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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더러움을 만든 사람보다, 그 더러움을 가리키는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
1. “사회파시스트(Sozialfaschist)”
1928년 8월, 제6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는 하나의 결의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름부터 살벌했습니다. 「국제공산주의에서의 일부 우익적 경향성에 대하여(О некоторых правых уклонах в международном коммунизме)」, 라는 문서였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Bukharin)이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과 손잡고 트로츠키의 권력을 분쇄한 뒤, 오히려 신경제정책(NEP)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농민과 시장을 조금 더 믿어보자는 쪽이었죠. 그런데 정치·사상 전선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부하린은 스탈린이나 카메네프보다, 심지어 지노비예프보다도 사회민주주의자들, 다시 말해 “사회개량론자”들에게 훨씬 가혹했습니다.
이 결의안의 핵심은 간단했습니다. 전 세계의 “공산당”들은 이제 중도좌파 세력을 우익 파시스트들과 같은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계급의 온건한 친구가 아니라,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안에 묶어두는 관리인이라는 논리였죠. 동시에 이 결의안은 각국 공산당에게 묘한 백지수표를 던졌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는 것은 배신이지만, 왼쪽으로 가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다는 식이었습니다.
독일공산당(KPD)에서 이 결의안의 효과는 강하고도 즉각적이었습니다.
대회가 끝난 지 3주도 지나지 않아, KPD 의장 에른스트 텔만(Ernst Thälmann)의 측근이자 함부르크 당 조직원인 욘 비토르프(John Wittorf)가 1928년 총선 자금 약 3,000 라이히스마르크를 횡령했다는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텔만이 이를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이었습니다. KPD 중앙위원회는 즉각 비토르프와 함부르크 당 간부들을 제명했고, 텔만 역시 조사 기간 동안 직무가 정지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는 스탈린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를 움직여 KPD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뒤집었고, 텔만은 복권되었습니다. 이후 KPD는 완벽하게 “스탈린화”되었죠.
하지만 이 대체역사에서 스탈린은 전연방공산당의 총서기이긴 해도 절대권력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강력한 정치가였지만, 혼자 코민테른의 결정을 뒤집을 만큼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 문제에서 결정권을 쥔 인물은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코민테른 집행위원장인 부하린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부하린의 판단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텔만 구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KPD 내부의 양쪽 날개가 동시에 움직였습니다.
당내 좌파, 즉 평의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루트 피셔(Ruth Fischer)와 아르카디 마슬로(Arkadi Maslow)는 텔만의 중앙파를 정면으로 공격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당내 우파, 혹은 부하린주의자로 평가받으면서도 평의회민주주의 문제에서는 좌파와 일정하게 뜻을 같이하던 아우구스트 탈하이머(August Thalheimer)와 하인리히 브란들러(Heinrich Brandler)가 텔만을 압박했습니다.
왼쪽에서는 “텔만은 혁명적 도덕을 배신했다”고 공격했고, 오른쪽에서는 “텔만식 중앙파는 조직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혁명적 구호만 외친다”고 비판했습니다. 양쪽에서 두들겨 맞은 텔만은 결국 일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탈하이머-브란들러의 옛 지도부가 당권을 되찾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1923년 독일 혁명 실패의 책임을 떠안고 있었습니다. 당원들에게 그들은 너무 신중했고, 너무 늦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 망설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텔만이 사라진 공백 속에서, KPD의 방향타는 루트 피셔와 아르카디 마슬로에게 넘어갔습니다.
피셔-마슬로 체제의 KPD는 실제 역사에서보다도 훨씬 매섭게 독일사회민주당(SPD)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 SPD는 더 이상 노동계급 안의 온건한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SPD는 자본주의 공화국의 관리인이고, 노동계급을 경찰과 의회와 임금협약 안에 가두는 사회파시스트 정당이었습니다.
그러나 피셔와 마슬로는 단순히 거리에서 구호만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독일노동조합총연맹(ADGB)을 “사회파시스트 노조 관료의 성채”라고 맹비난하면서도, ADGB를 당장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공장과 ADGB 계열 노조 지부 안에 혁명적 공장세포를 침투시켰습니다. 실업자-조합원 공동위원회도 조직했습니다.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SPD계 지도부가 ADGB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ADGB 지도부가 KPD에 동조하는 조합원들을 제명하면, KPD는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제명자들을 묶어 혁명적 노동조합 반대파(RGO)라는 분파조직을 키웠습니다. 다시 말해 KPD는 ADGB 안에 남아 조직을 갉아먹고, 쫓겨난 사람들은 RGO로 받아냈습니다. 안에서는 흔들고, 밖에서는 빼앗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SPD였습니다.
1928년 6월, 오랜만에 출범한 헤르만 뮐러(Hermann Müller)의 SPD 주도 내각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당의 왼쪽이 실시간으로 갉아먹히고 있었습니다. KPD는 거리에서 SPD를 때렸고, 공장에서는 ADGB를 파고들었고, 실업자 조직에서는 SPD를 “배부른 노동귀족의 정당”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해 11월,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의 우파 내각 시절부터 추진되어 오던 도이칠란트급 장갑순양함 건조 예산안 표결이 다가왔습니다. SPD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SPD가 이미 내각회의에서는 건조안에 찬성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중앙당(Zentrum), 독일인민당(DVP), 독일민주당(DDP) 등 연정 파트너들은 공공연히 내각 불신임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SPD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함부로 찬성했다가는 KPD가 곧바로 외칠 것이 뻔했습니다.
보십시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에게는 빵을 아끼고, 해군에게는 철갑을 입힙니다.
더 나쁜 일은 루르에서 벌어졌습니다.
192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루르 철강노동자 총파업 국면에서, SPD는 노동자들의 편을 강하게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중앙정부의 SPD 노동장관 루돌프 비셀(Rudolf Wissell)과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카를 제베링(Carl Severing)이 경영자 쪽에 약간 경도된 타협안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당의 최대 기반인 ADGB가 KPD에게 갉아먹히는 상황에서, SPD가 루르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연정 파트너들의 불신임 압박도 무서웠지만, 루르 노동자들의 이탈은 더 무서웠습니다. 내각은 흔들렸고, SPD는 점점 더 좁은 길로 몰렸습니다. 오른쪽에서는 “책임 없는 노동자정당”이라는 비난이 날아왔고, 왼쪽에서는 “노동자를 배신한 사회파시스트”라는 비난이 날아왔습니다. 둘 다 맞을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둘 다 맞고 있었습니다.
결국 1929년 1월, 우파 정당들은 독일국가인민당(DNVP)이 제출한 내각불신임안에 압도적으로 찬성했습니다. 헤르만 뮐러 내각은 출범 7개월 만에 붕괴했습니다.
그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시 한 번 내각을 잃었습니다. SPD는 정부 안에서도 상처를 입었고, 정부 밖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KPD는 이 모든 것을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파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우파는 이를 “마르크스주의 내각의 무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카를 제베링의 친구이자 베를린 경찰청장으로 프로이센 경찰대의 책임자였던 구스타프 뵐러(Gustav Wöhler)는 조용히 이를 갈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KPD는 더 이상 시끄러운 극좌 정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장과 거리와 노조 안으로 뿌리를 뻗는, 공화국 내부의 또 다른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뵐러는 그런 종류의 국가를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2.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지만 빨갱이는 때립니다
1929년 3월, 지난 선거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아 라이히슈타크 총선거가 다시 치러졌습니다. SPD는 기존 153석에서 무려 30석을 잃고 123석으로 주저앉았습니다. 원내 1당이라는 타이틀은 간신히 지켰지만, 이쯤 되면 “승리”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양심이 좀 필요한 결과였습니다.
반면 중앙당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당내 우익이자 현직 가톨릭 신부인 루트비히 카스(Ludwig Kaas)가 이끄는 중앙당은 7석을 늘려 68석을 확보했습니다. KPD도 14석을 늘려 중앙당과 같은 68석에 도달했습니다. 이쯤 되면 의회 안에서 검은 수단복과 붉은 완장이 같은 숫자로 앉아 있는 셈이었죠. 독일인민당(DVP)과 독일민주당(DDP)은 점점 당세를 잃고 있었습니다. 공화국의 점잖은 신사 정당들은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독일 정치의 무대 위에서 점점 배경음악처럼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결과는 따로 있었습니다.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 다시 말해 갈색 깡패조직 나치당의 의석이 12석에서 35석으로 껑충 뛰어오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는 대공황 이후 치러진 1930년 9월 선거에서 나치당이 무려 107석을 얻으며 원내 2당으로 뛰어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공황 이후의 이야기였습니다. 아직 1929년 봄을 살아가는 이 대체역사의 독일인들에게, 나치당 의석이 1년도 안 되어 세 배 가까이 늘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독일 정치는 왼쪽에서도 불타고 있었고, 오른쪽에서도 냄새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극좌와 극우의 약진이 동시에 표면화되자, SPD는 중도파 연정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중도파라는 사람들이 SPD 입장에서 썩 편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카스 내각의 일원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좀 더 신사적이긴 했지만 우파 은행가 냄새가 강한 하인리히 브뤼닝(Heinrich Brüning) 내각도 불편했습니다.
그때 중앙당은 절묘한 카드를 꺼냈습니다. 공화국 초기 SPD와의 공투 경험이 있던 옛 동지이자 왕년의 수상, 요제프 비르트(Joseph Wirth)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도내각을 출범시키자는 제안이었습니다. SPD 내부에서는 잠시 격론이 일었습니다. 의석을 크게 잃었지만, SPD는 여전히 원내 1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내 1당이 중앙당 출신 수상을 받쳐주는 모양새가 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앙당이 “나름 양보한” 안을 걷어찼다가는 곧바로 재총선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총선이 열리면 KPD에게 한 번 더 얻어맞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결국 SPD는 비르트 내각에 참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왼쪽 옆구리를 더 뜯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명분은 공화국 방어였고, 실제 이유는 생존이었습니다. 정치에서는 대체로 이 둘이 그럭저럭 비슷한 표정을 하고 나타납니다.
1929년 봄, 비르트 연립내각은 공화국 방어와 치안 안정을 내세웠습니다. SPD는 내각 참여의 대가로 사회정책 일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공화국 질서 유지의 책임도 떠안았습니다. 이 책임이라는 것은 듣기에는 고상했지만, 실제로는 시위가 벌어지면 누가 맞고 누가 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베를린과 프로이센의 SPD 경찰라인은 당연히 KPD의 급성장을 심각하게 보았습니다. KPD는 더 이상 시끄러운 극좌 정당이 아니었습니다. 공장 안에는 혁명적 세포가 있었고, ADGB 지부 안에는 적색 반대파가 있었고, 거리에는 적색전선전사동맹(RFB)이 있었습니다. 공화국의 눈에는 이것이 정당이라기보다, 아직 국가가 되지 못한 또 하나의 국가처럼 보였습니다.
이 시기 프로이센 경찰 쪽의 구도는 대략 이렇습니다. 베를린 경찰청장 구스타프 뵐러가 수도의 현장 치안을 총괄했고, 프로이센 치안총감 카를 죄르기벨(Karl Zörgiebel), 그리고 제베링의 후임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알베르트 그제진스키(Albert Grzesinski)는 대부분의 사안에서 뵐러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이들은 KPD가 노동조합과 거리조직을 결합하는 것을 “공화국 질서에 대한 실질적 도전”으로 보았습니다.
그 무렵 중앙정부 내무장관으로 옮긴 카를 제베링(Carl Severing)은 프로이센 내무부 청사를 방문했다가, 뵐러의 거친 언동에 잠시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카를, 적색전선전사동맹(RFB)은 공화국의 적입니다. 나는 1918년까지는 독일 국가의 적을, 그 이후부터는 공화 독일의 적을 때려잡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겁니다.
뵐러는 농담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였습니다.
한편 KPD는 4월 프로이센 주정부의 집회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노동절 집회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피셔와 마슬로는 때이른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회파시스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귓등으로 흘리는 습관은 이미 충분히 내재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SPD는 “노동절을 금지하는 자칭 노동자 정당”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좋은 선전문구였습니다. KPD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습니다.
1929년 5월 1일 베를린, 충돌은 실제 역사에서처럼 베딩(Wedding), 노이쾰른(Neukölln) 같은 노동자 구역에서 격화되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세계의 KPD는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한 노동자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ADGB 내부의 적색 반대파, 실업자-조합원 공동위원회, 공장세포, RFB의 거리조직이 한꺼번에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경찰청장 뵐러는 기다렸다는 듯 “좌익맹동주의자”들을 때려잡을 만반의 각오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첫 사망자는 무장봉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창가에서 시위를 지켜보던 주민이 경찰의 유탄에 맞아 즉사했습니다. 정치적 비극은 종종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가장 먼저 죽고, 그다음부터 모든 사람이 자기가 옳았다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5월 2일, KPD는 프로이센 주정부와 비르트 내각을 규탄하며 총파업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곧바로 대격변을 일으키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독일은 아직 혁명 직전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와 달리, 베를린, 함부르크, 루르, 작센 산업지대 일부에서 동맹파업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선례였습니다. ADGB 중앙이 명시적으로 금지한 총파업을, 기층 노동자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성공시킨 것입니다. KPD는 즉시 이 사실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ADGB 지도부는 금지했지만, ADGB 노동자는 싸웠다.
이 한 문장은 이후 몇 달 동안 수천 장의 전단으로 찍혀 나갔습니다.
순식간에 비르트 내각은 공화국 수호 내각에서 학살 범죄자들의 정부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르트는 사태 진정을 위해 조사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좌파인 SPD와 프로이센 주정부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희대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경찰의 생명이 공산당원의 생명보다 가볍습니까?
문장 자체는 질서정연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노동자 정당이 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내각은 공식적으로는 질서유지를 지지하되, 과잉진압 조사를 실시한다는 모호한 타협을 내놓았습니다. 이 모호함은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자기들을 팔아넘겼다고 생각했고, KPD는 학살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외쳤습니다. SPD는 그 사이에서 또 한 번 얻어맞았습니다. 이 당은 어느 순간부터 왼쪽에서도 맞고 오른쪽에서도 맞는 것을 정치적 중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후폭풍은 세 갈래였습니다.
첫째, KPD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실업자, 청년, 금속노동자, 운수노동자, 베를린·루르의 급진 조합원들이 KPD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KPD가 완벽해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맞을 때 도망가지는 않는 정당처럼 보였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둘째, SPD는 당내 균열이 커졌습니다. 우파는 “공화국 방어를 위해 경찰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좌파는 “노동자당이 노동자를 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고 반발했습니다. 둘 다 나름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망했습니다.
셋째, ADGB 내부에서 KPD 반대파가 커졌습니다. 지도부는 공산당원을 제명하려 했지만, 대량 제명은 오히려 KPD 외곽조직인 혁명적 노동조합 반대파(RGO)를 키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방치하면 KPD가 지부를 장악했습니다.
ADGB는 단순하지만 끔찍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제명하면 KPD가 RGO를 키웠습니다.
방치하면 KPD가 지부를 장악했습니다.
이 세계선의 KPD는 바로 이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피맛을 본 SPD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점점 더 이상해졌습니다.
뵐러는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을 비롯한 당 주류 중도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의 말을 들먹였습니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하는 정당은 아니다.” 원래는 섬세한 이론적 구분이었지만, 뵐러의 입에서 나오자 뜻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하지만 공산당원들이 거리를 장악하게 둘 생각은 없습니다.”
힐퍼딩 같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뵐러를 타박했습니다. 표현이 너무 거칠고, 경찰국가적 냄새가 나며, 당의 사회주의적 품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조금 시원해했습니다. 그동안 사회주의자로서의 체면이 상할까 봐 하지 못하던 말을, 뵐러가 대신 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자 마리 유하츠(Marie Juchacz) 역시 복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뵐러가 노동자들을 두들겨패는 것은 분명 욕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원들이 물리적으로 조금 줄어드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인지에 대해서는, 그녀도 아주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애는 넓었지만, 공산당 세포가 자기 당 지부를 뜯어먹는 장면을 보면 인간애도 가끔 피곤해지는 법입니다.
ADGB의 위원장 테오도어 라이파르트(Theodor Leipart)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21년부터 노총을 이끌고 있었지만, 이제는 “대체 뭘 하면 좌익모험주의자들이 노조를 통째로 갉아먹는 동안 아무것도 못할 수 있냐”는 타박을 듣고 있었습니다. 라이파르트는 차라리 중앙당 계열의 기독교 노조와 협력하면서 빨갱이들을 족치는 것이 더 나은 전략 아닌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변화였습니다.
SPD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습니다. 당 강령에는 자본주의 극복이 남아 있었고, 당원들은 여전히 사회주의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SPD는 공화국의 경찰, 노조 관료, 사회정책 전문가, 의회지도자, 기독교 노조와 손잡는 반공사회주의자들의 정당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스꽝스러운 문장이 SPD 내부의 새로운 상식이 되어갔습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지만, 빨갱이는 두들겨팹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농담이 오래 살아남으면 곧 정책이 되곤 했습니다.
3. 백작 나리와 갈색 셔츠
나치당이 1929년 초 총선에서 획득한 35석은 작지도, 그렇다고 경천동지할 만큼 크지도 않은 성공이었습니다. 집권의 문턱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당 지도부가 보기에는 충분히 달콤한 숫자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 숫자를 이렇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합법 노선이 옳았다.”
SA가 거리에서 얻어낸 35석이 아니라, 당이 거리에서 참았기에 얻어낸 35석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이 해석은 사실관계와 별개로, 당 지도부의 기분에는 아주 잘 맞았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품위 있게 성공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갈색 셔츠의 주먹질 덕분에 표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양복 입고 의회에 들어갈 준비를 했기 때문에 표를 얻었다고 믿는 편이 훨씬 고상했죠.
그리고 35석이면 이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의석 배분, 당비, 후원금, 신문광고, 선거명부, 지방조직 예산이 모두 정치자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싸운 사람”보다 “명부에 올릴 만한 사람”이 중요해졌습니다. 귀족, 퇴역장교, 변호사, 기업가 연결자, 지방 명망가들이 갑자기 민족운동의 소중한 자산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무렵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올라선 인물이 있었습니다. 쿠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 백작(Kuno Graf von Birken-Honigsessen), 보통은 그냥 ”쿠노 백작(Graf Kuno)“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1875년생인 쿠노는 전통적인 발트 독일인 융커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낡은 성과 가문의 문장만 붙들고 사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집안의 돈으로 과감히 라인란트의 공장에 투자한 산업귀족이기도 했습니다. 봉건적이되 계산적이고, 귀족적이되 현금흐름을 볼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낡은 프로이센이 은행계좌를 열고 라인란트 공장 굴뚝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나올 법한 인간이었습니다.
쿠노 백작은 DNVP의 당수이자 이름이 비슷한 쿠노 폰 베스타르프(Kuno von Westarp), 군부의 실력자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 등과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치당의 돈줄 상당수를 그가 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히틀러에게 쿠노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치당이 “맥주홀 선동가들의 모임”에서 “국가를 맡을 수도 있는 정치세력”으로 보이게 해주는 장식장이었습니다. 그것도 은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장식장이었습니다.
나치당은 아직 권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벌써 권력 주변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권력 냄새를 맡은 운동은 대체로 가장 먼저 자기 돌격대를 귀찮아합니다.
히틀러는 쿠노 백작을 애지중지했습니다. 은색 담배케이스, 흑단나무 지팡이, 맞춤 정장, 고급 안경. 그런 것들을 갖춘 백작이 자신을 깍듯이 모신다는 사실은 히틀러의 정치적 허영심뿐 아니라 개인적 결핍까지 채워주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무명 화가지망생이었던 남자에게 발트 독일인 산업귀족이 “각하” 비슷한 태도로 굽신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정치가 아니라 심리치료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비용은 독일 전체가 치르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 사이 바깥세상은 얌전히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뵐러가 베를린 거리에서 노동자들을 두들겨패고, KPD가 노동조합 정치에서 전선을 넓히고, 비르트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동안, SA의 불만은 무섭게 쌓여갔습니다.
히틀러는 쿠노 백작을 아꼈지만, SA는 선거 “승리”가 자기들 덕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35석은 의회주의의 성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러진 코, 깨진 이, 경찰서 유치장, 공산당원과의 난투, 장례식장에서 얻어낸 영수증이었습니다.
선거명부와 당 자금 배분 문제는 즉시 터졌습니다. 적색전선전사동맹이 강해졌으므로 SA는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이 히틀러를 어엿한 원내 주요정당의 지도자로 만들어주었으니, 그 정도는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 이들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말하는 민족공동체와 SA가 생각하는 민족공동체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히틀러에게 민족공동체란 자기 연설을 듣고 박수치는 질서 있는 대중이었고, SA에게 민족공동체란 자신들이 두들겨패도 되는 사람과 자기편으로 인정해야 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거리의 본능이었습니다.
1929년 8월 말, SA 지도자 프란츠 페퍼 폰 잘로몬(Franz Pfeffer von Salomon)은 갈색 제복을 입고 히틀러의 집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오른손을 번쩍 올려 칼같이 경례한 뒤, 공손하게 “건의안”을 내밀었습니다. 건의안이라는 단어는 매우 온건했습니다. 내용은 별로 온건하지 않았습니다.
SA에 의회 안정권 의석을 최소 3석 보장해달라. 당비와 후원금 중 일정 비율을 SA의 장비 충원, 부상자 지원, 가족 부조에 배정해달라. 베를린, 루르, 작센 같은 충돌다발지역에서는 SA의 지휘권을 대관구지도자(Gauleiter)가 아니라 현장 SA 지도자가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 SS의 특권 확대를 중단해달라.
페퍼 입장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요구였습니다. 실제로 SA는 얻어맞고 있었고, 실제로 돈이 필요했고, 실제로 RFB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히틀러 입장에서 이 요구가 전부 위험했다는 점입니다. 의석을 SA에 주면 의회정당 이미지가 망가졌습니다. 돈을 주면 당 중앙의 통제가 약해졌습니다. 현장 지휘권을 주면 SA가 별도 군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SS 특권을 줄이면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하는 작은 칼이 무뎌졌습니다.
옆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쿠노 백작이 대놓고 경멸에 찬 표정을 지으려던 찰나, 히틀러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는 페퍼가 내민 종이를 그의 면전에 던지며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은 의석을 원하나? 돈을 원하나? 아니면 나를 협박할 권리를 원하나? 돌격대가 민족사회주의 운동을 만들었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돌격대에 의미를 주었다. 내 허락 없이 거리에서 혁명을 말하는 자는 공산당원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요청이 아니라 반역이다! 당장 꺼져라, 대위!
방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페퍼는 한참 동안 서 있었습니다. 그는 방금 자신이 공산당과 싸운 죄가 아니라, 너무 진심으로 나치였던 죄로 꾸중을 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그가 생각한 나치당은 거리에서 싸워 권력을 잡는 운동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생각한 나치당은 거리를 이용해 의회로 들어간 뒤, 필요할 때만 거리를 다시 부르는 운동이었습니다. 두 생각은 비슷해 보였지만, 돈과 의석이 걸리자 갑자기 매우 달라졌습니다.
페퍼가 “매우 합리적인 건의”를 올렸다가 퓌러와 백작에게서 엄청난 모욕을 듣고 쫓겨났다는 소식은 베를린 SA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갈색 셔츠들은 극심한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은 쿠노 백작 같은 인물이 자기들 위에 앉아 당의 돈과 명부와 후원자를 다룬다는 사실을 참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백작이야말로 민족사회주의 운동 안에 잘못 배달된 고급 청첩장이었습니다.
베를린 SA 지도자인 발터 슈테네스(Walter Stennes)는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도 1930년과 1931년에 걸쳐 당내 분란과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입니다. 이 대체역사에서 슈테네스의 분노는 훨씬 빨리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그는 히틀러의 합법주의를 비겁함으로 보았고, 쿠노 백작의 존재를 모욕으로 보았으며, SS의 특권을 배신으로 보았습니다.
1929년 9월 16일, 쿠노 백작은 당 베를린 대관구 사무실에서 후원자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메뉴는 정중했고, 초대장은 비쌌고, 주제는 아마도 “국민운동의 책임 있는 정치세력화”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듣기만 해도 SA 대원들이 창문을 깨고 싶어질 만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때 갈색 셔츠를 입은 깡패들이 당 기관지인 《공격(Der Angriff)》 사무실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쿠노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는 아마 퓌러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친위대장이 된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가 그 하찮은 반란을 얼마나 어설프게 진압할지를 상상하며 비웃었을 것입니다. 쿠노에게 SA는 시끄럽지만 결국 명령을 받는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적어도 30분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30분 뒤, 그 “명령을 받는 사람들”이 그의 집무실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가위로 쿠노의 넥타이를 잘랐습니다. 뺨을 때렸습니다. 찬장에 놓인 고급 와인을 머리 위에 줄줄 부었습니다. 은색 담배케이스를 빼앗아 흔들며 “이것도 민족의 재산인가?”라고 물었습니다. 흑단나무 지팡이는 잠시 혁명적 노동자 교육도구로 전환되었습니다. 책상 위 명패에는 붉은 페인트로 “겁쟁이”라는 글자가 덧칠되었습니다.
쿠노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엉망이 된 채 경호원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호텔로 돌아갔고, 사실상 호텔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감금”이라는 단어는 품위 있는 귀족에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상황은 어울림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방문 밖에는 흥분한 SA 대원들이 있었고, 호텔 직원들은 갑자기 공화국 경찰보다 더 중요한 안보행위자가 되었습니다.
소식을 전달받은 히틀러는 처음에는 격노했습니다. 그는 쿠노를 아꼈습니다. 쿠노는 히틀러에게 돈과 인맥과 품격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쿠노는 히틀러를 존중해주는 귀족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넥타이가 잘리고 와인을 뒤집어썼다는 것은 정치적 손실이자 개인적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곧 힘러와 괴벨스의 보고를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습니다. SA의 반란 규모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자신을 축출하기로 결심했다면, 합법주의고 뭐고 끝장이었습니다. 이것은 1934년에 SA를 싸그리 숙청해버리던 그 나치당이 아니었습니다. SS가 총출동한다고 해도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힘러의 친위대는 아직 전설이 아니라 동호회에 가까웠고, 그 동호회는 지금 갈색 셔츠들에게 맞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결국 쿠노를 지켜주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베를린으로 전보를 보냈습니다.
쿠노 백작에 대한 무례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운동의 단결이 최우선이다.
호텔방에 갇혀 벌벌 떨던 쿠노는 이 문장을 읽고 정이 뚝 떨어졌습니다.
무례를 용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례한 자들은 지금 호텔 방문을 두드리며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운동의 단결이 최우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운동의 단결이라는 것은 쿠노가 방 안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유지되는 것 같았습니다. 쿠노는 그날 처음으로 히틀러의 문장을 천천히 다시 읽었습니다. “용납될 수 없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도 쿠노는 여전히 갇혀 있었습니다. 개인 수행원들이 창문에 연결된 밧줄을 통해 겨우 전달해주는, 먼지가 잔뜩 묻은 딱딱한 빵을 씹던 쿠노는 퓌러의 무책임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귀족의 품위란 많은 것을 견디게 해주지만, 밧줄에 매달려 올라온 빵은 그 품위의 한계를 시험했습니다.
괴링은 쿠노를 달래려 했습니다.
백작, 정치란 원래 조금 지저분합니다.
쿠노는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직 와인 냄새가 남아 있었고, 잘린 넥타이의 기억도 선명했습니다.
괴링 씨, 나는 지저분한 정치를 압니다. 다만 내 지팡이가 혁명적 노동자의 교육도구로 쓰이는 정치는 처음입니다.
결국 슈테네스 반란은 히틀러가 직접 베를린으로 가 SA를 달래고 나서야 진정되었습니다. 달랬다는 표현은 점잖았습니다. 실제로는 모두에게 다른 말을 해주고, 모두가 자기 말만 들었다고 믿게 만든 뒤, 아무것도 확정하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히틀러는 SA에게 그들이 운동의 심장이라고 말했고, 쿠노에게 그에 대한 모욕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고, 괴벨스에게 신문에서는 단결만 보이게 하라고 말했고, 힘러에게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들 조금씩 위로받았고,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히틀러식 봉합의 초기 형태였습니다.
쿠노는 히틀러를 찾아가 반역의 주동자들을 즉각 제명하는 조치라도 취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공허했습니다.
나는 백작의 공을 잘 알고 있소. 귀하에 대한 모욕행위를 잊지 않을 것이오.
쿠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히틀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자를 벗어 공손하게 인사했습니다. 오른손을 높이 쳐들어 경례하는 대신, 귀족식 인사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민족사회주의자 쿠노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원래 돌아선 추종자가 가장 무섭다고 하던가요. 쿠노는 그날 이후 매일같이 그간 당세 확장을 도와주던 상류층 후원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치당 지원을 접을 것을 간곡히 설득하는 로비스트처럼 활동했습니다. 그는 이제 히틀러의 품격을 보증하는 사람이 아니라, 히틀러의 불안정성을 설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쿠노 백작의 말은 여전히 사교계에서 통했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 말의 방향뿐이었습니다.
SA 대원 패거리가 어느 밤거리에서 쿠노를 다시 포위했을 때, 그는 이번에는 호텔방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대전쟁 시절 동부전선의 장교였던 쿠노는 품에서 권총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한 놈의 허벅지를 망설임 없이 쏴버렸습니다.
그날 이후 SA 대원들은 쿠노를 “겁쟁이 백작”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미친 백작”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쨌든 존중은 조금 생겼습니다. 독일 정치에서 존중은 때로 허벅지 총상에서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양복쟁이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나치당 내부는 빠르게 음식 얼룩 묻은 갈색 셔츠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합법주의 노선을 외쳤지만, 당 사무실 복도에서는 SA 대원들이 다시 어슬렁거렸습니다. 괴링은 품위를 말했지만, 품위 있는 후원자들은 쿠노 백작의 말을 듣고 조용히 수표책을 닫았습니다. 힘러는 충성을 말했지만, 아직 충성만으로 SA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괴벨스는 단결을 썼지만, 신문 활자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덮기에는 너무 얇았습니다.
나치당은 35석을 얻었습니다. 히틀러는 그것을 합법주의의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SA는 그것을 자기 피값의 첫 번째 영수증이라고 믿었습니다. 쿠노 백작은 그것을 독일 보수층으로 들어가는 초대장이라고 믿었습니다.
놀랍게도, 세 사람 모두 조금씩 맞았습니다. 그래서 나치당은 더 위험해졌고, 더 우스꽝스러워졌으며, 더 다루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바다 건너 미국에서 소식이 하나 접수되었습니다.
10월 29일 화요일. 다우 존스 지수 폭락. 월화 양일간 시가총액 300억 달러 증발.
독일 정치인들은 아직 그 문장의 의미를 완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구스타프 뵐러
쿠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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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야..... kpd와 spd의 완전한 결별이라니... 근데 부하린의 스텐스는 좌파공산주의자로서의 경험때문인가요?
부하린은 사실 원래 저랬습니다. 실제로 왕년에 보그다노프 제자였던 경험도 있지만, 리코프랑 우익 반대파 할 때도 진짜 우익은 아니었단 말이죠..
@E.E.샤츠슈나이더 좌파공산주의자(?) 부하린이 우익반대파인게 그동안 의아했는데 생각해보니 트로츠키가 그만큼 소련공산당에서 매운맛이였기에 좌익반대파였겠군요....
@dnjdss 원역사에서도 세계혁명 제3기 이론(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파시스트다 운운하는…)을 밀었던 게 부하린이고, 스탈린은 오히려 몇년 뒤에 진짜 파시스트와 반동세력에 맞서 중도좌파랑 연합하자는 통일전선론을 밀었죠. 물론 후자는 부하린 말 들었다가 생긴 결과가 나치 집권(…)이라는 대참사라서 그런 것도 크긴 합니다만..
원작에서 쿠노는 백작이 아니라 공작이었는데 여기선 백작이군요?
파시스트는 아무래도 백작이랑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공작씩이나 돼서 초창기 나치 들어가는 건 좀 어색하죠 아무래도
소설버전 소망문처럼 소설버전 라민주가 나오나요 ㅋㅋㅋ 빠른 완결 기원합니다(?)
방어적 민주주의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사회민주적 경찰국가주의자 뵐러는 맘에 드시나요(?)
@E.E.샤츠슈나이더 네 ㅋㅋㅋ 예전의 말이 입증된 것 같아서 더 마음에 드네요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생각해보니 뵐러는 모범적인 사회파쇼(?) 아닐까 싶은데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소련 공산세력과 극우 파시스트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독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소 종이 극단주의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힌 어게인(???)
@E.E.샤츠슈나이더
오랜만에 쿠노를 보니 반갑군요!
그리고 나치당을 손절한 쿠노는 어디를 정치적으로 후원하고 있나요?
일단은 나치 낙선운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민주주의자가 되지는 않고.. 지금 당장 선거하면 DNVP나 중앙당 찍긴 하겠지만 나중에 어디 붙을지는 차차 나올겁니다
@E.E.샤츠슈나이더 다들 어딘가 하나씩 놓는다는거군요 ㅋㅋㅋ 제일 제정신이던 캐릭터가 얼마나 놓을지 기대하겠습니다 ㅋㅋ
@E.E.샤츠슈나이더 비르토프나 공산당의 노동절 집회 같이 사민당겜에서 많이 봤던게 나오던데 설마 사민당겜에서 나오는 DNVP와 중앙당이 합당한 기독교인민당이 쿠노의 행선지인가요(?)
@로콘 장갑순양함 반대하고 노조 편들다가 우파한테 불신임 쳐맞고 선거 져서 중앙당 내각 기어들어가는 것도 그 사민당겜에서 따온 스토리입니다(?)
@dear0904 제일 제정신이던 캐릭터가 누구죠(진짜모름)(?)
@E.E.샤츠슈나이더 아차! 매 연대기마다 한명씩은 정상이라서 착각했네요(?)
@dear0904 그게 주로 저였고요.
생각해보니 이 소련은 원역사 소련보다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겠네요 중공업도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미뤄진거같고, 시장시스템을 활용하는 이상 국제상황에 영향을 안 받을수는 없을테니.....?
아마 그럴 겁니다. 이르쿠츠크로 수도 옮기고 시베리아 그라드를 할 수도(?)
@E.E.샤츠슈나이더 헉! tno+tro의 재림이 왔군요!(?)
@dnjdss “파시스트 학살자들에 맞선 사회주의 조국 수호”로 똘똘 뭉친 러시아 농촌을 상대하는 기동전의 독일… ㄷㄷ
@E.E.샤츠슈나이더 헉! 마오주의(?) 소련 vs 군사파시즘 독일이라니 가슴이 웅장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