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장식 박사장의 부인이 아침 식전부터 봉천동 산꼭대기를 기어올라 지상호의 집을 찾아왔을 때, 상호는 막 화장실에서 무지륵한 아랫배를 움켜쥐고 나왔다.
어제 하루 내내 찜통 같은 방에서 더운 입김을 쏟아내는 선풍기와 맞상대를 하다가 저녁나절에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시퍼런 지폐 한 장을 고스란히 내주고 수박 한 통을 받아 들어올 때까지는 아무 탈이 없었다. 주제넘게 만 원짜리 수박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하루 종일 시달린 더위보다 더 지독한 열기가 가슴 한복판에서 솟구쳐 올랐고, 그 열을 삭이느라 얼음 덩어리까지 와작와작 깨물어 먹은 게 탈이었다.
"제대로 찾아왔네. 아프다더니 정말 얼굴이 쑥 빠졌구랴. 생전 안 아플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한여름에 개도 안 걸리는 감기를 앓고 그래."
박사장 부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달큰했다. 박사장 부인이 손수 산꼭대기 동네를 찾아왔다면 일이 시작된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한달 동안 여유를 주자구. 그리고 나서도 박사장이 꿈쩍 안 하면 그땐 자꾸 하자를 만드는 거지 뭘..... 보람장식에 전속되어 있는 열다섯 명의 도배사들이 지난주에 생맥주 한잔씩을 들어올려 부딪치며 다짐한 내용이었다. 우선 몸이 아프다고 돌아가면서 슬슬 사나흘씩 나오지 말자구. 사실 일당이야 박사장하고는 아무 상관 없잖아. 도배지 팔아먹으려니 우리가 필요한 것이고, 일당은 손님들한테서 고스란히 나오는 거니까 박사장이야 손해보고 자시고 할 것 없다구. 그리고 우리가 괜한 소리 하는 거야? 다른 집들은 벌써부터 쑤셔대고 있대. 인테리어집 같은 데서는 사람 구하기가 힘드니까 사만 원이고 오만 원이고 부르는 대로 준다구. 그렇다고 우리가 육만 원을 달라는 거야? 그저 만 원만 더 올리자는 거지. 그런다고 손님 끊어지진 않아. 박사장 손님들이야 어디 예사 손님들인가. 대부분 수입벽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한테서 만 원쯤 더 빼낸다고 보람장식이 문닫진 않아..... 또 한 잔을 부딪치며 덧붙인 내용이었다. 바로 그 순서대로 어제부터 상호가 감기를 앓게 된 것이었다.
만 원짜리 수박이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덕분에 감기환자 시늉을 애써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상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짐짓 밭은기침까지 내보았다.
"허지만 어떡해, 오늘 시작하기로 한 행촌아파트 1동 말야. 최씨하고 주씨가 일을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둘 다 못 나온다는 거야. 어제까지 말짱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죽는 소리를 하는 건 우리 물먹이려고 하는 짓 아냐?"
얼씨구, 물은 먹여도 한 바께쓰는 먹인 게로구나. 상호의 콧구멍이 벌름거렸지만 애가 타서 입 안이 타들어가는 박사장 부인의 눈에 보일 리 만무했다.
"지씨, 오늘 하루만 내 사정 좀 봐줘. 내일은 주씨가 꼭 나와 준다고 했으니까 오늘만 좀 수고해 줘. 내일까지 끝내 주기로 해서 휴가 날짜를 맞추었다는데 어떡해."
"빈집이에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여름은 일손을 놓아야 하는 계절이었다. 집안을 온통 한 꺼풀 벗겨 내고 다시 한 꺼풀 덮어씌우려면 가구며 살림살이를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줄줄 땀이 흘러내리는 삼복더위에 하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서너 해 전부터는 한여름이 성수기로 바뀔 정도가 되어 버렸다. 어차피 더위를 피해 집을 떠나야 할 바에야 평소에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던 집단장을 업자에게 맡겨 그 동안 해치우게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배만 할 경우에는 사나흘에서 일 주일 정도가 거리지만 완전히 집 안을 개조하기로 작정한다면 보름도 넘게 걸리는 작업이었다. 작업기간에 맞춘 것인지 아니면 피서기간에 맞춘 것인지는 모르지만 작업일수에 따라서 산이나 바다 또는 해외로 피난을 가는 모양이었다. 하기는 그처럼 신선놀음이 어디 있겠는가. 실컷 해수욕을 즐기다 돌아와 보면 원했던 대로 산뜻하게 돌변한 집 안이 되어 있으니 그 얼마나 신기루 같은 일일까. 일하는 사람 쪽에서도 싫지는 않았다. 일일이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라, 잔소리하는 주인들 덕분에 하루에 끝날 일이 이틀 넘게 걸릴 수도 있고, 죽어라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의 훼방 때문에 머리끝이 곤두설 만큼 불필요한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어차피 점심이라고 얻어먹어 본댔자 짬뽕 한 그릇이기는 마찬가지일 테니 오히려 찬물 한 그릇이라도 주인한테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는 불편함 따위가 없는 것만으로 흉볼 수만은 없는 유행이었다. 그리고 두부 한 모라도 배달시켜야 직성이 풀린다는 아파트 사람들에게서부터 비롯되어진 유행 덕분에 상호의 수입이 전보다 훨씬 늘어났으니까.
"빈집이나 다름없지. 오늘 이사 나가고 그 사람들은 휴가 갔다가 이사 들어온다지. 삼십일 평이고, 장판은 노브롱을 깐다니까 큰일은 아니야."
"제기랄, 이삿짐 싸놓고 무슨 정신으로 휴가를 가. 그렇다면 더 놀다 오면 되겠구만요. 어떤 놈들은 이삿짐 싸놓고 휴가 가는데 어떤 놈은 아파서 누워 있지도 못해요?"
비위가 상하다 못해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아유, 그러니까 내가 잃게 찾아왔지. 우리도 못 해먹을 노릇이야. 일꾼들은 배짱만 퉁기지, 손님들 주문은 까다롭지, 가운데서 이게 무슨 꼴이야.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 판인지 전에는 도배하는 사람들이 남아돌았는데 이젠 그 일도 힘들다고 배우려 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잘하면 지씨 같은 사람들도 머잖아 인간문화재가 될 거야."
그러니 홀애비 배아픈 사정 홀에미나 알지. 도배하는 사람들이 인간문화재가 된다 한들 허리 쑤시고 목줄기가 뻣뻣해지는 작업이 쿠션좋은 회전의자에 앉아서 펜대 쥐는 일로 바꿔지는가. 도배지 장사하는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집주인 영감만 해도 내 일당이 사만 원이라는 말에 혀를 내둘렀었다. 하루 사만 원이면 한 달에 일요일 빼더라도 백만 원도 넘는 것 아냐. 세금도 안 뺄 테니 순수입이 그렇다면 지씨 곧 떼부자 되겠어..... 그 말엔 그러고도 아직껏 사글셋방 신세를 못 면하냐는 뾰족한 가시가있다. 운좋다는 게 별거냐, 가져다 주는 돈으로 계 들어서 목돈 만드는 마누라는 못 될지언정 세 끼 밥 푸짐하게 지어 먹고 매일매일 낮잠을 퍼자도 좋으니 사지 멀쩡하고 튼튼한 마누라 가진 것이 행운이라고 상호는 믿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느닷없이 골반뼈가 썩어 가는 해괴한 병에 걸린 아내 때문에 주인영감이 혀를 내두를 만큼 벌어도 매양 빈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만 건강해도 치사하게 만 원 오리려고 꾀병까지 앓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상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내가 건강했다 해도 돈이 새나갈 일은 얼마든지 생겼을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지 않던가. 엎어지는 놈이 코 깨지고 넘어지는 놈이 허리 부러지는 법이지 반듯하게 서서 걸어가는 양반들이 공연히 깨지고 부러지는가. 그러니 유전무죄고 무전유죄라고 악을 쓰는 놈도 있는 것이지.......