가 지해냐 아니냐를 경전상의 정의를 가지고 따지는 데에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실제 경지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학자가 스님 같은 소리를 하고 앉아 있다고 답답해하실 분도 없지 않겠지만 사실 이 문제는 누군가가 지금 깨달았는데 그 깨달음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실존적인 의심에서 부터 비롯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해오와 지해의 실제 내용올 드러내 보임이 없이 아무리 해오는 지해가 아니라고 주장해 보았자 헛바퀴가 돌듯 공허하기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김교수는 이왕 '견성'이란 말이 나왔으면 견성의 상징적인 의미를 체험적인 차원에서 따져야 하고 특히 보조국사와 성철스님 사이에 나타난 개념 사용상의 현저한 차이를 계속 추궁해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하지 않고 해오는 지해가 하닌 견성이다'라는 말만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 보조국사의 견성은 해오를 가리키고 성철스님의 견성은 증오를 가리킨다. 말은 똑같은 견성이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바는 현저히 다른 두 개의 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조사상의 근본전제가 '해오의 경지에서는 解碍를 극복 못한다'는 것인데 김교수는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김교 수는 여기에서 (修心訣)과 (節要)에 나오는 돈오의 정의를 가지고 돈오점수의 돈오는 지해가 아닌 깨달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문제는 그러한 말의 정의에 있지 않고 그러한 깨달옴을 얻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삶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여기에 갑과 을이라는 두 사람의 수행자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갑과 올이 똑같이 '나는 해오를 얻었노라고 주장하면서 김교수가 인용한 (수심결)과 《절요)의 돈오 정의를 가리켜 이것이 바로 나의 체험한 바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하자. 이때에 갑과 을이 둘 다 진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진짜는 별로 말이 없는데 가짜가 기승을 부리면서 (보조어록)을 한 글자도 틀림없이 다 외우고 '나의 체험은 지해가 아니라 견성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이 者가 가짜임을 증명할 것인가? 김교수가 여러 편의 논문을 통해서 해오는 지해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아직 해오를 얻지 못하고 여전히 알음알이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 김교수와 똑같은 주장을 못할 것 같은가?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무엇으로 해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인가? 보조국사도 성철스님도 그리고 천하의 선지식인들이 모두 이 점을 걱정하신 것이다. 실제의 삶 자체에는 해오 다음에도 여전히 解碍가 남아 있다는 이 무서운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문제는 다른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보조국사 자신의 문제이었고 지금 우리들의 문제이다. 보조국사의 문제였으며 우리의 문제인 ‘解碍의 문제'를 외면하는 모든 돈점 논의는 문제 의 핵심에서 벗어나간 일종의 부실공사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제 15) (p.469 중간) 그런데 박교수는•••••• (그의) Buddhist Faith and Sudden Enlightenment 라는 저술에서 해오를 성숙하지 못한 깨달음이라고도 하지만 해오=삼매로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해오를 삼매로 보는 것은 돈오선의 역사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해오=삼매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도 않고 보조의 저술 어디에도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응답) 定慧雙修와 惺寂等持는 보조사상의 핵심이다. 이 점은 김교수 자신도 누차 강조했던 바였다. 해오가 慧라면 삼매는 定이다. 해오가 惺이라면 삼매는 寂이다. 양자는 體와 用의 관계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성적등지 정혜쌍수라는 사상이 나온 것이다. 정혜쌍수라는 말을 잘 생각해보자. 悟면 慧고 定이면 三昧가 아닌가. 해오 없는 삼매 없고, 삼매 없는 해오 없다. 이 문제는 神會 이전의 北宗禪의 공식으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교수도 강조한 바 있는 수상정혜(隧相定慧)로 풀려해서도 안되고 자성정혜(自性定慧)로 풀어야 할 것이다. 해오에서 삼매를 빼내버리면 무엇이 남으며 삼매에서 해오를 빼내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해오를 삼매로 보는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김교수의 해오란 과연 어떤 것인가 궁금해진다.
김교수의 이러한 경향은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返照之功을 해오 이후로만 보고 解悟 이전에 붙이면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성숙하지 못한 깨달음이라는 말은 해오를 얻은 다음, 증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단계가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김교수는 또 여기서 역사의 문제와 오늘날 수행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순간순간 당면하고 있는 실존적인 문제를 혼동함으로써 일종의 혼선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김교수는 또한 보조의 저술 어디에도 없다는 그 말은 사상의 원형이란 형태로 거기에 엄연히 있었다. 또 뭔가 의사소통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한 말이 한 획 그대로 〈보조어록>에 있어야 한다고 김교수가 주장한다면, 김교수의 평은 맞다. 그러나 필자의 뜻하는 바가 보조국사의 뜻이 계합한가를 따진다면 김교수의 표현은 정확하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보조사상을 자기의 삶 속에 용해하고 이를 현실에서 철학적으로 전개하려 할 때에는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그 다음에 자기의 주석을 다는 식의 주석학적인 공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 16) (p.469 하단) 이러한 해오의 절대성 • 완전성, 즉 해오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동소(同疏)에서 “若約解悟 是性具門 非功行頓畢也 約證悟 則始是現行門頓修 辦事也" (보조전서), P.127) 라고 했다는 데에서도 분명 하다 하겠다•••••• 따라서 해오는 단순한 지해가 아니라 깨달음이다.
(응답) 여기서 동소(同疏)란 청량스님의 ‘정원소貞元疏’를 가리킨다. 그러나 인용된 문장은 청량스님의 말이 아니고 보조국사의 해설인 것 같다. 원문의 뜻을 전후로 잘 살펴보면 보조국사의 뜻은 김교수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으니 좀더 철저한 분석이 요청된다고 본다.
(문제 17) (p.469 하단, 주 34) 해오와 증오를 동일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박교수만이 아니라 전치수선생의 논평에서도 같은 범주착오가 행해지고 있다.
(응답] 김교수는 이와 비슷한 말을 본문에서도 몇 번인가 했었다. 여기서 범주착오라는 죄명에 해당되는 죄행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34라는 번호가 붙어 있는 본문을 보니 '해오한 다음에 점수하고 그 다음에 증오한다;'는 도식에 관계되는 곳이었다. 김교수는 이를 두고 '보조 저술의 그 어디에도 없다'는 죄목 하나를 더 붙여놓았다. 보조 저술의 도처에 나타나 있는 보조사상의 기본골격을 왜 이러게 단죄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필자의 해오-점수-중오'라는 도식이 왜 해오와 증오를 동일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좀더 자상한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범주착오 운운은 필자가 이미 본문에서 밝혔듯이 김교수가 해오는 초시간적이고 증오는 시간적이라고 자기류의 일방적인 정의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발생한 평지풍파현상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김교수가 해오의 가능 근거인 性具門이 초시간적인 것을 해오가 초시간적이라고 속단한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김교수는 증오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현행문이고 현행문은 시간상의 일이기 때문에 증오는 시간적이라고 속단한 것 같다. 그러나 김교수는 수행자가 증오의 경지에서 성구문에서 말하는 초시간적인 것과 하나가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 18) (p.474 상단) 보조의 돈오점수의 돈오는 해오이므로 철저한 깨달음인 돈오돈수(=돈오)를 받아들이고 (선문정로)의 돈오돈수는 닦음 이론이 없으므로 보조의 돈오점수(=점수)를 받아들여 변증법적인 종합을 통해서 돈오돈수적 점수설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돈오와 점수의 종합을 돈오점수라고 하지 않고 돈오돈수적 점수설이라고 한 것도 돈오돈수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응답] 김교수는 p. 460에서 필자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을 會通說이라 불렀는데 여기서는 변증법적인 종합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것 역시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김교수는 필자가 돈오돈수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사실과는 매우 거리가 먼 말이다. 그러한 입장은 바로 그와 정반대의 입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전치수교수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필자가 돈오돈수라 말하지 않고 돈오돈수적 점수설이라고 뒤에 점수를 갖다붙인 것은 돈오점수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체계에서는 돈오돈수란 증오를 가리키고 점수는 보현행을 말하므로 증오사상에 입각한 보현행원사상이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정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증오와 보현행의 관계는 체와 용의 관계이므로 양설의 종합이라는 표현은 정확치 못한 것이며 더구나 변증법적인 종합이라는 표현은 더 거리가 먼 것 같다. 다만 후일에 변증법적인 사고방식에 젖은 어떤 문 밖의 역사가가 돈오점수파와 돈오돈수파라는 두 물줄기가 변증법적인 종합을 통해 돈오돈수적 점수설로 발전해 나갔다고 서술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문 안에서 모든 사정을 훤히 아는 사람은 돈오돈수적 점수설이 증오와 보현행의 관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를 변증법적인 종합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 19) (p.474 하단) 그러나 보조에게는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없다. 필자(김교수)가 이해하는 바로는 그의 사상은 체계적 이해가 가능하고 또 그 스스로도 회통론자이기 때문에 자신 안의 이론적 모순이나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 있다면 반드시 회통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끄럽지만 말이 좀 안 되어도 좋으니 현실에 더 충실하기로 결심하여 돈오점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말도 되고 현실과도 가장 잘 부용하는 이론으로서 돈오점수를 확신을 가지고 제시하였던 것이다.
(응답) 보조국사는 여러 차례의 깨달을 얻고 난 다음에도 자기의 심경을 ‘如讐同所’’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불교전서), p.420. 원수와 함께 사는 듯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없다는 말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이다. 아무런 괴리도 모순도 없는 이론이 빛을 잃고 배가 난파당하듯 부서지는 곳이 현실이다. 보조국사는 이런 경우까지도 항상 고려에 넣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 무서운 현실의 대명사로서의 인간을 문제삼고 이를 보조사상 속에 끌어들였고, 나아가서는 '부끄러움'과 '말 안됨'의 문제까지도 우리의 논의 속에 포함시켜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다.
보조국사의 주요 관심사는 그의 이론을 수미일관 아무런 모순없이 잘 만드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이 무서운 현실을, 하나도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과대평가하지도 않고 과소평가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내려고 평생 애쓰신 분이 우리의 보조국사였다고 생각한다. 설시이오 대경각미(說時以悟 對境却迷)를 즉 '말로는 아무 데도 막히지 않는데 현실에서는 갑자기 캄캄해져 버린다'는 말은 우리를 충분히 긴장케 한다. 이른적인 차원에서의 모순 없음이 그대로 현실 에서도 모순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김교수는 분명히 낙관론자이거나 아니면 불교철학자들이 항상 골치를 앓는 1※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199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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