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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
대규모로 식용 동물을 사육하면서 상당한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집약적인 방식이 사용되지 않는 전통적인 영농법 하에서도 동물들은 거세, 어미와 새끼 떼어놓기, 사회 집단 갈라놓기, 낙인찍기, 도축장으로의 수송,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축되는 과정을 겪는다. 동물들이 이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고 식용으로 사육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물론 사육이 소규모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비집약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고기로 오늘날의 엄청난 도시 인구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상징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태도를 고수한다는 것이 스스로의 순수함만을 유지하고, 그리하여 세상의 추한 현실로부터 이탈하여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잔혹성과 살육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아니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실천적인 모습이며, 이는 인간 아닌 동물 살해와 고통 야기 종식을 향한 효과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채식주의는 사실상 다른 대부분의 불매 운동이나 항의보다 훨씬 강력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해 남아프리카에 대한 불매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은 만약 그러한 운동을 통해 남아프리카 백인들의 정책을 변혁시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들은 행동을 통해 자신들이 동물들의 고통과 도축 감소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 수 있다. 즉 그들이 대중적인 고기 불매 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농장에서 동물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행위들을 종식시킬 날을 보게 될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실상 그들은 채식을 통해 동물들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언급 외에도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공장식 영농법을 옹호하는 흔하면서도 전적으로 그릇된 논변에 대한 실천적이고도 살아 있는 반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공장식 영농법이 급격히 늘어나는 전세계의 인구를 부양하는 데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이 말이 진실인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드러난 진실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변에 무게를 실어줄 것이다 하지만 공장식 영농법을 통한 가축 사육과 인류를 먹여 살리는 것의 관계 규명은 이제껏 강조해 왔던 동물 복리의 문제와는 별개의 논의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에서는 잠시 본론에서 벗어나 식량 생산의 원리를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바로 이 순간 세상의 수많은 곳의 수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양적으로는 충분하지만 적절치 못한 음식을 먹고 있다. 대개 그들은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풍요한 국가에서 시행되는 식량 생산 방식이 기아 문제 해결에 대해 얼마만큼 이바지하고 있는가이다.
모든 동물들은 인간이 먹기에 적당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무게를 늘려야 하며, 이 때문에 줄기차게 먹어야 한다. 그런데 가령 송아지가 오직 목초만이 자랄 수 있고 옥수수나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되는 다른 종류의 작물은 자랄 수 없는 거친 목초지에서 풀을 뜯어 먹는다면, 그 결과 인간은 송아지를 통해 다른 것을 희생하지 않고 단백질을 얻은 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장한 송아지는 우리가 거친 목초로부터 경제적으로 추출할 수 없는 단백질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똑같은 송아지를 사육장이나 다른 감금 시스템에서 사육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제 송아지에게는 먹을 것이 주어져야 한다. 아무리 송아지와 그 동료들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사육한다고 해도 적어도 옥수수, 사탕수수, 콩 또는 송아지가 먹을 사료를 재배할 땅은 필요하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사람들이 먹어야 할 식량을 소에게 주게 된다.
송아지는 음식에 포함되어 있는 단백질을 얼마만큼 사용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이를 얼마만큼
이용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예상 밖이다. 1파운드의 동물 단백질을 생산하기 위해 송아지가 먹는 단백질은 무려 21파운드이다. 즉 우리가 투입한 단백질 양의 5% 미만을 되돌려 받는 것이다. 프랜시스 무어 라페가 이러한 유형의 영농을 “거꾸로 작동되는 단백질”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따져 보도록 하자. 1에이커의 비옥한 땅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땅은 가령 콩이나 완두 같은 고단백식물 식량을 재배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300에서 500파운드의 단백질을 얻게 될 것이다. 반면 이 땅에서 곡물을 재배하여 동물들에게 주고 우리는 그 동물들을 죽여서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동물에게서 뽑아내는 단백질은 40에서 55파운드에 불과하다.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먹는 대신 그들을 우유나 계란 생산에 사용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단백질의 비율은 훨씬 커진다. 하지만 동물들은 단순히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단백질을 사용해야 하며, 그리하여 아무리 효율적인 계란, 우유 생산 방식일지라도 그러한 방식은 식물성 식량을 통해 제공될 수 있는 1에이커당 단백질의 1/4을 넘지 못한다.
물론 단백질은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분 중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칼로리는 어떠한가? 식물성과 동물성 음식이 산출하는 칼로리의 총계를 비교해 보면 여기서도 여전히 식물이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리나 브로콜리를 심은 1에이커 땅의 산출량과 돼지고기, 우유 , 가금 또는 쇠고기를 산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1에이커 땅에서의 산출량을 비교해 보면, 에이커당 산출되는 귀리는 동물 생산에서 가장 효율적이라 일컬어지는 돼지에서 산출되는 칼로리의 6배이다. 1에이커의 브로콜리는 돼지의 거의 3배가 되는 칼로리를 산출한다. 귀리는 쇠고기보다 에이커당 25배 이상의 칼로리를 산출한다.
다른 영양소를 살펴보아도 육류 및 낙농 산업에서 조장해 놓은 다른 신화들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가령 1에이커의 브로콜리는 같은 면적의 땅을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보다 24배나 많은 철분을 산출한다. 그리고 1에이커의 귀리는 16배의 철분을 산출한다. 비록 유제품이 귀리보다 1에이커당 더 많은 칼슘을 산출하기는 하지만 브로콜리는 우유의 5배에 해당하는 칼슘을 제공하며 우유를 능가하고 있다.
세계 식량 사정에 대해 이 모든 것이 지니는 함축은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한다. 1974년 해외 개발위원회의 레스터 브라운은 만약 미국인들이 1년에 10%만 고기 소비를 줄인다면 최소한 1200만 톤의 곡식이 인간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 것-혹은 6,000만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전 농무부 서기관보 돈 파알버그는 단순히 미국의 가축 수를 절반으로 줄인다고 해도 비사회주의 저개발 국가의 칼로리 부족액을 거의 4번 메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풍요한 국가에서 동물 생산을 통해 낭비되는 식량은 만약 적절히 배분되기만 한다면 세상의 기아와 영양 실조를 종식시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양이다. 결론적으로는 동물 사육 방식은 기아 문제 해결에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육류 생산은 다른 자원을 낭비하기도 한다. 워싱턴에 본거지를 둔 환경 두뇌 집단인 세계 감시 연구소의 앨런 더닝 연구원의 계산에 따르면 가축 사육장에서 사육된 수송아지 고기 1파운드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2,500갤런의 물, 1갤런의 가솔린에 상당하는 에너지, 그리고 약 35파운드의 부식된 표토가 사용된다. 미국 영토의 1/3이상은 목초지로 이루어져 있고, 곡초지의 절반 이상에는 가축에게 주어지는 식량이 심어져 있으며, 미국에서 소비되는 절반 이상의 물이 가축에게 사용된다. 어떤 측면에서 따져 봐도 식물 생산은 육류에 비해 우리의 자원과 환경에 훨씬 적은 손실을 주고 있다.
우선 에너지 사용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사람들은 토양의 비옥함과 태양 광선이 제공하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한 가지 방식이 농업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농업은 바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하는 과정이었다. 가령 멕시코산 옥수수는 1칼로리의 화석 연료 에너지를 투입하여 83칼로리의 양분을 산출한다. 이에 반해 선진국의 농업에서는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가 투입되는데, 그 생산성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가령 미국에서 가장 효율적이라 일컬어지는 귀리 생산에서도 화석 연료 에너지 1칼로리당 2.5칼로리의 양분이 가까스로 산출될 따름이다. 반면 감자는 2칼로리 이상이 산출되며 밀과 콩은 1.5칼로리가 산출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산출량도 미국의 동물 생산에 비하면 엄청나게 효율적인 생산이다. 가장 효율이 높다는 방목 소에게는 산출하는 고기 1칼로리당 3칼로리 이상의 화석 연료가 사용된다. 반면 가장 비효율적인 가축 사육장 소에게는 고기 1칼로리당 33칼로리의 화석 연료가 소모된다. 에너지 효율을 따져 볼 때 달걀, 양고기, 우유, 그리고 가금 생산은 방금 언급한 두 가지 쇠고기 생산 방식 사이에 위치한다. 미국의 농업에 국한시켜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곡식 재배는 소의 방목에 비해 최소한 5배의 에너지 효율성을 가지며 닭 생산에 비해서는 20배 이상을, 그리고 가축 사육장의 소 생산에 비해서는 50배의 에너지 효율성을 갖는다.
미국의 육류 생산은 수백만 년 동안 축적된 태양 에너지가 석유와 석탄이라는 형태로 땅에 저장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농업 관련 산업 회사는 고기를 판매할 경우 석유나 석탄 소모 비용보다 많은 이득을 올릴 수 있다. 이는 농업 관련 산업 회사에 경제적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한정된 재원을 장기간 합리적으로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고려한다면 그와 같은 이익 산출은 별다른 의미가 될 수 없다.
또한 동물 생산에는 곡식 생산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물이 사용된다. 1파운드의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양의 밀에 사용되는 물의 50배가 필요하다. <뉴스 위크>지는 “1,000파운드의 거세한 황소에 들어가는 물만 있으면 구축함을 띠울 수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육류 생산에 투입되는 물의 양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 동물 제품에 대한 수요로 인해 미국, 호주, 그리고 그 외 국가의 수많은 건조 지역이 의존하고 있는 막대한 지하수가 고갈되고 있다.
한편 동물 생산이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물에 주는 영향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는 매년 농장 동물들이 20억 톤의 거름을 만들어낸다-이는 전인구가 배출해낸 거름의 10배에 해당한다-그리고 그 중 절반은 공장에서 사육된 동물에서 나온 것이다. 거기에서도 폐기물이 땅으로 자연스럽게 되돌아가지 않는다. 한 돼지 영농업자의 말처럼 ‘폐기물은 비료의 가격이 노동 비용보다 비싸지기 전까지 나에게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흙이 다시 비옥하게 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할 비료는 끝내 시내와 강을 오염시키고 만다.
고기에 대한 수요로 인해 야기되는 모든 어리석은 행동 중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은 마구잡이 산림 개발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물로 하여금 풀을 뜯어 먹게 하려는 욕구는 산림 개척의 중요한 동인이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브라질, 말레이시아, 태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들이 열대우림을 소 목초지로 사용하기 위해 개척하고 있다. 하지만 소에게 얻게 된 고기로 인해 그 나라의 가난한 자들이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고기는 대도시의 부유층에게 판매되거나 수출된다.
현재의 대규모 상업적 대양 어업에 반대하는 다른 생태학적 논거가 있다. 즉 그러한 고기잡이로 인해 매우 빠른 속도로 대양의 생선들이 남획되어 씨가 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들어서 포획되는 생선의 양은 극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한때 풍부했던 여러 종의 물고기, 가령 북부 유럽의 청어, 캘리포니아의 정어리, 그리고 뉴잉글랜드의 해덕과 같은 고기들은 이제 상업용으로 쓰이기엔 멸종된 것이나 다름없이 매우 희귀하다. 오늘날의 고기잡이 선단들은 항로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는 훌륭한 계량기를 사용하여 고기잡이 장소에 조직적으로 트롤 그물을 친다. 목표물이 아닌 종들은-이들은 관련 산업에서 ‘쓰레기’로 분류된다.-포획된 물고기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들의 몸뚱아리는 배 밖으로 내던져진다. 트롤링은 과거에는 아무런 침해도 받지 않았던 대양 바닥을 따라 커다란 그물을 훑어가는 고기잡이 방식이기 때문에 깨지기 쉬운 해저 생태계에 타격을 가하게 된다. 그러한 고기잡이는 다른 동물 식량 생산법과 마찬가지로 생산량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화석 연료를 낭비한다.
많은 채식주의자들은 고기를 먹었던 과거보다 현재에 훨씬 편안하고 건강하며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상당수의 새로운 증거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988년 ‘미국 일반 외과의 영양 및 건강 보고서’는 35세에서 64세 사이의 채식주의자의 심장마비 사망률이 동일한 연령 집단의 일반 미국인의 28%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를 인용하고 있다. 더욱 나이가 많은 채식주의자들에서는 심장마비 사망률이 비채식주의자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동일한 연구는 계란과 낙농제품을 먹은 채식주의자들이 고기를 먹는 자들보다 16% 낮은 콜레스테롤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완전 채식주의자들은 29% 낮은 콜레스테롤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콜레스테롤과 지방(특히 포화지방)의 소비량을 줄이고 정백하지 않은 곡물과 곡류 제품, 채소(건조된 강낭콩과 완두콩), 과일으리 소비량을 늘리라고 권장하고 있다. 콜레스테롤과 포화 지방을 줄이라는 충고는 사실상 고기(여기서 가죽을 제거한 닭은 제외한다), 크림, 버터 등의 낙농 제품(저지방 낙농 제품은 제외하고)을 피하라는 권고였다.
보고서는 삼가야 할 음식과 관련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여기에는 ‘전국 목장주 협회’와 낙농청 등의 로비 활동이 성공적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로비가 어떻게 이루어졌던 간에 유방암과 고기 섭취의 관련성, 그리고 고기, 특히 쇠고기를 먹는 것과 대장암과의 관련성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영양 전문가는 고기의 필요성과 관련해 더 이상 토론을 벌이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고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고기 없이 살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의심을 품는 자가 있다면 그의 의심은 무지에 기인한다. 대개 그러한 무지는 단백질의 특징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단백질이 건강한 식사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흔히 접하게 된다. 그리고 고기가 단백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다지 알지 못하는 다른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는 평균적인 미국인이 지나칠 정도로 단백질을 많이 섭취한다는 점이다. 평균적인 미국인의 단백질 섭취는 국립과학 아카데미가 권하는 넉넉한 수준인 45%를 초과하고 있다. 다른 평가에 따르면 미국인들 대부분은 몸이 필요로 하는 고기의 2배에서 4배 사이를 소모한다. 과다하게 섭취된 단백질은 체내에 저장할 수 있다. 그 중 일부는 배설되고 일부는 육체에 의해 탄수화물로 전환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탄수화물 섭취량을 증가시키는 것은 지나친 낭비라 할 수 있다.
단백질에 대해 알아야 할 두 번째 사항은 고기가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는 무수한 음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고기가 비싸다는 정도라는 것이다. 한때 고기로부터 얻게 되는 단백질이 다른 것에 비해 양질이라고 생각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950년 ‘영국 의료 협회 영양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약 필수 단백질이 흡수될 수 있는 형태의 적절한 혼합물 단위로 제공된다면, 그것이 식물에서 추출되었는지 아니면 동물 음식에서 추출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인정되고 있다.’
더욱 최근의 연구는 이러한 결론을 확증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단백질이 함유하고 있는 필수 아미노산에 영양가가 들어 있음을 안다. 필수 아미노산은 육체가 사용할 수 있는 단백질의 양을 결정하는데, 동물성 음식(특히 계란과 우유)에는 이러한 아미노산이 매우 균형 있게 함유되어 있다. 그런데 콩과 견과와 같은 식물 음식 또한 이와 같은 성분을 다량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서로 다른 종의 식물성 단백질을 동시에 먹을 경우, 동물의 단백질과 전적으로 동일한 단백질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는 ‘단백질 상보성’ 원리하고 불리운다.
그런데 우리가 영양에 대해 많은 내용들을 알아야 단백질을 적당히 섭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별다른 생각 없이 쌀 또는 곡물과 함께 강낭콩이나 렌즈콩을 먹는 농부는 단백질 상보성의 원리를 파악하고 있는 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통밀 빵으로 만든 피너츠 버터 샌드위치-이는 피너츠와 밀의 조합으로서, 양자 모두 단백질을 포함한다-를 자신의 아이에게 주는 어머니도 이를 부지불식간에 시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상이한 음식에서의 상이한 유형의 단백질은 개별적으로 먹을 때보다 함께 먹을 경우에 육체가 더욱 많이 흡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결합한다. 하지만 상이한 단백질을 결합시키는 상보적 효과가 없더라도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식물성 음식-견과, 콩, 강낭콩만이 아니라 밀, 쌀, 그리고 감자마저도-은 그 자체로 충분한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칼로리가 높으나 영양가는 낮은 스넥류 음식을 피한다면 칼로리가 충분치 못한 식사를 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고기에는 단백질만이 함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영양분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도 채식을 통해 쉽사리 얻을 수 있다. 오직 동물 제품을 전혀 먹지 않는 완전 채식주의자들만이 식사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정상 상태에서 얻을 수 없는 필수 영양소는 한 가지, 오직 한 가지 뿐인 듯하다. 그것은 B12인데, 이는 계란과 우유에 포함되어 있지만 식물 음식에서는 쉽게 동화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B12는 켈프라 같은 해초, 전통적인 발효법으로 만들어진 일분 간장, 또는 발효시킨 콩 음식인 템페로부터 섭취할 수 있다. 수년 동안 B12가 함유되어 있는 어떤 음식도 먹지 않은 완전 채식주의자를 연구해 본 결과, 그들의 혈액 내 B12 함유량은 여전히 정상인 범위 내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럼에도 B12의 결핍을 확실하게 피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비타민 정제를 먹는 것이 간단하고 값싼 처방이다. 그러한 정제에 들어 있는 B12는 식물 음식에서 배양된 박테리아로부터 얻어낸 것이다. 완전 채식주의자 가족의 아이들에 대한 연구는 그들이 이유 이후 동물을 먹지 않았지만 B12을 보강한 식사를 통해 정상적인 발육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지배
동물에 대한 서구의 태도는 두 가지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바로 유대주의와 고대 그리스의 전통이 그것이다. 이러한 원류들은 기독교로 통합된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고답적인 태도가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은 기독교를 통해서이다. 우리와 동물들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계몽적인 견해는 사상가들이 비교적 교회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18세기까지 유럽에서 당연시되었던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인 흐름을 따져 볼 때, 동물의 태도와 관련된 역사적 논의는 기독교 이전, 기독교, 그리고 계몽 시대와 그 이후라는 세 부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88년에 이르러서야 환경 운동이 가톨릭의 가르침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하는 언명을 발효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회칙 “사회적 관심에 관하여”에서 인간이 발전하려면 ‘자연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했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지배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우리가 부여받은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생물을 ’신용하고 오용“할 자유를 논할 수 없다. 또한 우리에게는 생물을 임의로 죽일 자유도 없다. 자연계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법칙(위배했을 경우 죄를 면할 수 없는)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인간이 절대적인 지배권을 갖는다는 입장을 교황이 단호히 부정하였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하지만 교황이 부정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가톨릭의 동물과 환경에 관한 계도 방향의 역사적이고도 획기적인 전환의 전조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오늘날에 비해 쇼펜하우어와 벤담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도축이 훨씬 살벌하게 이루어졌다. 동물들은 먼 길을 걸어가야 했으며, 가능한 한 빨리 일정을 끝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가축상에 의해 도축장으로 끌려갔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도축장 마당에서 2~3일을 음식 없이, 간혹 물도 마시지 못하고 보내야 했다. 그 후 그들은 기절하지 않은 상태에서 야만적인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벤담이 무엇이라고 말했건 그들은 최소한 도축장으로 끌려 들어가 동료들의 피 냄새를 맡고 난 다음부터는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바를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벤담과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만행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동물 제품을 계속 사용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동물들이 겪게 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지해 준 셈이며,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파알리는 육식의 이와 같은 측면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고기를 먹는 것이 함축하는 바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안심하고 사실을 직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육식을 허락해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와 벤담은 이와 같이 변명할 수가 없었으며, 그리하여 추한 현실로부터 자신들의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윈은 과거 세대의 태도의 배경이 되고 있는 지적인 토대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 또한 이전의 세대가 가지고 있던 동물에 대한 도덕적 태도를 벗어나기 못하였다. 다윈은 본인 스스로가 서로 사랑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존재, 호기심을 느끼며 사유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서로에 대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던 존재들의 고기를 계속해서 먹었다. 그리고 그는 동물 실험 통제 압력을 가하려는 RSPCA의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고 동물에서 유래되었지만 우리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윈의 생각이 인간의 품위를 해쳤다는 비난에 답하여 다윈의 위대한 옹호자인 헉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누구도 나만큼 문명인과 야수 사이의 간격이 크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고결함에 대한 존경심은 인간의 본질과 구조가 야수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헉슬리는 동물에 대한 오늘날의 태도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과 ‘야수’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상정하는 오래된 이유들이 더 이상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동물 사용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반박에 저항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그 근저로부터 논파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토대를 발견하거나 여타 입장의 논리적 설득력을 거부하면서 원래의 입장을 고수하려 할 것이다. 바로 후자와 같은 경우가 우리의 동물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났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위상에 관한 오늘날의 견해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과거의 모든 견해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 따져볼 때 다른 동물 처우에 관한 우리의 태도는 변한 바가 거의 없다. 동물은 이제 더 이상 도덕적 영역 밖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가장자리 근처의 특별한 구역이다. 그들의 이익은 인간의 것과 충돌하지 않을 때만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동물에 대한 과거의 태도는 우리의 사고와 실천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다. 때문에 우리와 다른 동물들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변했어도 근본적인 변혁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종차별주의...
우리는 종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비판해야 하며, 이는 중요한 작업이다. 물론 동물들의 일부 조건에 개선이 있었고, 이를 우리가 그들에게 자비로운-매우 선택적인 의미에서-혜택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목적을 위해 인간 아닌 존재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도 무방하다는 근본적인 입장을 변경시키지 않을 경우 현재와 같은 정도의 개선은 언제나 부식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2천 년 이상 지속되어 온 동물에 대한 서구의 사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타파해야 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동물에 대한 착취를 없애기 위한 굳건한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아닌 동물들의 본질에 대한 생각, 그리고 본질에 대한 생각이 갖는 함축에 관한 잘못된 추론 또한 우리가 종차별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제껏 우리는 스스로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덜 야만적이라고 생각하길 즐겨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들이 친절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야수 같은”, “짐승 같은”이라고 하거나 또는 단순히 “동물처럼”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잔인하고 거칠다는 것을 시사하였다. 우리는 최소한의 이유라도 갖고서 다른 존재를 죽이는 동물은 인간 동물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사람들은 사자와 늑대가 다른 동물들을 죽이기 때문에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동물들은 죽이거나 굶주려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오락 삼아 죽이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자신들의 몸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그리고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인다. 또한 인간은 탐욕이나 권세를 얻기 위해 자기 종의 구성원을 살해한다. 게다가 인간은 단순히 죽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역사를 통틀어 인간은 자신의 동료 인간과 동물들을 죽이기 전에 고문하고 괴롭혔다. 그 어떤 인간 아닌 동물도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야만성을 간과하며 다른 동물들의 그것을 과장해 왔던 것이다. 가령 민담에 악한으로 수없이 등장하는 악명 높은 늑대는 야생에서 매우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이 동물학자의 조심스러운 관찰에 의해 밝혀졌다. 즉 늑대들은 충실하고 애정 어린 부부 관계를 유지-단지 한 계절만이 아닌 평생을–하며, 헌신적인 부모인 동시에 무리에 충성하는 구성원이었던 것이다. 늑대는 먹을 때 외에는 다른 동물들을 거의 죽이지 않는다. 수컷들이 자신들끼리 싸워야 할 때는 패한 늑대가 승리한 늑대의 목 아랫부분-이 부분은 자신의 몸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다-을 드러내며 복종의 몸짓을 보여주는 데에서 끝난다. 승리한 늑대는 적의 급소의 불과 1인치 거리에 자신의 송곳니를 들이대고는 복종에 만족하며, 인간 정복자와는 달리 패배한 적을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를 피비린내 나는 전투 장면으로 머리 속에 그린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 종의 다른 구성원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 등의 복잡한 사회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인간이 결혼할 경우, 우리는 양자의 결합을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낀다. 반면 다른 동물이 일생을 결혼해서 지내면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본능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사냥꾼이 연구를 위해, 또는 동물원에 보내기 위해 동물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경우, 우리는 사로잡힌 동물의 갑작스러운 없어짐이나 죽음으로 고통을 받을 배우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경우 아기와 산모를 떼어놓는 것이 양자 모두에게 비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업상의 목적으로 새끼와 어미를 으레 갈라놓는 영농업자이건 또는 애완 동물과 실험용 동물 사육자이건, 그들은 인간 아닌 존재의 어미와 새끼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는다.
오래된 편견과 강력한 기득권, 그리고 체질화된 습관을 극복하고 동물 해방 운동이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이성과 도덕성을 제외하고 그러한 운동에 대한 원조자가 있을까? 10여 년 전, 우리에게는 이성과 도덕성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확신을 제외하고는 동물 해방을 옹호하는 논변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데 아무런 구체적인 기반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해방 운동에 대한 지지자가 늘어났고, 대중의 시각이 개선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동물에게 혜택을 부여하려는 제도적 개선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10년 전만 해도 동물 해방 운동은 대체로 괴상한 운동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참된 자유주의 철학을 신봉하는 집단의 회원 수는 적었다. 오늘날 ‘동물에 대한 윤리적 처우를 위한 사람들’은 회원수가 25만이고, 비일 송아지용 나무 우리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켐페인을 벌이고 있는 ‘인도주의 영농 협회’는 4만5천명의 회원이 있다. ‘종에 제한되지 않는 사람들’은 중앙 펜실베니아에 사무소 하나를 갖는 조그마한 집단으로부터 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그리고 시카고에 지부를 갖는 범국가적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LD50과 드레이즈 실험 폐지 연합‘은 동물 권리 집단과 동물 복리 집단을 함께 모아 합계 수백만이 되는 회원을 갖게 되었다. 1988년 ’동물 해방‘은 동물 복리 운동을 나타내는 상징어가 되었다.
우리는 특정한 주제를 검토하면서 동물에게 주어지게 된 일부 혜택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을 함께 묶어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에는 영국에서의 비일 송아지 나무 우리 사용 금지와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의 배터리 새장에 대한 단계적 제거, 그리고 동물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막는 모든 장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포함된다. 여기에 비일 송아지용 나무 우리, 배터리 새장, 암퇘지용 좁은 우리 제거 등 가장 광범함 영역을 포괄하는 스웨덴의 법률이 추가된다. 스웨덴에서는 날씨가 따뜻한 몇 개월 동안 소를 방목하지 않을 경우 주인이 불법 단속의 대상이 될 것이다. 모피 무역에 반대하는 범세계적 캠페인으로 인해 모피 판매량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일류 백화점 체인인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가 모피 반대 항의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에는 런던의 잘 알려진 상점인 헤롯즈 하나만을 남기고 60개의 모피 상점 중 59개가 문을 닫는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에서는 아직까지 농장 동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특별히 반대할 만한 많은 실험들이 중지되었다. 첫 번째 성공은 1977년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 켐페인은 헨리 스피라가 주도하였는데, 켐페인에 동참한 자들은 불구가 성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고양이를 불구로 만드는 과정을 포함하는 일련의 무의미한 실험을 중단할 것을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요구하였다. 1981년에는 동물 해방 실천가 알렉스 파체코가 메릴랜드 실비 스프링스의 에드워드 타우브 행위 연구소에서 자행된 17마리의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소름끼치는 실험을 폭로하였다. 국립 보건 연구소는 타우브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였으며, 타우브는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로 인해 미국에서 최초로 유죄 판결-나중에 가서 연방 조세 자금을 받는 동물 실험가들은 주(州) 의 반 잔혹행위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기술적인 근거로 판결이 번복되었지만-을 받게 되었다. 이 사례는 ‘동물에 대한 윤리적 처우를 위한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신생 단체를 범국가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1989년 아본, 르블롱, 파베르제, 메리 케이, 암웨이, 엘리자베드 아든, 막스 펙터, 크리스찬 디오르, 그리고 여러 소규모 회사가 모든 동물 실험을 종결한다고, 또는 최소한 일시 중지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수년 동안의 고된 노력의 결실이었다. 같은 해 유럽 공동체 10개국의 안전 실험을 담당하고 있는 유럽 위원회는 LD50과 드레이즈 실험의 대안을 선택하기로 하였다고 선언하였으며, 모든 OECD국에게 일반화될 수 있는 다른 안전 실험 개발을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제 LD50과 드레이즈 실험은 호주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동시에 가장 많은 동물 실험이 수행되었던 주(州)인 빅토리아와 뉴 사우스 웨일즈에서 통지 법으로 금지되고 있다.
동물 해방 운동의 전망이 밝아지고 지지를 획득하여 감에 따라 각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에 고무되어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록 뮤지션들이 동물 해방 메시지가 유포되도록 도움을 주었다. 영화 배우, 모델, 그리고 의상 디자이너들은 모피를 입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보디 숍 체인점이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사람들은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와 무관한 화장품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제품을 선뜻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채식주의 식당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심지어 채식주의 식당이 아닌 곳마저 채식주의 식단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동물 해방은 다른 어떤 해방 운동보다도 인간 쪽의 훨씬 큰 이타성을 요구한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해방을 요구할 능력이 없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항의하는 투표, 시위 또는 거부운동을 벌일 수 없다. 인간에게 영원히, 또는 이 행성이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들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종들을 억압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냉소적인 시인과 철학자들이 항상 말해온 바와 같이 도덕성이 자기 이익과 부딪칠 경우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우리의 횡포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도전에 잘 대처하고 인간의 우월한 지위를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음을 인식하여 우리의 권한 내에 있는 종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종식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 모두가 개별적으로 어떻게 이 질문에 답하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